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조 멸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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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무술천궁(戊戌遷宮)은 1898년 10월 17일, 무술정변으로 연금당한 청나라 광서제가 베이징 자금성을 탈출하여 심양으로 도망친 사건이다.

하지만 실상은 한국 조정과 원세개가 합작하여 광서제를 반강제로 납치한 사건이며 7년뒤인 1905년에는 광종이 광서제로부터 청나라 제위를 선양받고 중화제국 천자로 올라선다. 이 사건으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한국은 만주 영유권 주장에 대한 명분을 얻게 되었으며 황제가 납치까지 당할 정도로 청나라가 허약해졌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배경

동치제 등극 이전부터 청나라는 몰락의 몰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들인 동치제를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원칙을 앞세워 점진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양무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867년 서구열강에게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참제한(황제를 참칭함) 조선을 정벌하겠다며 군사를 일으켰지만 압록강 부근에서 한국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양무운동은 시작된지 몇년만에 추진 동력을 잃어버리면서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이렇게 국내외로 혼란스러운 와중인 1874년, 광서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는데 여러차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서태후의 권력은 강고한 상태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서태후 아래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 청나라는 계속해서 무너져갔고 1898년 이를 보다못한 광서제가 캉유웨이등 여러 신하와 함께 변법자강운동을 펼쳐 청의 마지막 근대화 기회를 붙잡으려 했다.

전개

광서제의 탈출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캉유웨이등과 함께 논의하여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서를 반포하여 청의 근대화를 위한 여러조치를 시행할 것을 공표했다.

7월 19일에는 광서제가 직접 서태후 일파및 여러 보수적 권신들을 숙청하였는데 이는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이들은 서태후의 도움 아래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광서제도 신식 군대를 이끌던 원세개에게 이들의 동향을 보고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그는 황제의 명령을 겉으로 따르는 척만 한채 보수파에게 이를 밀고하는 등쿠데타 세력의 행동을 수수방관하는 동시에 이중간첩 노릇까지 수행한다.

결국 9월 9일 보수파는 정변을 결행하여 광서제를 자금성에 연금하고 개혁파 신료들에게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변법자강운동은 백일천하로 끝났다. 한편 한국과 내통하던 원세개는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는 것을 한국이 돕겠다는 약속을 받고 겉으로 광서제에게 본인의 불찰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밀지를 보냈다. 게다가 수개월 내로 원세개 본인이 이끄는 신식군대로 보수파를 박살내는 역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밝힌다. 이에 원세개를 전적으로 신뢰하게된 광서제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10월 16일, 정말 원세개가 신식군대(톈진항을 통해 밀입국한 한군도 포함되어있었다.) 이끌고 베이징으로 들어와 변변찮은 보수파 군대를 격파하고 자금성을 접수한뒤 광서제를 구출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본인의 군대를 이용해 마치 보수파 군대가 역습을 가한 것처럼 보이는 자작극을 꾸몄고 이에 당황한 광서제를 한국측 군대를 통해 산해관 너머로 빼돌렸다. 이때 한국과 원세개 군사들은 광서제가 밖을 보지 못하도록 사방이 막힌 어두컴컴한 식량조달용 수레에 실어 남부의 안전지대로 도망치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광서제가 심양의 단성관(但星館)이라는 양식 저택에 도착한 것은 8일뒤인 10월 25일 밤이었다. 원세개의 인사들은 이곳이 직예성 남부의 한단 모처라고 그를 속였으나 진비는 한단에 양식 저택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단성관에서 광서제와 진비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원세개가 베이징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는 글을 자주보내오자 거의 2주일동안 반강제로 갇혀지냈음에도 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광서제는 본인을 방어할 모든 수단을 빼앗긴채 청으로부터 만주를 빼앗은 적국인 한국의 손아귀에 빠졌다. 자신들의 영토, 그것도 신성히 여기던 만주를 빼앗은 한국에 옥체가 묶인 것은 그로써 대단히 참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분개하였고 진비와 여러차례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한국측에 발각되어 아예 그가 연금된 건물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11월 8일 광종이 광서제를 찾아와 그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광종의 알현, 원세개의 권력 장악

11월 8일, 광종은 광서제를 알현하기 위해 몸소 심양으로 행차한다. 그리고 신하의 예를 갖춘뒤 광서제에게 알현을 청했으나 두차례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진비의 조언으로 끝내 광종을 만났다.

광종은 스스로 한왕(韓王)으로 칭하고 광서제를 알현한뒤 절을 했는데 광서제는 칭제해놓고서 스스로를 낮추는 속이 뻔히 보이는 짓을 하지 말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광종은 과거의 고려에서도 칭제하되 송나라와 같은 대국 앞에서는 봉신국인 고려국왕을 자처했다면서 현재의 한국도 그와 다르지 않다며 몸을 더욱 낮추었다. 이에 광서제는 짐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광종은 신하의 국가로서 천자의 나라인 청이 우매하고 썩어빠진 관리들로 인해 망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며 원세개와 협력해 불충을 무릅쓰고 옥체를 이곳으로 모신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원세개가 한 조정에 보낸 서신을 보여주며 그가 베이징에서 광서제에게 불충한 짓을 저지른 이들을 처분하고 있으며 조속한 환궁을 위해 한 조정과 함께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광서제를 안심시키려했다. 게다가 만주에 한국이 진출한 것은 양이인 러시아가 감히 청의 영토를 침범했기에 이를 대신 벌하려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노기가 조금 누그러진 광서제는 아버지뻘인 광종이 계속 엎드려 있는 것이 불편했는지 그만 엎드리고 자신과 나란히 앉아도 된다고 하였으나 광종은 꿋꿋하게 절을 한채 말을 이어가다 광서제가 세차례 권유하자 자리에 앉았다.

이날 광종은 광서제에게 베이징의 불충한 관료를 직접 벌하는데 한국이 도울 것, 천자를 조속히 자금성에 환궁시킬 것 이 두가지를 약속했다. 이날 광종이 돌아간 후 광서제는 짐과 나라에게 힘이 없어 여전히 신뢰할 수 없는 한국에게 청조 사직의 운명을 맡겼다며 진비와 수행원들에게 한탄한 것이 진비의 일기에 기록되어있다. 광서제도 광종이 한 말이 전부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챈 것. 진비 또한 한왕(광종)을 믿을 수 없으나 그의 태도는 믿을 수 있다며 불안함과 기대를 동시에 내비쳤다. 그리고 후일 그녀의 행보를 보면 진비는 이미 당시의 모든 상황에 더하여 앞날까지 간파했던 것으로 보이나 광서제에게 일러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청나라 조정은 광서제가 사라진 사실에 발칵 뒤집혔다. 아무리 꼭두각시 황제였다고 한들 천자이자 곧 청나라 그 자체였던 황제가 사라진 것은 국가적인 변란이었기 때문이다. 11월 14일, 원세개는 자신이 서태후 일파의 정변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황제가 실종되었다고 발표했고 국가의 전력을 다해 황제를 찾겠다는 공문을 발표한다.

12월 7일, 조사 약 3주일만에 원세개는 광서제가 나타날때까지 자신이 섭정을 맡겠다고 선포했다. 서태후를 승덕의 피서산장에 연금하고 보수파와 개혁파들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숙청한 뒤였다. 이렇게 원세개는 차근차근 절대적인 독재권력을 쌓아나갔으며 광서제의 신변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도 가리지 않고 하옥시키고 처벌하였다. 게다가 청의 이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서양열강으로부터 권력을 인정받는 매국행위까지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원세개의 절대권력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의화단의 난 참조.

결과와 영향

광서제는 사실상 한국에게 감금당했으며 당연히 청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원세개는 황제를 공격한 죄를 물어 서태후 일파를 대대적으로 처형하고 서태후는 승덕 피서산장에 연금했으며 변법자강운동에 참여했던 개혁세력 인사들을 위협하여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원세개가 청의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스스로 직예총독, 대도독에 올라 섭정을 선포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무술천궁이 일어난 순간 청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의화단의 난이 끝나고 한국에 의해 서태후와 원세개 일파등 광서제의 명목상 친정에 반하는 모든 세력은 제거되었고 광서제는 자금성으로 환궁하여 다시금 절대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 천단과 태묘에서 대규모 제례를 올렸으나 제례 수행을 위한 자금조차 한국 정부로부터 나왔다. 한마디로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하긴 했으나 사실상 모든 정치행위는 한국 정부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극적이게도, 광서제는 즉위한 뒤부터 1905년 광종에게 제위를 선양할때까지 허수아비 황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