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아시아 태평양 전쟁
Asia-Pacific War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날짜1938년 6월 29일 ~ 1945년 8월 10일
장소동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인도양과 서태평양 전역
결과 연합국의 승리, 일본제국 멸망
교전국
연합국
대한국 (동방) 대한국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동투르키스탄
미국 (1941~)
영국 (1940~)
영국령 인도
캐나다 자치령
호주
뉴질랜드
네덜란드
추축국
일본제국
중화민국 난징정부
필리핀 제2공화국
중화타이완 자치정부
태국
라오스 왕국
베트남 공화국
캄보디아 왕국
버마국
북보르네오 공화국
연합국 지원국
멕시코
자유 프랑스
추축국 지원국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1943)
연합국 참여 공동체
자유 베트남 인민전선
인도네시아 공화국 임시정부 (1943~)
참여 공동체/국가
소련 (~1938)
자유인도 임시정부
인도네시아 공화국 임시정부 (~1943)
지휘관
대한국 (동방) 무종
대한국 (동방) 이승만
대한국 (동방) 김창암
대한국 (동방) 여운형
대한국 (동방) 지청천
대한국 (동방) 안중근
대한국 (동방) 유동열
대한국 (동방) 김원봉
대한국 (동방) 김홍일
대한국 (동방) 장학량
대한국 (동방) 박시창
대한국 (동방) 최용덕
대한국 (동방) 송호성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왕밍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리리싼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주더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린뱌오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펑더화이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예젠잉
장제스
린썬
허잉친
천청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알리한 투라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에흐메탄 콰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오마르 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더글러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홀시
조지프 스틸웰
커티스 르메이
조지 6세
윈스턴 처칠
루이스 마운트배튼
존 커틴
히로히토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스기야마 하지메
야마모토 이소로쿠†
야마구치 다몬†
나구모 주이치†
무타구치 렌야
도미나가 교지
오카무라 야스지
구리바야시 타다미치†
나가노 오사미
왕징웨이
천궁보
펑위샹
리쭝런
바이충시
탕성즈
라마 8세
쁠랙 피분송크람
병력
14,000,000명 5,400,000명
피해 규모
대한국 (동방) 대한국
사망 1,300,000명
부상 1,290,000명
80만명 사망 (민간인)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 소공
사망 750,000
부상 800,000
중화민국 국민정부
사망 1,200,000명
부상 800,000명
800만명 사망 (민간인)
일본제국
사망 1,200,000명
부상 1,300,000명
130만명 사망 (민간인)
중화민국 난징정부
사망 2,100,000만명
부상 900,000명
600만명 사망 (민간인)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으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동부 아시아, 서태평양 일대에서 대한국과 미국, 일본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동북아-서태평양 전선과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난징정부가 대치한 중국 전선, 호주가 중심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선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일본제국이 서방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국가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제국이 한국의 영향력을 꺾어버리고 아시아에서 배타적 패권을 행사하려 벌어진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기까지도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공명하여 많은 서방국가의 식민지인들이 일본제국의 편을 들었으며 1942년경부터 전황이 기울어지고 일본제국의 가혹함을 경험한 식민지인들은 이들에게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한국의 편으로 기울어졌다.

중국 전선은 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과 임시적인 동맹을 맺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일본의 약속을 믿고 장제스와 척을 지던 군벌들이 모여 결성한 중화민국 난징정부간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나 중국 내부에서는 내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배경

전쟁 이전 일본의 상황

소련-일본 불가침조약

1937년 9월 3일 일본 사절단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 이면에는 일소 양국이 한국을 침공하여 분할할 구상이 숨어있었다. 오호츠크 해전에서 한국이 참패하는 것을 본 소련은 한국이 상당히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했고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판이라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한국 해군은 분명히 약화되었지만 소련은 그렇게 높지 않은 수준의 첩보을 통해 군사력 전체가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전개

소련과 일본의 한국 동시 침공

1938년 6월 29일 오전 9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하였고 뒤이어 소련도 한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소련은 투바와 만주전선에 10만 대군을 동원하였고 일본군도 동래에 15만 대군을 상륙시켰다. 예상치못한 기습으로인해 대한국은 일본 해군에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으나 만주와 투바 전선에서는 7월 1일부터 7월 7일까지 이뤄진 첫번째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소련군을 돈좌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한국은 전열을 재정비한뒤 공세에 나서 8월 1일에 소련군 방어선을 붕괴시켰고 8월 9일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빠르게 진격하였다. 이후 8월 12일 한국은 그리고리 시테른 극동군 사령관과 강화조약을 맺고 한국군은 소련 영토로부터 전면 철수하였으며 소련은 결국 한국 침공을 포기하였다.

논란

중국 전선은 아태평양 전쟁의 일부인가?

중화민국 국민정부+아시아소비에트공화국중화민국 난징정부+일본제국이 대치한 중국 전선은 아태평양 전쟁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국제전의 간판을 달았을 뿐인 중국 내부의 내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추축국에게 선전포고하였고 한국의 요구로 승전국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정작 서울 강화조약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중국 내전이 여전히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중화민국 난징정부에 참여했던 주요 군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한채 각지방에 할거하고 있었고 전후에도 중국을 통일하려는 국민정부와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