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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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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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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대 총통 김영삼 | Youngsam Kim | |
출생 | 1927년 12월 20일 |
경상남도 통영군 (現 경상도 통제군) | |
국적 | 대한민국 |
사망 | 2015년 11월 22월 (87세) |
서울수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임기 | 대한민국 2대 총통 |
1973년 ~ 1982년 | |
민주국민당 2대 주석 | |
1975년 ~ 198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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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2대 총통이자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정계 입문과 지도자 수업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을 하였으며, 이승만의 눈에 띄게 된다. 김영삼은 통일전쟁 시기, 웅변실력을 인정받아 정훈병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승만의 비서가 된다. 이후, 이승만의 권유로 3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7년 1차 개헌 당시, 김영삼은 탈당과 잔류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이승만의 설득으로 잔류를 선택했다. 이후 김영삼은 국회의원, 중앙정보성 장관, 정무성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치며 정치경험을 쌓았다. 이는 이승만이 김영삼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함이었다.
김영삼이 내무부 장관 시절 단행한 행정개혁은 복잡했던 행정구조를 일목요연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올랐다.[1]
총통 시절
1973년 제6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서 60%라는 높은 득표율로 자유당의 박순천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총통에 당선되었다. 이는 김영삼의 개인적인 인기와 전임 총통 이승만의 후광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비록 김영삼이 총통이 되었지만 여당인 민국당의 주석은 여전히 이승만이 맡고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 초기는 김영삼과 이승만이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김영삼은 이승만의 뜻대로 총통의 3중임을 제한하는 개헌안을 상정시켜 통과시켰고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국가들을 모아 미국의 비호 아래 아시아태평양국가연합을 출범시켰다. 이승만은 김영삼의 뜻대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사전 작업에 사재까지 투입하며 협조했다. 이러한 양두체제는 1975년 이승만이 민국당 주석직을 내려놓으면서 끝났다. 이 이후부터 이승만은 정치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였으며 김영삼의 독무대가 열렸다.
작업 예정...
평가
긍정적 평가
- 행정개혁
- 금융실명제 실시
- 아태 통합
부정적 평가
- 폼생폼사
- 후광정치
- 폐쇄적 국정운영
역대 선거 결과
선거 종류 | 연도 | 소속정당 | 득표율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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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 1956 | 41.4% 경남5 |
당선 |
초선 | |
국회의원 선거 | 1963 | 52.9% 경남5 |
당선 |
재선 | |
국회의원 선거 | 1966 | 55.1% 경남5 |
당선 |
3선 | |
국회의원 선거 | 1971 | 전국구 2번 | 당선 |
4선 | |
총통 선거 | 1973 | 60.9% | 당선 |
초선 | |
국회의원 선거 | 1976 | 전국구 1번 | 당선 |
5선 | |
총통 선거 | 1978 | 50.7% | 당선 |
재선 |
- ↑ 이는 김영삼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