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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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왕 · 소노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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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계
() () () ()
소노가씨
소노가 가문의 가몬
소노가 석류
() () ()柘榴 (ざくろ)
본성 김해 김씨(金海金氏)?[1]스이씨(須伊氏)[2]
가조 소노가 쓰네키요(素能我恒精)[3]
종별 무가(武家)
왕실(王室)[4]
출신지 고려(高麗)
근거지 사와리국(狭張国)[5]후마(風馬)
지류 · 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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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요(御三葉)[6]
 다이라요(大羅葉)
 신로쿠요(寝鹿葉)
 고코요(五向葉)
당주 소노가 쓰네요시(素能我恒温)

소노가씨(일본어: 素能我氏 (そのがし) 소노가시[*])는 소노가 쓰네키요가 개창한 씨족으로 오늘날에는 후마 국왕왕족들을 가리키며 후마 왕실(일본어: 風馬王室 후마오시쓰[*])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사와리국슈고 가문이었으나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해 ·조선 등과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고쓰치미카도 덴노로부터 '후마노키미'(風馬王)[7]라는 작호를 하사받으며 명목상의 번국(蕃国)으로서 자립하였다.

도리지(通字)[8]는 '恒'(쓰네)와 '精'(기요)이며, 현 당주는 소노가 쓰네요시이다.

역사

출신

소노가씨는 고려 삼별초 출신의 장수, 김항정일본에 귀부한 뒤 창시한 도래인 씨족이다. 그는 여몽연합군에 맞서 탐라에서 항쟁을 주도하던 중 승산이 없다고 판단, 1272년 초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사와리섬으로 향했다. 당시 사와리섬은 일본의 고키시치도[9]사이카이도에 속한 구니(国) 중 하나였으나, 일본 열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이유로 오랫동안 토착 호족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사와리섬에 도착한 김항정은 삼별초의 항쟁 동안 쌓인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호족들을 빠르게 제압했으며, 그들로부터 오코시카무키(於古斯加牟岐)[10]로 추대되었다. 사와리섬을 장악한 김항정은 그곳에서 대몽항쟁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1273년 탐라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고려에 항복하는 대신 가마쿠라 막부와 접촉하는 길을 택했다. 이듬해인 1284년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사절을 보내 귀부를 청했고, 당시 막부를 통치하던 싯켄[11] 호조 도키무네원나라와 고려의 침략 위협 속에서 김항정의 사절을 환대하고 조정을 통해 그에게 우지인 '스이'(須伊)[12]가바네 '아손'(朝臣)을 하사토록 만든 뒤 사와리국 슈고[13]로 임명하였다.

그 뒤 김항정은 소노가향(素能我郷) 인근에 저택을 지었고, 그곳의 지명을 묘지(名字)[14]로 사용함으로써 소노가씨가 되었다.

자립과 왕조 개창

사와리국은 형식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노가씨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초기엔 원나라의 일본 원정이라는 군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했지만 원나라의 일본 정벌이 실패로 끝나고 호조 도키무네 사후 가마쿠라 대지진[15]을 시작으로 시모쓰키 소동[16]헤이젠몬의 난[17], 안도씨의 난[18], 악당[19] 등 사회적 혼란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지배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자 소노가씨는 막부와의 주종 관계 속에서 벗어나 다원적 천하질서의 주체 중 하나가 되려 했다.

소노가 무네키요는 휘하 호족은 물론 지토[20]재청관인[21]들을 가신으로 삼는 피관화(被官化)를 통해 토지 지배와 행정권까지 장악하며 소노가씨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사와리섬 일대가 오랫동안 조정막부에 복속되지 않았기에 고쿠시[22] 등의 율령제 아래에서 소노가씨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부재한 상태였고,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 시기부터 두각을 드러낸 슈고 다이묘 보다도 훨씬 일찍 자립할 수 있었다.

뒤이어 그는 대내적으로 최고정무기관인 하카리도코로(議所)를 설치하고 정기적인 토지 측량 사업인 진세이료치(鎮星量地)[23]를 시행, 이를 바탕으로 연공군역을 부과하는 등 통치 체계에 기틀을 다지는가 하면, 대외적으로는 사략선을 운용해 전라도한반도 남부 해안지대와 조운선을 약탈하고 동시에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이후 벌어진 난보쿠초 시대라는 혼란상을 틈타 일본 본토에서 넘어오는 왜구들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힘썼다.

남북조간의 분란 속에서 소노가씨는 표면적으로는 고다이고 덴노를 필두로 한 남조를 지지하였으나,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가 주도하는 북조와 교류했고 1363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라헨키[24]를 받아 '소노가 요시키요'로 개명하였다. 무네키요 사후 당주가 된 소노가 쓰네유키원말명초 속에서 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천하질서가 구축되자 홍무제를 상대로 봉표칭신의 예를 갖춘 표문을 보내며 적극적인 통교를 시도했다. 이에 1374년 홍무제는 소노가 쓰네유키를 '풍마국왕'(風馬国王)으로 책봉하면서 3년 1공으로 전쟁물자로서 중요했던 풍마산 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반대 급부로 각종 약재와 서적 등을 주기적으로 공급함에 따라 조공 무역은 후마의 큰 이익이 되었다.

1392년 남북조합일로 일본에서의 혼란이 종식되자 쓰네유키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무로마치 막부와의 통교를 재개했다. 쓰네유키가 보낸 가신단은 명과의 조공·책봉 등 그간의 사정을 통보하며 자신들이 막부의 신하가 아닌, 천황을 정점으로 한 조정제후임을 주장하며 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가신단의 태도가 불손하다며 문전박대했고 소노가씨가 세습하던 슈고 지위를 박탈한 뒤 후마 정벌을 주장했지만 1428년 그가 사망하자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소노가 요리키요는 일본을 대신해 조선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자 1421년의 사절단을 보내면서 이전까지 있어왔던 한반도와의 악연을 매듭지었다. 또한 류큐쇼시쇼왕이 사신을 보내자 이에 대한 회답사를 보내는 등 다각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대내적으로는 하카리도코로를 소노가씨의 가정기관(家政機関)으로 역할을 축소한 뒤, 기조슈(議定衆)를 중심으로 한 관제로 정비했고 소노가씨의 방계 중 세 가문을 고산요(御三葉)로 지정하여 묘지가몬 사용, 그리고 종가의 후사가 끊길 시 후계자를 배출할 권리를 주어 가문 단절과 체제 위협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게 했다. 또 쓰유 성(津湯城)을 축조해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고 민속신앙신토의 영향을 받은 불교 종파인 선오종(先悟宗)을 후원하여 세이칸지(正寛寺)를 세우는 등 문화적 진흥에도 힘썼다.

요리키요로부터 가독을 이어받은 소노가 쓰네토모 대에 일본에서는 메이토쿠 화약[25]에서 약조한 양통질립[26]의 원칙을 무시하고 고하나조노 덴노가 즉위하자 남조 부흥 운동(후남조)이 일어나 금궐의 변[27]과 같은 정치적 혼란이 재개되기 시작했으며, 1467년 쇼군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오닌의 난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 이때 쓰네토모는 오닌의 난에 의한 전란으로 궁핍해진 황실에게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고, 고쓰치미카도 덴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후마노키미'(風馬王)로 봉하였다. 또한 그는 오닌의 난에서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지지했고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히사는 쓰네토모를 막부의 신하가 아닌, 천황 아래 동등한 제후임을 인정하면서 둘 사이의 오랜 갈등은 수십년이 지나서야 종결될 수 있었다.

가독 계승 전쟁과 대항해시대

1477년 쓰네토모의 장남인 소노가 히로키요는 당주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고, 후사도 없이 요절하였다. 그러자 후계 문제를 두고 고산요 내에서 분쟁이 벌어졌는데, 고산요 내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다이라요의 가주 소노가 쓰네모리는 자신의 아들 소노가 다카키요를 보위에 올리고자 했고, 신로쿠요고코요는 다이라요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발하였으나 도리어 쓰네모리는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쓰유 성을 장악한 뒤 다카키요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자 다이라요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호족들도 후계 문제에 개입하였고, 다이라요를 지지하던 호족들 역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1478년 다카키요의 즉위를 반대했던 나카토게진[28]의 호족 오야카리 히로후사[29]가 다이라요의 본거지, 아리타마를 급습해 쓰네모리의 차남을 비롯한 다수의 가신을 참살한 덴로몬의 변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를 소노가씨 가독 계승 전쟁이라고 부른다. 수년간 이어진 전란은 양측 모두 소모전을 강요받았고, 1483년 쓰네모리가 사망하자 구심점을 잃은 다이라요 세력은 강화를 제의했다. 그 뒤 다카키요의 즉위를 인정하되 후계 단절 문제가 발생할 시 다이라요를 제외한 두 가문끼리 협의하여 배출한다는 내용이 담긴 세이카 화약을 맺으며 전쟁은 종결되었다.

힘겹게 왕위에 오른 다카키요였으나, 기조슈의 최고위직인 싯세이(執制)를 포함한 핵심 관직들을 다이라요를 제외한 나머지 두 고산요의 사람들이 독점하면서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를 기점으로 '후마노키미'(또는 풍마국왕)는 실권 없는 바지사장의 역할로 전락하였고 실질적인 통치는 기조슈와 호족들의 합의기관인 헤이코(評侯)를 중심으로 하는 이중적 지배 질서로 확립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후마의 정세는 고카지 준사에의 난[30], 한치 전쟁[31] 등을 비롯한 사회적 혼란을 거쳐 점차 안정되었으며, 1540년대부터는 일본에서 전래된 연은분리법을 도입해 스미에 은광을 개발했다. 스미에 은광에서 채취·가공된 풍은(風銀)은 일본과 명나라는 물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남만무역에도 이용되어 후마를 대항해시대 이후 형성된 국제무역질서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소노가씨는 광산 일대를 직할령으로 삼아 은 공급을 통제해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한편, 포르투갈 상인들과 함께 들어온 예수회 사제 주앙 자카리아스를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래되어 가톨릭 성당이나 미션스쿨이 세워졌으나 당시 싯세이였던 소노가 기요토시천주교가 통치 질서를 위협하다고 판단해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의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다테즈쓰미(館堤)[32]를 유일한 교역 창구로 지정했다.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후마에 국서를 보내 명나라 정벌을 위한 군량미와 군역을 요구했으나, 소노가씨는 명나라의 책봉국이라는 지위와 조공무역이라는 경제적 이득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 뒤 명나라의 사신을 보내 일본의 상황을 전달하고 내부적으로는 호족들에게 침략에 대비해 성곽을 보수할 것을 명령, 군역 체계를 정비하는 등 전란에 대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에도 막부가 세워지자 그동안 중단되었던 통교가 재개되었고 내부 정세를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정기적인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한편,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입조해 기존 명나라와의 조공책봉관계를 계승함으로써 청일 간 중개무역을 주도하는 등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영국의 보호와 일본의 지배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서 평화를 구가한 소노가씨는 서구 열강제국주의 침탈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특히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부동항을 확보해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영 제국 간의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고, 1861년에 벌어진 쓰시마 점령 사건[33]은 영국으로 하여금 극동에서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군사·보급기지 확보의 필요성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이에 영국은 동중국해에서 대한 해협을 감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후마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자 극동에서 영국의 해상 패권을 위협할 세력이 사라지면서 후마의 전략적 가치는 급감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이후 영일 동맹이 파기되자 일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던 영국은 1923년 시기쓰 조약의 일방적인 파기를 선언한 뒤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그동안 영국과의 관계로 후마 정복을 단념하고 있었던 일본은 당시 국왕인 소노가 쓰네타카에게 수차례에 걸쳐 후마 병합에 대한 조약 체결을 강요하며 침략 야욕을 드러냈고, 쓰네타카가 이를 거부하자 1930년 5월 27일 1만 명 규모에 군사를 호쿠쓰에 상륙시키면서 풍일전쟁이 발발했다.

후마군은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전력차를 뒤집을 수 없었고, 결국 한 달 만에 수도 교텐은 함락되었다.

  1. 최초의 정사(正史)인 풍마세표(風馬世表)에 따르면 삼별초 장수 김항정(金恒精)이 2천 여명의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사와리섬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나, 본관 등 그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 1284년 김항정이 고우다 덴노를 알현해 귀부를 요청했고, 이에 우지(氏)로서 '스이'(須伊), 가바네(姓)로 아손(朝臣)을 하사받았다.
  3. 본래 이름은 '스이노 쓰네키요'(須伊恒精)
  4. 일반적으로 1374년 소노가 쓰네유키명나라 홍무제로부터 풍마국왕(風馬国王)을 책봉받은 시점을 개국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며, 1469년 소노가 쓰네토모고쓰치미카도 덴노로부터 후마노키미(風馬王)로 봉해진 시점을 시작으로 보는 소수설도 있다.
  5. 지금의 후마 일대에 설치한 율령국(律令国)으로 사이카이도(西海島)에 속하였다.
  6. 미국 점령하 후마 제도 시기에 포고된 '왕실 존치 및 유지에 관한 행정 명령' 이후 직계만이 왕족 지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오늘날 이들 방계 가문은 모두 민간인 신분이다.
  7. 이외에 '안자이타이쇼군'(安西大将軍)이라는 관위까지 임명받고자 했으나 공가무로마치 막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8. 가문 대대로 인명에 사용되는 한자를 의미하며 대표적으로 오다씨의 '信'(노부), 도쿠가와씨의 '家'(이에)가 있다.
  9. 아스카 시대부터 사용한 옛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기나이(수도권)의 다섯 율령국(律令国)과 기나이 밖의 일곱 (道)를 일컫는다.
  10. 후마벤으로 대왕(大王), 대군주(大君主)를 의미하며, '카무키'(加牟岐)는 당시 사와리섬의 호족들을 지칭했다. 어원은 가야에서 군주를 부르던 호칭인 한기(旱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11. 執権, 쇼군을 대신해 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으로 막부의 중심기관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를 장악하면서 실권을 차지했다.
  12. 김항정의 성인 金의 초기 중세 한국어 발음인 'swoy'(쇠)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13. 守護, 쇼군에 의해 파견되어 구니를 감독하던 지방관으로 조큐의 난 이후에는 군사·치안에 관한 권리를 확보했다.
  14. 苗字(みょうじ)라고도 하며, 중국(字) 개념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구쿄(公卿)에서 저택이 소재한 지명 등을 묘지로 삼은 것이 공가무가에서도 사용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성씨를 의미하게 되었다.
  15. '에이닌의 간토지진'(永仁の関東地震)이라고도 부르며 1293년 간토 지방 남부에서 일어났다. 규모는 M8.0으로 추정되며 수만 명이 사망하는 등 가마쿠라 막부 붕괴에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6. 霜月騒動, 1285년 유력 고케닌이었던 아다치 야스모리나이칸레이 다이라노 요리쓰나 간의 대립이 격화, 요리쓰나측이 야스모리 세력을 멸망시킨 사건이다.
  17. 平禅門の乱, 1293년 시모쓰키 소동 이후 막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행사하던 다이라노 요리쓰나호조 사다토키가 처단한 사건이다.
  18. 安藤氏の乱, 에조의 봉기와 안도씨의 내분 등 일련의 사건을 총칭한다.
  19. 悪党, 중세 일본에서 지배층이나 체제에 반항하여 소란을 일으켰던 사람이나 집단을 의미한다.
  20. 地頭, 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장원공령에서 징세, 행정 업무 등을 담당한 지방관이다.
  21. 在庁官人, 지방 행정 실무에 종사한 지방관들의 총칭이다.
  22. 国司, 조정에서 지방의 율령국을 감독하고자 파견한 지방관이다.
  23. 진세이(鎮星)는 토성의 다른 명칭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이해한 토성의 공전주기인 28년마다 시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24. 偏諱, 공을 세우거나 관례를 통해 자기 이름 중에 한 자(字)를 내려주는 일을 말하며 이를 통해 주군과 가신간의 결속을 추구했다.
  25. 明徳の和約, 남북조합일 과정에서 체결된 약정으로 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가 북조의 고코마쓰 덴노에게 삼종의 신기 인도, 황통 계승 등의 내용을 담았다.
  26. 両統迭立, 고후카쿠사 덴노의 자손인 지묘인 황통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인 다이카쿠지 황통이 서로 번갈아 황위를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27. 禁闕の変, 1443년 후남조 세력이 야습을 감행해 삼종의 신기를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28. 진(鎮, ちん)은 본래 주둔군의 편제 단위 중 하나였으나 가독 계승 전쟁 이후 호족이 다스리는 장원을 의미하게 되었다.
  29. 세이카 화약 체결 이후 덴로몬의 변에 대한 책임이 거론되면서 끝내 처형되었고 그의 친족들 또한 토지 몰수나 신분 박탈, 유배 등의 처벌을 받게 되었다.
  30. 小梶純佐衛の乱, 1504년 아마타니진(甘渓鎮)의 요토(邑頭, 촌락의 대표자) 고카지 준사에를 중심으로 영민들이 과도한 연공 납부와 고리대금에 반발해 일으킨 민란이며,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번주 히쓰기노 가타히사(棺野堅久)는 폭정의 책임을 지고 수도 교텐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31. ヤリイカ戦争, 1516년 다키마에진(滝前鎮)이 호쿠쓰(蓬苦津) 어부 및 상인들에게 한치 잡이와 유통을 금지시키자, 호쿠쓰에서 자체 무장 및 용병을 동원해 저항하면서 벌어진 항쟁이다.
  32. 본래는 '시모가하마'(下ヶ浜)로 불리던 작은 어촌이었으나 포르투갈 상관(商館)이 들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서구와의 교역을 독점하면서 다테즈쓰미로 이름이 바뀌었다.
  33. 당시 러시아 군함의 이름을 따서 포샤드니크 호 사건(ポサドニック号事件)이라고도 부르며, 러시아 군함이 쓰시마(対馬) 아소만(浅茅湾) 남부에 있는 이모자키(芋崎)를 점령해 막사와 공장, 연병장 등을 건설하고 반년 동안 체류했던 사건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