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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도, 아베 신조의 강력한 유산과 자민당 내 강경파의 압력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정책은 일본의 전통적인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일본의 역할을 재조정하려는 시도를 반영하고 있다.
기시다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도, 아베 신조의 강력한 유산과 자민당 내 강경파의 압력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정책은 일본의 전통적인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일본의 역할을 재조정하려는 시도를 반영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2019년 일미 무역전쟁]]은 기시다가 턴을 넘겨받았을때 이미 일본의 타격이 더욱 컸기 때문에 사실상 패배를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으로 내수시장 활성화와 그를 통한 대미 도전을 위하여 엔저정책을 단행했지만 국민의 후생이 아베 시절보다 전반적으로 나빠지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결정적으로 지지율이 폭락했다. 또 막후의 아베가 기시다에 대한 신임을 거두고 직접 총리를 다시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총리직이 위협받는 중이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2019년 일미 무역전쟁]]은 기시다가 턴을 넘겨받았을때 이미 일본의 타격이 더욱 컸기 때문에 사실상 패배를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으로 내수시장 활성화와 그를 통한 대미 도전을 위하여 엔저정책을 단행했지만 국민의 후생이 아베 시절보다 전반적으로 나빠지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결정적으로 지지율이 폭락했다. 또 막후의 아베가 기시다에 대한 신임을 거두고 직접 총리를 다시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총리직이 위협받는 중이다. 기시다 본인은 총재직 불출마 예상을 깨고 출마를 천명했다.


== 성향 ==
== 성향 ==

2024년 6월 30일 (일) 22:21 판

틀:신질서의 황혼

틀:역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신질서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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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제76-77대 내각총리대신
기시다 후미오
岸田文雄 | Kishida Fumio
출생 1957년 7월 29일 (66세)
대일본제국 도쿄도 시부야구
국적 일본
현직 대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
자유민주당 총재
재임 기간 제75대 내각총리대신
2021년 10월 4일 ~ 2021년 11월 10일
제76대 내각총리대신
2021년 11월 10일 ~ 현직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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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 어머니 기시다 스미코
배우자 기시다 유코
자녀 장남 기시다 쇼타로

차남 기시다 고시로

신체 173cm, 65kg, AB형
종교 무종교
학력 지요다구립 나가타초 초등학교 (졸업)

지요다구립 고지마치 중학교 (졸업)

카이세이 고등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병역 제2국민역
지역구 히로시마현 제1구
의원 선수 10 (중)
의원 대수 35, 36, 37, 38, 39, 40, 41,42, 43, 44
소속 정당
파벌 무파벌
약력

개요

일본의 정치인이며 현직 내각총리대신. 2021년 10월부터 재임 중에 있다.

생애

1957년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출생했으며,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히지야마초이다. 후미오의 가문은 히로시마를 기반으로 3대째 정치가를 배출해온 명문이다. 할아버지 마사키(正記)는 만주에서 백화점 경영, 부동산 사업 등으로 큰 부를 쌓아 이를 기반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아버지인 기시다 후미타케는 상공성 관료, 정치인이었다.

상세

기시다 후미오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아베 신조의 후임으로 집권하게 된다. 기시다는 아베의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정책을 이어받았으나, 그의 통치 스타일과 정책 방향은 몇 가지 측면에서 차별화된다.

기시다 후미오는 2021년 10월 4일부터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임 중니다. 그는 비교적 온건한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며, 아베 신조의 급진적 우경화 정책을 일부 수정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자민당 내 강경파의 영향력 때문에 기시다의 정책은 여전히 군사력 강화와 국가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는 일본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상비군 병력은 76만 5천 명으로 유지되었다. 그는 미국과의 냉각된 관계를 일정 부분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신냉전 구도 속에서 독일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를 관리한다.

기시다는 경제적 안정과 성장을 중시하며, 아베노믹스를 기반으로 한 경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지속되었고, 특히 아베 신조의 영향력 하에 있던 자민당의 강경파들은 기시다의 리더십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기시다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안정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도, 아베 신조의 강력한 유산과 자민당 내 강경파의 압력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정책은 일본의 전통적인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일본의 역할을 재조정하려는 시도를 반영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2019년 일미 무역전쟁은 기시다가 턴을 넘겨받았을때 이미 일본의 타격이 더욱 컸기 때문에 사실상 패배를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으로 내수시장 활성화와 그를 통한 대미 도전을 위하여 엔저정책을 단행했지만 국민의 후생이 아베 시절보다 전반적으로 나빠지는 결과를 낳게 되면서 결정적으로 지지율이 폭락했다. 또 막후의 아베가 기시다에 대한 신임을 거두고 직접 총리를 다시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총리직이 위협받는 중이다. 기시다 본인은 총재직 불출마 예상을 깨고 출마를 천명했다.

성향

전전임 아베 신조의 국수주의, 민족주의 기조를 사실상 계승하고, 신냉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후방 관리의 차원에서 인도차이나의 공영기구 대거 합류를 추진하는 남방정책은 아베를 이은 기시다 시대에 들어와서 성과를 거두어 대중국 포위망을 더욱 탄탄히 했다.

다만 아베 내각 말엽에 거의 징병제 부활까지 간다고 할 정도로 군국주의 분위기가 심화되었던 시기보다는 여러모로 온건하게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2049년까지의 건조계획을 세우도록 승인하고[1], 공군의 6세대 전투기 도입에 박차를 가하며 미국과의 해상패권 싸움에서 물러설 뜻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전부터 강화되고 있었으나 서방을 의식해 신중하게 조정하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동맹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2022년 프랑스 침공에서 이를 암묵적 지지했으며 2024년 5월의 프리드리히 메르츠의 방일에서는 2025년 일독이 3국을 비롯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서방 통합기구 창설을 논의하면서 박차를 가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이전의 아베에 비해서 유화적이다. 기시다는 중국이 일본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전제에는 변함이 없지만, 적어도 중국과의 전쟁은 한사코 피해야 하며 "평화로운 방식"으로 중국을 동아시아 공존공영에 협력하게 할수 있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그는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협정에 중국까지 4국이 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 이유는 그가 아시아주의자이며 이상론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시다의 친중적인 행보는 특히 자민당 내 아베파에서 강력한 비토를 받고 있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4 - 현재 정계 입문
  1. 미국의 건함계획도 2049년을 종착점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에 맞불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