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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마천루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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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복음 연합
국기
2317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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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세기 초 김제 무역연합
  • 2296년 김제 왕국의 성립
  • 2317년 무역 연합 왕국의 성립
  • 2323년 황제 추대
  • 2328년 원불교도의 난
  • 2344년 신성 복음 제국으로 국호 변경
  • 2381년 신성 복음 연합으로 국호 변경
  • 2399년 제 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
  • 2402년 기계교 반란
  • 2432년 신성 혁명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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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전주
최대 도시
주요 도시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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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류 문화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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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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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국교
제국 국교회(국교)
소수 종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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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봉건제
지도자 (황제)
이한월

개요

신성 복음 연합은 충청과 전북에 위치한 봉건 제국이다. 현재 지도자는 이한월. 제국국교회를 믿으며 주요 봉신으로 북부 대공령임요한이 있다.

제관

신성 복음 연합의 제관은 고대에 서쪽 먼 나라에 살던 한 황제가 쓰던 모자로, 그의 제국은 대륙 하나를 통째로 아우를 정도로 거대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모자는 초대 황제 김무홍의 조상이 사들인 이후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며 영광의 상징이 되었으며, 신성 복음 연합이 세워진 이후로 공식적으로 제국의 제관으로 채택받아 역대 황제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사건과 그 이후의 혼란, 그리고 신성 혁명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지나면서도 보존되고 있는 이 제관은, 신성 복음 연합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 문명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

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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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2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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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발생
2137 신안 문명
2189 러시아 공산당 출현
2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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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백두산 화산 분화. "신의 징벌"
2234 정교회의 정비
2235 아르세니예프 공의회
2235 - 2395 프리모리예 군벌 시대
2298 신안 제국 형성
2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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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2327 신안의 인천 정복
2317 신성 복음 연합 건국
2322 - 2324 제1차 신안-복음 전쟁
2327 고려국 선포
2332 제2차 신안-복음 전쟁
2349 - 2365 인천 독립 전쟁
2351 신미년의 역
2365 인천 연합 출범
2371 - 2374 1차 강화도 전쟁
2377 - 2381 2차 강화도 전쟁
2383 서해안 연합 형성
2387 - 2402 인천 제 1 군정
2395 - 2396 대 조국 전쟁
2396 동해 제국 건국
2399 - 2415 동해안 식민 계획
2399 제3차 신안-복음 전쟁
25세기 - 본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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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 - 2413 대반란
2402 기계교 반란
2405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2410 경오정난과 대요 건국
2416 - 2418 1차 화북 원정
2419 요양 조선족 폭동
2420 - 2421 2차 화북 원정
2421 - 2422 묵던 원정
2423 얄루 제국 건국
2427 - 2439 인천 제 2 군정
2428 - 2432 주체교도의 난
2432- 신성혁명
2439 - 2442 얄루 전쟁
2440 대진의 분열
2440 인천의 봄
2444- 인천 내전
24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등장
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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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동해 제국의 분열
24?? 얄루 제국의 분할
2666? 스포일러의 등장

무역 연합

전라도 지역은 '사건'의 피해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고 거대한 곡창지대의 존재로 인해 빠르게 문명이 재건되었다. 넘쳐나는 곡물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계급 사회를 불러왔고 큰 도시의 지배자들은 스스로를 시장, 군수 등으로 칭하며 각 고을의 수장을 임명하여 소국들을 건설해 나갔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였지만 국가를 유지하고 더 발전하기 위해 협력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남는 곡물을 판매하여 이득을 얻는 무역이 발달하게 된다. 곡물의 판매 방향은 북부의 기계교 세력이었고 기계교는 그 곡물을 다시 서울로 판매하여 이득을 보는 무역구조가 확립되었다. 지리적 길목에 있었던 소국들은 더욱 발전하였고 시장의 협력 하에 전북 서부 지역은 느슨하고 거대한 무역 연합체가 형성된다.

이렇게 쌓이는 부를 노리는 세력은 많았다. 판매할 곡물이 없었기에 연합에 참여하지 못했던 동부 권역은 무역로의 변두리에 위치하게 되며 비교적 낙후되고 문명이 발전하지 못하여 촌락 단위로 갈갈이 찢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부유한 서부 곡창지대에 대해 끝없는 투쟁을 이어갔고 외부의 간섭을 거부한 채 추수철에 빈번히 들판으로 습격을 감행하였다. 거기에다 남부에서 북상하는 신안의 해적들은 어떠한 협상에도 응하지 않고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2229년 가을에서 겨울까지 해상 무역이 사실상 동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로부터 무역로를 방어하기 위해 2230년 1월 1차 김제회의가 개최되었다. 김제는 무역 연합 최대의 곡물 생산지임과 동시에 전주와 군산, 익산의 중앙에 위치하며 무역 요충지로 발전한 곳이었다. 전주, 익산, 김제, 남원, 정읍의 시장들이 뭉쳐 대책을 강구하였고 그 방안으로 군산의 미군 세력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군산의 미군들은 독자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나 병농을 겸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무역연합이 식재료를 공급하며 수익의 일부를 넘기는 것으로 협상을 수락하였다. 그 결과 군산 미군은 무역연합의 지원을 얻어 해적을 방어하기 위한 해군을 양성한다. 또한 군산을 미곡수출용 항구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역 연합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결과 연합은 순조롭게 무역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김제를 중심으로 한 연합은 오랜 시간 성공을 거두었고 신안의 약탈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방어해나가게 되며 신안의 무서움은 잊혀지고 있었다. 2296년 김제의 시장 김벽원은 무역 연합을 한단계 더 끌어올리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2차 김제회의를 개최하여 무역 연합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명목 하에 모든 시장과 군수를 불러모았다. 그 이후 왕국이라는 통일된 체제의 선포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다. 왕국에 대한 근본적 논의가 이루어졌고 결국 신권의 억제를 통한 왕권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이 청사진으로 제시되었다. 그 결과 익산전주 등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동부권은 이에 반발하고 나섰고 반면 정읍고창, 부안은 어느정도 김제의 제안에 따르고자 하였다. 김제 회의가 종료된 이후 익산, 전주, 임실, 순창이 연합을 탈퇴하였다.

김제 시장 김벽원은 남은 세력을 모아서 김제 왕국으로 칭왕 선포를 한 후 나머지 지역을 정벌하고자 시도했다. 군산 미군과 맺었던 계약 관계는 아직 연합 쪽에 남아있었고 그들의 군사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자체적인 생산력으로는 비대해진 군산 미군의 유지비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5년이 지난 2301년 김제 왕국이 유지비를 지불하지 않자 계약이 해지되고 만다. 이에 익산 시장 김무홍은 곧바로 군산 미군과 계약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주, 임실, 순창을 모아 익산무역연맹을 결성한다. 이에 정읍시장 박철원은 순창과 고창을 이끌고 왕국을 배신하여 익산무역연맹에 합류하게 된다. 사면이 고립된 김제왕국은 곧 사면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익산과 전주 방면인 동쪽과 북쪽은 방비가 철저하였으나 정읍이 있는 남쪽은 허술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부안을 함락시킨 후 해군의 지원을 받아 동진강을 넘어온 박철원이 김제국왕 김벽원을 생포하는데 성공한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김제는 곧 쑥대밭이 되었고 김벽원은 처형하여 김제 앞바다에 목을 빠트렸다. 김제의 땅은 전주와 익산, 정읍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 김제 국왕이 지지 기반으로 삼았던 증산도 계열의 종교는 전부 탄압당하였다. 김벽원과 증산도의 교령이 주고받은 밀서가 발견되며 처형된 이후 증산도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많은 신도들이 죽었고 진압 과정에서 성지가 파괴되어 절과 교회가 들어섰다. 진압된 이후 증산도에 대한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제국의 탄생

한차례의 내전이 끝난 이후 남쪽의 해적과 동쪽 부족의 약탈은 이전보다 더 거세졌고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지역을 통합하여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였다. 2317년 전주, 익산, 정읍, 남원의 지배자들이 모여 통합된 지도자를 선출하였다. 전쟁을 주도하여 승리로 이끈 김무홍이 만장일치로 지명되었고 무역 연합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종교들이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지만 공식적인 국교는 지정되지 않았다.

1대 황제 김무홍은 과거 익산에 있던 육계 기업의 회장의 먼 후손이였고 그 영향력으로 대대로 시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군산 미군의 육군 세력을 연합기사단으로 편성하여 친정을 통해 전라도 동부를 안정시키고 남부 해적들의 발호를 막았다. 김벽원과 증산도의 난을 진압하고 연합을 건설한 김무홍은 공동의 적을 만들어 연합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는 연합 내부에서 종교적 갈등이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갈등 역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신안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였고 그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목 하에 즉위 직후부터 5년간 계엄령을 선포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신안 제국은 쉽게 이기기 힘든 상대였고 연합을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해줄 것이었다. 잠깐이나마 경험한 신안의 약탈은 위협적인 것이었기에 제후들 역시 군말없이 협조하였다.

2322년 제 1차 연합 왕국-신안 제국 전쟁을 개전한다. 신안군의 짙은 해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내륙 깊숙히까지 진입해 대담하게 약탈을 감행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규군에 가까운 모습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육로로 진격한 김무홍은 산개된 신안 사략군을 각개격파하며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신안은 병력을 모아 반격을 준비하는 한편 사략선을 보내어 배후에서 수도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군산 미군이 재해권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익산까지 가는 항로는 멀고 험해 보였다. 결국 신안 해군은 국지적인 약탈 이외에 군사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연합 왕국군의 보급로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성공하였다. 그 결과 연합 왕국 군대는 보급을 감당하기 위해 두갈래로 갈라져 천천히 진격하였다. 이어진 무안 전투에서의 신안과의 전투는 갑작스러웠고 그 승리 역시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무안 전투에서 승리한 김무홍은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였고 결국 신안의 황제가 연합왕국의 사신을 목포로 맞이하여 목포협약을 채결하게 된다. 승전 이후 김무홍의 위상은 끝없이 높아졌고 연합민들의 요구와 시장들의 추대를 통해 2323년 신안의 황제를 패퇴시킨 업적으로 무역 연합 제국황제로 추대되었다. 2325년 초대 황제 김무홍은 연합을 정비하던 도중 50세에 돌연사하였다.

당시 선제후는 익산의 공작 김효일, 전주의 공작 이문호, 정읍의 공작 박철원, 남원의 공작 이진선이었다.

번영과 영광

2대 황제 이문호의 선출은 뜻밖의 일이었다. 익산 시장이자 황제였던 김무홍의 두 아들들은 전부 전쟁터에서 사망하였고 손자는 너무 어렸기에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무홍의 가문이 황위 선출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주시장 이문호는 황제의 사위 자격으로 후보자로 지목되었다. 전대 황제의 선례를 따라 투표가 실시되었고 익산과 전주, 정읍의 표를 얻어 승리하게 된다. 황제 즉위 이후 그는 연합의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반발이 터져나왔고 김제 왕국의 최후를 돌이켜 보라는 간언까지 들려왔다. 상당한 반발을 극복하기 위해 이문호는 종교를 선택하였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목사들을 이용하여 연합을 주무르고자 하였다. 연합의 종교는 복잡하였으나 개신교는 제국 내 분명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순조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익산이 문제였다. 익산은 원불교의 도시였고 목사들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의 뜻과 익산의 뜻은 항상 어긋났고 도시에 만연한 연합의 수도였다는 특권 의식의 존재에 의해 그들은 더욱 반발하였다.

2328년 마침내 이문호 즉위 3년차에 익산에서 원불교의 난이 일어나며 원불교도들은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전 황제의 씨족인 익산 김씨 가문원을 학살하고 원불교 종법사 청산 임효신을 국왕으로 옹립한 후 익산원국의 건설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기계교와 협력하였고 군산 미군의 기술력을 대가로 그들의 군대를 빌렸다. 익산의 지척에 전주가 있었고 당시 연합기사단은 동부로 원정을 나가 있었기에 수도의 방위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문호는 전주를 굳건히 방어하며 군사를 끌어모았다. 다행히 황제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는 굳건했고 십만에 달하는 대군이 삽시간에 소집되었다. 혈전 끝에 익산의 원불교 반란이 진압되었고 기계교 세력 역시 패퇴하게 된다.이후 주인이 없어진 익산 시장의 자리는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제국 자유시 제도로 전환되었다. 원불교도가 아닌 익산시민들이 해당 조치에 반발하자 익산시의 투표권만은 남겨두어 황제의 표를 하나 더해주는 지역이 되었다. 반란 이후 익산의 원불교 신도들의 상당수는 이미 전쟁에서 사망하였고 연합 제국에서는 남은 신도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교세는 확연히 줄어들었지면 많은 이들이 탈출하여 연합의 지배가 느슨한 동부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역시 연합 내부의 원불교 교당은 모두 파괴되었는데 이때 원불교의 뿌리라는 명목으로 불교 세력 역시 민간에 의해 공격 받게 된다. 황제는 이에 겉으로는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며 은밀히 지원하였고 재위 말년에 연합 내부의 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정리되었다.

황제는 여러번의 전쟁 참여 경험과 비범한 무력을 바탕으로 확장주의적 정책을 통해 무수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2328년 원불교의 난 진압 이후 정식으로 제국군을 창설하며 강대한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며 제국의 중앙집권에 한발짝 더 나아갔으며, 2330년 북쪽에 난립하던 무장 기계교 세력을 정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북부 총독부를 설치한다. 논산에 설치되었던 북부 총독부는 황제의 재위 말년인 2350년 공주시를 포함하게 되었다. 군산 미군이 담당하던 해군은 정식으로 제국 해군으로 재편성하였고 지상군인 연합기사단은 개신교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재편한 후 신성기사단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제국 해군을 창설한 황제는 2332년 호남의 패권을 쥐고 있던 해상 무역제국 신안의 위상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거대한 군세를 소집하여 목포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명 바다로의 행군, 제 2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신안의 패권을 빼앗았다. 2336년 동부 원정을 통해 제국의 동부 국경선을 확정짓고 지도를 다시 그렸지만 이후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한 귀족 증세와 몇몇 권리 박탈은 2338년 전주 귀족 반란을 촉발시켰으나 황제는 신성기사단을 이용하여 손쉽게 진압하였다. 황제는 제국의 국경을 재확립하고 신안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였으며 연합의 지위를 영원하고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문호의 치세는 수많은 전쟁과 정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검이 수많은 피와 아픔으로 물든 이후 황제는 민중과 군인의 삶이 많은 상처와 절망으로 휩싸여 있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전쟁을 끝낸 이후 2344년 전주에 제국 중앙 정부를 설치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정립하여 국가를 안정시킨다. 2347년 자신의 아들에게 전주공작의 자리를 미리 물려주고 이를 왕작으로 승격시켜 황제가 공인한 후계자의 자리로 삼았다. 이는 제국의 세습을 준비한 것이었다. 이처럼 눈부신 그의 군사적 업적과 건실한 내치로 제국은 전성기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2대 황제 이문호는 2351년 사망한다.

당시 선제후는 익산의 자유시장 최유일, 전주의 왕 이제용, 정읍의 공작 박석금, 남원의 공작 이류현이었다.


3대 황제 이제용은 2대 황제의 아들이며 전주왕이었기에 사실상 황태자나 다름없었다. 선거에서 선제후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선출하였다. 2대에 걸친 세습은 당시 제국의 왕권과 중앙집권체제가 크게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황제는 즉위 당시 목사들의 지지를 받았고 정식 대관식 직후 교회에서 목사들에게 따로 대관을 받았다. 두번째 대관식이 끝난 이후 그는 제국의 국호를 신성 복음 제국으로 변경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미 제국 내부에서 기독교 선교가 상당히 진행되었기에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총명한 황제는 또한 냉소적이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권위를 위해 종교를 이용하였고 자신의 지배를 거부한 천주교 세력을 배척하여 제국을 개신교가 장악하도록 유도했다. 천주교 세력은 붕괴되며 신성 복음 제국과 신안 제국의 틈바구니인 광주로 이동하였다. 이후 제국의 기독교는 황제교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제국국교회로 개혁되었고 천주교를 모방하여 수직적이고 사도전승에 기반한 전문 목사들을 양성해 교회의 행정 기반으로 사용하였다.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한 이후 제국 법원 창설과 제국법 대전 편찬을 통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법의 집행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정책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치안을 강화한 한편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여 귀족 계층의 힘을 더욱 억눌렸다. 또한 제국 재무국을 창설하여 효율적인 국가 재정 확보를 통해 제국의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국명 변경 직후 상당한 반발이 이어지던 북부 총독부에 대해서도 종교를 용인하는 등의 유화 정책을 실시하여 사회 구조를 안정화 시키고 호서 북부의 천안, 아산을 총독부에 포함시키며 충청남도 대부분을 북부 총독부에 편입시켰다. 북부 총독부의 확장으로 인해 서울과 제국의 국경이 가까워지며 경제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를 통해 확충된 재정을 이용하여 수도 전주와 대도시들에 대한 개발이 시작되었고 제국군을 확충하였다. 북부 총독부는 유화정책이 펼쳐지며 안정화되었고 북부 제국군에 기계교도가 자원 입대하여 기계교인 부대를 편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문화 발달이 촉진되며 황제와 신을 찬양하는 문학이 유행하며 황제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또한 황제는 자신의 마지막 치세에서 제국의 무역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 제국 전역에 가도망을 설치하여 무역의 이득과 군사적 이점을 취하였다. 2370년 뜻밖에도 선제후 확대 칙령을 발표하였다. 대상은 북부 총독, 제국 원수, 부여 공작이었다. 이를 통해 황제에게 충성한다고밖에 볼 수 없는 두 표를 얻고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즉시 끈이 떨어질 부여의 표를 얻으려는 조치였다. 두 공작가의 반발이 터져나왔으나 무마하였다. 2378년 제국 자유시 익산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법왕 오요셉이 봉해져 익산 법왕령으로 삼으며 선제후 직위를 넘겼다. 3대 황제 이제용은 2380년 목사들의 축복 속에서 사망한다.

이제용의 치세는 전임자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문호가 제국 내부의 모든 반발세력을 제거한 이후였기에 그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고 제국은 안정과 발전, 그리고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오랜 전란과 불안을 거쳐 찾아온 평화는 문화의 융성한 발달을 거두었고 황제의 뛰어난 관리력과 통찰력을 통해 제국은 급격한 인구증가와 상공업의 발달 또한 가져왔다. 이 시기의 제국은 비견할 세력이 없었고 그 영향력은 멀리 서울과 소백산맥을 넘어서 영남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계까지 밀어붙인 중앙집권화와 3대 세습시도는 귀족 계층의 반발을 낳았고 황제의 주요 지지층인 교계와 군부의 이반 역시 초래하였다. 황제의 장남이자 황태자 이태성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오만하여 모든 계층에 두루 적을 만드는 악수를 두게 되었다. 특히 이태성은 자신의 여동생 이현미와 결혼한 정읍공작 박중현을 노골적으로 백안시하였다. 그는 공공연히 박중현에게 수치를 주었고 이는 그의 분노를 부르게 되었다. 이에 군부에서는 박중현에게 접근하여 그의 뒷배를 봐주며 황제 경쟁에 참여하게 하였다. 한편 교계의 반발은 뜻밖의 것이었다. 황제에 의해 개신교 세력은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지만 황제에 의해 이용당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위세는 황제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를 마땅찮게 여긴 법왕 오요셉은 역시 박중현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황제가 자신의 손에 완벽히 넣었다고 생각한 제국은 뜻밖의 인물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의 선제후는 익산의 법왕 오요셉, 전주의 왕 이태성, 정읍의 공작 박중현, 남원의 공작 이인부, 공주의 북부총독 김학표, 제국군 원수 도현민, 부여의 공작 유태산이었다.

회색 시대

4대 황제로 선출된 것은 정읍의 박중현이었다. 그는 이제용의 사위였으며 황권의 계속되는 강화에 두려움을 느낀 다른 선제후들이 전주 이씨 가문의 세습을 막고자 그를 지지하며 선출되었다. 그의 치세 초반은 선대 황제의 유산을 물려받아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듯했으나 그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다. 제국은 황제의 무능 아래 내부에서부터 점차 썩어들어갔다. 황제는 무능했고 나약했다. 정치력을 통해 제국을 쥐게 된 그였지만 실권과 능력이 없었기에 그가 제위에 오른 순간 그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다. 그는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였으며 단지 귀족들이 제국의 왕권을 약화시키고자 그를 허수아비로 내세운 것에 불과했다. 그는 즉위한 이후 제후들의 요구에 따라 국명을 신성 복음 연합으로 변경하며 그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박중현 시대의 제국은 왕권의 쇠퇴와 지방분권의 심화, 제국에서 연합으로의 후퇴로 설명될 수 있다.

귀족들의 권위는 과도하게 신장되었고 그들에게 감세정책이 이어졌기에 국고는 더이상 쌓이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제용이 쌓아놓은 국고는 제국의 약 5년치 재정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당장 문제가 터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국군은 점차 더 많은 예산을 요구하게 되었고 늘어난 예산들은 모두 군부의 뒷주머니로 사라지게 되었다. 군비는 절반 이상 늘었으나 제국 상비군들에게 돌아가는 보급은 날로 줄었고 예비군을 소집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러던 찰나 2399년 제 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의 발발은 예고된 몰락이었다. 나주 전투에서 신성 복음 연합은 대패하며 제국군의 대부분을 잃었다. 훈련되지 않았고 보급되지 않았던 군대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군부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였고 신안제국도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제국은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제구군은 재편되지 못하였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던 제국 중앙행정부는 임금 체불과 왕권의 권위 하락으로 제기능을 하기 못하고 마비된다. 황권은 곧 기반을 상실하며 권력 공백이 나타나게 된다. 제국군의 부활을 바라지 않은 귀족들은 황제에게 제국군 예산법의 변경을 요구하였다. 본래 신성 복음 연합에선 군대의 예산을 귀족 계층이 분산하여 부담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제안한 제국군 예산법의 내용은 군대의 예산을 황제가 전면 부담하는 것이었고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법안을 승인한다. 이로써 제국의 국고는 바닥나고 말았고 대부분의 제국군은 군축을 시행하게 된다. 이로써 황제의 권력 기반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고 군부는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남은 제국군들은 주둔지의 귀족들의 후원을 받거나 해당 부대 사령관의 사비로 부대를 운영하게 되며 사병화가 진행되었다. 해산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빈민이 되거나 지방 귀족들의 사병이 되었고 일부는 도적이 되어 방랑하게 된다.

북부 총독부 역시 혼란에 빠졌다. 3대 황제의 치세 동안 기계교는 잠잠해졌고 총독부의 남부에서 제국국교회 전파는 성공적이었다. 4대 황제의 즉위 초반에 중립 노선을 지향하던 북부 총독부는 아직 안정을 유지하였으나 제 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에 북부 총독부의 주력이 징병되며 상황은 역전되었다. 파병된 병력의 십분의 일만이 돌아오며 총독부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혼란한 상황에서 부임된 총독들은 전부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이들이었다. 황제가 국고를 채우고 목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황제는 능력과 상관없이 그저 신실하고 종교에 헌신할 뿐인, 정확히 말해 광신적이고 불관용을 추구하는 이들을 총독에 부임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능하였고 열성적이었으며 이 오염된 불신과 적그리스도의 대지를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기계교 신자들에게 강제 개종을 강요하였고 2402년 기계교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곧 공주에 있던 총독부는 고립되었고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파발을 보내었다.

황제는 이 보고를 무시하였다. 사실 제국은 척박한 북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력조차 없었다. 그저 좌천된 장군을 총독부 안무사에 임명했을 뿐이었다. 자살 명령에 가까웠지만 총독으로 부임한 임요한은 부여에 있던 삼천명의 병력을 인수하여 토벌을 개시하였다. 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남부를 기반으로 병력을 모으고 반란군을 공격하였다. 천재적인 전술적 승리를 통해 공주의 북부 총독부를 수복하는데 3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이미 반란군에게 투항하고 처형된 전임 총독을 대신하여 총독에 부임하였다 . 2405년 태안에서의 마지막 기계교 지도자를 처형했을 때 북부총독부 관할 병력은 구천을 웃돌았고 임요한의 사병에 가까웠다. 북부 총독부 또한 실질적으로 총독 임요한의 사유지에 가깝게 변모했다.

종합적으로 4대 황제의 치세 동안 기존의 중앙집권체제는 붕괴하고 봉건정으로 후퇴했으며 어떻게든 권력을 회복하여 제국을 원 상태로 만드려는 황제의 노력은 오히려 무분별한 인사와 족벌정치로 인한 제국 국교회의 부패와 경제적 실패, 자유 농민의 몰락과 농노제를 야기했다. 이러한 수많은 문제들은 제국이 크게 쇠퇴하고 몰락하게 되는 분명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4대 황제는 2414년 사망한다. 그는 정무를 보지 않고 쾌락만을 탐하였기에 정신적 피로를 덜 받아 오래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선제후는 익산의 법왕 김성지, 전주의 왕 이한월, 정읍의 공작 박근영, 남원의 공작 이두수, 공주의 북부총독 임요한, 제국군 원수 권창덕, 부여의 공작 유궁호였다.



5대 황제인 이한월은 어린 나이에 황제로 선출되어 즉위하게 된다. 제국의 몰락은 귀족들에게도 큰 충격을 불러왔고 박중현이 불러온 재앙에 모두 놀라게 되었다. 그러나 선제후들의 권력다툼은 여전히 치열하였기에 3대 황제 이제용의 손자인 이한월을 꼭두각시로 옹립하였다. 제국이 봉건정으로 후퇴함에 따라 왕권은 추락하고 귀족들의 힘은 보다 막강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궁정에서 제국의 쇠퇴를 지켜본 황제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 2418년에 익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격화되며 굶주린 농민과 해산되었던 군인들이 참여하며 반귀족 성격을 띈 신성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혁명군은 민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각 도시들의 귀족들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병들을 잃고 영향을 상실했다. 그들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들을 숙청하고 그들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길 요구했다. 전주에서 황제가 직접 그들을 만나 5가지의 요구 사항을 수락하고 위문한 이후 혁명군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복수를 원하였고 혁명의 주도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민중의 요구 사항은 묵살되었다. 신성 혁명을 진압하던 도중 제국군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임요한의 사유지에 가깝게 변모한 총독령에 신임 총독을 임명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이미 소멸한 제국군을 이끌고 북부 총독부의 반발을 진압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황제는 임요한과의 합의를 거쳐 총독령의 범위를 조정하고 그를 북부 왕국령의 초대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때 서산, 예남, 공주 이남의 지역은 제국의 영토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2424년 제국이 쇠퇴해가는 상황에서 황제의 스승인 김한결 주교는 귀족 계층이 쇠약해진 틈을 타 인맥을 통해 국경 지대의 신성기사단을 수도에 배치하여 황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황제는 제국의 기반이 붕괴하고 있음을 깨닫고 제국 가도망을 재건하고 추가 건설하여 제국을 다시 하나로 연결하는 등 20년간 제국의 재건에 집중하여 제국의 쇠퇴를 멈추었다. 현재 황제는 지병으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하였다.

시작 시점에서 5대 황제는 스트레스로 인한 암으로 사망하고 그 아들 이유한이 새로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게 된다. 김한결 주교는 더 많은 황제의 친위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황제의 사촌 여백작을 수도로 불러들이고 급진적 개혁을 계획하게 된다.

제국 개혁

신성 복음 연합은 법률을 바꾸지 못하는 대신 독자적인 개혁 시스템을 통해 제국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이유한이 왕좌에 앉은 이후 나타나는 이벤트를 통해 개혁의 노선을 정할 수 있다.


삼두정

가장 급진적이고 위험한 선택지.

황제의 친구인 주교 김한결은 절대적인 황제 친위대를 구성하여 황권을 강화하고 급진적으로 각종 개혁들을 통과시킬것이다.

이 삼두정의 인물은 주교 자신과 황제의 사촌 그리고 신성 기사단의 단장으로 이루어진다.

성공 시에는 빠르게 개혁들을 통과시킬 수 있겠지만 수많은 음모와 적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적절한 외교와 음모력이 높은 주교를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맹가능 (황제, 신성 기사단, 황제의 사촌, 제국군)


온건 개혁

제 6대 황제가 주교의 제안을 거절하고 온건 개혁을 시작하는 진보적 선택지.

거의 지지자가 존재하지 않는 삼두정과는 달리 이 선택지는 개혁 지지자인 부여 선제후의 도움을 추가로 받을 수 있게 한다.

제국은 천천히 개혁을 시작할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완전히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동맹가능 (황제, 신성 기사단, 제국군, 황제의 사촌, 부여 선제후)


보수파 연대

개혁을 포기하고 안정을 선택하는 보수적 선택지.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와 동맹을 만들 수 있다. 동맹이 깨지기 전까지는 매우 안정적인 선택지.

대신 일정 기간 동안 아예 개혁이 불가능한 페널티가 존재한다.

동맹가능 (황제, 제국군, 부여 선제후, 공주 선제후, 익산 선제후)


개혁 내용

제국 개혁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황권 재정비
  2. 제국군 재창설
  3. 제국 중앙정부 조직
  4. 제국 법원 재개설
  5. 영구수도 지정
  6. 제국 통합세 도입
  7. 제국 국교회 개혁
  8. 상속법 명문화
  9. 제국 평화법
  10. 개혁의 완성

개혁은 제국 권위를 사용해 해금할 수 있다. 법률 제한은 개혁을 진행하면 점진적으로 열리게 된다. 개혁 1개당 봉신들과의 관계도 페널티 -5를 먹는다.



주요 봉신

선제후

신성 복음 연합은 분권화 된 봉건 제국으로서 선거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선거권은 7명의 선제후에게 있다.


전주 선제후

황제 이한월

신성복음연합의 제5대 황제. 능력과 선량함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군주. 중병으로 목숨이 위태롭다.


부여 선제후

행동하는 자 유석주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서 지역 개발과 자선 사업으로 이름 높은 선제후.


논산 선제후

제국원수 김종찬

김종찬은 혁명기에도 잔존한 제국군을 이끌고 혁명군을 진압하였으며 훌륭한 지휘와 포로에 대한 자비로운 대우로 이름높은 군인이다. 제국군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는 잔존 제국군을 이끌다가 주인 없는 논산을 점거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신 제국군이 된다.


남원 선제후

광인 이옥순

이옥순은 혁명으로 모든 가족을 잃었다. 어렸을때 정의로웠던 성품은 삐뚤어졌고 그 결과 그녀의 통치에는 광기와 공정이라는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흉흉한 소문으로 친구 사이였지만 실종된 사촌이 불화로 인한 다툼으로 그녀에게 잡아먹혔다는 소문이 있다.


정읍 선제후

기회주의자 이룡승

이룡승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다. 선제후 중에 가장 빈약한 세력을 가지고 있고 여기서 오는 위기감은 그가 더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일례로 그는 신안이 약해진 틈을 타 기습을 통해 간을 보고 있다. 신성 복음 연합이 혼란해질 때 그는 자신의 높은 음모력을 이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익산 선제후(법왕령)

법왕 김한결 익산은 원래 제국이 세워진 곳으로써, 초대 선제후 중 하나였으나 원불교 반란 때 그의 가문이 끊어진다. 이후 제국국교회가 성립되고 익산은 성직 선제후로써 법왕의 영지가 된다. 현재 제국 법왕으로써 국교회의 수장인 김한결은 제 5대 황제의 스승이자 동반자. 망가진 황권을 주변의 상황을 이용해서 약간이나마 복원시켰고 동시에 2424년 이후 20년 간 제국의 안정화와 재건을 이끈 능력 있는 인물. 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본업인 신학보다 음모에 집중하고 있다.


비선제후

북부대공령

공주의 전사 임요한

임요한은 원래 좌천된 장군으로서 북부 총독부에 파견된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북부 총독부의 혁명을 휼륭하게 진압함으로서 북부의 마지막 총독이자 초대 대공이 되게 된다. 그는 북부 국경에 맞닿은 선제후이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한다. 제국군이 붕괴된 이후 북부의 침입을 계속해서 막아냈고 힘으로써 질서를 세웠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고 분권화된 제국을 바라기에 개혁에 대해 매번 반대할 것이다.

홍성

이단 반대파 박만희

박만희의 선조는 기계교 세력을 배신하고 연합에 가입해 수많은 공을 세워서 공작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박만희는 기계교 비밀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집권을 거부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계속 왕처럼 군림하길 바라고 있다.

신성기사단

기사단장 박윤호

"예수그리스도와 신실한 형제들을 위한 가장 신성한 기사단" 보통은 줄여서 신성기사단이라고 하는 조직은 사건이전 군산미군을 계승한 기사단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종교에서 찾았으며 이제 제국국교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해 봉사하려고 한다.

서천공작 이유진

황제의 장녀 이유진

황제의 장녀인 이유진은 어릴적 부터 높은 경제능력을 보여줬다. 성인이 되고나자 황제의 곁에서 연합의 무너져 가는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4232년 가증스러운 신성교의 난이 발생했고 순식간에 연합은 무너져 갔다. 황제는 지금까지 자신을 보좌해 온 이유진을 서천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 이유진은 혁명의 여파가 서천으로 퍼지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수습하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황제에게 서천공작위를 하사받았다. 이유진은 서천 공작이 되어서도 황제를 도와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징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한 국가. 제국 개혁이라는 미션 트리가 존재하기에 플레이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특수 유물로 나폴레옹의 군모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