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상 전함 계획 1917년형 (푸른 오얏꽃2)


제1차 세계 대전의 대한제국 황립해군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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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상 전함 계획 1917년형
제원
함종 초중전함(試製案)
제작 연일 해군 공창, 현대중공
운용 대한제국 황립해군
건조기간 1917~1918[1]
예산  5,000만원
제원
함급 율곡급
배수량 약 47,000 ~ 51,000t
전장 230m
선폭 27m
터빈  고압 증기터빈 × 4축 추진
출력 약 110,000 shp
속력 21Kn (추정), 26Kn (설계상)
항속거리 14노트로 7,500해리
승조원 약 1,400명
무장 11년식 400mm 45구경장 3연장 주포 5기

개요

박효상 전함 계획은 대한제국 해군이 제1차 세계대전 중반기에 제시한 초중전함(超重戰艦) 개념 설계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영국·러시아 등 열강의 해상 전력에 대응하고 동아시아 해양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거함으로 기획되었다.

박효상 전함은 총 5기의 3연장 400mm 주포(총 15문)를 탑재하고, 전장 230미터, 26노트 이상의 항속력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이는 동시기 열강의 주력함(예: 퀸 엘리자베스급, 바이에른급)을 능가하는 수치로, 대한제국 해군의 기술적, 상징적 도약을 상징하는 초중전함(Super-Heavy battleship)으로 여겨졌다.

건조 취소

1918년, 대한제국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열강 주도의 군비 축소 조약에 서명하면서, 박효상 전함의 건조는 용골 설치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당시 1번함은 황해 조선소 제2건함장에서 선행 공정에 들어간 상태였으나, 이후 폐기 조치되었고 일부 선체 구조물과 장비는 차기 경순양함 및 항공모함 개발에 전용되었다.


논란 및 회의적 평가

박효상 전함은 당시에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스펙과 현실성이 결여된 설계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기술적 의문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1. 400mm 3연장 주포의 실현 가능성
해당 계획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400mm 3연장 주포 5기의 채택이다. 당시 대한제국 해군이 실제로 채택하려 했던 11년식 해군포는 400mm 2연장형에 40구경장 구조였으며, 계획 도면상의 3연장 45구경장 주포는 개발조차 된 바 없다. 3연장 자체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해군 등에서도 연구되던 복잡한 구조이며, 주포 구경이 커질수록 배치, 반동 제어, 포탑 내부 구성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대한제국이 이 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2. 과도한 속력 설정
속력 26노트는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급(24~25노트)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당시 기술로 5기 주포탑을 탑재한 중량급 선체를 이 속도로 끌고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대한제국이 실용화한 고압 터빈 및 보일러 시스템은 이보다 출력이 낮았으며, 무장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실속력은 22노트 전후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3.비현실적인 배치 구성
총 5기의 3연장포탑을 ABQXY 형식으로 배치할 경우, 중앙부(Q포탑) 아래에 탄약고와 보일러실이 중첩되는 구조가 된다. 이는 피격 시 연쇄 폭발의 위험성을 높이는 설계 결함으로 평가되며, 실제 건조가 진행되었다면 배치를 변경하거나 포탑 수 자체를 줄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지나치게 과밀한 포탑 배치는 항해 안정성 및 구조 강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설계 배경

박효상 전함의 과감한 무장과 과장된 성능 목표는 단순한 군사적 판단만이 아니라, 당시 대한제국 해군의 정치적·상징적 욕망, 그리고 기존 전함 건조 성공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산물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1914년, 대한제국은 **초노급 전함 ‘세종함’**을 진수하며 조선사상 최대급 전함을 자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세종함은 주포 구경, 추진력, 장갑 면에서 영국의 오리온급이나 독일의 바이에른급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성능을 갖추었고, 실제 실전에서도 안정적인 탄착군과 피격 방어력을 보여주며 국민적 자긍심을 고양시켰다.

이 성공은 대한제국 해군 수뇌부에게 '우리도 열강 수준의 함선을 건조할 수 있다' 는 신념을 심어주었고, 이는 곧 더 크고 강한 것, 초노급을 넘는, 곧 '초중전함’ 수준의 무장과 성능을 추구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1916~17년 시점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나가토급 전함’을 건조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압도할 수 있는 화력과 방호력을 갖춘 대응 전함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세종함을 기반으로 화력·속력·장갑 모든 면에서 그 상위호환을 목표로 삼은 계획안으로 태어났다. 세종함의 주포는 385mm 2연장포였으나, 박효상 전함은 이를 400mm 3연장포 × 5기로 급격히 증강시켰으며, 속력과 장갑도 동시 강화를 노리는, 이론상 완전체 전함으로 설계되었다.

정치적 상징성과 선전적 의도

이러한 과도한 설계에는 단순한 군사적 목적 외에도, 국내 정치적 메시지와 해군 예산 확보를 위한 명분으로서의 목적이 있었다.

박효상 전함의 거대하고도 인상적인 사양은 국회 및 국민들에게 “해군이 국가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선전도구로 기능했다.

실제로 당시 해군본부는 박효상 전함 계획을 언론에 제한적 공개했으며, 기술자와 설계자의 이름을 앞세워 “순수 자국 기술에 의한 독립전함”이라는 프레임을 강조하였다.

전후

초중전함의 등장은 해군 전략 및 함정 설계 사상에 상징적 충격을 주었다. 특히 대한제국의 박효상 전함 계획안이 1차대전 종전 직후 외신을 통해 공개된 이후, 동시대 해군 관계자들과 군사 평론가들은 해당 설계가 실현 불가능에 가까운 과장된 괴물이라 평가하면서도, 그 발상 자체에 놀라움과 경계심을 동시에 표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국가는 일본 제국 해군이었다. 계획안이 공개된 1919년당시 일본은 나가토급을 통해 세계 최초로 16인치(410mm) 주포를 실전 배치한 전함을 진수하며, 거함거포주의의 상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박효상 전함이 채택한 400mm 3연장 주포 5기, 26노트 항속력, 복합 장갑 체계 등의 스펙을 접한 일본 해군은 설계의 현실성은 의심스럽지만, 그 구상 자체가 우리를 능가한다며 강한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기존의 순차적 증강 계획을 재검토하고, 1920년대 초반부터 박효상 전함을 의식한 초대형 신형 전함 계획들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때 등장한 계획이 바로 제13호형 전함, A-140 계획안, 그리고 훗날 실현되는 야마토급 전함이다.

  1. 용골 부분만 건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