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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등이 부임했을 당시 대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대만군정청]] 통치기에 일본부역자 색출 명분으로 많은 대만인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2.28 사건]]이 터지며 대만인들의 한국의 통치에 대한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고 [[중국 내전]]을 피해 대만으로 약 220만명의 중국 본토 피난민이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마땅한 직업도 없이 대만 남부에서 사회 혼란과 침체를 초래했다. 북부는 한국 통치에 호의적인 대만인이 모여 살았으나 남부는 피난민과 하류층 대만인들이 살아 한국에 저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혜등의 자서전내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것이 도전받고 있었던' 것이다. 전임 성장인 유태호 성정부에서는 대만을 북위 24도선을 경계로 나누어 남부를 독립시키자는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방안까지 논의됐을 정도였다.
혜등이 부임했을 당시 대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대만군정청]] 통치기에 일본부역자 색출 명분으로 많은 대만인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2.28 사건]]이 터지며 대만인들의 한국의 통치에 대한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고 [[중국 내전]]을 피해 대만으로 약 220만명의 중국 본토 피난민이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마땅한 직업도 없이 대만 남부에서 사회 혼란과 침체를 초래했다. 북부는 한국 통치에 호의적인 대만인이 모여 살았으나 남부는 피난민과 하류층 대만인들이 살아 한국에 저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혜등의 자서전내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것이 도전받고 있었던' 것이다. 전임 성장인 유태호 성정부에서는 대만을 북위 24도선을 경계로 나누어 남부를 독립시키자는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방안까지 논의됐을 정도였다.


북부 대만인들중 상류층으로 이루어진 형식상 의회에서는 혜등의 부임 후에도 연일 남북분리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혜등은 1962년 8월 22일 성의회 첫 기조 연설에서 남북분리안이 채택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아울러 민중은 분노하고 있지만 아직 임계점을 넘지는 않았으며 설득과 화해를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성장 산하 사면국을 신설하여 [[선종 (동방)|황제]]의 즉위후 사면령을 내리기로 했다.
북부 대만인들중 상류층으로 이루어진 형식상 의회에서는 혜등의 부임 후에도 연일 남북분리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혜등은 1962년 8월 22일 성의회 첫 기조 연설에서 남북분리안이 채택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아울러 민중은 분노하고 있지만 아직 임계점을 넘지는 않았으며 설득과 화해를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성장 산하 사면국을 신설하여 [[선종 (동방)|황제]]의 즉위 기념 사면령을 내리기로 했다.

2021년 9월 13일 (월) 01:46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틀:역대 대만성 성장

대만성 13대 성장
성용권 | 成鏞權
출생 1928년 10월 8일
한성부 동대문구 신설동
사망 2013년 3월 27일 (향년 84세)
대만성 화련시 전보동
재임 대만성 13대 성장 (관선)
1962년 8월 13일 ~ 1981년 6월 10일
47대 외무대신
1984년 9월 12일 ~ 1989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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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성단중효근공 (文盛端中孝勤公)
작위 대북후(臺北侯)
→ 대만공 (臺灣公)
본관 창녕(昌寧)
성(成)
이름 용권(鏞權)
혜등(慧燈)
금아(金兒)
부모 부친: 성기준, 모친: 윤정순
배우자 정희숙
자녀 1남 2녀
학력 국립서울대학교 정치학(학사)
정당
(1983~2013)
약력 외무성 동남아시아국장
베트남 대사
붕따우 고등판무관
33, 34, 35대 국민원 의원
총리실 외교안보 특보
국민당 자문위원

개요

한국의 외교관, 정치인. 호는 혜등(慧燈), 자는 금아(金兒). 마지막 관선 성장인 제13대 대만성 성장과 47대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약 19년간 관선 대만성장을 역임하면서 후덕한 인품과 능력으로 대만을 안정시켰고 2.28 사건등 조사로 역사문제를 청산하여 대만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평화롭게 무마하였다. 중앙정부의 철저한 외면으로 역사문제 청산은 반쪽짜리 완성으로 끝났지만 그의 성장 재임기에 대만성의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해 아직까지도 대만인의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거의 유일한 본토계 정치인이다.

생애

청년기

1928년 성기준[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기준은 본래 파주 출신으로 우계 성혼의 후손이다. 창녕 성씨 일가의 남성들은 종갓집의 장남이거나, 봉작을 받은 귀족의 장남이거나, 황제로부터 따로 봉작을 받지 않는한 모두 자작 신분이 주어졌는데 성기준 또한 그러했다. 성기준은 1925년 문과시험에 합격하였고 곧바로 윤정순과 결혼하였으며 한성부 재무수석담당관으로 활동하다 1927년에는 서재필 총리에 의해 천거되어 대한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29년부터 31년까지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로 서재필 내각에서 재무성 차관까지 지내 능력을 인정받았고 세조 황제로부터 효제백 작위를 하사받았다.

혜등음 어릴적부터 상당히 유복한 편이었고 관료에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혜등이 10살인 1938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성기준 일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만주로 피신했다. 재산은 거의 챙기지 못했어도 성기준은 꾸준히 정부 부처의 업무를 맡았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생활을 이어갔고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성기준 일가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저택은 파괴된 후였고 하인도 뿔뿔히 흩어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성기준은 서울에 남고 어머니 윤씨와 용권, 남동생 용훈, 여동생 이청은 파주에 있는 친척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운 것은 친척집도 피차일반이었고 17살의 혜등은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였으며 저녁에 야간반 수업을 들었다. 1948년 12월, 한성부중앙대학 정치학과(現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고 칙령을 통해 특별 장학금 면제생이 되어 심양으로 갔다.[2]

그에게 대학생활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인지 친구와 어울리지 않고 도서관에서 홀로 외교와 군사에 대한 서적을 탐독했으며 영어와 중국어를 습득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53년 졸업후에는 곧바로 외교관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1956년까지 외무성에서 일하다 베트남 대사로 발령됐다.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중책을 맡게된 것. 1958년에는 붕따우의 고등판무관으로 전보되었으며 붕따우 정부의 외교 업무를 전담했다. 이 시기 탁월한 행정능력까지 보여주며 중앙정부에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은 그는 혼란스러운 대만의 분위기를 바꿔줄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1962년 대만성장에 임명된다.

대만성장 재임

혜등이 부임했을 당시 대만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대만군정청 통치기에 일본부역자 색출 명분으로 많은 대만인들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2.28 사건이 터지며 대만인들의 한국의 통치에 대한 감정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고 중국 내전을 피해 대만으로 약 220만명의 중국 본토 피난민이 들어와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마땅한 직업도 없이 대만 남부에서 사회 혼란과 침체를 초래했다. 북부는 한국 통치에 호의적인 대만인이 모여 살았으나 남부는 피난민과 하류층 대만인들이 살아 한국에 저항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혜등의 자서전내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것이 도전받고 있었던' 것이다. 전임 성장인 유태호 성정부에서는 대만을 북위 24도선을 경계로 나누어 남부를 독립시키자는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방안까지 논의됐을 정도였다.

북부 대만인들중 상류층으로 이루어진 형식상 의회에서는 혜등의 부임 후에도 연일 남북분리안이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혜등은 1962년 8월 22일 성의회 첫 기조 연설에서 남북분리안이 채택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아울러 민중은 분노하고 있지만 아직 임계점을 넘지는 않았으며 설득과 화해를 위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성장 산하 사면국을 신설하여 황제의 즉위 기념 사면령을 내리기로 했다.

  1. (1904~1988). 한국의 관료, 정치인.
  2. 당시 조선반도에 있던 모든 대학들은 사실상 심양이나 장춘에 임시 교정을 두고 있었다. 이런 대학들은 195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본교정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