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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제국
국기
(2137년?)[1]2296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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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군수를 선출한 2137년
  • 신안 공국 선포 2189년
  • 신안과 진도 간의 전쟁 2190~2205년
  • 목포 점량 및 신안 왕국 선포 2243년
  • 신안 제국 선포 2296년
  • 신안 공위기 2335~2338
  • "대반란" 2400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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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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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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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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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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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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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국교
개신교(국교)
소수 종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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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해양 제국
지도자 (황제)
김문어
소금.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그 하얀 물질은 때로는 같은 양의 금과 같은 가치를 가집니다. 신안의 염전사업은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지만 막대한 노동력 역시 필요로 하였습니다. 수많은 노예들로 유지되던 신안의 공포정치는 신성복음연합과의 전쟁, 그리고 피로스의 승리로 촉발된 대규모 반란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목표와 신안의 섬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상실한 황제는 다시 찬란했던 영광을 되찾고자 합니다.

개요

사건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문명.
과거 바다의 패권을 쥐었던 해상 무역제국 신안, 몰락 제국 신안. 그들은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한다. 현재 지도자는 김문어로 종교는 개신교이다.



역사

백색 황금의 땅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신안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은 '사건'에서 많은 것들을 살아남게 해주었다. 본토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은 신안은 사건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사회를 재건하였고 배를 만들어 주변으로 진출하게 되는 여건을 제공해주었다. 22세기 초반 육지와 접촉하며 신안은 육지에 소금이 매우 희귀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건 이후 기존의 정제염 공장들은 무너져 내렸으며 한반도에서는 암염 또한 존재하지 않았고 소금을 생산하는 해안가와 내륙의 유통망 등이 모두 소멸했던 것이다. 소금의 음식 보존부터 살균, 식용까지 때때로 생존에 필수적인 특성들 그리고 희귀성에 의해 소금의 가치는 황금을 추월했다. 이런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엄청난 염전을 통해 신안은 소금을 생산, 유통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소금 무역은 상당한 부를 안겨다 주었지만 그만큼 고강도의 노동 또한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신안의 주민들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본인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이유로 염전의 가동에 필요한 수많은 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한다. 한때 본토에서 노예제는 금지되었으나 사건 이후 사회를 통제하고 법을 시행할 중앙 정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신안은 무역선들을 개조하여 육지에 상륙하여 많은 노예들을 납치해 데려왔다. 신안과 교역하던 영주들이 금화 대신 노예로 지불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신안이 엄청난 경제적 호황을 경험하자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토호들은 점차 하나로 연합하게 된다. 하나의 지도자가 필요했던 그들은 주기적으로 '군수'를 선출하여 국가의 통치권과 권력을 위임했다. 시간이 지나자 김씨 가문은 군수 작위를 독점하게 된다.

신안 공국의 탄생

22세기 말 육지에서 여러 국가와 왕들이 난립할 무렵 김씨의 가주이자 신안의 군수 '김성호'는 스스로 공을 칭하였다. 칭왕을 하지 않은 이유는 주변 왕국들의 눈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신안 공국은 이제 외교와 군사를 통해 밖으로 뻗어나가고자 하였다. 당시 확장주의 정책에 의해 분쟁했던 국가가 바로 진도였다. 1차 신안 공국-진도 전쟁에서 수적 우위를 믿고서 자만한 신안은 함대를 울둘목으로 밀어넣었다. 신안의 함대는 격파되었으며 이후에 신안성이 되는 신안 군청 또한 불타오르게 된다. 겨우 살아남은 함대를 모아 신안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복수를 다짐한 신안의 군주들은 일치단결하여 2차 신안 공국-진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진도를 복속시킨다.

신안의 진도를 향한 첫 확장 이후 진도를 통해 남해안의 길목이 신안에게 떨어지며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신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신안인들은 점령한 영지들을 나누어 가졌고 풍부한 자본과 교역을 통해 군사력을 크게 성장시킨다. 이후 목포에 상륙해 국왕을 사로잡은 뒤 비로소 신안의 왕을 칭하게 된다. 신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던 목포는 신안과 가장 가까운 육지로서 셀 수 없이 많은 배가 지나가는 곳이였다. 때문에 신안은 육지 진출의 중요 거점이자 무역 거점으로 활용함은 물론 노예들을 도로망을 통해 이송하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이후 수많은 확장의 연속 사이 150년간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해상 무역제국 신안

2296년 신안 왕국의 통치자 김대주는 전남 일대 목사들의 전원 참관 아래 '염제'의 칭호와 함께 비로소 황제로 대관받으니 이것이 바로 신안 제국의 창설이다.

하지만 직후 신안의 팽창은 저지되는데 북쪽에서 신성 복음 연합이 건국된 것이다. 이후 신안 제국과 신성 복음 연합은 백년간에 걸친 패권 다툼을 지속하게 된다. 제국의 영광 또한 끝이 있었으니 본래 신안인들은 외지인들을 보다 미천한 하위 계층으로 대했다. 또한 소수의 신안인들, 그리고 그 밑의 수많은 염전 노예들이 지탱하는 신안의 사회 구조는 상당히 기형적이고 불안정했다. 때문에 신안 제국 군사력의 기반인 상당한 재력으로 무장된 정예군은 오직 신안 시민권자들로만 구성되었다. 노예는 군대에 복무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이는 노예들에게 군사력을 쥐어주어 반란을 꾀하지 않게 함이였다. 노예를 필요로 하여 벌인 수많은 약탈과 납치로 인해 외교 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24세기 초중반의 내전으로 정예군은 상당수 소모되었고 지역 토호들은 점차 각자만의 이권만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황제는 토호들을 견제하며 내륙 출신 인사들을 등용하는 등의 개혁 개방 정책을 실시하나 토호들에 의한 황제의 암살로 이는 모두 물거품이 된다.

소금 제국의 몰락

다음 황제는 꼭두각시였으며 이는 몰락의 시작이였다. 살인적인 통치에 짓눌려 있었던 식민지의 주민들은 봉기를 도모했으며 이때 일어난 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은 반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신안은 피로스의 승리로 인한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경험했고 다음 해에 동부 제후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부 전남에서는 억압받던 농민들이 해방 전쟁을 선포한다. 당시 권력층이었던 귀족들도 상황이 매우 이상함을 인지하고서 사병을 보냈으나 반군에게 모두 패배하고 목표와 신안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한다.

현재 황제는 김문어로 과거 젊었던 시절 수많은 반군에 대항해 반생을 전장에서 지내었지만 이제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서 만족한 인물이다. 육지를 잃었지만 이는 토호들의 권력 또한 매우 제한됨을 뜻했다. 황제의 직할령이 거의 상실되었지만 이는 그에게 토호들에 대항해 뭔가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제국의 쇠퇴 과정에서 신안의 많은 섬들은 지역의 토호들과 방계 황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황제의 유일한 직할령은 목포로 여전히 거대한 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이다. 이를 기반으로 황제는 내부의 질서를 새로 정립하고서 또 한번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이다.



특징

신안 문화는 약탈이 가능하며 아마 이는 신안의 주 수입원이 될 것이다. 신안은 북쪽의 제국국교회와는 다른 개신교를 신봉하며 해양 제국이라는 고유 정부 체제를 가지고 있다. 신안은 찬란했던 몰락 제국, 제국을 다시 재건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사라져 잊혀버릴 것인지는 플레이어의 몫이다.


역대 황제

초대 김대주 염제 2296~2325

2대 김웅 2325~2335

3대 김헌 2335~2338

공위기 2338~2341

4대 김태우 2341~2377

5대 김훈 2388~2386

6대 김수호 2386~2393

7대 김구리 2393~2405

8대 김준성 2405~2407

9대 김요셉 2407~2425

10대 김문어 2425~

  1. 전설적인 시대로써 주변국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불가능하기에, 믿지 않는 이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