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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unist 1968, 2022 | CC-0 |
![]() 부여의 식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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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98년부터 1968년까지 약 70년간 필리핀에 위치했던 부여의 식민지이다.
부여 식민제국이 거느리던 식민지중에서도 가장 그 규모가 거대하였다.
역사

여반전쟁과 부여령 필리핀의 성립
제1차 세계 대전
필리핀 자치령 시절
식민지 저항운동과 독립
사회
사회 고위층은 부여인으로, 중산층들은 화교들과 스페인계로, 그리고 하류층은 주로 필리핀인들로 이뤄져있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이후 기존의 경제적인 질서가 필리핀 내에서는 많이 무너졌고, 귀족층이 아닌 평민층에서는 민족에 따른 계급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필리핀인들 중에서도 귀족 작위를 받을정도로 돈을 많이 번 기업인들이 다수 있었으며, 이들은 1968년 필리핀의 독립 이후 필리핀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재벌 기업인들이 되었다.
물론 부여의 전제군주적인 독재 정권은 부여인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였다. 필리핀으로 이주해온 부여인들은 주로 조선계와 일본계, 그리고 대만계 본도인들이 대다수였다. 반면 만주계 부여인들은 기후와 문화가 극명히 다르다는 이유로 이주를 꺼렸다.
일본계 부여인들이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한때는 일본 독립운동의 핵심 지역으로 꼽히기도 했다.
문화
부여의 문화는 스페인, 부여 그리고 필리핀 고유의 문화가 모두 합쳐진 독특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여기에다가 화교들의 문화까지 더해져, 부여령 필리핀은 아시아 다문화의 장으로 불렸다.
필리핀은 부여의 영향을 받아 아직까지 부여의 문화가 사회의 이곳 저곳에 남아있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식문화가 그러한데 부여의 음식인 냉면은 변형된 형태로[1] 현지에서도 즐기는 음식이 되어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영향으로 필리핀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강압적인 군사, 귀족 문화는 필리핀의 사회적 병폐로 꼽히기도 한다.
비율빈국 논의
세종 황제는 치세 말기, 전공을 세운 귀족중 한명을 필리핀의 왕작으로 임명하고 비율빈국이라는 책봉국을 만들어 필리핀을 영구히 자국의 영토로 귀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필리핀 내부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반발 여론이 일어났고 결국 1954년 세종 황제는 비율빈국 구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일단 동북아시아의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비율빈국의 책봉왕 문제도 있었는데, 비교적 한지인데다가 가헌초의 업적이 명백하여 가씨 가문이 세습 왕작이 되는 것에 거의 반대가 없었던 북이국의 성립과는 달리, 필리핀은 정치, 경제, 안보적으로 모두 부여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누가 세습 왕이 될지에 대하여 추밀원 내부에서 큰 세력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예 세종 황제는 비율빈을 책봉국이 아닌, 자신의 직할지로 하려고도 하였지만 이는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을 방불케한다며 추밀원 내부에서도 반발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문제들로 인하여 비율빈국은 성립될 수 없었고, 필리핀은 알려진대로 1960년대 후반 여러 투쟁을 통해 독립하게 된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대중매체에서
여담
- ↑ 메밀이 주 재료가 되는 부여의 냉면과 달리 필리핀의 냉면은 현지에서 많이 나는 재료인 쌀과 밀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