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변화)/배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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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5일 출범한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과 '선진조국창조' 등을 내세워 제4공화국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먼저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에서 7년 단임제로 고쳤고, 야간통행금지 폐지, 교복 자율화, 스포츠 산업 활성화 등 일명 '3S 정책'이라 불리는 유화 정책을 펼쳐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했다. 이를 통해 1986년 아시안 게임과 프로야구 활성화가 이루어졌으며, '3저 호황'이라는 현상이 나타나 경제적인 성장과 물가 안정 추세를 보였다.
1981년 2월 25일 출범한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과 '선진조국창조' 등을 내세워 제4공화국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먼저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에서 7년 단임제로 고쳤고, 야간통행금지 폐지, 교복 자율화, 스포츠 산업 활성화 등 일명 '3S 정책'이라 불리는 유화 정책을 펼쳐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했다. 이를 통해 1986년 아시안 게임과 프로야구 활성화가 이루어졌으며, '3저 호황'이라는 현상이 나타나 경제적인 성장과 물가 안정 추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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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고문 치사로 사망하면서 전 국민의 충격을 받았고, 이어 4월 13일 단행된 호헌 조치와 항쟁 전날 벌어진 이한열 학생의 죽음으로 전국적인 항쟁이 터지게 된다. 결국 노태우는 6월 29일 특별 선언에서 야권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해 항쟁에 끝을 맺었으며,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된 이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제5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고문 치사로 사망하면서 전 국민의 충격을 받았고, 이어 4월 13일 단행된 호헌 조치와 항쟁 전날 벌어진 이한열 학생의 죽음으로 전국적인 항쟁이 터지게 된다. 결국 노태우는 6월 29일 특별 선언에서 야권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해 항쟁에 끝을 맺었으며,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된 이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제5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변화의 시대/문단|제목=야권 개편|크기 = 1}}
<div style="text-align: left; margin-top: 7px; margin-bottom: -12px; font-size: 18pt; color: #CFA547; line-height: 30px; font-family: Noto Serif KR">{{bold|야권 개편}}</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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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재야 세력의 축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의 후폭풍으로 1987년 신한민주당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정당인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정치깡패들의 방해 사건을 겪으면서 난항에 빠지지만, 6월 항쟁을 주도하여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단일화 실패와 계파 갈등이 당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결국 10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동교동계가 이탈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 야권이 분열되었다.
이 때 재야 세력의 축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의 후폭풍으로 1987년 신한민주당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정당인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정치깡패들의 방해 사건을 겪으면서 난항에 빠지지만, 6월 항쟁을 주도하여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단일화 실패와 계파 갈등이 당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결국 10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동교동계가 이탈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 야권이 분열되었다.


이렇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재야 세력을 등에 업은 야권이 분열된 채로 대선 정국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 김종필은 정계 복귀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하겠다며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충청권에서의 지지를 받았고, 단일화 실패에 반발한 일부 세력은 훗날 '변화당'을 창당하여 을지로와 명동에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이렇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재야 세력을 등에 업은 야권이 분열된 채로 대선 정국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 김종필은 정계 복귀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하겠다며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충청권에서의 지지를 받았고, 단일화 실패에 반발한 일부 세력은 훗날 '변화당'을 창당하여 을지로와 명동에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변화의 시대/문단|제목=[[제13대 대통령 선거 (변화)|제13대 대통령 선거]]|크기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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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29일, 북한의 소행으로 인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선거에 판도가 뒤바뀌게 되었고, 이에 북풍 여론이 힘을 얻으며 노태우 후보 측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노태우 후보가 36.64%로 당선되어 군사 정부를 이끈 민주정의당의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더불어 야권에서는 4자 필승론 붕괴와 충청권 보수 표 분산으로 인해 김대중, 김종필이 부진했지만, 김영삼은 부경권은 물론 전국에서 30%에 근접한 득표율을 얻어 선방했다.
1987년 11월 29일, 북한의 소행으로 인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선거에 판도가 뒤바뀌게 되었고, 이에 북풍 여론이 힘을 얻으며 노태우 후보 측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노태우 후보가 36.64%로 당선되어 군사 정부를 이끈 민주정의당의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더불어 야권에서는 4자 필승론 붕괴와 충청권 보수 표 분산으로 인해 김대중, 김종필이 부진했지만, 김영삼은 부경권은 물론 전국에서 30%에 근접한 득표율을 얻어 선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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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변화의 시대/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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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9일 (화) 00: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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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모든 설정은 공식이자 허구임을 밝히며, 자세한 정보는 각 링크를 참고하십시오.

본 문서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의 과정을 나타낸 하위 문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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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25일 출범한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구현'과 '선진조국창조' 등을 내세워 제4공화국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먼저 대통령의 임기를 6년 연임제에서 7년 단임제로 고쳤고, 야간통행금지 폐지, 교복 자율화, 스포츠 산업 활성화 등 일명 '3S 정책'이라 불리는 유화 정책을 펼쳐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했다. 이를 통해 1986년 아시안 게임과 프로야구 활성화가 이루어졌으며, '3저 호황'이라는 현상이 나타나 경제적인 성장과 물가 안정 추세를 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과 같은 인권 유린과 더불어 강압적인 검열 조치가 이루어졌고, 재야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 또한 자행되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만든 관제야당들이 쏟아져 나와 의석을 나눠먹으면서 사실상 북한과 유사한 일당 + 우당 체제로 흘러갔으며 다음 총선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고문 치사로 사망하면서 전 국민의 충격을 받았고, 이어 4월 13일 단행된 호헌 조치와 항쟁 전날 벌어진 이한열 학생의 죽음으로 전국적인 항쟁이 터지게 된다. 결국 노태우는 6월 29일 특별 선언에서 야권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해 항쟁에 끝을 맺었으며,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된 이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제5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제목 추가 바람)

이 때 재야 세력의 축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의 후폭풍으로 1987년 신한민주당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정당인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정치깡패들의 방해 사건을 겪으면서 난항에 빠지지만, 6월 항쟁을 주도하여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단일화 실패와 계파 갈등이 당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결국 10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동교동계가 이탈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 야권이 분열되었다.

이렇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재야 세력을 등에 업은 야권이 분열된 채로 대선 정국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 김종필은 정계 복귀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하겠다며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충청권에서의 지지를 받았고, 단일화 실패에 반발한 일부 세력은 훗날 '변화당'을 창당하여 을지로와 명동에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제목 추가 바람)

어찌됐든 야권 개편으로 4개 정당이 맞붙게 될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연고지를 바탕으로 한 지역 구도의 강화로 이어졌다. 전국적으로는 노태우가 대경권, 김영삼이 부경권, 김대중이 호남권, 김종필이 충청권에서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김대중은 호남을 시작으로 수도권을 공략하기 위해 일명 '4자 필승론'을 내세운다. 뿐만 아니라 김종필을 제외한 세 후보는 여의도에서 세를 과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 많은 부정선거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유세를 이어간다.

1987년 11월 29일, 북한의 소행으로 인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선거에 판도가 뒤바뀌게 되었고, 이에 북풍 여론이 힘을 얻으며 노태우 후보 측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노태우 후보가 36.64%로 당선되어 군사 정부를 이끈 민주정의당의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더불어 야권에서는 4자 필승론 붕괴와 충청권 보수 표 분산으로 인해 김대중, 김종필이 부진했지만, 김영삼은 부경권은 물론 전국에서 30%에 근접한 득표율을 얻어 선방했다.

여러분은 지금 변화의 시대를 보고 계십니다. 모든 문서는 공식 설정이자 허구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