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 광서제 정실황후
효목경황후 | 孝穆景皇后
존호 덕임왕후 (德林王后)
장경태후 (章敬太后)
시호 효목장경인헌위무덕임순현재원각의정화경황후
孝穆章敬仁憲魏武德林純顯載元恪毅貞和景皇后
출생 1876년 2월 27일
청나라 직예성 베이징
사망 1981년 6월 30일 (105세)
대한국 심양도급시 인경궁
능묘 숭릉(崇陵)
재위 청의 황후
1901년 10월 6일 ~ 1909년 2월 14일
만왕후 / 만왕태후
1909년 2월 15일 ~ 1981년 6월 30일
인경궁 장경태후
1951년 7월 6일 ~ 1981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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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광서제의 두번째 정실황후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이다. 본래 후궁출신으로 광서제의 총애를 받아 황귀비에 책봉되었으나 의화단의 난 이후 광서제가 복위되자 곧바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광서제가 광종에게 제위를 선양한 후 만왕후(滿王后)에 봉해졌다. 1951년에는 세조로부터 장경태후(章敬太后)라는 존호를 받으며 선대황후로 인정받았다. 사후에는 황후의 예에 맞추어 국장을 치렀으며 시호도 효목경황후(孝穆景皇后)로 올려졌다.

생애

입궁

환란의 시기

만왕후(滿王后)

1951년 3월 7일, 세조가 몸소 인경궁이 있는 심양으로 행차하여 왕태후를 알현하고 장경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 이때 무종이 계단참 위에 서있던 태후에게 절을 올리자 그녀는 놀라서 뛰어내려오며 폐하께서 이러시면 안된다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자 세조는 태후께서는 나라의 큰어머니이시니 마땅히 절을 올리는 것이 옳다고 답했고 만수무강하시라는 뜻에서 정중히 예를 갖추고 다시 절을 하자 태후는 어쩔 수 없이 절을 받았다. 그런데 세조는 이미 여든살의 노인이었고 태후보다도 5살이 많았다. 이때부터 왕태후는 언론이나 공식석상에서 황태후 칭호를 얻게 되었고 인경궁도 황실 별궁으로 승격되어 특별관리를 받게 되었다.

사진관 할머니

1952년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하던 그녀는 76살이라는 노구를 이끌고 심양에 사진관을 연다. 사진관 이름은 아름다운 거울이라는 의미의 화경(華鏡). 그녀는 아침에 일찍 궁을 나서 사진관에서 일하다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을 승하할때까지 반복한다. 전문 사진술을 배우고 여러 최신 카메라를 능숙히 다룰줄 알았던 태후의 사진관은 대흥행하며 5,60년대 한국에 사진촬영 열풍을 불러오기까지 했다. 사진관 화경은 가족사진과 결혼사진만 찍어주었고 비용은 무료였다. 처음에는 오는 사람들마다 찍어주었지만 사람이 너무 몰려들어 태후의 경호에 문제가 생겨 예약제로 바뀌었는데, 한번 예약하면 몇개월 후에나 찍을 수 있었다.

승하

태후가 말했다.

“하나의 왕조가 흥하고 쇠할 수도 있는 시간을 거닐며 말못할 회포가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물러났을지라도 국모였던 이로서 그것을 함부로 입밖에 낼 수는 없는법. 수많은 회한은 내가 짊어지고 떠날테니 너희들은 괘념치 말고 본업을 소홀히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이에 장손 만왕이 눈물을 흘리며 영을 받들겠다라고 말했다.
인경궁실록 장경태후편 18권 융희 3년(1981년) 6월 29일 마지막기사

6월 29일, 태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익종 황제 내외와 현문왕의 처인 며느리 현영순, 4대 만왕 예성왕 내외, 장녀와 차녀인 장명공주 내외, 장화공주 내외가 인경궁을 방문했다. 태후는 황제와 가까운 가족, 사관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침소에 들지 못하게 했으며 오후 11시 30분경부터 임종을 지킨 십여명 가량의 사람 각자에게 짧은 유언을 남기고 다음날인 30일 새벽 2시 경 승하했다.

장례는 제왕의 예로 치른 부군 광서제와 달리 황후의 예로 치렀으며 이때 광서제도 선황의 예로써 제례를 치렀다. 태후는 7월 3일부터 7월 21일까지 약 3주간 상을 치른뒤 부군이 잠든 심양 숭릉에 안장되었다. 숭릉 옆에는 청 태조 누르하치의 능인 복릉이 위치해있는데 청의 초대 황제와 말대 황제 그리고 그들의 황후가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평가

망국의 황후였고, 부군인 광서제와 본인이 똑똑한 사람이었던 덕택에 현대의 평가는 동정이 약간 섞인채 매우 우호적이다. 아울러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황후의 신분이었던 데다가 광서제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제위를 선양하면서 효목경황후는 서태후처럼 정치면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을 여지조차도 없었다.

굉장히 영민하고 당찬 인물이었다. 광서제에게 황제의 위엄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하여 20년간 서태후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던 그가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여러 근대화 조치를 밀어붙일 수 있게 도왔고 무술천궁의화단 운동을 거치며 망국에 다다라서야 황권을 되찾은 광서제와 함께 정사를 돌보기도 했으며[1] 서양 국가들을 이간질하여 윈난성의 벌목권을 지켜내는등 정치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로서도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청을 되살릴 수는 없는 것을 짐작했는지 1904년에는 만족소집령(滿族召集令)을 내려 1909년까지 약 240만명에 이르는 만주족을 베이징을 비롯한 직예성 북부에 모여살게 하였고 1909년 광서제가 광종에게 선양할 때 만주족이 만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광종을 협상하여 만주족의 대량 이주를 관철한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이후 미처 피하지 못한 만주족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오열했다고 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항일투쟁을 외치며 만주족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이끌어 내어 전쟁에 도움을 주었고 본인의 장신구를 정부에 기증해 재정을 보태는 등 솔선수범하였다. 만주족은 재이주 후에 한국 정부로부터 여러 불이익[2]을 받았음에도 자신들을 지켜준 황후를 위해 기꺼이 전장에 나서 보답하였다. 전후에는 만주족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아지며 모든 불이익이 해제되었고 결과적으로는 황후의 행동이 한국내 각 민족의 조화를 이끌어낸 것이 되었다.

기타

그녀의 삶을 주제로하여 만든 미국, 한국, 중국, 프랑스의 합작 영화인 <마지막 황후>가 2004년 개봉되었다.

  1. 1902년 광서제는 황후의 정사개입을 허용했다.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2. 말을 비롯한 여러 가축 소유 금지, 총도검류와 활등 무기 소지 금지, 한국 정부가 지정한 곳에서만 모여 살 것, 성과 이름을 조선식으로 바꿀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