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변화)/배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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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 #580009; color: #CFA547" | 동아일보 1면에 실린 '박종철 사망사건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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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중앙일보의 신성호가 이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모든 신문사가 중앙일보에 전화하여 그 진위를 물었고, 시민단체인 정의구현사제단은 후술할 이부영의 비밀서신을 통해 5·18 7주기 미사에서 사건의 경위를 폭로하였으나 경찰은 병원에서 숨졌다거나 은폐 보도를 하는 등 사건을 축소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이 때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 겸 대공수사처장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문제의 발언을 함으로써 전 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언론 기자들은 사건의 행방을 위한 추적을 개시했고, 5공 기간 동안 경찰에 밀려있던 검찰은 부검을 강행한 끝에 고문의 의한 경부 압박 질식, 즉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임을 밝혀냈다. 이런 와중에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 특전사령관을 맡은 신임 내무부장관인 정호용은 사건을 수습하겠다며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2차 수사 결과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발표하며 위의 견해를 뒤집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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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날 당시 경찰이 이를 축소하느라 바쁜 상황에서,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 겸 대공수사처장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문제의 발언을 함으로써 전 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에 언론은 사건의 행방을 위한 추적을 개시했고, 검찰은 부검을 강행한 끝에 고문의 의한 경부 압박 질식, 즉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임을 발표했는데,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 특전사령관을 맡은 신임 내무부장관인 정호용은 사건을 수습하겠다며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발언을 함으로써 논란이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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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1일 (토) 14: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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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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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면에 실린 '박종철 사망사건 발표'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중앙일보의 신성호가 이 사실을 보도함으로써 모든 신문사가 중앙일보에 전화하여 그 진위를 물었고, 시민단체인 정의구현사제단은 후술할 이부영의 비밀서신을 통해 5·18 7주기 미사에서 사건의 경위를 폭로하였으나 경찰은 병원에서 숨졌다거나 은폐 보도를 하는 등 사건을 축소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이 때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 겸 대공수사처장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문제의 발언을 함으로써 전 국민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언론 기자들은 사건의 행방을 위한 추적을 개시했고, 5공 기간 동안 경찰에 밀려있던 검찰은 부검을 강행한 끝에 고문의 의한 경부 압박 질식, 즉 물고문으로 인한 사망임을 밝혀냈다. 이런 와중에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부대 특전사령관을 맡은 신임 내무부장관인 정호용은 사건을 수습하겠다며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2차 수사 결과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발표하며 위의 견해를 뒤집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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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재야 세력의 축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의 후폭풍으로 1987년 신한민주당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정당인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정치깡패들의 방해 사건을 겪으면서 난항에 빠지지만, 6월 항쟁을 주도하여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단일화 실패와 계파 갈등이 당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결국 10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동교동계가 이탈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 야권이 분열되었다.

이렇게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재야 세력을 등에 업은 야권이 분열된 채로 대선 정국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 김종필은 정계 복귀 이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계승하겠다며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충청권에서의 지지를 받았고, 단일화 실패에 반발한 일부 세력은 훗날 '변화당'을 창당하여 을지로와 명동에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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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야권 개편으로 4개 정당이 맞붙게 될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연고지를 바탕으로 한 지역 구도의 강화로 이어졌다. 전국적으로는 노태우가 대경권, 김영삼이 부경권, 김대중이 호남권, 김종필이 충청권에서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김대중은 호남을 시작으로 수도권을 공략하기 위해 일명 '4자 필승론'을 내세운다. 뿐만 아니라 김종필을 제외한 세 후보는 여의도에서 세를 과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수 많은 부정선거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유세를 이어간다.

1987년 11월 29일, 북한의 소행으로 인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선거에 판도가 뒤바뀌게 되었고, 이에 북풍 여론이 힘을 얻으며 노태우 후보 측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는 노태우 후보가 36.64%로 당선되어 군사 정부를 이끈 민주정의당의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더불어 야권에서는 4자 필승론 붕괴와 충청권 보수 표 분산으로 인해 김대중, 김종필이 부진했지만, 김영삼은 부경권은 물론 전국에서 30%에 근접한 득표율을 얻어 선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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