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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9일 (일) 13:06 판

Destiny634 , 2025 - | CC-0
대일본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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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大日本帝國 ・ Dai-Nippon-Taikoku
국기 국장
八紘一宇
팔굉일우
(1940 ~ 現)
상징
국가 기미가요 ( (きみ) ())
국화 벚꽃, 국화
국수 일본 꿩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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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쿄 (東京)
북위 35° 41′ 22.4″ 동경 139° 41′ 30.2″
최대 도시 도쿄 (東京)
북위 35° 41′ 22.4″ 동경 139° 41′ 30.2″
대륙 아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
면적 763,626km2 | 세계 25위
접경국 만주 공화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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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48,493,648명 | 세계 3위
밀도 328.20명/km2
출산율 2.14명 (2024년)
기대수명 76세 (2024년)
민족 일본인 95.3%[1]
러시아인 2.1%
중국인 1.6%
남방인 1.1%
타카사고족 0.3%
기타 2.0%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조선어, 대만어, 객가어, 중국어, 대만 제어, 오스트로네시아어, 솔로몬 피진, 러시아어
공용 문자 가나, 한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국가신토 (사실상)
분포 불교 51.2%
기독교 3.6%
기타 종교 2.2%
무종교 43.0%
군대 대일본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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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다당제, 양원제, 의원내각제, 단일국가, 성문 헌법, 과두정(사실상)
국가 원수 (천황) 아키히토
정부
요인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귀족원 의장 호소카와 모리히로
중의원 의장 오카자키 나오토
집권 여당 국민자유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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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혼합 경제 (국가자본주의)
GDP
(명목)
$11조 3,021억 8,940만 | 세계 3위 (2024년)
1인당 $32,518
수출
입액
수출 $2,845억 6,000만 | 세계 1위 (2024년)
수입 $2,546억 7,600만 | 세계 2위 (2024년)
외환보유액 $10조 2,780억 3,100만 (1985년)
화폐 공식 화폐 일본 엔(¥, 円)
ISO 4217 JP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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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헤이세이(平成)
시간대 GMT+09:00(일본 표준시)
운전 방향 좌측통행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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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기구 이력 국제연맹 가입: 1920년
국제연맹 탈퇴: 1933년
대동아공영권 가입 1943년 (창립국)
ccTLD
.jp
국가 코드
JPN, EJP, JP, 382
위치[2]

개요

八紘一宇
팔굉일우

온 천하가 하나의 집이다

대일본제국(일본어: 大日本帝國 (だい にっぽん ていこく) 다이닛폰데이코쿠[*]), 줄여서 일본(일본어: 日本 (にっぽん))은 동아시아에 일본 열도, 사할린섬, 치시마열도, 캄차카반도(히노데시마, 日出島), 조선반도, 블라디보스토크, 타이완, 남양군도 등에 걸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자 식민제국이다. 수도이자 이자 최대 도시는 도쿄이다. 국가 원수인 천황은 나루히토, 정부 수반인 내각총리대신은 아베 신조이다.

2025년, 제국은 미합중국, 대게르만국에 이어서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대동아공영권의 맹주국으로서 미국, 독일과 더불어 3대 열강의 하나인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중국 전선의 장기화로 인한 경제불황과 사회의 경직성, 고령화 문제는 제국의 국운을 조이고 있다.

상세

본래 일본은 일본 열도에 국한된 섬나라였으나, 1868년 대정봉환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근대화되었고 이후 비서구권의 최초이자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여 조선, 대만, 만주 등을 합병하며 그 영토를 넓혔다. 현재와 같은 영토를 지니게 된 것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며 아카기 조약을 맺은 이후이다.

메이지 유신 자체가 무신들의 주도로 일어난만큼 국가 초기에는 군국주의적인 면이 강했으나, 1913년 내지는 1918년부터 진행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하여 근대적인 의원내각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 등이 발동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전시 준비 체제로 인하여 국가가 불안정해졌으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만주 -> 중국 대륙 -> 태평양 순으로 전쟁을 감행하여 승리했다.

상징

국호

일본의 공식적인 국호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다. 그러나 대일본제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40년대이며, 그 이전에는 대일본국(大日本國), 일본국(日本國), 일본제국(日本帝國), 대일본(大日本) 등의 일관되지 않은 표현들이 서류 상으로 사용되었다. 1936년 공식적인 국호를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정하고 국제적인 조약 및 서류에서 사용하도록 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

약칭으로는 일본(日本)과 일본제국(日本帝國)이 주로 사용된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인 아스카 시대에는 왜국(倭國)이 공식적인 명칭이었으며, 701년의 다이호 율령 반포 당시 왜국의 명칭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는 야마토(大和)라는 명칭도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일본의 별칭(別稱)이다.

국제적으로는 일본국(日本國)의 중국식 발음이었던 지펀구를 마르코 폴로가 라틴 문자로 옮긴 Zipangu가 Japan이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보통 일본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일본 측의 공식적인 명칭은 Empire of Japan이며, 드물게 Empire of Great Japan 혹은 Greater Japanese Empire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국기

대일본제국의 법정 국기
일장기 | 히노마루
日章旗 | 日の丸
빨간색 (#AA4455) 하얀색 (#FFFFFF)

일본의 공식적인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는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서 수천년간 사용되어온 깃발이었다. 공식적인 국기로 채택된 것은 메이지 3년(1870년) 2월 27일의 일이다.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 때부터 일장기와 디자인이 유사한 니시키노미하타가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일본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일장기가 사용되어온 기간은 가늠할 수 없이 길다. 공식적인 명칭인 일장기보다도 히노마루(日の丸)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깃발이다.

속 일본기에 따르면, 701년 몬무 덴노가 태양을 나타낸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태양 상징 깃발을 사용한 사례이지만, 흰색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는 아니었다. 다만 바탕에 원 하나라는 디자인은 고대나 현대에나 같았고, 이 깃발은 일본의 조정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사용되었다. 늦어도 16세기 이전에는 빨간색 동그라미에 하얀 바탕이 디자인이 되는 현대 모양의 일장기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에도 시대 때부터 상선에 흰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상징을 사용하게 되면서 일장기는 국제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욱일기 역시 일장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지만, 공식적인 국기는 아니며 군기(軍旗)로 사용된다. 하지만 욱일기 역시 일장기에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기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국가


(きみ) () (임금의 치세)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이다. <기미가요>는 국가치고 분위기가 매우 어두우며, 단 11마디의 단가로만 되어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적인 요소가 들어가있는 것도 특징이다.

기미가요는 가사가 먼저 나왔고 곡은 나중에 붙었다. 912년 편찬된 <고금 와카집>에 익명의 단가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후 여러 문헌에 수록되며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로써 신분에 관계없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후, 일본에는 자국을 상징할만한 국가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프란츠 에케르트가 기미가요에 현재의 곡조를 붙여 곡을 완성하였다. 20세기 들어 기미가요는 천황을 기리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기미가요> 이외에도 <바다에 가면>(海行かば) 역시 국가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고 군가(軍歌) 및 준국가로서 사용된다. 이 노래는 비교적 늦은 1937년 작곡되었다.

역사

유신 이후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주요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시기를 알렸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산업화된 서구와 경쟁하기 위해 일본을 근대화하고 서구화하려고 했다. 정부는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일본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급속히 현대화되었고 지역 강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강력한 군대와 해군을 건설하고, 주변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주요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1889년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고, 이는 1962년 현재까지도 일본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과 확장의 시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일본은 1894-1895년에 조선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일본에 결정적인 승리였다. 근대화에 소극적이고 체질을 개선하지 못한 중국은 근대적인 일본에 참패하면서 전통적인 중국의 동아시아 질서를 파각하고, 조선에 영향력을 뻗쳤으며 처음 타이완을 정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일본의 다른 강대국, 특히 러시아와의 관계에 긴장을 초래했고, 일본은 1904-1905년에 만주와 조선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일본을 현대 전쟁에서 유럽 강대국을 물리친 최초의 아시아 강대국으로 만든 주요 승리였다. 이어서 마침내 1910년 조선을 병합하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권력 상승은 또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증가를 가져왔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서구에 대항하여 아시아를 이끌 사명을 가진 "신성한" 국가로 보았다. 이로 인해 점점 더 공격적인 외교 정책과 사회의 증가하는 군사화가 이루어졌다.

대동아전쟁 이전

제1차 세계대전(1914)는 일본의 떠오르는 태양을 정점에 올려 놓았다. 독일의 아시아 식민지 일부만을 공략하고도 일본을 향한 대규모의 산업 주문 때문에 공업국가로 완전히 전진했다. 그러나 대전경기라고도 불리는 이 호황을 거쳐, 대전쟁이 끝나고 유럽의 산업 복구가 예상보다 빠르자 침체가 찾아와 전후 불황이 있었고,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제국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결정적으로 1929년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민생이 무너지고 경제는 멈췄다. 블록 경제권이 부재한 일본의 위기는 심각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제국 관동군은 류타오후에서의 사건을 조작하고 만주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만주사변이라고 불린 이 사건에서 일본군은 매우 적은 희생으로 중국 동북지방의 자원의 보고를 얻어냈고 만주국을 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고, 1933년 국제연맹을 떠났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중국 본토, 나아가 아시아의 패권을 갈망했다. 1936년 2월 26일,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가 진압된 이래 군부는 더욱 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37년 7월, 만주국과 중국의 국경 지대인 만리장성 인근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간의 사소한 국경 충돌이 발생했다. 충돌 자체는 우발적이었으나 일본인들은 이를 계기로 상황을 전쟁으로 몰아갔다. 루거우차오 사건 동안 일본은 국경 갈등을 중국 전체에 대한 본격적인 전쟁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그것은 후일 "지나사변"이라 불릴 일본 제국의 전면전의 시작이자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의 시작이었다. 루거우차오는 태평천국의 난 이후 아시아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악명 높은 상징이 되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노력에 대한 의지 부족과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젊은 공화국은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현대식 총으로 무장하고 전함을 타고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탄 일본의 엄청나게 우월한 군대는 분열을 뚫고 나가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배력으로 대륙을 압도하고 전쟁의 첫 해에만 일본은 갈등의 지속에 중요한 도시 대부분을 차지했다. 중국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힘을 합쳐 2차 통일전선을 구축하더라도 일본의 공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무난하게 승리하지 않았다. 어떤 나라도 총력전을 향한 정신의 완전한 변화에서 상처입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된 정치, 사회, 경제 구조는 완전히 대체되어 새롭고 더 효율적인 삶의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일본 생활의 대부분을 정의했던 사회적 구조는 산산이 조각났다. 1940년, 제국의 양대 정당인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을 비롯한 정당들이 강제 해산되었고 그 자리에 대정익찬회가 처음부터 세워졌다. 민주주의의 낡아빠진 잔해, 또는 적어도 남아 있던 외관은 마침내 사라졌다. 전쟁을 위해 지어진 새로운 국가가 등장했고, 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이러한 국가를 정의하는 새로운 단어, 즉 전체주의가 등장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장제스는 항복했고, 대신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국민 정부가 점령된 난징에 세워졌을 것이다. 장제스는 국민이 허우적거리고 국가가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했다. 군대는 목숨을 바쳐 돌격했고, 게릴라는 일본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양측이 긴 싸움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동안 전쟁은 힘겨운 싸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은 승리의 문턱에 있었고, 위대한 잔에 손이 닿을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달할 수 없었다. 익찬회의 수장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이 시대에 자신이 유능한 지도자임을 계속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의 내각은 맹렬한 호전적 민족주의자 마츠오카 요스케의 공개 비판으로 끝났다. 고노에가 중국에서 최근의 귀중한 성과를 보존하고 바다 건너의 유령인 미국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조절하려고 했을 때, 마츠오카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고노에가 세 번째 내각을 구성하여 마츠오카를 그의 고위 외교직에서 축출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결국 비판의 압력과 사임 요구로 고노에가 끝났다. 1941년 10월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가 총리직에 취임했다. 알 수 없는 역사의 톱니바퀴가 세상에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 갈등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단어는 그 해에 태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태평양에 전쟁이 찾아왔다.

대동아전쟁

전후

야스다 위기

1963년, 중국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형사들은 수색을 시작했고, 별일 아닌 일상적인 살인사건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행적을 추적하다 한 회계사를 자주 만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회계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회계사도 살해당한채로 발견되었다. 아주 예리한 군용 나이프에 찔린 채였다.

살해당한 노동자와 비슷한 방식. 베테랑 형사는 큰일이 숨어있다고 직감했다. 이윽고 살인자를 추적하다 용의자를 추려냈다. 제국 육군 출신의 전역한 남성으로, 전문적인 살인기술을 훈련받았고, 직장이 없는데 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했다. 형사는 그 용의자를 체포하러 향했으나 용의자는 경찰들을 보자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이 죽었고, 이제 이 사건은 형사의 개인적인 일이 되게 되었으며, 모든 경위를 알기 전까지 절대로 수사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경찰들은 이내 육군에게 살인법에 대하여 정보를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육군이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기본적인 프로필도, 부대 관계자도, 하다 못해 군 내 동기들도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고, 경찰은 막막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해군이 경찰에게 접촉했다. 해군은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또한 살해당한 회계사가 육군의 회계 외주를 맡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경찰은 대장성에 연락하여 육군의 회계 감사를 요청했다.

감사 결과, 공영권 전역에서 이상하리만치 군수품 수요가 거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의 수요 수준으로 매우 큰폭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그 보관 창고들을 매우 많이 증설했다. 형사는 중국의 한 창고로 도대체 무슨 군수품을 그렇게 많이 쌓아뒀는지 조사하러 떠났다.

한 창고에 도착하여 문을 여는 순간 창고는 텅 비어있었다. 그 시각, 내지에서 경찰들이 육군의 비밀 기지 한 곳을 습격했다. 매우 많은 부상자가 나왔지만, 드디어 핵심 관계자를 체포하는데 성공했고,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매커니즘은 이러했다. 군대는 보급품 수요 증가와 창고 증설을 명목으로 군표 추가 발행을 요청. 군표는 야스다 은행이 환전해주었다. 미네자카 중공업은 환전된 돈으로 군수품을 공급해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게 사기였다.

군수품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군대는 거짓말로 군표를 끌어오고, 미네자카는 공짜로 돈을 얻어 군인들에게 돈을 "만들어서" 돌려주고, 야스다는 중간에서 환율로 장난질을 하고, 이를 위해 회계 장부를 조작하고, 정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뇌물을 먹인 사건이었다

후나다 내각은 이를 알고있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군수품도, 야스다의 환치기와 분식 회계도, 미네자카의 군인들에게 바치는 리턴금도. 하지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그저 돈을 주기 때문이었다.

죽은 노동자는 군수품이 생산되지도 않았는데 생산 보고가 올라가는걸 보고 의문을 품고 회계 비리를 폭로하려던 회계사와 접촉하다 살해당한 것이었다. 결국 청문회가 열렸다. 후나다 내각의 거의 모든 정치인은 부패 연루로 구속될 것. 거의 모든 육군의 고위 군인들은 구속 될것이었다.

수천개의 영장이 발부되었고, 1963년 3월 25일 제국 전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내지의 수많은 회계 사무소중 야스다 사태와 연루되지 않은 청렴한 곳을 찾아 수색을 맡기려 했고, 단 한 곳도 없었다. 결국 모든 야스다의 투자자들은 이를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하려고 야스다 은행으로 달려가며 일본 경제의 초석이자 공영권의 거인, 공룡같은 덩치를 자랑하던 자이바쓰중 대장이던 야스다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1963년 3월 27일, 후나다 총리의 사임을 시작으로 전후 일본 역사 최대의 격랑기가 시작되었다.

정당정치의 부활

도쿄도 경시청에서 횡령과 뇌물부터 살인과 협박에 이르기까지의 혐의로 다수의 자이바츠 임원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진행되고 있던 미네자카 상사에 의해 이뤄진 광범위한 국고 횡령 행위에 대한 조사가 야스다와 미쓰비시 자이바츠에 초점을 맞춘 오독에 대한 대규모 조사로 확장된 것이 틀림없었다.

고위급 육해군 지휘관들과 익찬회의 주요 파벌 전반에 걸친 정치인들에 대한 추가적인 기소가 예상되고 있었다. 공영권 전반에 걸쳐 전례없는 경제적 혼란을 불러올 일본 재정 체계의 붕괴를 피하기 위해 정부의 결정적인 개입이 필요한 이 시점에, 익찬회는 상호 비방으로 인해 완전히 마비된 것으로 보였디.

일본이 야스다 붕괴가 불러온 혼란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익찬회는 자신의 종말을 피할 수 없었다. 비익찬회 의원들의 모임인 무소속의원회의 지도자인 고노 이치로는 그 사이를 틈 타 총리로 임명되었다. 임명 이후 첫 연설에서 고노는 제국 의회에 자유선거와 정당 정치를 회복 시키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다시 한 번 밝혔다.

비평가들은 가나가와에서의 그의 전제적 지배와 자이바츠와 해군과의 연결을 근거 삼아 입헌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에 질문을 던졌다. 또한 고노의 내각이 이전의 익찬회 내각과 달리 그의 무소속의원회와 자유주의적인 미키 다케오의 국민교도회 사이의 불안정한 동맹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사실 역시 거론되고 있었다. 두 파벌 모두 익찬회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각의 향후 안정성에 대한 우려에 합당한 근거가 되었다.

어쨌든 고노의 공약대로 일본에는 정당 정치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대정익찬회는 1963년 5월 정식으로 완전히 해산되고, 23년 만에 정당 설립이 자유화되었다. 고노가 이끌면서 주로 해군/자이바츠와 친연적이며 강경 보수 성향인 무소속의원회는 헌정자유당(憲政自由黨)을 창당했다.

원래 미키 다케오와 공동으로 창당하려 했으나, 사회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하며 반재벌적 / 반군부적 입장을 견지하던 미키의 국민교도회는 익찬회 타도라는 대의에 있어서만 공감했을 뿐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 우익 색채를 가진 고노와는 연합이 힘들었다. 결국 미키는 같은 해 단독으로 교도민주당(教導民主黨)을 창당했다. 대체로 이 양당이 거대 체제를 이루었으며 기타 군소정당이 다수 활동했다.

1963년 오랜만에 열린 자유 선거에서 헌정자유당이 과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또 이때를 시작으로 하여 1918 - 1932년에 이루어졌던 것처럼 관례적인 정당정치 / 내각책임제를 정착시켰으며 다수당 대표가 총리에 취임하는 관행을 확립시켰고 천황주권설은 유지되면서도 사실상 천황은 국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이럴듯 겉으로는 상당히 민주화된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한계가 많았다. 보수 양당제로서 좌익 세력의 공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고, 치안유지법도 유지되었고, 여성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은 것, 그리고 지주와 정당의 깊은 유착으로 말미암은 지주제의 지속으로 인한 농촌 피폐의 유지, 메이지 헌법의 미개정 등 사실상 통제민주주의의 외피를 두른 엘리트 과두정이라는 형태가 이전과 큰 변화는 없었다.

오일쇼크 이전

야스다 재벌과 후나다 등 구 내무계 정치인들만 본보기로 엄벌에 처하고 구속시켰지만, 근본적으로 재벌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고노 내각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일본 경제를 불황에 빠트렸고, 한때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일본은 성장률이 크게 저하되면서 GDP 2위로의 도약을 이루지 못했다.

1965년 고노 총리가 사망한 후 가와시마 쇼지로가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가와시마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지만 질서 위주의 경찰국가를 지향했고, 야스다 위기를 틈타서 부상한 좌익 세력에 대해 더욱 강력한 탄압으로 응수했다. 경제적으로는 불황 타개를 위해 공영권 식민지들의 자원을 더욱 강력하게 착취했으며, 블록경제를 제대로 구현하면서 야스다 위기의 충격에서 일본을 벗어나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게 되었고, 경제성장률도 다시 고성장으로 복귀했다. 국민 생활은 희생했다고 해도 제국의 경제는 다시금 살아났다.

1965년은 국제정세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첫 번째로 친일 정권이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권에 맞서, 모하맛 하타가 이끄는 친미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서 인도네시아 내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효과적으로 수카르노 정권을 지원했고 1966년 내전을 진압했다. 다만 자립을 추구하던 수카르노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던 일본은 1968년에 수하르토를 사주하여 수카르노를 실각시킨 후 정권을 교체했다.

같은 1965년, 만주국에서는 관동군이 악명 높은 쿠데타를 일으켜 푸이의 황실을 타도하고, 완전히 도쿄의 직할 아래 있는 공화국을 수립했다. 세지마 류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다카기 마사오(박정희)가 2인자가 되었드.

더 큰 일은 같은 1965년 중국에서였다. 운남성을 비롯한 중국 서부지역을 거점으로 일어난 중국에서의 반일 봉기였다. 일찍이 1947년 충칭 함락 이후 충칭 너머는 일본의 통제가 닿지 않는 곳이었고, 195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파탄적 상황은 항일의 열기를 다시금 예열시켰다. 국민당의 잔당인 서북혁명정부와 공산당이 합작하고 여기에 운남군벌, 귀주군벌 등이 가세했다. 일본은 처음엔 난징 정부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높은 반일 감정으로 인하여 중화민국 국군 대거 반군에 투항하는 등으로 전선이 급격히 붕괴, 호국군이 난징 앞까지 진출했다.

이에 일본은 1966년에 중화민국 정부의 정식요청 형식을 취하여 중국 개입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전세는 느리지만 뒤집혔고, 일본군의 압도적 질적 우위와 제공권 덕에 반란은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갔다. 결국 1969년, 다시 충칭으로 진격하고 중국군이 서부 지역을 평정하면서 서부반란은 일본과 공영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중국은 일본의 전쟁 무대가 되며 수천만 명이 사망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당장엔 붕괴를 면했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에서의 반일 감정의 증대로 일본의 대중국 관계는 불안정해졌다.

한편 전쟁 중이던 1967년 총선에서는 미키의 교도민주당이 승리하였고, 정권을 교체한 교도민주당 내각은 중국 서부반란의 마무리와 더불어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는데, 바로 1968년 조선과 대만 총독부를 해체하고 이들 지역을 내지로 편제한 일이었다. 본토의 엘리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미키는 1968년 선거법 및 공통법 개정을 통해 자신의 자유주의적 이상을 관철시켰다. 이는 훗날 일본판 민권법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중의원도 중선거구제 676명으로 증가하였다.

1969년 총선거에서는 본토에서 교도민주당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대만 지역의 투표를 통해 압승하며 정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정체기

그러나 1970년 이란, 이집트, 수단, 예멘, 무스카트, 이라크에서 모두 내전이 터지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쟁을 겪으면서 석유파동이 발생했다. 야스다 위기와 잇따른 전쟁의 충격에서 겨우 회복해가던 일본 경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완전히 고도성장의 엔진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미키 다케오가 사임하고, 같은 교도민주당의 스즈키 젠코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석유 위기는 일본뿐 아니라 중국, 만주국, 인도네시아 등 공영권 주요 국가의 경제도 파괴했다. 일본은 중동 석유 의존을 줄이는 대신 공영권 내 회원국들에게 석유를 싼값에 풀라고 강요하는 방식으로 오일쇼크에 대처하였으나 불완전했고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빠졌다.

결국 1972년 총선거에서 다시 헌정자유당이 승리하고, 헌정자유당의 총재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직에 취임했다. 후쿠다는 원자력 발전 증가, LNG, 석탄, 수력 산업 등을 대대적으로 육성하여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일본은행의 통화팽창 억제와 금리 인상을 시행, 공영권 내 무역 강화를 병행함으로서 오일쇼크 위기를 겨우 진정시켰다.

한편 1975년에는 국민사회당이라는 정당이 결성되었다. 국민사회당은 대중 파시즘, 국가자본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아카기 무네노리, 세지마 류조, 아베 신타로 등 극우 민족주의 엘리트들이 주축이었다. 일본판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주창하며 청년층과 하층민 중심으로 이끌었다. 관동군 계열인 세지마 류조, 만주국 경영에 참여한 기시 노부스케와 관계가 깊은 아베 신타로 등 만주국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여, 만주국 모델의 내지 이식을 추구하려 했다. 훗날 국민자유당의 전신이 된다.

이후 1975년 오히라 마사요시가 총리직을 이어받았으나 1976년 총선에서는 다시 교도민주당이 승리, 이토 마사요시 총리를 거쳐 1978년 고모토 토시오가 총리직에 취임했다.

공영권 전체로 보면, 한때 세지마 류조가 통치했던 만주 공화국은 명목상으로만 철권 통치를 하는 타카기 마사오(박정희)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박정희는 철저한 내지 내 만주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만주를 관리했고, 만주는 산업 디스토피아로 전락했다.

국내적으로, 일본은 여전히 ​​메이지 헌법 아래 있었다. 이 헌법은 "민주주의"의 범위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문서였다. 이는 여전히 강력한 일본 엘리트층의 방해 행위에 대한 상당한 국민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겉으로만 개혁을 내세운 일본의 신생 준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약화되고, 내전을 마친 중국은 빠르게 경제개발에 착수하고, 동남아가 자립적 성향을 띠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지속적인 지배에 대한 위기가 다가옴에 따라 일본에는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만주파의 대두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미국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끊고 데탕트를 시도했다. 이는 1980년 환태평양 무역협정으로 결실을 맺었는데, 사실상 1940년 이후 40년 만에 단절되어 있던 미국과 일본 간의 무역이 재개된 것이었다. 도쿄에서 처음으로 맥도날드 매점이 들어서는 등 미국 자본의 급격한 유입이 시작됐으며, 일본 자동차와 전자기기의 대미 수출도 개시되었다. 일본 내에서 미국의 경제침투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고모토가 매국노로 몰리게 되었고, 그는 조약을 강행시킨 뒤 사임했으며 니카이도 스스무가 총리대신에 올랐다.

니카이도 내각은 이미 미국과의 '매국 조약' 체결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강한 가운데 교도민주당의 정권을 유지시켜야 했다. 헌정자유당과 국민사회당은 조약이 완전한 매국, 반민족적 조약이며 제국 경제를 미국에 종속시켰다고 비난했다. 이런 와중에서 1982년, 결국 교도민주당 정권의 숨통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대일본항공 149편 납치 사건(大日本航空149号拉致事件)'이었다.

이는 대일본항공 149편이라는 도쿄발 난징행 민항기가 일본적군파에 하이재킹당한 사고였다. 이들은 일본 내 공산당 불법화의 중단과 공산주의 합법화을 요구조건으로 내걸면서 나리타 공항에 착륙하여 협상을 벌였다. 니카이도 내각은 "절대 불가'라는 원칙론을 고수했고, 일주일 여간 항복을 요구한 끝에 1982년 3월 17일, 역사적인 강제 진입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적군파는 육군과 경찰이 강제 진압을 시작하자 곧바로 자폭, 납치 피해자 318명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정권을 향해서의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게 됐다. 거기에 복지 부재, 지주제 타파 없음, 빈부격차, 인권침해 등으로 이미 민주화와 혁신 열기가 강하던 국민적 여론은 정부의 이번 사건의 권위적 대응과 무능에 완전히 폭발했고, 마침내 1982년 총선에서 극우 민족주의, 기득권 타파를 내세우는 국민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으며 헌정자유당과 연립해 아카기 무네노리가 총리에 취임했다.

세지마 정권 시기

국민사회당은 질서 회복과 함께 제2의 유신을 모토로 내세웠다. 임시로 재임한 아카기를 뒤이어 1983년 총리에 오른 세지마는 쇼와 유신(昭和維新)이라는 모토를 제시하고, 국체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국민에게 신뢰를 당부했다. 먼저 좌익을 향한 전면적 억압이 저번 하이재킹 사건을 불러왔음을 인정하고 같은 해 사회당 창설을 허용하여 좌익적 욕구의 배출구를 마련하도록 했다.

또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에 의거하여 지주제를 해체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러면서도 공산당 및 국체 부정 세력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그었고 억압을 강화하였다. 치안유지법은 1941년 개정판이 이어지다가 1984년 세지마 내각 아래서 40여년만에 재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개정안은 제국 내 모든 항공기 탑승 검문 의무화 조항을 포함했다. 다만 대중 일반에 대한 간섭과 감시는 대폭 완화하여 더이상 특고나 사상경찰의 민간인 사찰을 폐지하는 등 유화책도 실시했다.

또 기득권 유지 및 비리담합의 도구로 간주된 중의원 중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소선거구제 +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총 734석의 중의원을 구성했다. 거기에 더해서 지방자치를 대폭 강화하여, 도도부현지사의 직선 선거는 여전히 불허되었지만 도도부현의회, 시회, 정회, 촌회의 지방의회는 완전한 보통선거 아래 직선으로 뽑고, 단순 자문기관이 아닌 조례 제정권, 예산 심의권 등을 가져 지사와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전국 통합으로 1983년부터 통일지방선거(統一地方選挙)를 시행하여 도도부현의회 및 시구정촌의회 의원을 선출했다.(홋카이도청, 가라후토청, 남양청, 호코청은 제외)

1983년부터 당시 저출산 경향에 대한 대응으로 '産めよ増やせよ國の為'구호를 되살려 모든 여성이 30세까지 3명의 자녀를 필수적으로 낳아야 한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는 일종의 남성:병역의무 / 여성:출산의무를 지어야 한다는 직능구분의 일종으로 주어진 참정권인 셈이었다. 한편 여성의 사회진출은 일반적으로 장려되지 않았으며 학제는 남녀분리(여성 대학진학 사실상 억제)가 계속 유지됐다.

한편으로는 국가 전반에 만주국식의 기능 / 직능제 사회를 도입하려 하였다. 비효율성을 제거한 '효율적 군국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직능사회란 구체적으로 국민들이 각자의 직분에 종사하면서 거기에 머무르는 분업사회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를 제한하는 호구법이 통과되었고 가업 잇기를 장려하며 전 국민이 대를 이어 각자의 전문 분야에 국체에 기여하는 것이 이상이라는 관념을 조성했다.

조선에 대한 정책도 변화가 생겨, 내선통합에 박차를 가하되 조선 현지문화를 존중한다는 기조를 취하면서 기존의 민족말살 정책을 중지했고, 또 만주국 경영에 있어 조선인의 만주행을 장려하기도 했다. 1985년, 다카기 마사오가 만주국 대통령직을 마치고 귀국한 후 국민자유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출마하고, 당 부총재까지 오른 일은 조선인 포섭 정책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만주국 대통령직은 시라카와 요시노리(백선엽)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에 만주는 사실상 박정희 - 백선엽을 거치며 일종의 조선인들의 영지처럼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곧 조선인의 지위를 피지배민족에서 동등한 '대륙경영의 파트너'로 설정하는 것이었고,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반발과 본토의 좌익 운동에 영향받아 부활 중이던 조선 민족주의를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체제 내에 '조선인이면서도 일본 국민'이라는 공간을 부여한 셈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본래 교도민주당 지지가 강하던 조선의 정치 지형은 국민사회당이 장악하여 역으로 국민사회당의 정치적 텃밭이 된다.

만주국의 오족협화를 모델삼아, 내지인, 조선인, 대만인, 타카사고족(대만원주민)을 각각의 정체성 집단으로 인정하고 천황과 국체충성으로 통합한다는 사족협화(四族協和)가 세지마 정권의 정식 모토였다. 야마토 민족이라 함은 곧 이 4개 집단의 총합이며, 이를 일본 민족공동체 또는 일본 가족(日本家族)이라고 칭했다.

1985년에는 이미 무력해진 헌정자유당을 사실상 합병하다시피 하는 형식으로 재창당, 국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국민자유당은 이후 2025년까지 1998 - 2001, 2009 - 2012을 제외하고 줄곧 집권하며 일본의 지배정당이 된다.

세지마 정권은 전반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실용우로 접근했고, 이미 성립된 무역협정을 파토내는 일은 없었다. 1987년에 세지마 정권은 환태평양 무역협정을 갱신하여 추가적인 미일경제교류의 물꼬를 텄고, 문화나 사상은 거부하더라도 실용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미국 역시 대게르만국를 포위하는 관점에서,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안정의 관점에서 일본을 국제질서로 끌어들이기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두 나라는 점차 밀착해졌다.

이 시기에 일본은 형식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진 듯 보였지만 이는 민주적 이상을 좆아서라기보다는 시대에 맞춘 '효율적 재편'과 같은 것이었고, 근본적으로는 국체수호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후 일본의 이 불안한 민주주의 체제는 불과 20여년 뒤 국민들 스스로 허물게 된다.

아베 ~ 이시하라 시기

1988년 세지마의 뒤를 이어서 아베 신타로가 총리에 취임했다. 1988년은 일본 국가에 중요한 해로, 1964년의 도쿄 올림픽에 이어서 조선의 게이조(京城)에서 1988 하계올림픽을 개최했다. 이 대회는 일본 제국, 미국, 대게르만국 및 세계 3대 진영 모든 국가 및 중립국까지 대부분 참가하여 데탕트의 상징이 되었다.

1989년 1월 7일, 쇼와 천황 히로히토가 87세의 나이로 붕어하며 제국은 헤이세이 시대의 개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헤이세이 개막과 함께, 제국의 권위는 점차 흔들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중화민국의 급격한 부상이었다. 난징 정부는 1960년대 이후 중국 대부분 지역을 통일하고,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국민당의 개발독재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어서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일본에 대적할 수준의 국력을 갖추고 40년 전 일본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던 중국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중화 민족주의의 역린이던 광동국을 다시 중국으로 반환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광동은 과거 난징 조약에 의해서 정당하게 일본의 보호령으로 이전된 지역이며 반환 요구에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에 1990년에 중국은 광동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양자의 충돌 위험은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또 공영권은 분열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91년 아베 신타로가 급사하고, 국민자유당은 중국과의 위기 속에 새 총리로 강경파인 이시하라 신타로를 내세웠다. 미국과의 경제개방 이후 호황 일로이던 일본 경제는 중국과의 안보 위협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다.

1990년대, 일본과 중국이라는 아시아의 두 강호가 정면으로 맞붙으면서 동남아시아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동맹이 결성되고, 야망이 펼쳐지고,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모든 좋은 일들은 필연적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아시아에 의미하는 자유의 꿈, 즉 일본 제국의 지배 아래 주인도, 관료도, 노예도 없다는 꿈은 점차 빛이 바래고 있었다.

1995년 일본은 광동을 일본과 중국의 이중 주권 하에 놓는 이중주권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묵살되었고, 1996년, 중화민국은 급기야 일본에 결정적 도발을 감행했다. 바로 광동의 반환이 없었으므로 중국 내 모든 일본 자산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 조치로 인하여 일본 자이바츠들은 순식간에 중국 시장에서 퇴출당했으며, 일본 정부는 '이대로면 무력 충돌도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고 주장, 양측의 충돌 위험은 극대화되었다.

이시하라 내각은 당장 중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국민적 압박에 직면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97년 대동아회의에서 논의하기로 결정되었다. 동남아의 공영권 동맹국들은 대동아회의에서의 일 중 교섭의 결과에 따라 도쿄에의 충성 여부를 결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시아 교섭 상대의 변화를 희망하지 않던 OFN과 아인하이츠팍트는 '현상유지'를 강조하며 일본 측에 사실상 힘을 실었다.

공영권의 붕괴

1997년 대동아회의에서는 마침내 파국이 결정되었다. 중국과 일본은 광동 및 새로운 무역협정 문제에서 서로에게 단 하나의 양보조차 하지 않았고, 중국은 결국 협상의 결렬을 선언했다. 도쿄와 난징의 불안한 동맹이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공영권 패권의 종식이 찾아왔다.

중국은 대동아공영권을 떠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곧이어 만주 국경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의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고, 일본군 해군 항공대는 화북과 상하이에 폭격을 감행하며 전쟁 직전까지 이르렀다.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운이 감돌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파탄나면서 급격히 혼란으로 접어들었다. 필리핀과 말라야, 베트남 제국, 캄푸치아 공화국, 라오스 공화국, 그리고 만주, 광동국 정도만이 도쿄에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했고, 그 외 외곽의 국가들에서는 일본과의 결별과 독립, 미국과의 접촉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시하라 내각이 사임하고 뒤이어 미국과 독일은 상황의 파국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독일의 마르틴 무스그뉘 총통 모두 중일 양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질서있는 결별을 요구했다. 1998년 결국 미국이 중재하여 일 - 중간에 정전협정을 성립시켰다.

전쟁 위기는 겨우 막았지만 이미 항구적으로 파탄난 일중관계 속 공영권 회원국들 일부가 붕괴했다. 인도네시아는 1998년 수하르토 실각 후 등장한 민주정부에서 역시 일본 자산 국유화를 선언했고, 버마에서는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태국도 '중립외교'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일본에서 이탈을 했다.

1997년 이시하라는 극심한 대중적 비난 속에 사임해야 했고, 모리 요시로가 후임 총리에 지명되었다. 모리 내각이 들어선 후 일본은 실질적으로 냉전의 주요 플레이어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세계 냉전의 구도는 미국 - 독일 - 일본에 이어 중국과 인도라는 새로운 경쟁 세력의 등장으로 다극화되어 갔다. 일본은 이전의 초강대국에서 여전히 강대국이지만 더는 패권을 논할수 없는 위치가 되었다. 이는 곧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 일본 불황기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잃어버린 10년

1998년 제39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국민자유당의 인기가 폭락하면서 모리 내각이 무너지고, 합해서 과반을 넘긴 교도민주당과 일본사회당이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오부치 게이조가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2000년 사망한 후, 가토 고이치가 취임하게 되었다. 이 중도보수 - 좌파 연립내각 기간 동안 일본은 새로운 외교방침을 수립했는데, 미국 및 OFN과 적절히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에 대한 봉쇄를 정책 모토로 삼는다는 점이었다

1999년 일본 - 중국 - 미국 3국 간에 체결된 도쿄조약(東京条約)은 공영권의 붕괴 이후 아시아 태평양 질서에 대한 결정과 일본에 대한 '안전보장'의 성격이었다. 조약에 따라 일본은 만주, 필리핀, 남양군도, 파푸아뉴기니, 말라야, 베트남, 라오스, 캄푸치아를 배타적 영향권으로 인정받을 것, 광동국에 대해서 서로 주장하되 현상을 유지할 것, 중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 중국과 인도, 태국, 버마, 인도네시아는 OFN에 가입하지 않을 것 등을 규정했으며, 또 '현상을 무력으로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는 원칙도 강조되며 중국 본토에 대해서도 안전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이미 위상의 축소는 변함이 없었다. 1998년 GDP가 야스다 위기 이래 35년만에 역성장하며, 물가 상승 및 원자재 부족 사태가 고질화되면서 일본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장기불황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혁 연립내각은 불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결국 2001년 총선거에서는 다시 국민자유당이 승리하여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집권했다.

고이즈미는 집권 시 국제협조주의를 이전의 개혁 내각보다도 강화하면서, 대미관계를 전례 없이 좋게 이끌었다. 이 시기 일본은 전후 최초로 서방 국제질서에 편입되어가는 시기에 해당했고, 아베 집권 이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안정적인 파트너로서 일본이 더 선호되었다. 2002년 일본 월드컵 개최는 협조주의의 절정이라고도 할만했다.

경제적으로는 전반적으로 구조개혁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이즈미 본인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적용해보려는 시도를 했으나 관료, 자이바츠, 야당, 당내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국민자유당은 만주파와 본토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본토파는 친미, 작은 정부, 시장불개입, 자유방임주의, 복지확대를 주창하고 해군의 지지를 받은 반면 만주파는 여전히 고전적 만주국식 모델. 즉 국가자본주의 및 자이바츠 중심 경제, 복지축소, 외교적으로는 반미, 친독을 선호했고 육군의 지지를 받았다. 본토파에 고이즈미 등이, 만주파에 아베 신조가 속했다.

결국 고이즈미는 철도민영화와 우정민영화 법안을 강행하려다가 2006년 실각했고, 정통 만주파의 후계자이자 육군의 지지를 받는 아베 신조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아베 신조 집권 이후

중국 침공 및 현재까지

지리

행정구역

내지 (内地)

틀:대일본제국 행정구역 (뉴 오더: 2025)

외지 (外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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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천황


대일본제국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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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메이지 다이쇼 히로히토
신대 통치 · 야마타이 국왕 · 북조 천황 · 추존 및 비정통 천황
파일:아키히토 천황.jpg
아키히토

대일본제국의 천황은 대일본제국 그 자체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자, 국체(國體)이다. 동시에 살아있는 신의 대우를 받는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카미)로 국가 신토의 권위 아래에 신격화되는 대상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에도 막부의 권력이 메이지 덴노에게 이양되었고, 대일본제국 헌법에서도 천황의 절대적 권력을 인정하고 있기에 표면적으로 일본 천황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권한은 무한하나 실제로는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 내에서 천황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신이자 일본의 국민들을 통합하는 위치에 있는 천황은 전국민적인 존경이 되며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일본인들은 천황을 지키기 위하여 단결한다.

본래에도 일본 내에서 천황은 숭배받는 분위기였지만, 대동아전쟁에서 승전한 후 히로히토 천황은 말 그대로 절대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거의 모든 일본인들에게 존경받는 국가의 수호자가 되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극도로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중요 국면에서는 나설 때도 있었드.

일본 천황의 가문은 2,600년 전부터 이어져온, 인류 역사상 가장 그 유례가 깊은 가문이며, 역사적으로 존재가 인정된 천황만 포함하더라도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두고 만세일계라고 하는데, 이는 2,600년간 한 가문이 끊김 없이 내려져왔다는 것이다. 일본 천황의 시조는 아마타레스 오미카미로, 아마테라스 여신이 손자 니니기에게 일본을 다스리라며 천상계에서 내려보낼때 삼종신기를 함께 보냈는데, 이 삼종신기는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다.

영문으로는 Emperor of Japan, Tennō 라고 불린다. 2025년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Emperor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일본이 황제국인지 아닌지는 고대로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대일본제국의 건국 이후 천황의 권위가 확립되며 일본은 대외적으로 널리 황제국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일본의 천황들은 예로부터 교토에서 살았고, 메이지 덴노부터는 도쿄에서 거주하였다. 거처는 1888년 지어진 궁성(宮城).

현 천황은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천황(헤이세이)이다. 고령으로 인하여 정무에서 은퇴한 현재는 2019년 5월 1일부터 나루히토 황태자가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다.

내각


대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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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다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제13대 제14대
가쓰다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다이쇼 시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기 레이지로
쇼와 시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다나카 기이치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이누카이 쓰요시
제30대 제31대 제32대 제33대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하야시 센주로
제34대 제35대 제36대 제37대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제38·39대 제40대 제41대 제42대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스즈키 간타로 기시 노부스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제46대
나루히코 마에다 요네조 하토야마 이치로 아오키 가즈오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50대
아리타 하치로 후나다 나카 고노 이치로 가와시마 쇼지로
제51대 제52대 제53대 제54대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제55대 제56대 제57대 제58대
이토 마사요시 고모토 토시오 니카이도 스스무 아카기 무네노리
제59대 제60대
세지마 류조 아베 신타로
헤이세이 시대
제60대 제61대 제62대 제63대
아베 신타로 이시하라 신타로 고무라 마사히코 오자와 이치로
제64대 제65대 제66대 제67대
가토 고이치 아소 다로 아베 신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제68대 제69대 제70대
오시마 다다모리 이시바 시게루 아베 신조
인세이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아즈치모모야마 · 에도 · 내무경

원로 · 부총리


선거

의회

일본 제국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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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내각 (2006.10.26 - )
여당

국민자유당
 ----- 469석 
야당

교도민주당
 ----- 84석 

일본사회당
 ----- 61석 

참정당
 ----- 12석 

대일본애국당
 ---- 5석 
파일:뉴 오더 입헌양정회.png
입헌양정회
 ---- 4석 
파일:뉴 오더 레이와회.png
레이와회
 ---- 3석 
무소속  ----- 12석 
공석  0석 0석 
재적 436석 · 650석
좌측은 귀족원 의석 수, 우측은 중의원 의석 수


정당

관료제

지방 정치

경제

파일:도쿄 야경.jpg
도쿄의 길거리

자원

세계 최대의 금 은 보유국이다. 16세기부터 일본의 각종 광산에서 개발된 금광과 은광 때문에 17~18세기 세계 은 생산의 70%가 일본에서 이뤄졌으며 1945년 이후 은과 금의 생산량은 줄어들었으나 이때의 비축량 및 성장한 경제 규모 때문에 여전히 금과 은의 압도적인 보유량을 자랑하고 있다.

사회

민족

종교

신분제

언어

문화

군사

기술

외교

각주

  1. '일본인'이란 공식 지정된 소수민족을 제외한 모든 제국신민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출신지별로는 구내지인 66.3%, 조선인 23.4%, 대만 본도인 5.6%으로 나타난다.
  2. 지도의 빨간색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