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안주 대학살

DOOSAN247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5월 26일 (월) 19:13 판 (→‎전체자유당의 집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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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아버지, 저에게 야구를 알려주시고 도와주시던 그 순수한 모습은 전부 다 거짓이었나요?
인별인민민주공화국 붕괴 후, 대학살을 알게 된 이상진이 이준설에게 쓴 편지

1952년 4월에 인별국 금안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량 학살로, 이준설이 이끄는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정부와 전체자유당의 주도로 진행된 학살이다.

인별국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 중 하나로 여겨지며 '새로운 사상의 실패' 와 '반란의 실패' 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다만 이 대학살이 발화점이 되어 4.28 민주화운동이라는 대규모 항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있다.

금안주 대학살 이라는 이름은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치하에서는 금안주 발전 사업 또는 금안주 반동철폐 사업으로 미화되어 불렸으나, 이준설 하야 후 제2공화국 최윤주 정부의 출범 이후 붙여졌다. 최윤주를 포함한 수많은 인별국의 정치인들, 특히 금안주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주당계 정치인들 이 1952년 4월 대학살로 인해 사망하거나 가족과 지인들을 잃었다.

오늘날 인별국은 이 사건이 발화점이 되어 일어난 4.2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4.28 희생자와 유공자들과 함께 금안주 대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으며, 2024년 이준설 특별법의 통과로 이 사건을 미화ㆍ부정ㆍ왜곡ㆍ폄하ㆍ비하하는 행위는 이준설 찬양으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는다.

배경

3.22 군사쿠데타

1952년, 제 3대 대통령으로 오영환이 취임하며 오영환 정부가 출범했다. 오영환 대통령은 이전 대통령들이 만들어놓은 토대를 잘 이용해 인별국의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목표로 많은 정책을 시행했다. 대표적으로 총기금지령 등이 있었다. 총기금지령은 인별 사회주의파와 반정부세력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오영환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 대부분 비현실적인 정책이었고, 특히 총기금지령은 많은 비난을 받았고, 총기소유자들은 강제로 총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정책에 크게 반발해 인별국총기국민대연합을 결성해 시위를 벌였다. 오영환 정부는 총기련을 불법단체로 규정해 진압을 시도하며 국민들에게 더욱 분노를 사게 되었다.

대용자유군 역시 오영환 정부 때 낮은 대우를 받으며, 대용자유군 장병들에게 큰 분노를 샀고, 당시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 총사령관이었던 이준설도 이에 크게 분노했다. 이준설은 3월 20일 오영환 대통령 규탄시위에서 "오영환 정부의 정책은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있으며 조국을 망국으로 만들고 있다." 라고 연설하며 시위에 참여했다.

오영환 정부의 민심 하락과 부정부패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이준설을 중심으로 오영환 정부에 반감을 품은 대용자유군 대용경계수비대의 일부 장병들과 3월 21일 밤 비밀회의를 가졌고, 3월 22일 00시 인양특별시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오영환 정부는 반란으로 규정해 뒤늦게 진압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오영환은 실각하며 이준설과 그 장병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왜 금안주일까?

1952년 4월, 금안주는 지옥이었다.
금안주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대학살이 주로 금안주에서 자행되었는데, 금안주가 오영환의 소속 정당이자 오영환 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 (인별국)의 주요 지지층이 모여있고, 강세였던 지역이었다. 오영환이 축출 된 직후까진 이준설이 공산 사회주의파의 숙청을 진행하고 있던 터라 대학살이 진행되진 않았었다.[1]

그러나 1952년 3월 30일 오영환의 사형이 집행된 이후 친오계의 반발을 우려하게 되면서 금안주 지역의 대숙청이 감행되게 되었다.

전체자유당의 집단 학살

"더러운 오영환계와 공산 사회주의계는 인별국의 혼란을 주도한 국가내란세력으로 이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시위나 폭동에 대해선 유혈진압으로도 답 할 수 있다."
1952년 4월 10일, 정식 인별인민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오영환의 사형이 집행될 당시 인별인민민주공화국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큰 반발을 했으나, 강력하게 진압되었다. 대학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오영환의 사형이 집행된 3월 30일, 금안주 여러 곳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모든 시위는 군대로 인해 진압되었고, 정부는 결국 이를 방지하고자 1952년 4월 1일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를 조직해 금안주의 모든 도시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금안주 주요 도시 거주자 강제 이주

강제 노동과 착취

죽어가는 시민들에 대한 방관

반지성주의에 의한 대량 학살

학살 당시 사용된 방법

인별국 금안주인민통제부인별국 공산파ㆍ친민주당파처벌위원회

학살 주범들의 모순

금안주의 소년 세뇌 및 노동자ㆍ친위대 양성

공산주의ㆍ민주당계 처벌

금안주 대량 매장지와 전국토의 매장지화


후술할 이상진ㆍ이호상 형제의 폭로 과정에서 공개된 매장지 지도.

대학살 후,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이 자행됬으나, 그 중 대량으로 암매장해 처리하는 방법이 가장 많이 이용됬다. 대학살이 시작된 직후에는 금안주의 산악지대에 주로 매장하다, 부지가 줄어들자 금안주 외곽지역을 부지로 사용하다 이마저도 부족해지자 시체들을 외부 도시로도 보내 매장하게 되었다. 외부 도시로 보내는 과정에서 정부는 매장사실을 감추고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지역으로 나눠 매장했다.

지도의 공개 이후, 인별국 각지에선 매장지 발굴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특히 지도에는 거의 100%가 전부 매장지로 표시되있는 금안주의 모든 도시들이 합동 발굴을 진행했다.

학살 이후

4.28 민주화운동

잊혀진 대학살

인민공화국 청산 위원회

민주당계의 대학살 폭로와 진상규명 요구

이상진이호상 형제의 대학살 폭로

한기택 정부의 과거사 바로 잡기 정책

학살 규모

관련 법률

이준설 정부 및 전체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미화 밑 찬양 등에 관한 특별법

여담

대중매체에서

참고

각주

  1. 다만 이 때 이기태 전 대통령의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하다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