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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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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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4대 국왕 문조 | 文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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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초대 황제 문조 태황제 | 文祖 太皇帝 | ||||
출생 | 1809년 9월 18일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 ||||
사망 | 1877년 2월 9일 (67세) | |||
대한국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 ||||
능묘 | 고릉(高陵) | |||
재위 | 조선 왕세자 | |||
1812년 8월 13일 ~ 1833년 2월 10일 | ||||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 ||||
1826년 6월 9일 ~ 1833년 2월 10일 | ||||
조선 국왕 | ||||
1833년 2월 10일 ~ 1860년 12월 31일 | ||||
대한국 황제 | ||||
1861년 1월 1일 ~ 1877년 2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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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24대 국왕이자 대한국의 초대 황제. 묘호는 문조(文祖),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휘는 영(旲), 자는 덕인(德寅)이며 연호는 건창(建昌), 절일은 만수절(萬壽節).
생애
초년기
세자 책봉과 대리청정
임진년(1832년) 설을 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자 저하께서 문득 동궁 어전에 우의정 조인영, 병조판서 김정희, 부사과 윤상도와 나를 모아놓고 간밤의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스스로를 중일(中一)이라 하는 사람이 조개가 가득 든 망태기를 지고서 활을 차고 강을 끼고 내려오매 그 곁에는 양(羊)이 있었소. 그는 대뜸 하얀 관(冠)을 쓸 것을 권하였는데 꿈이 너무나도 해괴하여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소. 이에 김정희가 저하의 해몽을 해주었다. 중일이라는 자가 조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귀인(貴子)을 뜻합니다. 물을 끼고 양이 내려온다는 것은 커다란 바다(洋)를 뜻하고 그 자가 활을 찼으니 오랑캐(夷)입니다. 저하께 하얀 관을 쓰시라 한 것은 참람한 일이라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이에 저하는 판서에게 내(予)가 그대의 해몽을 들으니 더욱 혼란하지 않을 수 없구려. 근래 양이의 배가 근해에 출몰하니 이런 꿈을 꾼 것 같소. 하나 귀한 이인이라니 상상할 수 없구려. |
박규수, 헌재집 |
1832년 새해가 밝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조가 여러 측근을 모아놓고 꿈에 대해 얘기하였다고 한다.
무릇 국가의 일도 사람의 일과 같아서, 미리 대비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질 수 있으니 임금은 때마다 상황을 살피고 신속하게 처결해야 한다. |
문조실록 |
즉위 초기
문조 황제는 즉위 직후 첫 조회에서 조정의 수입과 지출 문제에 대해 거론했다. 조정의 재정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곧 조세제도에 대해 논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조선은 전근대적 행정으로 인해 조세제도에 있어 여러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조정의 주 수입원이었던 삼정으로 불리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제도가 문란해져 있는 상황이라 백성은 백성대로 피폐해지고 조정으로 들어와야 할 수입이 지방관과 아전등에게 새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증조부인 영조대부터 이미 잘 알려진 문제라 황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조는 문란해진 삼정을 개혁하고자 고조부 숙종 때 마지막으로 행해졌던 양전(量田)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이때 대리청정 기간동안 세도가에 대항해 형성해놓은 고령인 정약용부터 중년의 김정희, 젊은 박규수 같은 신진친위세력을 앞세우는 한편 반발하던 세도가들끼리의 경쟁심리를 부추긴 뒤 각 집안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지방에 교차 파견하여 보다 신뢰성 높은 조사를 추구했다.
붕어
1877년 1월 중엽 태자가 예조판서 유홍기에게 보낸 서찰 중
1876년 10월 초, 문조는 종묘에서 가을 대향(大享)을 친제한 직후 오한과 기침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어떠한 치료로도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고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동지 직후에 치러진 납일 대향은 대리청정하던 태자가 수행하였는데 대향에서 문조의 회복을 기원하였음에도 문조는 이후로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양력 새해 직후에는 문조가 숨을 쉴 때마다 가래끓는 소리가 났다고 하며 수차례의 거담제 처방으로 약간 호전되었다가 다시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헌종은 설날 문조의 쾌유를 기원하는 천신제를 거행하려 했으나 그 직전인 1877년 2월 9일 붕어했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면 사인은 폐렴으로 추정된다.
청 광서제는 국장에 참석한 사신단을 통해 문조에게 경원(敬元)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 소식을 접한 헌종과 대신들은 국장 기간이라 엄숙해야함에도 조회에서 웃었다고 한다. 경원(敬元)을 풀이하면 으뜸, 우두머리를 공경한다는 의미이기 때문. 압록강 전투 이후 사실상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대청 강경책을 고수해온 문조에게 청이 이런 시호를 내렸다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 정신승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국장도감 제조 예조판서 유홍기는 청 사신이 있었음에도 ‘문조(文祖)’라는 묘호를 종묘에서 대놓고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