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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1 ={{국기그림|도이치 정부}}<br />64,500명 전사<br />125,648명 부상<br />964명 실종<br />{{국기그림|이탈리아}}<br />52,321명 전사<br />82,728명 부상<br />1,253명 실종<br />'''전체 사상자''':<br />327,414명 (24.749%) | |사상자1 ={{국기그림|도이치 정부}}<br />64,500명 전사<br />125,648명 부상<br />964명 실종<br />{{국기그림|이탈리아}}<br />52,321명 전사<br />82,728명 부상<br />1,253명 실종<br />'''전체 사상자''':<br />327,414명 (24.749%) | ||
|사상자2 ={{국기그림|스위스}}<br />290,533명 전사<br />495,105명 부상<br />331명 실종<br />597,780명 포로<br />'''전체 사상자''':<br /> | |사상자2 ={{국기그림|스위스}}<br />290,533명 전사<br />495,105명 부상<br />331명 실종<br />597,780명 포로<br />'''전체 사상자''':<br />785,969명 (39.6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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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br/>{{국기그림|스위스}}<br />12,128명 사망<br />38,924명 부상<br />130명 행방불명<br />'''전체 사상자''': 51,182명 | '''민간인''':<br/>{{국기그림|스위스}}<br />12,128명 사망<br />38,924명 부상<br />130명 행방불명<br />'''전체 사상자''': 51,182명 |
2018년 7월 3일 (화) 20:09 판
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크롬, 제이위키 벡터 스킨 베이스 | 제작: Ernst | 프로젝트: Project 1988 | 모집: 사용자토론 | 세계관: 크리크 & 빌레
보덴위붕 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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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구의 일부의 일부 | |||||||
독일 산악군으로 활약한 이탈리아 알피니-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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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우폴벤 독일 이탈리아 | 스위스 | ||||||
지휘관 | |||||||
파트리크 코흐 울리히 슈뢰더 프레다 쾨제 위르겐 룀 에르빈 베른하르트 헬무트 폰 피팅호프 클라우스 슈미트 로베르토 루크 |
프리드리히 데어만 루돌프 카우피스츠 장 미셸 클레르 | ||||||
군대 | |||||||
병력 | |||||||
독일: 전체: 89개 사단 17,573개의 대포 14,701대의 전차 1,322기의 항공기 1,322,918명의 병사 |
스위스: 138개 사단 8,447개의 대포 2,781대의 전차 596기의 항공기 13척의 함정 1,983,749명의 병사 | ||||||
피해 규모 | |||||||
64,500명 전사 125,648명 부상 964명 실종 52,321명 전사 82,728명 부상 1,253명 실종 전체 사상자: 327,414명 (24.749%) |
민간인: 12,128명 사망 38,924명 부상 130명 행방불명 전체 사상자: 51,182명 |
보덴위붕 작전(독일어: Unternehmen Bodenübung) 또는 보덴 작전, 보덴 호 작전, 보데뉘붕 작전은 우폴벤 독일이 제3차 세계 대전 중, 중앙 유럽의 영세중립국 스위스를 침공한 작전이다. 암호명 "보덴위붕"은 독일어로 "보덴 호 훈련"을 뜻한다. 1989년 1월 14일 새벽, 독일은 스위스를 침략하였다. 우폴벤은 스위스의 철도와 도로의 사용을 요구하며 압박을 가해왔고, 스위스는 그럴 때마다 항상 단호히 거절해왔다. 스위스는 1월 1일부터 국경 지대에 지뢰를 매설했으며, 알프스 산맥과 쥐라 산맥을 통과하는 모든 터널과 선로, 아스팔트 도로 심지어 공항까지도 유사시 폭파할 수 있도록 폭약을 설치하고 독일이 침략한다면 스위스의 교통을 이용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1월 2일 스위스의 남성의 89%이상이 전선에 배치되고 1월 3일에는 전시동원령을 선언하고 여성의 60%이상이 공공기관과 공장에 동원되었다. 또한 거의 매일 방공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독일은 스위스가 독일과의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고 선동하였고 미리 그러한 야욕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발발시켰다.
우폴벤 독일은 훈련(übung)이라는 명칭을 채택하였으며, 실제로 도이치 국방군 사령부(MKD)는 대거의 공수사단과 산악사단을 투입하여 앞으로의 공수 작전과 산악 작전에 대비할 수 있게 되길 원했다. 이들은 주로 험지에 투입되었으며, 평지에는 최근에 편성된 야전군들을 투입시켰다. 대신 충분한 장비가 지급되었고 독일 본토와 맞닿아 있고, 독일 산업의 중심지인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와 인접하여 보급의 이점을 타지역보다 잘 느낄 수 있게 했다.
각국의 군사력
우폴벤 독일
독일군(Deutschwehr)은 1988년 동안의 2개의 군집단 규모, 약 64만 명의 병사가 전사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8할 이상은 네덜란드인, 벨기에인, 오스트리아인, 체코슬로바키아인,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과 같은 타민족이었다. 그러는 동안, 독일에서는 정예군(일명 교도사단)의 교육 아래 수 십만의 유럽인이 교육을 받으며 계속해서 전선에 배치되었다. 아직 완전히 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병사들은 후방군으로 남아서 배정된 지역에서 교육을 계속 받아야했다. 이러한 후방군은 크게 재편성 및 인원 보충을 위한 재편후방군과 아직 훈련을 이수하지 못한 재학후방군으로 나뉘며 재편후방군으로는 제10집단군, 제14군, 제16군과 제17군 2개의 군집단이 있다. 재학후방군에는 제38군, 제39군, 제46군, 제58군, 제59군, 제60군, 제61군, 제62군 총 8개의 야전군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군은 특수병종에 대한 전문 교육을 실시했다. 대표적으로 공수병종과 산악병종, 스키병종, 해안방어병종이 있다. 특히나 공수병종과 산악병종에서 1개 야전군 이상의 규모를 확보했으며, 해안방어병종은 일반병종과 함께 수 십개의 야전군으로 나뉘어 해안에 배치되었다.
1988년동안 독일의 산업 중추인 독일 공업 기술 연구기관(DITRI)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덴마크, 스웨덴에 대규모 군수공장단지를 구축하고, 연말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에서 농업력을 증강시키고 영국의 북부와 아일랜드 등지에서도 공업력 증진을 위한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이와 함께 대규모 해안 방벽 계획 또한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진행되었고 사실, 요새는 해안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독일 본토와 점령지, 영도자령 지역의 경계에서도 구축되었다. 이외에도 해협과 주요한 해로에 기뢰가 부설되는 등 해안으로의 침입에 대항한 많은 계획이 진행되었다.
독일군의 지휘계통에서도 큰 개편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육군으로 독일 육군 사령부(HQH)아래에 서방 원정군 사령부, 동방 원정군 사령부, 남방 원정군 사령부, 북유럽 원정군 사령부 등의 지역 사령부가 분화되어 새로이 생겨났다. 북유럽 원정군 사령부(KNE)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아이슬란드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남방 원정군 사령부(KSE)은 발칸 반도와 동지중해 일대를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병력은 서방 원정군 사령부(KWE)와 동방 원정군(KOE) 사령부에 배치되는데 각각 서독부터의 서유럽, 영국과 동독부터의 동유럽의 군대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해군은 국내사령부으로 유럽의 10개의 항구도시에 지역사령부를 설치하였고 크게 각각 대서양, 남방, 북방, 흑해, 발트해, 북해로 나누었다.
독일군은 지휘계통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 규모와 장비의 질의 면에서 크게 향상되었다. 1988년의 마지막 달 유럽 전역에 배치된 독일 육군은 135개의 야전군 즉, 1,485개의 사단 규모, 명 수로 따지자면 약 2200만의 명이었다. 해군은 총 9개의 함대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고속정 이상의 군함 170여 척이 활동하고 있었다. 공군은 1989년이 되기 전까지 1만 여대의 군용기를 배치했다. 장비 면에서도 푼크트리히터 전차과 라인메탈 88형 전차가 양산체제에 돌입했고, 구데리안 구축전차도 생산을 시작하였다. 소총에서도 기존 총기가 HK88로 교체되는 등 육군은 장비 면에서 매우 많은 진보를 1년 동안 진행했다. 반면 공군과 해군은 연구 활동에서 확고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스위스
스위스는 냉전 체제의 혼란 속에서 군사 개혁을 하여 일명 61 군사 체제를 구성하여 제1군단, 제2군단, 제4군단, 제3산악군단을 국경에 배치했는데 우폴벤 독일이 프랑스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는 시점에서 88 군사 체제로 재편성하였다. 유사시 징병 대상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그리하여 제1군, 제2군, 제4군, 제5군, 제3산악군으로 편성되었다. 총 77개의 사단으로 지역 전투시 만 15세 이상이 징병 대상이 되었고, 전면전 발생시에는 만 12세 이상의 남성은 무조건 전선에 나가야했다. 하지만, 급격한 군사 상황의 격변으로 인적 물자와는 반대로 장비와 같은 물적 자원이 크게 부족한 위기가 찾아왔다. 그들은 SIG SG550 돌격소총의 생산량을 두 배 어쩌면 세 배로 만들어야 했다. 또한, 스위스군에서 운영 중인 주력전차는 독일에서 1호 주력전차 2형으로 불리는 레오파르트 2호 전차가 가장 최신예였는데, 이들은 독일군의 최신예인 3호 주력전차보다 방호력과 화력이 약간 부족하였으며, 그 수 또한 적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레오파르트 2호 전차를 개량하여 한 달에 80대 정도를 생산했다. 그렇게 하여 1989년 1월 1일까지 총 450 여대를 생산하는데 그쳤다. 대신, 판저 68 전차를 양산에 쉽게 개조하여 같은 시일까지 천 여대를 생산하였고 미국에서 M1 에이브람스 전차 4백 여대를 구입하였다. 공군은 군사 개혁으로 구식이 된 F-5 대신, F/A-18를 50대 더 생산하는 등 장비 교체를 주로 장비를 확보하였다.
1988년 9월 이후로 프랑스가 완전히 점령당하면서 외부의 보급이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린 스위스의 군수 물자 생산량이 절반 이하으로 급락하였다. 특히나 석유를 해외에 어느정도 의존했던 스위스는 석유를 아끼기 위하여 여러 사회 캠페인과 당시 현존하는 국내의 석유의 국유화를 추진했고. 전쟁에 대비하여 효율적으로 분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스위스의 군 규모는 어느 군대보다 (독일군보다는 아닐 수 있지만) 빠른 성장과 탈바꿈을 보여주었다. 총 군인 수는 140만 명에서 200만 명에 육박했고 2,700 여대의 전차를 보유하게 되었고, 590 여대의 공격기를 운영했다. 산악 지역은 부비트랩과 지뢰들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후방 진지선을 보호했다. 제네바와 보덴 호 연안의 평야에 주요 군대가 배치되었다.
개전 전 단계
스위스는 독일이 독일민주공화국를 침공할 때부터 큰 위기 의식을 느꼈다. 스위스의 대통령이었던 오토 스티치(Otto Stich)는 '준 분쟁 상황'을 선포하고 독일 또는, -길을 내어 달라는- 독일의 적대국와의 분쟁 및 전면전에 대한 대안을 생각했다. 우선 1988년 2월부터 성향은 급진적이었지만 냉철하고 침착한 판단력으로 유명했던 파비안 뷔어키를 전시수상(戰時首相)에 취임시켰다. 이 시기부터 스위스는 파비안 뷔어키와 새롭게 연방군의 참모총장에 오른 로만 크라이슬러에 의해 개혁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