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왜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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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 종교 ==
  '''수화기의 신, 장달프.'''<br><br>
  '''수화기의 신, 장달프.'''<br><br>
사츠마 번에 출현하여 사무라이들을 양성한 장달프를 수호신으로 뫼시었다.
사츠마 번에 출현하여 수화기로 전국을 통일시킨 장달프를 수호신으로 뫼시었다.


== 정치제도 ==
== 정치제도 ==

2024년 2월 11일 (일) 22: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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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이전 시대 대왜제국
1598 ~ 1936
다음 시대
전국 시대 대일본제국 (마지막 제국)

개요

전국 시대의 후신이자,  대일본제국 (마지막 제국)의 전신.

도요토미 히데요시떄 이르러 한층 더 세련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한 왜 왕조

대왜제국(大歪帝国 일본어:ダイイビツテイコク, 다이이비츠 테코쿠) (1598년 ~ 1936년)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정유재란무술왜란을 통해 선포한 제국이다.

역사

배경 및 건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일왕 책봉에 이를 갈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왜군 사령부는 부산에, 시마즈 요시히로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사천에, 아리마 하루노부는 순천에 주둔했다. 이순신의 압박이 강해지자 아리마 하루노부가 부산으로 지원요청을 나간 사이 오무라 요시아키가 고립되었고, 울산에 먼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 역시 권율에 의해 고립되는 신세가 된다. 이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가토 기요마사를 구해주지만, 이순신이 여수 앞바다까지 진격하면서 사천, 부산 일대의 왜군들이 위기에 처한다. 동시에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용병들이 부산에 들어오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데라자와 마사시게를 보내어 이순신을 방어토록 한다. 도도의 부대가 난전을 겪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몸소 지원을 나서고, 이순신의 함대를 서해안까지 몰아낸다.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역시 이때 지원을 나가 대승을 거두고, 오무라 요시아키를 구출한다.(여수 해전)

왜군은 이때 한양으로 진격하여 조선 왕 선조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는데,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가 금세 또 위기를 겪는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부대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부산으로 퇴각시키고 직접 권율의 부대를 쳐 승리를 거둔다. 왜군들은 순식간에 한양을 점거, 선조를 시해하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무술왜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직접 군을 나누어 산둥 반도요동 반도를 각각 치는 이로병진 작전을 펼치고, 그 결과 자금성을 포위 점령하며 만력제를 처형하였다. 후방에 있던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부대가 자금성으로 향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부대를 이끌고 사막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사마르칸트 대첩)

하지만 본국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다.(세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는데, 시마즈 요시히로를 내세워 가토 기요마사와 가토 요시아키의 반란 유언비어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참수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소문내는 등 계략을 꾸미었다.[1] 하지만 이때는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야음을 틈타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터라 늦은 상황이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지막 방법으로 후지산 분화를 선택했다. 이때의 후지산 분화로 수호신 장달프를 비롯한 기존 오대로와 오봉행이 모두 죽었다. 이때 제주도로 후퇴한 이순신이 병력을 수습하고 오사카를 총공격한다.

오사카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죽으면서 쵸주인 모리아츠가 당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결국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열도를 내어주고 대륙을 먹는 초강수를 둔다.

오사카를 함락한 이순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요제이 천황을 처형하고, 곧장 진격준비를 하였다. 이때 자금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황의 자리에 오르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쵸주인 모리아츠, 구루지마 미치후사, 다테 마사무네를 새 오대로에 임명하면서 대왜제국이 선포된다. 그리고 오대로의 집결지로 둔황칠전 왜성[2]이 건축된다.

지속되는 반란

이 무렵, 명나라의 환관이였던 연우(延宇)는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고 있었다. 진린의 부대를 처음 보냈지만 고바야카와 부대에 의해 저지당하였고, 직접 전투에 임하게 된다. 갑작스런 기습에 데라자와 마사시게가 전사하고, 동시에 조선에서도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초반에는 몇번 승리했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적진 깊숙히 들어간 와중에 낙마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3] 칠전 왜성의 총대장이였던 쵸주인 모리아츠는 사츠마로 후퇴를 결정했고, 후일을 도모하게 된다.

삿포로 섬아이누족을 경계하던 다테 마사무네가 칠전성에 입성하게 되고, 곧장 조선으로 출정하게 된다. 투항하여 상해왜성 총대장직을 얻은 이순신은 적진에 잠복해 있다가 공격을 퍼부었고, 다테 마사무네, 와키자카 야스하루, 쵸주인 모리아츠가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을 퍼붓는다.

이 때 신요의 지원군들이 조선의 반란군에 대사군전을 퍼부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대왜제국은 신요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주 땅에서 탁시는 연우의 명군[4]을 대패시키고 대륙을 먹으면서 청나라를 새로 세우는데, 이 또한 나중에 대왜제국에 의해 진압당하고 만다.[5] 이때 대왜제국은 심각한 난전을 겪었는데, 구루지마 미치후사쵸주인 모리아츠가 전사하면서 그 자리를 하타 치카시, 미야모토 무사시가 잇게 된다.

중원을 다시 차지한 대왜제국은 칠전왜성을 사마르칸트로 이전하고 태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정 하에 유럽을 정벌하고 곧장 개혁(일명 홍데타)을 실시한다. 개혁에 반발한 다이묘들을 추방시키는 등 오대로의 권력은 어마어마했다. 이때 원로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사가 사망하면서 2차 개혁(일명 분데타)가 실행되는데, 이에 반발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오스만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이 거세지자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군대가 나섰으나 대패했고, 다테 마사무네는 칠전성에서 할복하였다. 가메이 고레노리하타 치카시는 탈영한 터라 더는 군사도 없었고, 한반도의 왜군들이 나서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대를 이끌고 발해만으로 진격하는 반면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몽골인으로 변장한 상태로 자금성의 다이묘들을 탈출시켜 함락된 칠전왜성을 다롄에 재건한다.[6]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톈진의 반란군들을 해안봉쇄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대가 산해관을 넘으면서 바린 좌기의 대하왜성[7]으로 진격한다. 가토 역시 톈진을 지나 자금성을 수복하고 대하왜성으로 진격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군대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한반도군이 승리하였지만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전사하고 만다.

사츠마로 후퇴한 반란군의 잔당들은 안코쿠지 에케이를 내세워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미륵을 신봉하던 명나라 잔당들이 봉기하게 되지만 영웅왜성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이이 나오마사시마 사콘, 다케다 노부요시 등이 모두 진압하였다. 칠전왜성은 시안에 재건되었고, 이이 나오마사시마 사콘, 구로다 칸베에를 새 오대로에 임명하였다.

이후, 대왜제국은 200년이 넘는 전성기를 누렸다.

쇠퇴와 멸망

시간이 흘러 조선과 청나라, 오스만이 독립했고, 대왜제국은 다시 열도로 쫓겨났다.

1863년의 영국 사츠마 공격은 존황파의 반영감정을 자극시켰고, 이들은 유신을 대비하여 막부를 흔들기 위해 쓰시마를 러시아에게 침공해달라는 상주문을 보낸다. 1867년의 대한제국 선포 이후 러시아의 쓰시마 침공이 직접적으로 감행되자 불쾌감을 느낀 대한제국과 영국은 1차 한영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보신전쟁에 개입하기 시작된다.

1868년부터 시작된 보신전쟁, 혹은 1차 일본내전은 일본을 폐허로 몰아넣었다. 유신회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와 막부가 크게 밀리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뭉친 한영동맹은 영국군이 쓰시마의 러시아군과 산발적 교전을 벌이는 사이 논영의 배를 타고 온 대한제국군이 나가사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신전쟁을 국제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사건의 결과로 보신전쟁은 어느 누구의 완벽한 우세로 끝나지 않고 서쪽의 존황군, 동쪽의 좌막군으로 나뉘어져 휴전상태로 끝이나게 되었다.

1873년 신센구미 주도의 사카모토 료마 암살은 불안정한 휴전을 깨뜨렸고, 1년 후 2차 일본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1차와는 달리, (빚으로 강제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통해 막부의 군세는 확연히 달라 도카이도 선을 기점으로 참호전의 늪에 빠졌다. 이때 근황군은 국제적으로 고립당해서 무기 수입 루트가 없으니 떠오르는 해, 독일과 일본에 개입을 하고픈 야수 미국에게 철도부설권, 탄광채굴권, 최혜국 대우 등의 이권을 빼주며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근황군 대한 여론이 나락으로 가면서 2차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두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근황군의 아교,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은 내전의 종지부를 찍게 만든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은 근황군의 뼈저린 실수로 인해 대한제국의 '운양호'가 불타 침몰하는 사건이었다. 이를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던, 새로이 즉위한 대한 광무제 이천은 대한제국군을 동원하여 훗날 '조선대습래'로 불리울 규슈 침공을 감행한다. 여러가지의 악재가 겹친 끝에 1878년 교토에 막부의 깃발이 꽃혔으나, 일은 그다지 좋게만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영국과 러시아, 미국과 독일, 대한까지 막부에게 내전기간의 영수증을 요청하였고 차마 배를 쨀 수 없던 막부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한편 일본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실에 분노한 이들이 정토진종을 구심점으로 1881년 일향종의 난을 일으켰다. 일향종의 난은 당대 사회에 팽배하던 반 서구, 반 기독교 감정에 편성하여 서구 열강의 조계지와 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사태로 확대되었으며 결국에는 서구 열강들의 개입을 불러왔다.

이 일향종의 난이 끝나자 열강들은 아와지 조약을 맺어 사실상 일본을 아무것도 못하는 시체국가로 만들었다. 다른 말로는 일본 분할이라고 불리는 아와지 조약은 각 열강들이 담당한 구역에서의 치안을 책임지는, 막부를 하나의 국가로도 보지 않는 처우였었다. 명분이야 일향종의 난이 또 일어날 것을 방지하는 조약이었지만 사실상의 국권피탈이나 마찬가지인 셈.

이 아와지 조약은 계속 열강들의 힘으로 유지되다가 1902년 러시아가 한러전쟁에서의 패배로 이탈함으로 휘청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명무실화되었다. 결국 1920년 대한제국이 중국 청도를 반환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영-조 결렬 이후로 사문화된 아와지 조약은 미국이 재한적 재무장을 허가하면서 완전히 파기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1882년 아와지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쿠레, 프랑스가 마이즈루, 스페인이 요코스카(미서전쟁 후 미국령), 한국이 사세보, 러시아가 하코다테를 조차지로 얻으면서 마무리 된다. 1884년 이러한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것에 대한 자정작용으로, 일본 막부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쇼군 요시노부의 동생의 주도로 "아키타케 사절단"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줄을 가진 영국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영국의 헌법을 배워 1886년 초안을 작성, 1887년 천황은 제사장 및 일본국민의 총의로, 쇼군은 일본국의 군주로 두는 이중군주제 일본국의 탄생을 알리는 일본국헌법을 반포한다.

1902년 한러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일본국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집중하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수백년동안 모여온 경력의 도쿠가와 가문은 경제적인 면에서의 발전은 준수하게 이뤄냈다. 1910년대 세계대전기는 일본에도 경제호황을 불러왔다. 아와지 조약의 폐지 이후로 회복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의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촉발된 기미 3.1 봉기는 계몽시대 이후의 일본은 내적으로 사실상 변한 것은 없다는 민중들의 불만을 말해주었고,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막부-도쿠가와 체제 자체의 모순점을 주었다. 미흡한 대처와 사태수습 사이에 있던 부패한 행정과 번벌간의 알력다툼은 전국민적인 분노를 일구었다. 그리고 운명의 1929년의 경제대공황은 일본국의 권위를 바닥 끝까지 쳐박았다.

1936년 강명황제 암살시도의 여파로 규슈에서는 또 다시 3.1운동과 비견될 정도의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을 파견한 일본국 정부는 역으로 이들이 진압을 포기하고 시위에 참여하자 혼란에 빠졌고, 설상가상으로 규슈에서 총격사건으로 피난민이 사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지게 되었다.

일본 본토 내에서도 수 많은 시위가 일어났고, 반정부 인사들은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태황에게 아편 든 차가 올라갔다.

현재까지도 아편이 든 차를 누가 진상하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어떤 이들은 유신파가 태황을 암살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도쿠가와 일족 중 한 명이 일본을 장악하기 위해 태황을 독살한 것이라고도 말을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간에, 1936년 2월 3일을 기점으로 태황이 공식 사망한 것이 알려졌고, 일본은 혼란의 상태에 돌입했었다. 교토에 잔존하던 도쿠가와군은 지휘체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 수도 없어 사방에서 일어나는 소요사태를 진압하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유신회가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유신회는 본디 일본 국외에서 유학을 한, 일본 내 정계에서 비교적 젊은 지식인, 장교들이 꾸린 세력으로, 간사이와 세이난 전쟁 이후 완전히 중앙 세력에서 배제된 조슈-사쓰마 번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들은 장교들을 이용하여 혼란 속 교토에서 정부를 장악하고 의회에서 일본 신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도쿠가와 일족을 몰아낸 후 유신회 고위층은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려 하기까지 하였으나, 아직까지 일선 장교 및 병사들은 유신회 고위층에서 교토 점거 후 어떠한 정부를 수립한다 제대로 된 말조차 없어 슬슬 혼란에 잠기기 시작하였다. 유신회 고위층에서도 사실 공화정을 세울지, 군정을 임시로 할 지 논의가 갈렸던 때였다. 이 때 의외의 존재가 이들에게 찾아왔다. 바로 쇼와 덴노였다.

쇼와 덴노는 유신회가 교토를 장악하는 혼란의 시점에서 느슨해진 감시망을 피해, 황거에서 나와 직접 이들이 있는 의회로 향하였다. 일본에서의 천황은 곧 그들의 신이나 다름 없었기에 쇼와는 유신회 권력을 평소 친분이 있던 도조 히데키와 기타 장교진들의 열성적인 호응으로 장악하였고, 도쿠가와 막부 정부는 조적이고, 신정부와 천황의 친정을 통해 이들을 토벌하겠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리하여 일본 내전, 그리고 30년간 이어질 쇼와 유신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덴노라는 구심점과 에도의 막부라는 적을 확실하게 설정한 정부는 천황의 이름으로 오사카, 나고야를 빠르게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일본 왕국 치하의 삶이 좋지 않았던 국민들 또한 유신회의 이러한 '혁명'에 호응하여 막부군을 테러하거나, 각지에서 친유신회 잇키를 일으키는 등의 활동을 하며 막부의 치세가 종결되었음을 알렸다.

결국, 에도에 쇼와가 입성하면서 을병전쟁, 오헤이전쟁 등으로 불리는 일본내전은 끝을 알렸고, 유신회는 1937년 4월 16일 쇼와 헌법을 발표하면서 일본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렇게 막부를 무너뜨렸다 할지라도 아직 문제는 많이 남아있었다. 여러차례의 기근과 전쟁으로 농토는 황폐화되었고, 천석호와 만석호들이 그마저 있는 땅을 장악하였다. 번벌들은 아직도 호시탐탐 신정부를 노리고 있었고, 유신회는 인력이 적은 탓에 행정적인 부분에서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쇼와는 이를 정공법으로 돌파하기로 하였다. 막부 치세에서 일하였던 자들에게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고, 전향서를 쓰는 형식을 취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반성하고, 신일본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맹세를 하게금 하면서 인력을 확충하였다. 천석호와 만석호들은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여 자작이 아닌 토지에는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팔거나, 아니면 세금을 더 내던가의 양자택일을 하게금 유도하여 정부에게 팔게금 만들었고, 이렇게 정부가 사들인 농지는 싼 값에 농민들에게 다시 팔아주면서 자작농의 비율을 늘렸다. 번벌들은 친정부적 성향을 가진 조슈, 카가 등은 그들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선에서 통합을 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북쪽의 번벌들은 이러한 통합에 끝까지 반대하자 결국 어군이 직접 이들을 공격한 뒤에야 통합에 동의하였다.

일본 신정부는 이렇게 일본 통일이라는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외세의 지지를 받았는데, 당시 1937년 한국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영국은 홍콩,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반한(反韓)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일본 신정부가 이들을 견제해주는 역할을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외국에서 차관도 도입하고, 미국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 군제도 개편하였고, 주요 산업공장도 국영화를 하면서 물품들을 생산해 차근차근히 체제를 뿌리부터 뜯어 고치면서 일본을 정상국가화 하기 시작하였다. 도량형 통일, 공장 국영화, 산업집중지대 재설정, 농촌개혁운동 등등 수 많은 정책이 이때 세워졌다.

그러나 일본 내부에서도 수백년 간 이어져 온 관습들을 뜯어고친다고 하니 막대한 반발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도량형인데, 간사이는 SI단위계, 간토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야드파운드법을 쓰는 것을 SI 단위계로 통합하는 것에 공장주들과 국민들이 불편함을 표했던 것이었다. 이 외에도 산업집중지역을 설정하면서 지역차별이라는 등, 국영화 공장의 주인들의 반발과 농촌개혁운동의 불협화음까지, 유신정부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천황의 정부를 자처하던 유신정부는 1936년으로부터 5년 후인 1941년에는 도호쿠와 간토 일대에서는 소규모 시위까지 일어날 정도로 민심을 잃어갔다.

그리고, 이 모든 불협화음을 한꺼번에 침묵시키게 해줄 폭풍이 찾아오면서 대일본제국 (마지막 제국)이 선포되었다.

종교

수화기의 신, 장달프.

사츠마 번에 출현하여 수화기로 전국을 통일시킨 장달프를 수호신으로 뫼시었다.

정치제도

오대로와 오봉행들이 정치를 이끌어갔다.

문자

가나 문자를 사용했다.

수도

  • 자금성: 무술왜란 이후 수도. 베이징시에 위치.

경제

농업은 열도, 만주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신요와도 많이 교류하였다.

인구

  • 16세기 5000만
  • 17세기 6000만
  • 18세기 7500만
  • 19세기 9000만
  • 20세기 1억

같이 보기

외부링크

  1.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금성에 피신했다.
  2. 일곱 명의 전사들이 모인 성.(오대로, 데라자와 마사시게, 타치바나 무네시게)
  3.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뒷자리는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잇게 된다.
  4. 이들의 후예들이 미륵을 신봉하며 세력을 키우게 된다.
  5. 후술하겠지만, 나중에 누르하치가 여진국을 세워 독립시킨다.
  6. 미야모토 무사시는 기리시탄 다이묘임이 들통나 처형당했다.
  7. 반란군의 집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