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마천루의 지역 | ||||||||||||||||||||||||||||||||||||||||||
---|---|---|---|---|---|---|---|---|---|---|---|---|---|---|---|---|---|---|---|---|---|---|---|---|---|---|---|---|---|---|---|---|---|---|---|---|---|---|---|---|---|---|
[ 펼치기 · 접기 ]
|
국기 | |||||||||||||||
---|---|---|---|---|---|---|---|---|---|---|---|---|---|---|---|
(2137년?)[1]2296년~ | |||||||||||||||
역사 | |||||||||||||||
[ 펼치기 · 접기 ]
| |||||||||||||||
지리 | |||||||||||||||
[ 펼치기 · 접기 ]
| |||||||||||||||
인문환경 | |||||||||||||||
[ 펼치기 · 접기 ]
| |||||||||||||||
정치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사건 이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문명.
한때 바다의 패권을 쥐었던 해상 무역제국 신안, 몰락 제국 신안. 그들은 다시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한다.
역사
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 ||||||||||||||||||||||||||||||||||||||||||||||||
---|---|---|---|---|---|---|---|---|---|---|---|---|---|---|---|---|---|---|---|---|---|---|---|---|---|---|---|---|---|---|---|---|---|---|---|---|---|---|---|---|---|---|---|---|---|---|---|---|
[ 펼치기 · 접기 ]
|
백색 황금의 땅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신안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은 '사건'에서 많은 것들을 살아남게 해주었다. 본토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은 신안은 사건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사회를 재건하였고 배를 만들어 주변으로 진출하게 되는 여건을 제공해주었다. 22세기 초반 육지와 접촉하며 신안은 육지에 소금이 매우 희귀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건 이후 기존의 정제염 공장들은 무너져 내렸으며 한반도에서는 암염 또한 존재하지 않았고 소금을 생산하는 해안가와 내륙의 유통망 등이 모두 소멸했던 것이다. 소금의 음식 보존부터 살균, 식용까지 때때로 생존에 필수적인 특성들 그리고 희귀성에 의해 소금의 가치는 황금을 추월했다. 이런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엄청난 염전을 통해 신안은 소금을 생산, 유통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소금 무역은 상당한 부를 안겨다 주었지만 그만큼 고강도의 노동 또한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신안의 주민들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본인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이유로 염전의 가동에 필요한 수많은 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한다. 한때 본토에서 노예제는 금지되었으나 사건 이후 사회를 통제하고 법을 시행할 중앙 정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신안은 무역선들을 개조하여 육지에 상륙하여 많은 노예들을 납치해 데려왔다. 신안과 교역하던 영주들이 금화 대신 노예로 지불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신안이 엄청난 경제적 호황을 경험하자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토호들은 점차 하나로 연합하게 된다. 하나의 지도자가 필요했던 그들은 주기적으로 '군수'를 선출하여 국가의 통치권과 권력을 위임했다. 시간이 지나자 김씨 가문은 군수 작위를 독점하게 된다.
신안 공국의 탄생
22세기 말 육지에서 여러 국가와 왕들이 난립할 무렵 김씨의 가주이자 신안의 군수 '김성호'는 스스로 공을 칭하였다. 칭왕을 하지 않은 이유는 주변 왕국들의 눈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신안 공국은 이제 외교와 군사를 통해 밖으로 뻗어나가고자 하였다. 당시 확장주의 정책에 의해 분쟁했던 국가가 바로 진도였다. 1차 신안 공국-진도 전쟁에서 수적 우위를 믿고서 자만한 신안은 함대를 울둘목으로 밀어넣었다. 신안의 함대는 격파되었으며 이후에 신안성이 되는 신안 군청 또한 불타오르게 된다. 겨우 살아남은 함대를 모아 신안은 평화 협정을 맺었고 복수를 다짐한 신안의 군주들은 일치단결하여 2차 신안 공국-진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진도를 복속시킨다.
신안의 진도를 향한 첫 확장 이후 진도를 통해 남해안의 길목이 신안에게 떨어지며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신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신안인들은 점령한 영지들을 나누어 가졌고 풍부한 자본과 교역을 통해 군사력을 크게 성장시킨다. 이후 목포에 상륙해 국왕을 사로잡은 뒤 비로소 신안의 왕을 칭하게 된다. 신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요충지였던 목포는 신안과 가장 가까운 육지로서 셀 수 없이 많은 배가 지나가는 곳이였다. 때문에 신안은 육지 진출의 중요 거점이자 무역 거점으로 활용함은 물론 노예들을 도로망을 통해 이송하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이후 수많은 확장의 연속 사이 150년간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해상 무역제국 신안
초기
2296년 신안 왕국의 통치자 김대주는 전남 일대 목사들의 전원 참관 아래 '염제'의 칭호와 함께 비로소 황제로 대관받으니 이것이 바로 신안 제국의 창설이다.
새로이 설립된 제국은 중앙집권화를 계획하고 2301년에는 과거 선출제 시절의 흔적이던 귀족 의회를 폐지하였다. 또한 이미 장악한 전남 지역을 넘어, 전북 일대까지 복속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직후 신안의 팽창은 저지되는데 북쪽에서 무역 연합 왕국이 건국된 것이다.(2317) 무역 연합국은 전북의 제후들을 통합한 대군세를 이끌고 남진하여 제국과 대결하니, 이것이 바로 제 1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이며, 또한 뒤이을 백여 년간의 다툼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약탈전에 특화된 반면,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전북의 연합군은 방어력이 튼튼하였다. 무안 전투에서 튼튼한 방패를 앞세운 연합군이 승리하며 염제는 평화를 제안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무역 연합의 지도자 김무홍의 명성은 크게 올라갔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 복음 연합의 황제로 추대된다. 호남 땅에 두 명의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염제가 죽고 벌어진 제 2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 일명 호남대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측은 신성 복음 연합이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연거푸 쓴맛을 본 신안은 전북으로의 진출을 중단하고, 광주를 양국의 중립 지역으로 놓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정체기
태조 염황제의 장자였던 2대 김웅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김헌이 3대 황제로 즉위했으나 3년 만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자식이 없었고, 이로 인해 염제의 다른 자식과 손자들은 제위를 두고 3년간의 피터지는 내전을 벌이니 이것이 신안 공위기이다.(2338~2341)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태조의 손자 중 하나였던 김태우였다. 경쟁자였던 그의 삼촌 김신과 그의 자식들을 모조리 처형한 뒤, 영토를 직접 늘리려는 방식은 이제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는 노예와 소금 무역을 통해 제국의 경제력을 다져 나갔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도 있어 귀족들에게 영지를 나눠 주는 등의 회유책을 벌였다.
제국의 영광 또한 끝이 있었으니 내전으로 정예군은 상당수 소모되었고 지역 토호들은 점차 각자만의 이권만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선제의 아들로써 제위에 오른 5대 김훈은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고는 제후들에게 나눠 주었던 권한을 회수하고, 차별받던 육지 출신 인물들을 등용하는 등 개혁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의 정책들은 큰 불만을 샀고, 결국 즉위 5년 만에 황제가 암살되며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황권은 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소금 제국의 몰락
다음 황제는 꼭두각시였으며 이는 몰락의 시작이였다. 살인적인 통치에 짓눌려 있었던 식민지의 주민들은 봉기를 도모했으며 이때 일어난 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은 반란의 기폭제가 되었다. 신안은 피로스의 승리로 인한 상당한 군사적 손실을 경험했고 다음 해에 동부 제후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부 전남에서는 억압받던 농민들이 해방 전쟁을 선포한다. 당시 권력층이었던 귀족들도 상황이 매우 이상함을 인지하고서 사병을 보냈으나 반군에게 모두 패배하고 목표와 신안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한다.
현재 황제는 김문어로 과거 젊었던 시절 수많은 반군에 대항해 반생을 전장에서 지내었지만 이제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서 만족한 인물이다. 그가 즉위했을 때 신안의 귀족들은 대헌장을 요구하였고, 제국의 귀족의회가 다시 부활하게 하였다. 신안의 대토호들의 영지도 함께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들은 이러한 조치가 필요해졌던 것이다. 황제의 영지는 이제 목포밖에 남지 않았으나, 그것은 다른 영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쇠퇴 과정에서 신안의 많은 섬들은 지역의 토호들과 방계 황족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황제의 유일한 직할령은 목포로 여전히 거대한 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이다. 이를 기반으로 황제는 내부의 질서를 새로 정립하고서 또 한번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이다.
사회
본래 신안인들은 외지인들을 보다 미천한 하위 계층으로 대했다. 또한 소수의 신안인들, 그리고 그 밑의 수많은 염전 노예들이 지탱하는 신안의 사회 구조는 상당히 기형적이고 불안정했다. 때문에 신안 제국 군사력의 기반인 상당한 재력으로 무장된 정예군은 오직 신안 시민권자들로만 구성되었다. 노예는 군대에 복무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이는 노예들에게 군사력을 쥐어주어 반란을 꾀하지 않게 함이였다. 노예를 필요로 하여 벌인 수많은 약탈과 납치로 인해 외교 관계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황제는 토호들을 견제하며 내륙 출신 인사들을 등용하는 등의 개혁 개방 정책을 실시하나 토호들에 의한 황제의 암살로 이는 모두 물거품이 된다.
반란으로 육지 영토가 대부분 상실된 현재에도 노예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자유민과 노예는 매우 엄격히 구분되어 노예는 염전에만 한평생 박혀 있어야 한다. 중앙군의 부족으로 노예를 징집하자는 의견도 간간히 나오고는 있었으나, 반란 이후로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따라서 신안인들은 현재 더 이상 강한 군사를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도덕이 아니라 돈을 우선시하는 소수 용병단 정도를 고용할 능력은 있다.
특징
신안 문화는 약탈이 가능하며 아마 이는 신안의 주 수입원이 될 것이다. 신안은 북쪽의 제국국교회와는 다른 개신교를 신봉하며 해양 제국이라는 고유 정부 체제를 가지고 있다. 신안은 찬란했던 몰락 제국, 제국을 다시 재건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사라져 잊혀버릴 것인지는 플레이어의 몫이다.
역대 황제
초대 김대주 염제 2296~2325
2대 김웅 2325~2335
3대 김헌 2335~2338
공위기 2338~2341
4대 김태우 2341~2377
5대 김훈 2377~2386
6대 김수호 2386~2393
7대 김구리 2393~2405
8대 김준성 2405~2407
9대 김요셉 2407~2425
10대 김문어 2425~
관련 문서
- ↑ 전설적인 시대로써 주변국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불가능하기에, 믿지 않는 이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