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우휠 12편: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3번째 줄: 13번째 줄:
'''<big>호소니 교도소</big><br>'''
'''<big>호소니 교도소</big><br>'''


이곳은 [[라이프니츠]]에선 처리하기 어려운 대상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외국인과 같은 사람들을 해외로 추방하는 국외 교도소였다. 그들을 죽이지 않고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감옥 말이다. 이곳에 머무르면 결국 지지자들로부터는 잊혀지고, 자신은 독방에 갇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심연의 옥쇄였다.  
얼핏보면, 큰 호수 가운데 떠있는 아름다운 섬처럼 보이지만 그곳은 정치범 수용소였다.
 
이곳은 [[라이프니츠]]에선 처리하기 어려운 대상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외국인과 같은 사람들을 해외로 추방하는 국외 교도소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이지 않고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감옥 말이다. 이곳에 머무르면 결국 지지자들로부터는 잊혀지고, 자신은 독방에 갇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심연의 옥쇄였다.  


그렇기에 호소니 감옥은, "고독"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렇기에 호소니 감옥은, "고독"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작은 선박을 타고서 큰 호수를 건넌 반델과 아렌은 마침내 감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고, 부둣가에 마련된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감옥에 도착한다.


"천개의 창으로서, 야전 사령관께서 이런 교도소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천개의 창으로서, 야전 사령관께서 이런 교도소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23번째 줄: 25번째 줄:
"한개의 눈을 위해, 심문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한개의 눈을 위해, 심문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교도소장은 맥락도 없이 전선의 사령관이 방문한다고 하자 발벗고 아렌을 맞이한다. 그곳은 주변에 해자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큰 호수 사이에 띄워진 작은 섬이었기 때문에 교도소의 협조 없이는 방문조차도 어려운 지형이었다.
교도소장은 맥락도 없이 전선의 사령관이 방문한다고 하자 발벗고 아렌을 맞이했다.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조국을 위한 일이니"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조국을 위한 일이니"
35번째 줄: 37번째 줄:
접수원이 아렌의 말을 듣고 서류를 확인하다가, 몇 장 지나지 않아 금세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접수원이 아렌의 말을 듣고 서류를 확인하다가, 몇 장 지나지 않아 금세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말씀하신 죄수는 이송되지 않았습니다. 그.. 독극물로 자해해서, 현재는 사망 상태입니다."
"말씀하신 죄수는 이송되지 않았습니다. 그.. 현재는 사망 상태입니다. 자살이라고 나옵니다."


아렌은 귀를 의심했다.
아렌은 귀를 의심했다.
49번째 줄: 51번째 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몇분 후 아렌은 서류를 건내받았고, 곧 건물에 남는 공간인 면회실에 앉아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몇분 후 아렌은 서류를 건내받았고, 반델과 함께 텅 빈 면회실에 앉아 그 서류들을 살펴본다.


면회실은 굉장히 칙칙한 작은 방이었다. 비공정 상륙장에 있던 건물들이 내부로 엔티크한 목재가 제법 많았던 반면에, 이 강철 감옥은 죄다 쇠로 된 물건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장소도 아니었으므로, 정말 고요하고 적적했다.
면회실은 굉장히 칙칙한 작은 방이었다. 비공정 상륙장에 있던 건물들이 내부로 엔티크한 목재가 제법 많았던 반면에, 이 강철 감옥은 죄다 쇠로 된 물건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장소도 아니었으므로, 정말 고요하고 적적했다. 심지어는 저 하늘조차도 눅눅해보인다.
 
아렌의 건너편에 앉은 반델은 어딘가 불편한 낌새를 하고 있다.


"중장님. 이제 2시간 뒤면 작전 지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중장님. 이제 2시간 뒤면 작전 지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61번째 줄: 65번째 줄:
"...예"
"...예"


반델은 곧이곧대로 아렌에게 멀찍이 떨어졌다.
반델은 곧이곧대로 아렌에게 멀찍이 떨어졌다. 아렌은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다, 건조하게 마른 입을 열었다.


"소령, 잠시 시간이 나서 묻겠는데."
"소령, 잠시 시간이 나서 묻겠는데."
67번째 줄: 71번째 줄:
"말씀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근위대장이 그렇게 된 일에 대해서,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나?"
"근위대장이 그렇게 된 일에 대해서,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왜 말씀하시지 않나 했습니다."
"음. 왜 말씀하시지 않나 했습니다."


반델은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웬일인지 아렌의 건너편에 앉아서는 모자를 벗었다.
반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을 찡그리고는, 늘 서있던 평소와는 달리 아렌의 건너편에 앉아서는 모자를 벗었다.


"솔직히 이야기해도 될까?"
"솔직히 이야기해도 될까?"
77번째 줄: 81번째 줄:
"예."
"예."


"근위대장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러니까.. 나에게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굉장히 분했어."
"근위대장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러니까.. 나에게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아렌은 서류를 읽던 시선을 옮겨 반델을 반듯이 바라본다.
아렌은 서류를 읽던 시선을 옮겨 반델을 반듯이 바라본다.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굉장히 무례했으니까.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어. 사실이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귀관에게 이런 얘기를 계속 해서, 귀찮게 만드는 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귀관에게 이런 얘기를 계속 해서, 귀찮게 만드는 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85번째 줄: 93번째 줄: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지. 난 고작 참모장이었고, 총통이 자기 마음대로 앉혀놓았으니까.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반델 네가.. 아무런 감흥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제일..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내가 고작 소령을 본지 많아야 일주일이고, 우리가.. 그렇게 많이 친한 사이는 아니겠지만.. 그래. 소령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럴 수 있지. 난 총통이 자기 마음대로 앉혀놓았으니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근위대가 민간인을 학살할 이유는 안되지. 그 날, 소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군. 뭐라고 말을 하라는 것도 기대했다는 말도 아니야. 그냥, 뭐라고 할지. 내가 소령을 본지 많아봐야 일주일이고, 우리가.. 그렇게 막 전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
 
"소령도 그렇게 생각하나?"


"..."
"..."
93번째 줄: 103번째 줄:
반델은 하루 전, 근위대대가 이 작전에서 후방으로의 임무가 확정되었을 때, 언젠가 이 질문이 자신에게 맞딱드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반델은 하루 전, 근위대대가 이 작전에서 후방으로의 임무가 확정되었을 때, 언젠가 이 질문이 자신에게 맞딱드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웃기겠지만, 소령도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 그냥.. 내 하소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그럼.. 내 하소연일 뿐이지. 현실을 모르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아렌은 굉장히 불안한 눈초리였다. 이곳에 온 이후로 반델이 보기에도 가장 불안한 상태였다.
아렌은 굉장히 불안한 눈초리였다. 이곳에 온 이후로 반델이 보기에도 가장 불안한 상태였다.
101번째 줄: 111번째 줄:
반델도 아렌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반델도 아렌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근위대로서 자긍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당연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전날 밤, 근위대 투입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던 말, 기억 하십니까"
"근위대로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당연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전날 밤, 근위대 투입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던 말, 기억 하십니까"


"그랬지. 그럼 그때는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럼 그때는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187번째 줄: 197번째 줄:
"무, 무슨 상관이야?"
"무, 무슨 상관이야?"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만약 마법사임을 확인했는데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에는 죄수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자신이 높은 계급이더라도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아렌에게는 작지 않은 고민이다.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이 직접 마법을 사용해서 상대를 확인했는데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에는 정체를 위해서 죄수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자신이 높은 계급이더라도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아렌에게는 작지 않은 고민이다.


그래. 한 번 해보자.
그래. 한 번 해보자.
222번째 줄: 232번째 줄:
"왜지? 내가 당장 교도소장에게만 알려도 오늘 중으로 당장 이송될 텐데?"
"왜지? 내가 당장 교도소장에게만 알려도 오늘 중으로 당장 이송될 텐데?"


"웃기는군."
"웃기는군. 허수아비한테 무슨 권한이 있어? 바퀴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런 인간으, 윽, 아우."


오랜만에 담배를 펴서 그런지 그는 실실 웃다가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콜록거렸다.
오랜만에 담배를 펴서 그런지 그는 실실 웃다가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콜록거렸다.


"너. 참 이상해. 나이는 어리고, 여자인데다가, 계급은 지나치게 높고,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
"후우. 너. 참 이상해. 나이는 어리고, 여자인데다가, 계급은 지나치게 높고,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


담배를 다시 빨고는
담배를 다시 빨고는
268번째 줄: 278번째 줄:
"돌아가셨어."
"돌아가셨어."


구태여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렌은 그렇게 생각한다.
순간이지만 평온한 지바크의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구태여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렌은 그렇게 생각한다.


"짧게 이야기해주지. 그러니까.. 총통이 제안하더군. 내게 자유를 주겠다고."
"짧게 이야기해주지. 그러니까.. 총통이 제안하더군. 내게 자유를 주겠다고."
280번째 줄: 290번째 줄:
아렌은 총통의 말이 당연히 거짓말이라 여겼다.
아렌은 총통의 말이 당연히 거짓말이라 여겼다.


"어리긴 어려!"
"하! 어리긴 어려!"


그러나 면박을 주듯 지바크는 아렌을 비웃었다.
그러나 면박을 주듯 지바크는 아렌을 비웃었다.
288번째 줄: 298번째 줄:
지바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바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는 세상이 잘 풀렸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끔찍한 삶을 살지! 같잖은 마법을 포기하지 못해서 몸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해. 구시대의 망령이야! 우리에겐 당신이 보기에 같잖아보이고 바보같은 제안도 덥석 받을만큼 절박한거야. 알아?"
"아가씨는 세상이 잘 풀렸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끔찍한 삶을 살지. 같잖은 마법을 포기하지 못해서 몸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해. 구시대의 망령이야! 우리에겐 당신이 보기에 같잖아보이고 바보같은 제안도 덥석 받을만큼 절박한거야. 알아?"


그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울분을 토해낸다. 오랜 긴 세월동안 고통받았기에, 자신이 구원받을 일말의 기회조차 없었기에. 그래서 지바크는 오히려 아렌에게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울분을 토해낸다. 오랜 긴 세월동안 고통받았기에, 자신이 구원받을 일말의 기회조차 없었기에. 그래서 지바크는 오히려 아렌에게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304번째 줄: 314번째 줄: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렌은 교도소장의 배웅을 마다하고, 작은 배와 함께 호수를 건넌다. 얕은 바람과 들내음이 두 사람의 적적한 공간을 채웠지만, 그 부드러운 풍경과는 다르게 아렌의 마음 속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이 스몰스몰 올라차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지, 무얼 위해서 그렇게 싸웠는지.


어쩌면 정말로 워렛이 총통에게 협박받고 있다면,


그냥.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포기해야 하는게 아닐까.


자신 역시 그 시절처럼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
----

2022년 7월 16일 (토) 14:24 기준 최신판


정렬하여 보기

A

그로우휠 12편
감옥

호소니 교도소

얼핏보면, 큰 호수 가운데 떠있는 아름다운 섬처럼 보이지만 그곳은 정치범 수용소였다.

이곳은 라이프니츠에선 처리하기 어려운 대상들, 예컨대 정치인이나 외국인과 같은 사람들을 해외로 추방하는 국외 교도소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이지 않고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감옥 말이다. 이곳에 머무르면 결국 지지자들로부터는 잊혀지고, 자신은 독방에 갇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심연의 옥쇄였다.

그렇기에 호소니 감옥은, "고독"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두 사람은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고, 부둣가에 마련된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감옥에 도착한다.

"천개의 창으로서, 야전 사령관께서 이런 교도소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한개의 눈을 위해, 심문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교도소장은 맥락도 없이 전선의 사령관이 방문한다고 하자 발벗고 아렌을 맞이했다.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조국을 위한 일이니"

교도소장이라는 작자는 제법 윗선에 목이 말라있는 인물 같았다.

"심문하시려는 죄수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세그넌. 타라바오 세그넌입니다."

접수원이 아렌의 말을 듣고 서류를 확인하다가, 몇 장 지나지 않아 금세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말씀하신 죄수는 이송되지 않았습니다. 그.. 현재는 사망 상태입니다. 자살이라고 나옵니다."

아렌은 귀를 의심했다.

"불과 5일 전에 마지막으로 심문했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교도소장은 다시 한 번 그가 이미 사망 상태임을 알렸다.

왜? 고작 5일 전에 비공정에서 만났으면서, 그때는 자신에게 건강하라고 말해놓고.. 그때도 썩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며칠 남기지 않았다고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렌은 그와 친분을 드러낼 수도 없었고, 밀려오는 복잡함에 침을 삼키고는 그의 마지막 말대로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분명 이 감옥에 마법사가 수감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근 한달 간 본토로부터 이송된 죄수 명단은 있습니까?"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몇분 후 아렌은 서류를 건내받았고, 반델과 함께 텅 빈 면회실에 앉아 그 서류들을 살펴본다.

면회실은 굉장히 칙칙한 작은 방이었다. 비공정 상륙장에 있던 건물들이 내부로 엔티크한 목재가 제법 많았던 반면에, 이 강철 감옥은 죄다 쇠로 된 물건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장소도 아니었으므로, 정말 고요하고 적적했다. 심지어는 저 하늘조차도 눅눅해보인다.

아렌의 건너편에 앉은 반델은 어딘가 불편한 낌새를 하고 있다.

"중장님. 이제 2시간 뒤면 작전 지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반델은 촉박한 시간을 걱정하며 아렌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알고있어. 징그러우니 저리 가"

"...예"

반델은 곧이곧대로 아렌에게 멀찍이 떨어졌다. 아렌은 여전히 서류에 집중하다, 건조하게 마른 입을 열었다.

"소령, 잠시 시간이 나서 묻겠는데."

"말씀하십시오."

"근위대장이 그렇게 된 일에 대해서, 정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음. 왜 말씀하시지 않나 했습니다."

반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을 찡그리고는, 늘 서있던 평소와는 달리 아렌의 건너편에 앉아서는 모자를 벗었다.

"솔직히 이야기해도 될까?"

"예."

"근위대장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그러니까.. 나에게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아렌은 서류를 읽던 시선을 옮겨 반델을 반듯이 바라본다.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굉장히 무례했으니까.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어. 사실이지."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귀관에게 이런 얘기를 계속 해서, 귀찮게 만드는 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지. 난 총통이 자기 마음대로 앉혀놓았으니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근위대가 민간인을 학살할 이유는 안되지. 그 날, 소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군. 뭐라고 말을 하라는 것도 기대했다는 말도 아니야. 그냥, 뭐라고 할지. 내가 소령을 본지 많아봐야 일주일이고, 우리가.. 그렇게 막 전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

"소령도 그렇게 생각하나?"

"..."

"민간인들을 죽여도 된다고?"

반델은 하루 전, 근위대대가 이 작전에서 후방으로의 임무가 확정되었을 때, 언젠가 이 질문이 자신에게 맞딱드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내 하소연일 뿐이지. 현실을 모르는,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아렌은 굉장히 불안한 눈초리였다. 이곳에 온 이후로 반델이 보기에도 가장 불안한 상태였다.

"급하신 업무 중에..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그만큼 오랜 시간 고민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반델도 아렌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근위대로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당연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전날 밤, 근위대 투입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던 말, 기억 하십니까"

"그랬지. 그럼 그때는 왜 이야기하지 않았어?"

"차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근위대가 그런 집단이라고..."

"..."

반델의 말에 어폐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심정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마치 반델이 모자를 벗고 자신을 마주하는 모습이, 자신이 거짓이 아니라 정말 속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리고 전 중장님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델은 비공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비공정에서 결코 숨지 않으시고 같이 싸우시지 않았습니까. 위험한 일이더라도 저를 믿어주셨고,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침착하게 문제를 극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전 점차 중장님이 사령관으로의 자질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델은 조금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저에게 중장님은 사령관 그 자체이십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렌은, 반델이 이토록 말을 길게 한다는 사실도, 이렇게 진지할 수 있다는 모습도, 모두가 의외였다.

"알겠어. 그만해 그만.."

아렌은 필요 이상으로 모든걸 털어놓는 반델이 부담 그 자체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자신을 치켜세울 줄은, 아렌은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푸념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든 아렌은 다 읽은 서류를 반델에게 밀어놓는다.

"치워줘"

"예"

"...격려 고마워"

"전달됐으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다시 반델은 탁상에 올려놓은 베레모를 썼다.

"소령. 지금 좀 부담스러우니까, 면담실 문 앞에서 수감자들 10분씩 로테이션 해서 들여보내줘."

"알겠습니다."

반델은 다시 기계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그래. 이게 그의 모습이다. 아까는.. 부담스럽더라도, 오히려 인간적이었달까. 처음부터 워낙 딱딱한 인상에 늘 기계적이었는데, 이제야 반델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기분이었다.

아렌은 곧 면회실에는 수갑을 찬 죄수들이 하나씩 번갈아가며 들어오고, 그들을 심문했다.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떤 죄목으로 이곳에 왔는가?

하지만 하나, 셋, 다섯, 일곱.. 단서는 그다지 없다. 모두 정치범이거나, 좀 심한 성향의 정치범이다. 아렌이 찾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세그너의 말은 '마법사들을 호소니로 보내고 있다'였으니, 분명 이곳일 텐데..

"이름?"

"지바크"

그러던 중 아렌에게 눈에 띄는 수감자가 나타난다. 덥수룩한 머리에 한쪽 눈은 멀어서는, 딱 봐도 심상치않은 기운이었다.

"왜 이곳으로 왔지?"

"시발. 낸들 아나."

"그래 지바크. 고향은?"

"프르헴스비냐"

볼펜으로 종이를 툭, 툭, 두 번. 프르헴스비냐. 지금은 프로함이란 이름을 단 도시다. 그곳은 라이프니츠가 제국이었던 시절에는 마법사가 많이 배출되는 도시였다. 굳이 그곳 출생임을 숨겼으면 숨겼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지?"

"...농사를 하거나.. 뭐 물건을 팔았지."

뭔가 뻔하게 행동하던 그 남자가, 무슨 일을 했냐는 질문에 조금 뜸을 들였다. 사실 이 나라에서 '마법사'라고 한다면, 사형수 이상의 대우를 받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숨겨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마법사임을 드러낼 이유가 없을 것이다.

"농사는 어떤걸 했고, 무슨 물건을 팔았는지도 말해"

"그냥... 왜이렇게 시시컬컬해? 시발. 잠시만, 요즘은 어린애들도 별을 다네. 심문은 왜 왔지?"

지바크는 아렌이 만만해보였는지 험한 말로 아렌의 심기를 건드리다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지랄 지랄하네.."

아렌은 한숨을 쉬고는 수갑을 차고 있는 남자의 손을 강제로 잡아폈다.

"시발! 뭐야"

"농사를 지은 것 치곤 손이 깨끗하고"

"무, 무슨 상관이야?"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이 직접 마법을 사용해서 상대를 확인했는데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에는 정체를 위해서 죄수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자신이 높은 계급이더라도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아렌에게는 작지 않은 고민이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뜬금없지만 담배 피나?"

"...뭐 주게?"

"주지"

남자는 영문도 없이 담배를 준다길래 처음에는 고민하다, 뭐 별 일이야 있겠냐며 끄덕거린다. 아렌은 담배 한 개비를 남자에게 주고, 남자는 그것을 입에 물었다.

"블, 블드 즈으즈"
아마 불달라는 말 같다. 아렌은 곧이곧대로 검정색 지포라이터를 넘겨준다. 남자는 아무런 의심없이 라이터를 받고, 담배를 피기 위해서 라이터를 켰다. 그러자 라이터에서는 초록색 불빛이 솟아나온다. 별로 신경쓰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문 그는 멍을 때리다 곧 초록색 불빛의 의미를 깨닫는다.

"하. 시발.."

"비싼 물건이거든."

아렌은 빠른 손놀림으로 지바크에게서 지포라이터를 빼앗았다.

"마법에는 여러가지 기본 요소가 있지. 예를 들어서.. '목적'이라던지, 목적과 행동, 마력. 세 박자가 맞아야 해."

"얼씨구, 선생님 나셨네."

"이 라이터는 맨손으로 불을 켰을 때 마력이 흐르면 초록불이 나오지. 그쪽도 잘 알 텐데?"

지바크는 담배연기를 훅 뱉는다.

"프르헴스비냐에서 배웠지. 귀족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다시 한 번 크게 한 숨.

"왜 이런 심문을 하는건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나는 본국으로 다시 송환되지 않을거야."

"왜지? 내가 당장 교도소장에게만 알려도 오늘 중으로 당장 이송될 텐데?"

"웃기는군. 허수아비한테 무슨 권한이 있어? 바퀴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런 인간으, 윽, 아우."

오랜만에 담배를 펴서 그런지 그는 실실 웃다가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콜록거렸다.

"후우. 너. 참 이상해. 나이는 어리고, 여자인데다가, 계급은 지나치게 높고,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담배를 다시 빨고는

"뭐지? 이게 무슨 조합이지? 너.."

어느새 지바크는 자신이 아렌을 심문하듯 거들먹거리며 행동하고 있었다.

"굉장히 수상한 걸. 큽큽. 아닌가.. 아우, 맵네 담배가."

아렌은 전혀 불안한 기세가 없는 지바크의 모습을 보고서 어느정도 추론할 수 있었다.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신이 마법사인걸 들켰는데 이토록 당당하다면, 분명 본국으로부터 자신이 보호받는다는 걸 증명받고 넘어온 게 분명했다.

"어떤 제안을 받았지?"

"말해줄 의무가 없군."

이야기가 늘어질수록 촉박해지는 건 아렌이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작전이 진행되고, 이곳에 들릴 기회조차 없어진다.

"세그너.. 세그너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 총통이 마법사들을 이곳으로 옮기고 있다..라고"

여유롭게 담배를 피던 지바크는 자신의 귀에 '세그너'라는 이름을 듣고나서야 아렌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라..."

지바크는 피던 담배를 냅다 입으로 밀어넣더니, 씹어먹고 뱉었다.

"너, 마법사였군."

그리고 그만큼 예리했다.

"그래. 나도 당신과 똑같은 마법사야. 비록, 마법을 다루는 능력은 형편 없지만"

"도청이 없나보지?"

"내가 제거해놨지."

"어이가 없군. 군인이 맞나? 세그너 선생님은 어디계시지?"

선생님, 선생님이라는 말을 붙이는 걸 보아 남자와 세그너는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돌아가셨어."

순간이지만 평온한 지바크의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구태여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렌은 그렇게 생각한다.

"짧게 이야기해주지. 그러니까.. 총통이 제안하더군. 내게 자유를 주겠다고."

"자유?"

"그.. 이름을 모르겠군. 자신을 데려오는 남자를 따라서 마법진을 그리라고 했지. 나도 정확히 무슨 마법인지는 모른다. 아마 큰 규모일거고, 나 하나가 끝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때 동안 내 안전을 보장받고, 마법이 완성되면 해외로 추방 시켜준다더군."

"믿나?"

아렌은 총통의 말이 당연히 거짓말이라 여겼다.

"하! 어리긴 어려!"

그러나 면박을 주듯 지바크는 아렌을 비웃었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병신마냥.. 산송장마냥, 평생 감옥에 박혀서?"

지바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는 세상이 잘 풀렸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끔찍한 삶을 살지. 같잖은 마법을 포기하지 못해서 몸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해. 구시대의 망령이야! 우리에겐 당신이 보기에 같잖아보이고 바보같은 제안도 덥석 받을만큼 절박한거야. 알아?"

그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울분을 토해낸다. 오랜 긴 세월동안 고통받았기에, 자신이 구원받을 일말의 기회조차 없었기에. 그래서 지바크는 오히려 아렌에게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세그너 선생님의 이름을 듣고 알려준거다. 이 이상의 호의를 바라지마."

"..."

그리고 약 1분 간의 정적이 이어졌다. 방이 조용해지자 반델은 문을 두드렸고, 이후 면담이 끝났다.

아렌은 몇 번 더 면담을 진행했지만, 이미 아렌은 마음이 붕 떠 다른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자신은.. 자신은 너무나 일이 잘 풀렸으니까. 나는 행복하게 살아남았으니까. 아무렴, 그거면 충분한 게 아닌가. 죄책감을 가질 여유따위 그 어린날 가족들이 다 죽을때, 혼자 살아남았을 때 두고 왔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렌은 지바크의 언질에 정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렌과 워렛은, 결국 그런 위선적인 존재에 불과한가.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렌은 교도소장의 배웅을 마다하고, 작은 배와 함께 호수를 건넌다. 얕은 바람과 들내음이 두 사람의 적적한 공간을 채웠지만, 그 부드러운 풍경과는 다르게 아렌의 마음 속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이 스몰스몰 올라차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지, 무얼 위해서 그렇게 싸웠는지.

어쩌면 정말로 워렛이 총통에게 협박받고 있다면,

그냥.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포기해야 하는게 아닐까.

자신 역시 그 시절처럼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