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아름다운 나라)

Anonymous (토론)님의 2022년 2월 25일 (금) 13:0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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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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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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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제32대
김동연 이운석*
*개별 문서가 있는 총리

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총리

대한민국 2대 총통
김영삼
金泳三 | Youngsam Kim
출생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통영군
(現 경상도 통제군)
국적 대한민국
사망 2015년 11월 22월 (87세)
서울수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임기 대한민국 2대 총통
1973년 ~ 1982년
민주국민당 2대 주석
1975년 ~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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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손명순
본관 김녕
종교 개신교 예장합동
소속 정당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3,4,5,6,7
소속 위원회 내무위원회
복무 대한민국 국군 정훈병
1950~1951
별명 YS, 봉사왕
약력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이승만 총통 비서관
제3~7대 국회의원
중앙정보성 장관
정무성 장관
내무부 장관
민주국민당 원내주석
대한민국 2대 총통
민주국민당 2대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2대 총통이자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정계 입문과 지도자 수업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을 하였으며, 이승만의 눈에 띄게 된다.  김영삼은 통일전쟁 시기, 웅변실력을 인정받아 정훈병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승만의 비서가 된다.  이후, 이승만의 권유로 3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7년 1차 개헌 당시, 김영삼은 탈당[1]과 잔류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이승만의 설득으로 잔류를 선택했다.  이후 김영삼은 국회의원, 중앙정보성 장관, 정무성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치며 정치경험을 쌓았다.  이는 이승만이 김영삼을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기 위함이었다.

김영삼이 내무부 장관 시절 단행한 행정개혁은 복잡했던 행정구조를 일목요연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올랐다.[2]

총통 시절

1973년 제6회 대한민국 총통 선거에서 60%라는 높은 득표율로 자유당박순천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총통에 당선되었다. 이는 김영삼의 개인적인 인기와 전임 총통 이승만의 후광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비록 김영삼이 총통이 되었지만 여당인 민국당의 주석은 여전히 이승만이 맡고있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 초기는 김영삼과 이승만이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김영삼은 이승만의 뜻대로 총통의 3중임을 제한하는 개헌안을 상정시켜 통과시켰고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국가들을 모아 미국의 비호 아래 아시아태평양국가연합을 출범시켰다.  이승만은 김영삼의 뜻대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사전 작업에 사재까지 투입하며 협조했다.  이러한 양두체제는 1975년 이승만이 민국당 주석직을 내려놓으면서 끝났다.  이 이후부터 이승만은 정치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였다. 김영삼의 독무대가 열린 것이었다.

이후 3년간 김영삼은 인기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10%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이 7%대까지 떨어진 것이다.  60%를 넘던 김영삼의 지지율도 50% 남짓까지 하락했다.  그런 상황에서 실시된 7회 대선에서 김영삼은 신승을 거둔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삼은 두 가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첫 번째 카드는 이승만이 총통 퇴임 후 영입한 심상우, 김재익, 서석준, 일명 심김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두 번째 카드는 전임자인 이승만을 우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김영삼은 자신이 이승만의 정책과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것이었다.  김영삼의 전략은 효과를 보아 2기 정부의 국정 동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내에서 심김서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고 2기 정부 말이 되면서 김영삼계와 심김서계가 파워 게임을 벌였다.  이 파워 게임은 8회 대선 후보 경선에서 심김서의 서석준이 선출되면서 심김서의 승리로 끝났다.  1982년, 김영삼의 임기가 만료되면서 김영삼은 퇴임한다.

총통 퇴임 후

1982년 56세의 나이로 정계를 은퇴한 김영삼은 민주국민당믜 상임고문과 서석준 정부가 준 각종 명예직을 맡았으며 여기저기 정부 행사나 민국당 행사에 수시로 참석했다.  옛 김영삼계는 서석준계에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서석준 정부가 끝나고 김대중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활동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대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위한 '사랑의 집짓기', 겨울철 연탄 배달 봉사, 하천 쓰레기 치우기 등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김영삼은 '봉사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총통 재임 기간보다 퇴임 후에 훨씬 더 후한 평가를 받게되었다.  2016년경 뇌졸중 진단을 받아 모든 대외활동을 중단했으며 2020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폐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 폼생폼사
  • 후광정치
  • 폐쇄적 국정운영

여담

  •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 봉사활동 5,000 시간을 찍었다.
  • 우남주의의 창시자다. 즉, 이승만은 우남주의와 연관이 없다.(...)

역대 선거 결과

선거 종류 연도 소속정당 득표율 당락 비고
국회의원 선거 1956
41.4%
경남5

당선
초선
국회의원 선거 1963 52.9%
경남5

당선
재선
국회의원 선거 1966 55.1%
경남5

당선
3선
국회의원 선거 1971 전국구 2번
당선
4선
총통 선거 1973 60.9%
당선
초선
국회의원 선거 1976 전국구 1번
당선
5선
총통 선거 1978 50.7%
당선
재선

각주

  1. 탈당파는 호헌정우회를 창당, 결과적으로는 자유당으로 간다.
  2. 이는 김영삼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