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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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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연합 정상회의 의장
대한민국 4대 총통
김대중
金大中 | Daejung Kim
출생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국적 대한민국
사망 2011년 8월 18일 (향년 87세)
서울수도시 세브란스병원
임기 대한민국 4대 총통
1990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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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이희호
종교 천주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3,4,5,6,7,8,9,10,11
성향 중도[1]
별명 DJ

개요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4대 총통을 역임했다.

생애

정계입문 전

1924년 일제 치하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해방정국 당시 김대중은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위원회 목포지부에 가입하였지만 건준이 박헌영에 의해 좌경화되자 탈퇴했다.  김대중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소련에 대한 충성으로 기울어진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조국 소비에트 만세, 붉은 깃발만이 우리의 진정한 깃발이란 말을 하곤 해 나의 감정을 자극했다. 나의 반발심은 그들의 미움을 샀고 나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됐다.

이후 김대중은 해운업을 하여 수십 톤 규모의 선박 여러 척을 운영하며 큰 돈을 벌었다.  통일전쟁 발발 당시에는 사업차 서울에 있다가 북한군에게 잡혀 부르주아라는 혐의로 사형당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  목포로 돌아온 후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상선들로 의용군의 일종인 목포 해상 방위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였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2]

야당 정치인

연설하는 김대중 (1973)

1951년 2회 총선 당시에는 이승만의 권유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고향인 목포에서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후보에게 밀려 2위로 낙선한다.  이후 민국당 청년위원 등을 역임하다 1956년 3회 총선에 출마, 당선되었다.  하지만 당선 직후 벌어진 개헌 파동으로 김대중은 민국당에 실망하게되었고 이승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소앙, 김두한 등과 함께 탈당한다.[3]  이후 김대중은 이들과 호헌정우회를 창당하였다가 야당 통합으로 자유당에 속하게 된다.

자유당에서 김대중은 총선에서 목포 지역구에서 연전연승하며 당내 기반을 쌓았다.  마침내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모든 예상을 뒤엎고 1973년 6회 대선의 자유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어 민주국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옛 동료 김영삼과 맞붙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후광을 등에 업은 김영삼과의 대결에서 자그마치 20% 득표 차로 패배하며 나락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정계 은퇴 대신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선택했다.  여전히 목포에서 인기남이었던 김대중은 중앙정계에서의 활동을 최소화하고 지역구 활동을 극대화하며 존버를 탔다.  어느 정도 지역구활동을 한 후에는 물밑에서 자신의 계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 그에게 또다시 기회가 왔다.  자유당의 이민우 주석이 총선 공천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을 썼다는 폭로가 나온 것. 숨죽여왔던 김대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상공세를 개시했고 이민우는 주석직에서 사퇴한다.  자유당 주석에 선출된 김대중은 민국당 탈당파 김재익이 창당한 민주당, 구 근민당계 정당인 사민당와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함으로써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김기춘의 정치 공작으로 1990 대선에서 민주국민당 심상우 후보를 꺾고 총통에 당선되었다.

총통 시절

총통에 당선된 김대중

경제 정책

총통이 된 김대중은 이전 서석준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일부 수정했다.  김대중은 친기업적인 정책과 저세율 기조를 유지하는 한편 서석준이 등한시했던 복지를 확장하여 경제와 복지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다.  허나 친기업적인 정책은 사민당계의 반발을 사 훗날 분당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세입 증가 없는 세출 증가는 국가 재정의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외교 정책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통해 일본 문화를 개방하였으며[4] 원수 관계였던 서중국과도 상대국 수도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했다. 더 나아가 김대중은 한국, 일본, 동중국, 서중국이 함께 하는 평화선언 발표를 추진했고 1993년, 전라도 제주시에서 4개국 정상이 모여 "동아시아 평화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4국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기로 약속했다. 이 공로로 김대중은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동중국의 후야오방, 서중국의 자오쯔양과 함께 그 해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오르도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쿠데타 정부를 인정할 수 없으며 쿠데타로 집권한 바오라이에게 즉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또 아태연합에 영향력을 행사해 아태개발은행이 오르도스에 경제개발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경제 제재를 가했다.

내정 정책

당시 불안정한 위치에 있던 만주 자치령을 해산, 한국에 흡수시켜 만주 지역 주민들에게 국민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 조치로 만주 지역 주민들은 참정권 등을 비록해 본토 주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5]

냉전이 종식되면서 대규모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자 2000년대 초반까지 징병제를 모병제로 완전히 전환하여 병력을 감축하고 그 대신 군의 정예화를 꾀하는 '국방개혁 2010'을 계획하였다.

집권 말기

김대중은 기타 사회개혁 등을 통한 높은 지지율으로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그의 2기 정부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김대중의 자식들에 관련된 비리가 연이어 터졌으며 이후에는 불법 대소 송금 사건으로 대국민 사과까지 하는 상황에 몰렸다.  송금 사건을 가까스로 수습하자마자 터진 1997 아시아 경제위기는 김대중의 지지율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의 측근인 신기하1998 대선에서 민국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완패하면서 김대중은 정계에서 은퇴한다.

말년

퇴임한 후의 김대중은 여전히 민자당 상임고문을 맡았으며 자택에서 은거하였다.  2010년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에는 국립현충원 총통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진첩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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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주석 김대중[6] 기자회견하는 김대중 총통

여담

  • 1991년, 오르도스에서 오르도스 국군 소장 바오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오르도스 총리 양스펑이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 고향이 섬인 전라도 신안이다보니 해산물을 매우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홍어를 아주 좋아했는데, 냄새만 맡고도 품질을 감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해산물 말고도 라면, 아이스크림 등 군것질거리도 자주 먹었다. 식성 자체가 대식가이기도 했다.

선거 이력

선거 종류 연도 소속정당 득표율 당락 비고
국회의원 선거 1951
전남3
31.2%

낙선
국회의원 선거 1956 전남3
46.9%

당선
초선
국회의원 선거 1961 전남3
53.3%

당선
재선
국회의원 선거 1966 전남3
51.1%

당선
3선
국회의원 선거 1971 전남3
58.9%

당선
4선
총통 선거 1968 39.7%
낙선
국회의원 선거 1976 전남3
47.9%

당선
5선
국회의원 선거 1980 전남3
50.0%

당선
6선
국회의원 선거 1984 전남3
51.1%

당선
7선
국회의원 선거 1988 전국1
당선
8선
총통 선거 1990 국민회의 50.9%
당선
초선
총통 선거 1994 자유한국당 54.4%
당선
재선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8 - 1957 정계 입문
무소속 1957 탈당[7]
호헌정우회 1957 창당[8]
1957 - 1989 신설합당
1989 - 1992 신설합당
자유한국당 1992 - 1999 당명 변경
1999 - 2011 당명 변경, 사망

각주

  1. 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사회보수주의, 햇볕정책
  2.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공훈장이 아닌 보국훈장을 받았다.
  3. 김영삼은 처음에는 이들과 같이 탈당하려고 했으나 이승만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꿨다.
  4. 수교 자체는 서석준 정부가 했다
  5. 병역의 의무도. 다만 징병제가 2000년대 초반에 폐지되기는 했다.
  6. 맨 왼쪽은 당시 국민회의 원내총무 신기하
  7. 3선 개헌에 반발해 탈당
  8. 민국당 탈당파가 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