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코르보날에서 발발한 내전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전개

배경

코르보날 연합국은 1650년대까지만 해도 민족 자치와 연방제를 통해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한 다민족국가였다. 그러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때 코르보날 연합국은 그란치프 편으로 참전했다. 코르보날 연합국은 군수물자를 생산해 그란치프에 판매함과 동시에, 국방군 병력을 전선에 배치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그란치프에 협력했다. 하지만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키르수스의 승리로 끝남에따라, 그란치프 편에 선 국가들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코르보날에 대한 키르수스의 보복성 경제제재가 시작되었다.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필두로, 코르보날 연합국은 헤스페로스벨트 국가들과의 무역에 대한 관세 부과, 상품 품목 제한, 전략물자 수입 금지 등의 제재를 당하면서 코르보날 경제는 악화되었다. 더군다나 그란치프측에 판매한 물자 대금을 받지 못하면서 자금난에 시달린 코르보날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코르보날 연합국에는 주류민족 우월주의가 남아있었다. 코르보날 연합국의 군사력인 국방군 장교단의 핵심인 참모회의는 주류민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고, 대타협 이전부터 쌓아올린 기득권으로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장악해 형식적으로는 타민족과 동등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타민족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상황 악화는 국내 여론의 극단주의화를 불러일으켰고 반세기 가까이 잠재워졌던 민족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1650년대 후반부터 국가주의와 권위주의 성향의 우파 정당 연합 결의당은 주류민족을 중심으로 세를 불렸다. 본래 코르보날 국가주의와 탈민족주의 이념을 제창한 연합 결의당은 주류민족에 의해 코르보날이라는 단일 국가를 주도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변질되었고, 타민족에 대해서는 종속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갈등을 초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족별 균형을 맞춘 대의회는 연합 결의당의 권력 기반인 군부를 견제하고자 최고회의의 군부 인사인 당시 국방군 최고사령관이었던 야니스 오르멘을 통해 문민통제를 시도했다.

그러나 1658년 6월 1일, 국방군 최고사령관 야니스 티오르멘이 암살당하면서 정국은 뒤바뀌고 만다.

1차 코르보날 내전은 물론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이자 덕장으로써 민족을 막론하고 코르보날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의 암살은 코르보날의 구심점이 소멸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조사 결과, 대의회 내부의 분리주의자들과 공련의 사주를 받은 좌익 정당에서 암살과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회불안은 가속화되었다. 더군다나 대의회가 수사 결과를 은폐하고, 자료를 파기하는 모습을 보이자, 최고사령관 암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던 군부는 대의회의 소극적 태도를 계기로 쿠데타에 착수했다.

결의정변(1658년 6월 9일)

연합 결의당 당원이자 국방군 참모회의 일원이었던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군부를 대표하며 여러차례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대의회가 사건은폐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슬로딘은 중앙군 부대들에서 협력자를 모아 대의회와 참모회의를 필두로 정부와 국방군의 중앙기관을 장악하는 것을 계획했다.

1658년 6월 9일, 슬로딘 예하 중앙군 보병 사단 5개, 기갑사단 3개, 기계화보병사단 1개로 구성된 9개 사단 규모 쿠데타군이 새벽 3시에 코르보날 연합국 수도에 진입했다. 위 병력은 전부 중앙군의 수도권 방위군단에서 차출되었으며, 야니스 오르멘의 죽음에 동요하던 방위군단의 다른 사단들도 수도 진입을 묵인함에따라 쿠데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상한 군 병력 이동을 눈치챈 시 경찰과 대의회 경비대가 시가전으로 저항했으나, 보병사단이 경찰과 경비대와 교전하는 사이, 기갑사단이 중앙 경찰청을 포격하고, 기계화 보병사단이 시가지를 우회 기동해 대의회에 진입하면서 불과 30분만에 수도를 장악했다. 새벽 3시 30분에 대의회를 점거한 쿠데타군은 심야회의중이었던 대의회 의원들을 구금했다.

그로부터 15분 뒤인 3시 45분, 대의회에 출두한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대의회 중앙 연단에서 코르보날 내 모든 언론에게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은 분리주의자들에 암살당했으며, 대의회 내부 좌파 의원들과 분리주의에 협조하는 타민족 의원들의 방해로 대의회가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 수사에 소극적이고, 은폐를 주도했음을 밝혔다.

1658년 6월 9일 낮에는 중앙령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중앙령 내부의 타민족 인사들과 연합 결의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의 모든 당원과 대의회 의원들이 수도권 방위군단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들 중 좌파 정당 출신들은 즉결처분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중도와 우파 인사들에게는 연합결의당에 협력할 한번의 기회를 주고, 거부시 그들 역시 처벌되었다.

결의정부(1658년 6월 9일~1658년 7월 4일)

결의정부는 쿠데타 직후, 코르보날 내 자치령에 대해서는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 암살 배후에 관한 소식과 그 주동자들을 처벌했다는 소식만을 전한 채, 그 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언론통제로 일관했다.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야니스 오르멘 암살과 그 이전부터 악화된 경제, 고조되어가는 분리주의 등 불안한 사회의 기강 유지를 명목으로 그 자신이 국방군 최고사령관과 최고회의 의장직을 겸임했다. 1658년 6월 9일부터 시작된 결의정부는 일단 각 자치령에 대해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반응으로 일관하되, 행동적으로는 큰 개입은 없었다.

그 대신 중앙정부의 권한을 하나씩 높여가면서 각 자치령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코르보날 내 자치령들 역시 정보가 통제된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자치령의 자체 병력인 자치군을 소집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나 1658년 6월 중반부터 갑작스러운 계엄령과 비상사태에 대한 반발과 진정 야니스 오르멘 최고사령관이 슬로딘의 발표대로 사망하고, 진상조사가 방해받은 것이 맞냐는 의문이 고조되면서 혼란은 악화되었다. 특히 연합 결의당이 야니스 오르멘을 암살하고 은폐에 관여했다는 음모론이 퍼지면서 각 자치령 내부에서는 연합 결의당에 대한 반발과 추방이 이어졌다.

1658년 6월 19일 부터 각 자치령의 자치의회에서 연합결의당 의원들이 추방되었고, 자치군이 중앙군의 통제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움직이자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계엄령을 코르보날 전역으로 확대했다.

1658년 7월부터 코르보날의 자치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상황이 안정될 때 까지 자치령의 자치권을 박탈한다는 법안이 연합 결의당에 의해 장악된 대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코르보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발발했다.

초창기 결의정부는 1차 코르보날 내전 때 처럼 각 자치령을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사용했으나, 범좌익 세력인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1658년 7월 4일에 봉기해 여러 자치령이 인민공화국으로 규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부족한 조직력으로 각자도생해 각개격파당할 것을 상정했던 자치군들은 인민공화국으로 통합되어 양적 우세와 조직력의 대등함을 갖췄고, 해군 역시 인민공화국에 응하면서 결의정부의 중앙군은 우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이 코르보날 결의정부 타도를 선언하면서, 다른 자치령도 독립하거나 인민공화국에 편입함에따라, 7월 4일을 기점으로 코르보날은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붉은 홍수(1658년 ~ 1664년)

인민공화국의 준동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준동을 계기로 중앙령을 제외한 코르보날 전역이 결의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 체슈노어 자치령을 거점으로 삼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코르보날 각 자치령 내 사회주의 세력과 공화주의자들을 기반으로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통한 대규모 지역 장악이 가능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선포와 함께 코르보날 국방함대의 수병들도 일제히 봉기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해군 함정과 군항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의해 장악당했다. 그러나 함선 운용과 지휘에 필요한 장교들을 사살 후 함선을 제압하는 방식이었기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해군은 그 규모에 비해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후원국인 공화국 연맹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봉기를 기회삼아 코르보날을 적화시키고자 했다.

공화국 연맹은 결의정변 이전부터 자국에 망명한 코르보날 사회주의자들을 사관학교와 행정, 기술 분야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시켜 코르보날 사회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기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1658년 8월부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공련 장교단과 고문단, 기술자와 공련에서 학습한 코르보날 인들이 입국했다. 이들은 숙청당한 옛 장교단과 기술자, 행정가를 대체하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조기 붕괴를 막았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정치, 경제, 사회, 군사를 공련식에 바탕해 자국의 '특수한 상황'에 맞춰 개편했다.

1658년 11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긴급혁명내각이 해체되고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헌법이 발효되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헌법에 의거, 입법기관인 코르보날 인민회의에서 공화국 연맹식 일당제를 채택함과 동시에 인민사회당이 여당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인민사회당 전당대회에서 마르쿠스 버멜론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마르쿠스 버멜론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초대 공화국 주석이 되었다.

마르쿠스 버멜론은 경제적으로는 전시공산주의를 채택하고, 군사적으로는 기존 점령지의 지배력 강화를 결정했다. 이미 장악한 지역 외부로는 확장을 자제하고, 내부 방어전에 전념하면서 인민공화국에 대한 공세를 돈좌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키르수스의 아인츠블뤼겐 개입(1658년 7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봉기를 계기로 아인츠블뤼겐 역시 분리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인츠블뤼겐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키르수스와 동질성이 높았으며, 경제적으로도 키르수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던 지역이었다. 아인츠블뤼겐을 구성한 슈베로니아 민족은 코르보날의 정치, 경제에 대 키르수스 관계라는 외교적 변수로써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키르수스는 코르보날의 내전과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봉기를 확인하자, 아인츠블뤼겐의 키르수스 국민과 키르수스 자산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아인츠블뤼겐에 대한 개입을 실시했다.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으로 독립한 아인츠블뤼겐과 타 세력의 국경지대에 키르수스군이 주둔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타 세력의 접근을 차단했다. 국경에 주둔한 키르수스군은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의 체제 안정화와 함께 철수했으나, 키르수스제 무기 다수를 아인츠블뤼겐에 남기고, 키르수스 장교단이 아인츠블뤼겐 자유국군의 훈련을 담당했다.

그러나 키르수스는 아인츠블뤼겐의 일부 지역을 자유국으로부터 할양해 키르수스의 직접 점령지로써 장악하기도 했다.

결의정부의 대응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확장과 그로 인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각심이 격화되면서, 결의정부는 분리주의자들을 직접 제압하는 대신 인민공화국과 분리주의자들의 싸움을 조장하는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결의정부 입장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분리주의자들은 인구와 영토면에서 결의정부의 중앙령을 압도했고, 정면대결로는 결의정부 입장에서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의정부는 군사적으로는 소극적으로 활동하며,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교전중인 일부 세력에 대해서는 물밑협상을 시도했다. 코르보날 결의정부도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반대했기에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만큼은 결의정부는 분리주의자들의 군사적 활동을 묵인하거나, 일부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공화국과 접하지 않고, 지리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고립된 오사넨 연방에 대해서는 공세적인 진압정책을 펼쳤다. 반 제국주의, 고립주의를 표방하는 오사넨 연방은 타국의 대외지원을 거부하면서 결의정부군에 비해 열세인 전력을 갖춰 전면전에서 결의정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결의정부의 진압작전에 오사넨 자치군 출신으로 구성된 정규군인 오사넨 방위군이 궤멸당하고, 수도인 리겔이 결의정부에 함락당한다.

수도 함락을 계기로, 오사넨 연방은 토르넨을 임시수도로 삼아 게릴라전과 지연전을 채택한다.

PA 협약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양대 주축이었던 프로슬레우 자치령과 아키드노스 자치령은 내전 후 각각 프로슬레우 공화국과 아키드노스 대공국으로 독립했다. 프로슬레우는 산업시설과 공업역량이 풍부했지만, 식량과 인구가 부족하고 해로가 없었다. 아키드노스는 인구와 식량이 풍부하고, 해로가 있었지만 공업역량이 뒤떨어졌다.

내전에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확장을 경계한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비슷한 고민을 하던 프로슬레우 공화국과 접촉, 두 국가간 상호협력과 불가침, 군사적 동맹을 골조로 한 PA협약을 체결한다. PA 협약은 각자 부족한 자원과 기술, 장비를 서로 충당하고, 군사적인 지원과 정보 공유를 약속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로슬레우와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공세로부터 자국을 방어하는데 총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방제 전투(1663년~1664년)

1662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5년에 걸친 체제정비와 군사재편, 경제기반의 마련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공련으로부터 전수받은 교리와 기술을 토대로 군대와 산업을 재편하는데 성공하고, 결의정부와도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면서, 다른 독립국 역시 각개격파를 통해 하나씩 멸망시키는 전략으로 코르보날 각 지역을 장악해나가는 것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대전략이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적 전력 분산과 사회 혼란 겸, 공격 명분을 위해 각 독립국에 포진한 사회주의자들의 지하세력을 활용했다. 내전으로 피폐해져가는 민생고를 토대로 지지자를 확보한 사회주의 지하세력은 인민사회당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다.

PA협약 가맹국인 아키드노스와 프로슬레우는 사회주의 지하세력의 배후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있으며, 더 나아가 자국의 사회를 붕괴시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이라고판단해 그들의 배후에 대한 타격을 개시했다.

하위할 국민국 역시 봉기 직후 인민공화국에 가담한 인민국의 제압을 위해 이에 가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아키드노스-프로슬레우-하위할 3국 연합간 공방전이 발발했다.

분열기(1664년 ~ 1670년)

인민공화국 당쟁

방제전투의 패배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묻는 당쟁이 시작되었다. 마르쿠스 버멜론 공화국 주석의 지도력에 대한 의심이 인민사회당 내부에서 고조되었으며, 마르쿠스 버멜론은 공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인민사회당 전당대회에서 나올 정도였다. 인민사회당에서 마르쿠스 버멜론 공화국 주석에 반기를 내세운 주요 파벌로는 셰우난 벨로스크의 자생주의와 가르디난 제베네스의 혁명 근본주의가 있었다.

셰우난 벨로스크는 코르보날 내부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면서 내전 이전 사회주의자들을 통솔/지휘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비롯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민중의 '자생적/자발적 봉기'를 통해 민중의 자발적 의지가 반영되야 함을 주장했다. 혁명의 존속을 위해 공련과 불가피하게 협력할지라도, 공련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민중의 자생적/자발적 봉기와 자발적 의지가 퇴색됨을 경고했다. 버멜론은 방제전투의 패배로 공련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 책임이 있으며, 내전에서 승리하더라도 공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임을 주장했다.

가르디난 제베네스는 코르보날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마련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사회주의 이념에 의거한 체제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이 특정 개인과 특정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고 혁명의 타도 대상과 다를 바 없는 독재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주장했다. 마르쿠스 버멜론은 내전이 시작된 이래 모든 권력을 그 자신에게 독점시켰으며, 방제전투의 패전은 마르쿠스 버멜론의 권력 독점으로 인해 발생했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마르쿠스 버멜론을 축출해야 함을 주장했다.

마르쿠스 버멜론은 철저히 계산적이고, 현실주의적으로 대응했다.

1663년 인민사회당 전당대회에서, 마르쿠스 버멜론은 1658년에서 1663년 사이의 통계자료와 공화국 연맹으로부터 제공받은 군사물자 목록, 방제전투 당시의 작전 보고서와 참전 지휘관의 증언을 토대로 반박에 나섰다.

공련에 대한 의존과 일인독재로 인한 혁명의 변질이 패전의 책임을 초래했다는 반대파들의 주장에 대해, 마르쿠스 버멜론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이 가져온 자료들을 토대로 공련으로부터의 지원과 내전 상황에서의 권력 집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존속될 수 있었으며, 방제전투의 패배는 하위할의 게릴라전과 지형/지리환경을 이용한 그들의 전략에 있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버멜론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을 막기 위해 현지 사정과 적의 전략을 미리 파악/예측할 수 있는 정보력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그 해결책으로 코르보날 각 지역에 포진된 사회주의자들을 활용해 그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정보기관인 인민보안국의 수립을 제시했고,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갖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최대한 활용해 승전을 약속했다.

그리고 셰우난과 가르디난에 대해서는 자신을 대체할 대안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들은 자신이 물러나더라도 그들끼리의 정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분열로 이어질 것임을 주장했다.

인민사회당 전당대회에서 마르쿠스 버멜론의 반박에 인민사회당 내 반대파들은 전향하거나 중립을 택하면서 반대파는 빠른 속도로 추진력을 잃었다. 그리고 마르쿠스 버멜론이 설립한 인민보안국은 인민사회당 내 반대파의 정보를 모아 그들에 대한 약점 수색, 정보 조작을 통한 누명 씌우기 등을 거쳐 셰우난과 가르디난 계파 인원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그 결과,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내에서 마르쿠스 버멜론의 반대파들은 인민보안국을 통해 정보력을 장악한 마르쿠스에 의해 서서히 기반을 잃어버렸다.

반공원조

1664년, 신년정변 이후 피안토네가 게파르토를 장악하면서 제정시절에는 중립을 지켰던 게파르토도 코르보날 내전에 부분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게파르토는 국내사정상 코르보날 내전의 불씨가 자국에 끼치는 것을 막는 것을 중점으로 물자 원조와 외교적 협의 등 소극적인 부분에 개입을 가했다.

게파르토는 코르보날 군벌들과의 협상에 나섰고, 그 중에서 게파르토와 직접 국경을 맞댄 하위할 국민국과는 게파르토-코르보날 국경문제를 비롯한 양국간 갈등 요소들을 해결하기로 했다. 게파르토는 하위할 측에 하위할에 체류중인 게파르토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들이 게파르토 국경을 넘지 않는 다는 것을 조건으로 게파르토는 하위할의 독립을 인정하며 물자와 무기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위할측 역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반격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고, 내부통제를 위해서라도 게파르토와의 협약에 동의했다.

코르보날 결의정부 역시 게파르토와 키르수스와 비슷한 내용의 협약을 받아들였다.

확화전투

마르쿠스 버멜론은 방제전투 패전으로부터 3년의 기간 동안 재정비 시간을 갖췄다. 1663년에서 1666년 까지 진행된 3년간의 재정비 기간 동안, 마르쿠스 버멜론은 방제전투의 패배 원인은 다음과 같다고 정의했다.

1.현지 정보와 내부 침투망의 효율적 활용 부재.

2.인민공화국이 가진 거대한 세력으로 인한 적대 세력의 집중.

3.군사적 부분의 자만심 및 작전교리의 미비.

4.목표 대상지에 대한 사전조사 및 준비 미비.

마르쿠스 버멜론은 3년동안 이 4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현지 정보와 내부 침투망의 효율적 활용 부재.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정보기관인 인민보안국 수립을 통한 인민공화국의 정보망 조직화/체계화 진행. 코르보날 혁명군의 개편을 통한 협력자 및 현지 사회주의 세력 통제력 확보. 더 나아가 단순한 시민봉기, 사보타주를 넘어 정보전/첩보전 지원과 특작부대로의 운용 진행.

2.인민공화국이 가진 거대한 세력으로 인한 적대 세력의 집중.

->3년동안 공격적인 원정은 자제하고, 대외적으로 호전적인 이미지의 약화 진행. 외교적 차원에서도 자국은 코르보날 결의정부의 독재에 항거해 봉기한 것이며, 반란 정부가 아님을 주장. 점령지에 대한 현지 자치권 보장 등 현지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협상 가능성을 열어둠.

3.군사적 부분의 자만심 및 작전교리의 미비.

->방제전투 패전의 책임이 있는 지휘관에 대한 숙청 및 경질 및 방제전투의 실전경험을 갖춘 장교들의 승진을 통해 현장의 경험과 사정이 군 지휘부에 반영될 수 있도록 인사개편. 방제전투 당시의 전투경험을 문서화해 하위할과 적성세력들의 무기체계 및 작전교리 분석.

4.목표 대상지에 대한 사전조사 및 준비 미비.

->인민보안국과 현지 사회주의자들을 토대로 현지 사정 파악. 인민공화국의 진공 시, 그들의 진공에 협조할 수 있는 지하조직 창설로 현지 사정을 알고 있는 협력세력 양성.

마르쿠스 버멜론은 4가지 원인에 대한 4가지 대책을 가지고 다시 3년간 침묵했다. 1663년에서 1666년 동안,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다른 세력이 먼저 자국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다른 세력을 일제히 공격하지 않았으며, 다시 한번 방어전 중심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1666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확화작전을 시작한다. 확화작전의 목표는 하위할 국민국에 대한 포위섬멸과 속전속결이며, 그 중에서도 외국 국경과 하위할 국민국을 차단해 고사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제전투 이전, 하위할 국민국이 프로슬레우, 아키드노스와 반공전선을 형성한 것을 기억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프로슬레우와 아키드노스 내부의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동시다발적인 봉기, 파업, 사보타주를 단행했다. 그리고 공세를 시작할 준비를 드러내면서, 프로슬레우와 아키드노스가 자신들을 공격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었다. 실제로 프로슬레우와 아키드노스는 사회주의자들의 소요 진압에 군 병력을 집중시켜 가용병력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공세를 시작한 곳은 하위할이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가담한 하위할 인민국 측으로부터 하위할 현지환경과 내부 사정을 파악한 인민공화국은 하위할의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포위하는 기동전을 전개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공련으로부터 제공받은 전차, 장갑차, 트럭, 항공기, 자주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작전교리 측면에서도 공련식 기동전을 진행했다. 공련도 자국의 무기체계&작전교리를 실전에 적용할 기회로 여겼기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병력 규모와 기계화장비가 열세였던 하위할은 코르보날의 국경포위기동에 무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위할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기동전에 측후면 타격과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하위할 내부의 사회주의자 봉기와 지하조직을 통한 무장으로 인민공화국의 기동을 막을 시간을 놓쳤다. 정보전에서도 내부 사회주의자와 인민국 출신들의 도움을 받은 인민공화국이 우위였으며, 봉기 세력의 지역 점거로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확화작전의 1차 목표는 코르보날 내부 세력과의 차단, 2차 목표는 외부 세력과의 차단이었다. 이는 각각 1666년~1668년, 1668년~167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확화작전을 진행하면서 변수와 방해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압도적인 전력 우위와 기동성의 우위를 적극 활용했다. 전략목표 달성 후에는 욕심 부리지 않고 내실 다지기와 기반 확보에 전념하면서 점령을 공고히했고, 다시 시기가 올 때 새로운 전략목표에 따라 기동전을 반복했다.

코르보날 내전에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이 확화작전이 계기가 되었다. 확화작전의 결과로 하위할을 포위하고, 아키드노스와 프로슬레우를 위협하면서 내전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PA협약은 소극적인 방어 위주로 전환하게 되었다.

결의정부의 진압작전

한편, 결의정부는 코르보날 내전의 주요 세력들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집중하는 틈을 타, 세력 정비와 전력 강화에 몰두했다. 동시에 후환을 제거하고, 후방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사넨 연방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사넨 연방은 수도 리겔이 함락당하고, 정규군이 궤멸당한 상황에서도 게릴라전과 시민불복종, 사보타주를 비롯한 비정규전 위주의 저항에 나서면서 결의정부의 오사넨 진압은 차질을 빚게 된다. 오사넨 연방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리겔을 비롯한 주요 거점을 장악한 결의정부군을 끊임없이 공격했으며, 점령지 내부에서도 결의정부군에 대한 저항 활동으로 인해 오사넨 지역 지배력은 의심받고 있었다.

오사넨 진압 과정에서 결의정부가 축적한 전력이 소모될 위험에 처하자, 결의정부는 오사넨에 대한 노선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오사넨 연방으로의 더 이상의 진압은 자중하는 대신,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노선을 선회한 것이다. 코르보날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변형시켜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현지 협력자와 부역자를 토대로 오사넨 인들의 분열을 조장하고,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대한 '적색 공포'를 조장해 결의정부가 무너진 뒤의 인민공화국은 결의정부보다 최악의 사태가 될 것이라 선전했다.

한편, 결의정부는 1666년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확화작전을 실시하면서, 내전 세력들의 시선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집중된 것에 주목했다.

확화작전의 여파로 하위할 국민국에 대한 포위섬멸이 이루어져 하위할 국민국이 타 지역과 격리되었다. 아키드노스와 프로슬레우 역시 하위할 지역에 투입된 병력이 포위당함에따라, 상대적으로 본토의 방비가 약해졌다. 결의정부는 확화작전이 진행중인 1668년에 서진에 나섰다. 결의정부의 목표는 공업화된 프로슬레우였고, 키르수스와 게파르토의 지원을 토대로 강화된 전력을 프로슬레우 타격에 투입했다.

그동안 수세적으로 나섰던 결의정부에 대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약했던 프로슬레우는 결의정부의 서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프로슬레우는 영토의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의정부의 발목을 잡고 소모를 높여 진격을 최대한 돈좌시키는 것을 전략을 채택했다. 프로슬레우는 자국의 공업 역량을 토대로 민병대를 무장시키고, 정규군을 기계화시켜 결의정부에 대응했다.

1668년, 결의정부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적화위협으로부터 프로슬레우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프로슬레우의 수도 라그를 타격했다. 프로슬레우는 미리 수도를 아스트라벨로 옮긴 다음, 결의정부의 주력이 라그 시내로 진입했을 때 기동부대로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 결의정부 병력을 역포위한다. 결의정부는 이 역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예비대를 배치하면서 공방전이 벌어졌다. 프로슬레우는 결의정부의 예비대를 요격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했으나, 포위망이 느슨해지는 바람에 결의정부는 병력을 재배치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라그에 대한 포위가 풀리면서 결의정부는 라그 시를 장악하게 된다.

그 후 2년동안 결의정부와 프로슬레우는 기계화부대에 의한 기동전과 시가전을 통한 공방전을 병행하게 된다.

폭풍전야(1670년 ~ 1672년)

백아작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1668년부터 2년 동안 하위할 국민국을 게파르토를 비롯한 비 코르보날 국가들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공화국 연맹으로부터 도입된 무기체계, 작전교리를 바탕으로 기동전을 감행해 포위망을 형성했다. 포위망 형성이 끝난 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점령지에 코르보날 혁명군을 치안유지와 내부 저항 세력 제거 등을 목적으로 배치헀다. 동시에 현지 사회주의자들과 미리 포섭해둔 지하조직과 협력자들을 통해 통치 기반을 마련하고, 자국에 합류한 하위할 인민국에 세부적인 내정을 맡겼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하위할의 게릴라전과 그 역량을 체감했다. 하위할을 타국으로부터 고립시킨 뒤, 국민국 점령지인 내륙으로 섬멸전을 진행하면 그들의 게릴라전으로 인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하위할 국민국 역시 인민공화국이 내륙으로 진공 시 인민공화국에 최대한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강요하고, 정부 인사와 군 생존 병력은 지하 조직화해 저항하는 계획을 수립한 바 있었다.

마르쿠스 버멜론은 하위할 국민국의 모든 식량, 물자, 장비 공급을 차단하고, 보급역량을 궤멸시켜 하위할을 아사시키기로 결정했다.

1670년, 마르쿠스 버멜론은 하위할 국민국의 완전한 항복, 혹은 유격전 역량의 완전한 사멸이 확인될 때 까지 하위할 국민국으로의 모든 교통/통신을 차단했다. 하위할 국민국으로 향하는 인민공화국 점령지 구간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었고, 인민보안국 요원과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코르보날 혁명군이 비공식 불신검문을 맡았다. 인민공화국은 하위할의 자급능력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공습을 통한 산업시설 폭격과 농경지에 대한 소이탄/화학탄 투하, 세균 및 병원체, 감염성 질병 확산을 통한 의약품 수요 확대, 농업&공업시설에서의 사보타주와 사회주의자들을 통한 반정부 봉기, 파업 유도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위할의 역량을 마비시켰다. 하위할 국민국은 인민공화국에 의해 완전히 봉쇄당한 채, 자급역량도 파괴당하며 얼마 남지 않은 물자조차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도난당하기에 이르렀다.

급격히 악화되는 식량사정은 하위할 국민국 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입지가 커졌다.

하위할 국민국의 국가원수 로넨하이만 대원수는 모든 식량과 자원의 통제를 정부와 군이 독점, 감시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회주의를 비롯한 '불온사상'에 대해 무차별적인 색출과 체포, 사형 선고로 대응했다. 최대한 많은 양의 식량/자원을 확보, 보존하거나 게릴라전으로 인민공화국을 급습해 약탈하기도 했으며, 인민공화국의 고사작전에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넨하이만 대원수도 이러한 수단은 미봉책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포위망이 뚫려야 함을 인지했다.

코르보날 전투(1670년 8월 9일~1670년 12월 2일)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결의정부가 최초로 교전을 벌인 것은 1670년 8월 9일이었다. 하위할 국민국에 대한 포위망을 유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로넨하이만 대원수는 결의정부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라는 공적에 공동대응할 것을 밀약으로 제의했다. 인민공화국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결의정부에 협력하는 대신 결의정부로부터 활로를 얻게 된 것이다.

결의정부는 프로슬레우와의 공방전에 집중하느라 인민공화국 점령지에 대해선 크게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공화국도 그 점을 알고 제 2선인 혁명군을 위주로 배치했으며, 제 1선 병력이자 정규군인 코르보날 인민군은 대응방어를 위한 소수의 기동부대 위주로 배치했다.

1670년대 이후, 결의정부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위협이 가시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프로슬레우와도 인민공화국과의 충돌에 대해서는 상호간 묵인&협조를 꾀하는 반공 밀약을 제의했다. 프로슬레우는 결의정부와 교전중이었으나, 인민공화국과의 양면전선도 우려되었기에 이를 받아들인다. PA협약의 가맹국인 아키드노스 대공국 역시 프로슬레우와 비슷한 조건의 밀약을 승낙하면서 결의정부는 인민공화국 공격을 위한 외교적 밑작업을 끝마쳤다.

인민공화국 역시 정보기관인 인민보안국과 현지 사회주의자들을 통해 이를 눈치채고 대응에 나섰다. 인민공화국은 자신들의 숫적 우위를 이용해 프로슬레우, 아키드노스 등 주요 접경국과의 전선에 공세를 보내 병력의 발을 묶는 등 양동작전을 감행했다. 그리고 주요 정예병력과 기동병력을 결의정부의 공세에 대응수단으로써 배치한다. 1671년 8월 9일, 결의정부군은 하위할 국민국과 미리 공조된대로 결의정부 점령하의 프로슬레우 북부에서 대 하위할 포위망의 동남부를 타격했다.

당시 대 하위할 포위망을 수비하던 병력은 코르보날 혁명군 위주였고, 인민군 정예부대가 기동방어로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결의정부군은 주요 병력 대부분을 집중시킨 대공세를 펼쳤고, 코르보날 인민군은 숫적 열세에 몰려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갑작스러운 공세에 병력을 물리고, 예비대를 통해 다시 재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주요 병력 대부분이 아키드노스와 프로슬레우의 개입 차단을 위한 양동작전에 투입되어 가용병력이 충분치 않았다. 결의정부의 도움으로 포위망 동남부를 푸는데 성공한 하위할은 해당 점령지에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학살, 보복을 감행해 해당 지역의 인민공화국의 기반을 말살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전략 목표를 포위망을 다시 닫는 것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열어두고 이를 역이용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인민공화국의 반격작전은 하위할의 대외통로를 최대한 좁히는 것에 맞춰졌고, 결의정부 역시 하위할의 봉쇄를 푸는 것이 목표였기에 핵심 지역만을 남겨두고 후퇴했다.

반공연합전선

1670년 8월 9일부터 1670년 12월 2일까지 이어진 3개월 간의 공방전을 계기로, 비 사회주의권 세력들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대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내전이 발발한 이래 결의정부와 분리독립 세력들은 '반공'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게 되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인민공화국에 대한 대항을 위해 내전 이전처럼 단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결의정부는 반공을 이용해 내전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코르보날 재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따라서 결의정부는 자신과 인민공화국에 대한 밀약을 맺은 국가들을 대상으로 반공연합전선을 제의했다. 프로슬레우, 아키드노스, 하위할이 동의했으며 엔베르 왕국과 아인츠블뤼겐도 지지의사를 밝혔다.

1671년 1월 12일,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결의정부와 협력의사를 밝힌 프로슬레우, 아키드노스, 하위할, 엔베르, 아인츠블뤼겐 측 대표를 코르보날 수도 오덴그라츠에 초청했다. 슬로딘은 결의정부 주도하에, 결의정부가 다른 코르보날 민족국가들을 '영도'하여 '반공'이라는 국시를 내세워 코르보날 재통합의 기반을 마련하는 '반공연합전선'의 발족을 선언했다.

반공연합전선의 발족과 함께, 코르보날 내전의 구도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결의정부&비 사회주의 세력의 연합으로 변모했다. 독립을 꾀하는 세력들에게조차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위협적이었다. 더군다나 공련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인민공화국 특성상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의한 통일은 공련의 괴뢰국으로서 전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녹색계획

1671년, 슬로딘 파우수트시스키는 코르보날 결의정부가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에 위협에 처했으며, 그로부터 자국과 각 민족의 자결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병력 파견 및 지원을 외교적으로 요청했다. 가장 먼저 슬로딘이 향한 곳은 게파르토와 키르수스였고, 만일 코르보날 사회주의자들이 국경을 넘어 키르수스/게파르토에 대한 직접적 위해를 가하거나 결의정부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개입할 것을 약속받았다.

게파르토와 키르수스, 베른하이어, 바탈루냐를 비롯한 코르보날 인접국들 역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재통일을 우려했고, 가능한 빨리 내전에 개입해 인민공화국을 붕괴시킬 명분이 필요했다. 따라서 코르보날의 정식 정부인 결의정부의 요청을 받아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명분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군사개입을 진행하려 했다.

만약 타국이 코르보날 내전에 개입, 특히 인민공화국의 제거를 위해 적극적으로 군사개입에 나선다면 공화국 연맹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사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러나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의 내전 승리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각국은 그 가능성을 우선순위에 배제하기로 결정한다.

주요세력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연합국 문서 참조.

코르보날 결의정부는 코르보날의 정식 정부이자 정부군인 코르보날 국방군을 전력으로 두고있다. 그러나 자치군의 경우 대부분 각 자치령의 봉기에 합세하면서 반군화되었기에, 코르보날 결의정부 산하 국방군은 연합 결의당과 군부 세력이 장악한 중앙군에 기반한다.

코르보날 국방군은 중앙군 위주로 개편되면서 높은 정예도와 숙련도를 바탕으로 다른 세력보다 질적우위를 점유했다. 하지만 해군력인 국방함대 대부분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합세하고, 공군인 국방항공대는 각 자치령에 배치된 비행단이 자치령의 봉기와 함께 소멸되거나 전향하면서 수도권인 중앙령에 배치된 일부 전력만 살아남았다.

현재 코르보날 국방군은 키르수스, 게파르토 등으로부터 무기체계를 재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교단의 훈련 역시 키르수스에서 이수중이며, 전차와 항공기 같은 중화기는 키르수스제로 교체중이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자세한 내용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오사넨 연방(Othanen Federation)

오사넨 연방 문서 참조.

오사넨 연방
파일:오사넨 연방.png
국기
지도
수도 리겔
최대도시 토르네
지도자 달리아나 오세다 연방총의장
인문환경 공용어 오사넨어
인종구성 오사넨인
정치 수장 연방총장
수반 행정수상
체제 및 이념 민족주의, 공화주의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통화 오사네딧
군사 군대 오사넨 방위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우방 없음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오사넨 연방은 1658년 7월 4일 봉기 직후 오사넨 자치령에서 분리독립한 국가다. 범 오사넨주의에 따라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으나, 해외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재 결의정부에 의해 포위되었다.

프로슬레우 공화국(Prausleau Republic)

프로슬레우 공화국
파일:프로슬레우 공화국.png
국기
지도
수도 라그(결의정부에 점령됨)

임시수도:아스트라벨

최대도시 오덴그라츠(결의정부에 점령)
지도자 가리크 고트벨 대통령
인문환경 공용어 프로슬레우어
인종구성 프로슬레우인, 비슈네츠인
정치 수장 공화국 대통령
수반 공화국 총리
체제 및 이념 민주주의, 다당제공화정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경공업, 중공업 등 2차산업, 철도산업.
통화 프로슬레우 겔린
군사 군대 프로슬레우 공화국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우방 아키드노스 대공국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봉기를 기점으로 프로슈 자치령이 독립한 국가다.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발전된 산업능력을 활용해 빠른 속도로 자치군을 무장시켰으며, 이를 통해 결의정부의 국방군이 프로슈 이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했다. 공련 지원하에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인민공화국은 프로슬레우에 합류 제의를 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부정적이었던 프로슬레우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합류에 거절함에따라 프로슬레우는 양면전선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프로슬레우 공화국 북부는 각각 인민공화국과 결의정부에 의해 빼앗기면서 남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1670년대의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매우 절망적이다. 코르보날 결의정부에 의해 수도 라그가 함락당했으며, 그 여파로 라그를 중심으로 연결된 철도망과 라그 시 내외의 공업지대가 결의정부에 넘어갔다. 현재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아키드노스 대공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한 채 남부에서 최후의 저항을 진행중이다.

프로슬레우 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에 기반한 민주 공화정을 채택했다. 코르보날 내전에서 몇 안되는 민주주의 국가로써 아키드노스 대공국을 통해 프리슬란드 등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로부터 무기와 물자, 장비를 수입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제조업과 광업을 비롯한 공업이 발전해 이를 토대로 내전에 필요한 무기체계들을 생산/충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필요한 인력과 식량 생산이 소모량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부족한 인력과 식량은 아키드노스 대공국에서 빌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위할 국민국(National State of Hawihall)

하위할 국민국
파일:하위할.png
국기
지도
수도 미오킨
최대도시 시모
지도자 로넨하이만 대원수
인문환경 공용어 하위할어
인종구성 하위할인, 게파르토인, 비슈네츠인
정치 수장 대원수
수반 최고장관
체제 및 이념 일당제, 공화정, 국가주의, 민족주의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광업 및 임업, 천연자원 가공
통화 시클
군사 군대 하위할 국민군
외교 대외성향 폐쇄적, 반공성향
우방 코르보날 결의정부, 키르수스, 게파르토, 에세르
적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하위할 국민국은 봉기를 기점으로 하위할 자치령에서 수립된 민족주의 성향의 공화국이다. 그러나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형성됨과 동시에, 하위할은 국민국과 인민국으로 나뉘었고, 주요 공업지대와 국경지대를 장악한 인민국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합류함에따라 인민공화국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현재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인민공화국의 포위공세에 저항하고 있으며, 키르수스나 게파르토를 비롯한 타국에도 여러차례 지원요청을 타전했다. 인민공화국에 의해 시달렸던 탓인지, 코르보날 내전의 주요 세력중 유일하게 결의정부에 협조적이었다.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은 1660년대에 하위할 국민국에 대한 대외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하위할 국민국의 후방 국경지대를 기동타격하는 광범위한 포위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국경도시 텔그라스를 포함한 게파르토와의 국경지대를 상실했다. 1670년대 들어서, 하위할 국민국은 로넨하이만 대원수의 지휘 아래 구축한 로넨하이만 라인을 최종방어선으로 결성, 코르보날 인민공화국과 교전중이다.

결의정부에 협조적인 점과 반공 민족주의 성향이라는 점, 그리고 해외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원한다는 점은 훗날 게파르토와 키르수스가 코르보날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위할 국민국의 정치체제는 일당제 권위주의 군사정권으로, 하위할계 코르보날 군 지휘관이었던 로넨하이만이 국가원수이자 국민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다. 전시상황이라는 명목으로 군부인 국민군이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자원/인력/행정의 효율적 분배라는 명목으로 민간 관료를 대상으로도 군부가 영향력을 발휘한다. 로넨하이만 대원수는 결의정변 이후, 하위할 국경을 요새화해 동시다발적 봉기에 대비한 이래, 여러 겹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위할 국민군은 무기체계 면에서 매우 열세에 놓였다. 사방이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포위당한 탓에 노획한 정부군 무기나 인민공화국 무기를 사용하거나, 그들의 무기를 역설계해 자체생산한 것이 대부분이다. 해외로부터도 차단되어 키르수스를 비롯한 타국의 원조도 불가능한 탓에 소모율이 생산율보다 높아 하위할 국민군은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직면했다. 하위할 국민군의 작전교리는 적은 병력/장비로 최대한 많은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게릴라전과 지연전이 주축이다.

요새화와 장애물 설치, 사보타주를 통해 적의 진격로를 제한시켜 병목현상을 일으킨 다음, 해당 구간에 집중된 적을 저격수와 게릴라전, 기후를 활용한 전술로 공격하면서 적의 공세역량을 제거한다.

아키드노스 대공국(Great Principality of Akidnos)

아키드노스 대공국
국기
지도
수도 마슈클리트(인민공화국에 점령됨)

임시수도:아쇼프(임시수도)

최대도시 페슈탄츠
지도자 카르네우스 바슈페롤링거 대공
인문환경 공용어 아키드노스어
인종구성 아키드노스인, 프로슬레우인, 비슈네츠인
정치 수장 대공
수반 수상
체제 및 이념 입헌군주제, 권위주의, 귀족정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농업
통화 레후
군사 군대 아키드노스 대공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우방 프로슬레우 공화국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아키드노스 자치령의 세력가였던 바슈페롤링거 대공이 봉기를 기점으로 아키드노스 민족의 독립국 건설을 선언하며 자치령의 방위군과 행정역량을 흡수하며 건국했다.

바슈페롤링거 가문은 아키드노스의 명망있는 세력가로써, 봉기 이전부터 지역 유지였던 귀족들과 방위군 인사들, 아키드노스 현지 자본가와 행정관료를 인맥과 혈연으로 장악한 상태였다. 카르네수으 바슈페롤링거 대공은 가문의 인맥을 활용해 빠른 세력규합과 안정화가 가능했다. 아키드노스 자치령은 코르보날의 다른 지역보다 공업력이 뒤떨어졌다. 그 대신 해안을 통한 대외교역망과 풍부한 인구를 바탕으로 프로슬레우 공화국과 연합전선을 결성했다. 그러나 수도를 비롯한 서부 해안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빼앗기면서, 농촌인 동부 내륙을 중심으로 저항하고 있다. 부족한 공업력은 프로슬레우 공화국으로부터 공급받으며, 아키드노스는 농촌의 식량과 인력을 공급하는 공생관계를 구축했다.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프로슬레우 공화국과는 우호관계, 다른 세력들과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적으로는 코르보날 결의정부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있다. 코르보날에 복속되기 이전 왕국이었던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분리독립 여론이 가장 강한 곳이었고, 바슈페롤링거 가문이 구심점으로써 활동하고 있다.

아키드노스 대공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카르네우스 바슈페롤링거 대공을 비롯한 바슈페롤링거 대공가는 아키드노스를 단결시키는 구심점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하며, 주요 국정은 귀족원/서민원 양원제로 구성된 대공국 의회가 주도한다. 대공국 의회는 법안/정책의 발언권은 서민원에 있으나, 최종 결정권은 귀족원에 있기에 실질적으로 귀족정에 가깝다.

아인츠블뤼겐 자유국(Einzblügen Free State)

아인츠블뤼겐 자유국
국기
지도
수도 베인부르크
최대도시 되네비어
지도자 에른스트 레너베허 총의장
인문환경 공용어 키르수스어
인종구성 아인츠블뤼겐인, 키르수스인
정치 수장 자유국 총의장
수반 자유국 수상
체제 및 이념 의원내각제, 공화주의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경공업/중공업, 상업 및 금융업
통화 아인츠블뤼허마르크, 폴리거마르크
군사 군대 아인츠블뤼겐 국방군
외교 대외성향 친 키르수스
우방 키르수스
적대 코르보날 결의정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은 봉기 직후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이 키르수스의 도움을 받아 독립했다. 내전이 진행되면서, 키르수스가 아인츠블뤼겐의 보호를 명목으로 아인츠블뤼겐 자치주의 일부를 점거, 아인츠블뤼겐 보호국을 수립하고 아인츠블뤼겐에도 키르수스 병력이 주둔중이다.

다른 구성국들과 달리, 아인츠블뤼겐 자유국은 친 키르수스 성향과 키르수스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해 내전에는 소극적이다. 비록 아인츠블뤼겐 자치국의 실효지배를 통해 주권을 인정받고 있으나, 키르수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코르보날 결의정부 역시 키르수스의 지원이 필요했던 만큼, 아인츠블뤼겐에 대해서는 유화적이다.

아인츠블뤼겐의 정치체제는 의원내각제로, 수상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아인츠블뤼겐의 여당은 내전이 시작된 이래 국민자유당이며, 국민자유당은 키르수스의 개입을 받아들여 자국에 대한 키르수스의 보호와 키르수스의 원조를 통한 경제력/군사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아인츠블뤼겐은 내전에서 '폭풍의 눈'으로 불리며 정치적으로도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다.

아인츠블뤼겐 보호령

아인츠블뤼겐 보호령은 키르수스가 아인츠블뤼겐의 일부 지역을 점령해 수립한 괴뢰국이다.

엔베르 왕국(Kingdom of Enver)

엔베르 왕국
국기
지도
수도 호르난(인민공화국에 점령)

임시수도:켄네인

최대도시 델로인(인민공화국에 점령)
지도자 국왕 지그 1세
인문환경 공용어 엔베르어
인종구성 엔베르인
정치 수장 국왕
수반 수상
체제 및 이념 전제군주제
경제 경제제도 국가자본주의
주요산업 농업
통화 라나
군사 군대 왕립 엔베르군
외교 대외성향 중립, 고립주의, 반동주의
우방 키르수스
적대 코르보날 인민공화국

봉기 과정에서 독립한 엔베르 공화국이 지그 1세의 쿠데타로 인해 왕정으로 바뀌면서 왕당파와 공화파로 분열되었다. 주요 공업지대와 항구가 밀집한 남부를 장악한 공화파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합류했으며, 북부 왕당파는 키르수스의 지원 아래 타리나 강을 경계 삼아 저항하고 있다. 민심 대부분이 공화파에 돌아서면서, 지그 1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소수의 주민들과 북부 지역 유지들, 그리고 키르수스를 권력기반삼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보다는 인민공화국의 공세 방어와 자기 세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코르보날 결의정부와는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만큼 지그 1세의 통치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결의정부와는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는 탓에 중립적인 관계다.

엔베르 왕국은 전제군주제로, 의회가 존재하지만 국왕의 결정을 집행/이행하거나 국왕에게 주요 안건/의제를 정리해 보고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형식적으로 국왕의 정책은 의회의 찬반투표로 진행되나, 국왕이 내린 대부분의 결정은 의회에서 찬성투표를 얻고 통과된다. 엔베르 왕국은 상공업면에서 매우 낙후되었다. 그나마 있던 엔베르 자치국의 산업시설과 상업 인프라도 대부분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이 점령했으며, 베른하이어와의 국경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군사적으로 엔베르 방위군의 군부 대부분이 왕당파를 지지하면서, 자체 군사력은 뛰어나다. 그러나 무기체계 면에서 코르보날 인민공화국에 비해 뒤떨어지며, 베른하이어를 거쳐 공급되는 원조물자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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