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보날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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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보날 인민군
Ludowe Siły Zbrojne Korwónalskiej
창립일 1658년 11월 18일
활동 기간 1658년-
국적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편제 코르보날 인민군 육군
코르보날 인민군 해군
코르보날 인민군 공군
충원방식 징병제
징집연령 18세
지휘 체계
참전


코르보날 인민군(코르보날어: Ludowe Siły Zbrojne Korwónalskiej [ˈlu.dɔ.vɛ ˈɕi.wɨ ˈzbrɔɲɛ kɔrˈvɔ.nalskʲɛj])은 1658년 11월 18일 코르보날 내전 상황 속에서 창설되어 새로 수립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국가 통합 무장 세력이다. 헌법적 지위는 1658년에 수립되어, 코르보날 인민군 육군, 코르보날 인민군 해군, 코르보날 인민군 공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 켈라우틴 독립시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코르보날 연합군과 달리, 별개의 지역 군을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중앙군을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 각 지역의 군은 인민군 휘하에 편제되어 있는, 준주권국 방위대에 불과하다. 마르쿠스 버멜론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최고의장으로 명목상 통수권을 행사하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사회의 의장 자격으로 실질적인 통수권을 행사한다. 코르보날 인민군 총참모장을 포함한 참모부의 도움을 받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사회의에서 전반적인 군사 관련 업무를 전부 처리한다. 행정적 원리에 따른 군수의 처리를 한다.

중앙의 통제에 명확하게 따르는 군사 집단이라는 특성과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지원 아래, 코르보날 연합군보다 더 강한 강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모든 병력이 복잡한 행정 체계 아래,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때문에 합리적인 군수 처리와 더불어, 명령 불복과 같은 사례가 일어나지 않는다. 버멜론주의의 최대의 성과로 보기도 하나, 일부에서는 과도하게 복잡한 행정체계로 인해 장기적인 군사 능력의 하락을 우려하기도 한다.

명칭

코르보날 인민군(코르보날어: Ludowe Siły Zbrojne Korwónalskiej [ˈlu.dɔ.vɛ ˈɕi.wɨ ˈzbrɔɲɛ kɔrˈvɔ.nalskʲɛj])은 관례적으로 코르보날군(코르보날어: Siły Zbrojne Korwónalskiej [ˈsʲi.wɨ ˈzbrɔɲɛ kɔrˈvɔ.nalskɛj])이라 부르며, 더 줄여 코르보날군(코르보날어: Wojsko Korwónalskie [ˈvɔj.sko kɔrˈvɔ.nalskʲɛ])라고도 한다. 코르보날 연합군 혹은 코르보날 중앙군과 겹치나, 국내에서 통용되는 약칭인 만큼, 아직은 큰 문제로 발전하지 않았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사회주의 체제에 따르며, 각 지역에 종교적 자유를 선택적으로 부여했으나, 국가무신론적 성향이 굉장히 강력하며, 세속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코르보날 황제교 역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서는 일부 정치계를 제외하고서는 국가의 주요 상징으론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신, 인민공화국 국체에 적절하도록, 노동자들에 대한 존중의 명칭을 담아, 인민군으로 명칭을 정하고자 했다. 이는 상당한지지 하에 이루어졌으며, 코르보날 인민정부연합의 큰 국내의 정치적 이득과 외부에 대한 상당한 선전으로 작용했다.

역사

창립

1658년 6월, 코르보날 내전의 원인인 결의정변 직후, 울리르 자치령군, 좌파 성향 중앙군 일부 부대, 사회주의 빨치산 세력이 울리르에서 발흥한 코르보날 인민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발표 이후, 모이기 시작했다. 코르보날 인민정부연합의 일부 계층은, 이전 질저의 군사 계급을 유지하는 것은 혁명에 대한 배반임을 주장하였으나, 숙련 인력 유출을 막고 당장의 코르보날 내전에 대한 대처를 위해 종전 계급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통합은 상당한 갈등을 불러왔고, 충분히 하나로 합쳐져 훈련된 군 집단으로 변모하기에 상당한 시간과 중앙의 통제를 요했다.

이러한 타협을 바탕으로 같은 해 11월 18일,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라 코르보날 인민군(코르보날어: Ludowe Siły Zbrojne Korwónalskiej [ˈlu.dɔ.vɛ ˈɕi.wɨ ˈzbrɔɲɛ kɔrˈvɔ.nalskʲɛj])이 공식 출범하였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사회의 역시, 즉각적으로 설치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휘하 군부대는 없지만,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정치사령부 역시 당시에 즉각적으로 형성되어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군을 계도하고, 중앙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정비

창립 직후 인민군은 켈라우틴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사회의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총참모부를 두고 코르보날 인민군 육군, 코르보날 인민군 해군, 코르보날 인민군 공군 3군 편제를 확정하였다. 자치령군의 병참망을 활용해 탄약·식량을 표준화하고, 중앙군 장교단이 통일 교범을 마련하여 부대별 훈련 수준을 맞췄다. 빨치산의 기동 경험은 ‘타격 후 분산’ 전술로 녹아들어 기존 정규군 교리에 보완점을 제공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정치사령부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나눠주면서, 지역마다 군 언어가 다른 인민군의 상황에 대처하며,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노하우를 수입했다. 정치장교는 각 군의 사기 진작의 업무를 맡음과 동시에, 교육의 역할과 중앙과의 주요 통신망을 연결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민군은 점차 중앙화되고, 코르보날 연합군과 각 자치령군이 헤이해지는 현상을 지켜보며 전쟁에 대한 준비를 진행했다.

성축일 공세(방제작전)

1662년 12월, 마르쿠스 버멜론 최고의장은 코르보날 해방 1차 공세 계획(코드명 홍수)을 승인해 인민군에 PA 협약국 아키드노스프로슬레우 선제타격을 명령했으나, 양국 연합군과 강도 높은 유격전에 직면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공세 실패로 마르쿠스 버멜론의 권위가 흔들리자 정적 루카 베르나르디가 공개 비판에 나섰지만, 버멜론은 언론 통제와 숙청으로 반대파를 종파 세력으로 규정하며 주도권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버멜론주의가 이후 인민공화국의 핵심 노선이 되었고, 인민군은 대규모 동원보다는 산업·병참·정치 통제 강화에 집중해 총동원형 전시 체제를 다져 나갔다.

조직

지휘

코르보날 인민군은 코르보날 연합군처럼 통수권이 시기에 따라 나뉘는 이원 체계를 채택한다. 통수권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최고의장에게 속하고, 전시 지휘권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사회의 의장에게 위임된다. 평시 지휘권은 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무부 장관에게 속한다. 각각 직위는 법적으로 독립돼 있으나, 현재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최고의장, 마르쿠스 버멜론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사회의 의장을 겸임하고 있다.

평시에는 군사회의 의장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군무부 장관에게 행정·군수 업무를 일임해 국방 행정을 관리하고, 총참모부는 전력 기획과 훈련 평가에 집중한다. 전시가 선포되면 군사회의 의장이 직접 코르보날 인민군 총참모장에게 지휘권을 넘기며, 코르보날 인민군 총참모부(Sztab Generalny)는 작전·정보·동원 3본부를 통해 육군·해군·공군·혁명수비대·예비군본부를 일원 지휘한다.

코르보날 인민군 총참모장 아르딧 베리샤는 군령권을 받아 일상 작전을 총괄하고, 각 군종 사령부와 지역 전선 사령관들의 작전 지시를 최종 승인한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인민군은 최고 권력자의 정치적 정당성과 전문 지휘부의 운용 효율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충원

군비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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