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틀:역대 북강성 성장 틀:역대 평흥광역시장

초대 북강성 성장
윤근 | 尹勤
출생 1883년 5월 6일
함경도 북청군 신포읍
(現 조선성 북청시)
사망 1951년 9월 19일 (향년 68세)
북강성 평흥시
재임 초대 북강총독
1925년 4월 10일 ~ 1945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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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북강의 왕

한국의 관료, 정치인, 사업가. 북강성평흥의 아버지로 불리며 변방중의 변방이었던 북강 지역을 개척하는게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한국 최초의 비료 생산 회사인 화영사의 창립자로 널리 알려져있다.

가난한 잔반 출신으로 성공한 지역정치가, 기업인이 되었으며 실제로 왕 작위까지 받았었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후대의 지역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현재도 북강성의 도시마다 그의 아호나 시호를 딴 길과 지명이 있으며 평흥에 위치한 대학 세곳의 창립자이자 지역 대기업인 화영지주의 공동설립자로서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초반 생애

1883년 함경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홍서로 고려 초의 문신 윤관의 33대손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윤근의 집안은 이미 중앙 관직에 진출한지 수세기나 지난 뒤였으며 귀족 작위를 받지 못해 평민으로 분류되는 잔반 계급이었다. 아버지는 서당을 운영하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얼마 안있어 그만둔 뒤 어부일을 하였고 모친은 이씨로 농민 출신이었으며 손으로 가잿도구등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둘 다 벌이는 썩 좋지 못해 늘 가난하게 지냈는데 이 때문에 윤근, 윤형 형제는 열살이 조금 넘어서 신포읍내의 단천신문사에서 신문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잔반이라도 학문적 소양은 갖춰야 한다는 부모님의 교육관과 신문사에서 일하는 조건이 겹쳐 윤근은 신문물은 물론 국제 정세등에 대하 기초적 소양을 갖춘 2세대 ‘신사(新士)’계급으로 성장해 나갔다.

또한 윤근과 윤형 형제의 똑똑한 모습에 호감을 느낀 단천신문사 주필 김계영은 당시 각각 14살, 12살이었던 윤근과 윤형을 자신의 지인들이 소액의 교육비를 받아 운영하고 있던 함흥종합교습소에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훗날 함흥종합교습소는 윤근에게 인수되어 화영고등보통학교가 되었다가 윤근 사후인 1966년 효경고등학교, 효경중, 효경초로 분리개칭된다. 윤근은 교습소에서 우수한 학업성취도를 보여주었고 1900년 전국중등고시(현대의 수능에 해당)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1891년 처음 실시된 이후 늘상 지방 유력가 귀족 자제들이 수석을 차지해왔지만 윤근이 최초의 평민 출신 중등고시 수석이 되어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앙정부에서도 국가의 상업을 독점해나가며 점차 비대해지는 귀족층을 견제하기 위해 윤근을 적극적으로 치켜세워주었다. 광종 황제의 칙령으로 윤근은 한성부국립대학교에 특별입학 했다. 중등고시는 당시 입학시험이 아니어서 대학에 입학하려면 따로 시험을 쳐야 했으나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 광종 황제는 변방의 가난한 집안 출신 소년이 전국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사연을 특히 감명깊게 여겼다고 한다.

한성부국립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법학을 전공했다. 1세대 신사 계급이었던 교수들로부터 서구의 신식 행정체계와 법체계를 수학하였다. 당시 한국에서의 대학은 근대적 관료제를 뒷받침하는 관료들을 육성하는 기관에 가까웠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190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평양부사를 보좌하는 수석정무계원으로 보임되어 관료로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1906년에는 당시 관서 지방 최대 은행인 대동은행[2]의 창립자 안재형의 차녀 안희랑과 혼인하였다. 인구조사와 여러 행정 문제 처리에 탁월한 성과를 보이던 그는 불과 4년만에 평양부부사 자리에 올랐다. 이 정도의 능력이라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고 실제로 민정당이나 입헌당 같은 주요 정당에서 영입제안이 오기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0년 그는 누구도 이해못할 엉뚱한 선택을 하게되는데 5대 평성도호부사 김택룡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평성도호부사직으로의 영전을 중앙정부에 요청한 것이다. 아무리 도호부사가 권한이 막대한들 말이 영전, 승진이었지 당시 평성도호부(현 북강성 일대)는 벽지중 벽지였고 인구도 희박했던데다가 당시에는 농사고 뭐고 아무것도 안되는 곳이라 보통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거나 좌천된 인사가 부임하는 곳이었다. 실제로 초대 평성도호부사 겸 평흥관찰사 안현을 제외하고는 2대부터 5대까지 4명의 도호부사는 은퇴 직전의 고령 관료들이라 아예 평흥에 가지도 않고 한성에서 전보등을 통해 대부분의 업무를 볼 정도였다. 게다가 실제 평성 땅에서 근무했던 안현조차도 2년만에 가혹한 환경 때문에 병을 얻어 직을 사임해 한성으로 돌아왔다. 때문에 전임자들을 비롯한 중앙 관리들은 앞길이 창창한 이 젊은 관리가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지 계속 설득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평민 출신’ 관리가 자신들과 경쟁하지 않고 알아서 좌천길로 내려간다니 내심 반기는 귀족 관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정계 인사와 원로 관료들은 이를 말렸다. 하지만 윤근의 고집이 꺾이지 않자 정부에서는 3년 임기를 6개월마다 갱신하는 방식으로 바꿔주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당연히 처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출가외인이라고는 해도 양갓집의 여자를 벽지로 데려간다는 말에 장인 안재형은 온갖 방법으로 윤근을 설득하였으나 오히려 아내가 적극적으로 윤근을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이내 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안재형은 자신의 막대한 부를 통해 하녀 세명에 주치의 두명까지 딸려보냈다.

북강으로 가다. 그리고, 비료와 화약을 생산하는 회사를 세우다

평흥은 당시에 막 정착촌이 형성된 것치고 인구도 1만명 안팎에 나름 철도와 역, 도로 같은 기반시설을 갖춘 소도시였다. 하지만 주민 절반을 조금 넘는 6천여명은 군인, 관료등 정부지원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집계가 안된 일부 농민이나 이민족까지 합하면 2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되긴 했지만 결국 산업이라고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었다. 그나마 목축업이 성행하긴 했지만 겨울에는 상당수의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윤근은 벽돌로 짓고 온돌까지 깐 축사를 건설하고 주변 늪지를 개간하여 옥수수, 밀, 콩등을 재배하는 1차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초반에는 윤근의 정책을 다들 비웃었으나 그가 포기하지 않고 1913~14년에 걸쳐 끝내 200섬 가량(약 38톤)의 콩을 재배하는데 성공하면서 모두들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윤근은 오로지 평흥에서 대규모 농사가 가능하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1913년 독일 과학자인 프리츠 하버가 발명한 질소 고정법을 주의깊게 지켜보았고 1915년 측근 십수명을 파견하여 질소 고정 공정을 조악하게 나마 베껴 왔다. 1916년에는 장인어른의 막대한 사비를 들여 파주 인근에 한국 최초의 질소 고정 반응기를 세웠다.[3] 안재형의 돈으로 과학자와 인력을 끌어모은 그는 수천번의 좌절 끝에 1917년 12월 오스트발트 공정과 거의 유사한 방법으로 질산 생산에 성공했다. 안재형은 이게 돈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는지 사위와 함께 ‘아름다운 햇빛’이라는 의미의 화영사(華景社)를 설립하였고 질소 비료를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화영사는 처음에는 비료만 생산했었으나 촉매와 공정 기계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3년 화약 생산 및 광업과 기계 제조업으로까지 발을 넓혔다. 이 업적으로 1920년 윤근과 안재형, 그리고 여러 과학자들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되었고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훈 받았으며 윤근은 북하후(北河侯)에 봉해지며 귀족까지 되었다.

그러나 윤근은 이런 커다란 업적을 오로지 북강의 발전에 쓰기 위해 평흥 인근에 화영사 소속 대규모 비료와 화약 공장을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진행된 품종 개량을 통해 1920년대 말엽 북강 지역에서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의 농업생산량이 달성되었으며 이런 업적으로 북강 주민들에게는 위대한 성현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북강 같은 추운 지역에서도 대규모 농업이 가능해지면서 옥수수와 콩, 밀의 재배는 점차 내만주로 확산되어갔다. 이를 통해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으며 북강의 인구도 윤근 부임 초기인 14만명 가량에서 1927년 110만명으로 폭증했다. 1925년에는 평성도호부에서 북강성으로 승격되어 정식으로 대한국의 일개 성이 되었고 윤근은 화영사의 실질적 영수이자 북강성 초대 성장으로서 명망있는 사업가이자 지역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윤근은 멈추지 않았다. 1926년 북강성 정부 새해 기조 발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인류는 곡식을 얻기 위한 고투를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쇠를 얻기 위한 고투를 해야할 것이다.

당연히 보좌 관료들은 이 발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 했지만 윤근은 곧바로 북강지질조사사업에 착수했다. 광물자원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1928년까지 진행된 이 사업에서 북강 지역 곳곳에 금광과 다양하고 상당한 양의 철이 묻혀 있음을 밝혀내는데 성공하자 윤근은 화영사를 동원해 채굴 및 제련을 시작했다.

말년

1945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에도 그는 북강총독과 화영사 사장의 자리를 지켰다. 산업 증진등 업적으로 승전에 커다란 공로를 세우면서 그는 생애 두번째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훈 받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 영예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1945년 10월 장남 윤흥이 심양에서 음주가무에 빠져 문란한 생활을 하다 행인을 차에 치어 죽게 하고 차남 윤경재는 아버지를 앞세워 사업을 위해 투자받은 돈을 들고 잠적해 사기 혐의로 투옥되는 등 자녀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20여년만인 1945년 12월 북강총독직을 내려놓게 된다. 물론 자식농사를 잘못지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동정 여론이 대세였으나 자식들의 추행으로 인해 그는 점점 마음고생이 심해지며 쇠약해졌다. 1947년에는 폐렴과 고혈압을 진단받아 부사장이자 기업인인 차명호에게 화영사 사장 자리를 넘기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생활을 보냈다.

여담

19세기 출신 인물 치고 키가 엄청나게 컸다. 병환으로 인해 입원했을 때인 1947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장을 측정했는데 노년기에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191cm였다. 아마 청장년기에는 190cm 중후반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거인이었던 셈.

북강성 평계군에 있는 일부 어웡키족 부락에서는 윤근을 신으로 모시며 매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유목에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던 그들에게 농사법을 전파했기 때문이라고.

  1. 1946년 작위 반납
  2. 현재는 화영지주 산하 은행이다.
  3. 이때 윤근은 괴상한 기계를 세우려는데 처갓집 돈을 빼먹는다고 안재형의 불벼락을 맞았으나, 윤근이 쌀과 콩을 서너배는 더 잘 자라게 해주는 물건을 만들거라고 호언장담하자 윤재형은 탐탁치 못해하면서도 돈과 사람을 내주었다고 한다. 딸을 평흥으로 끌고갔지만 사위에 대한 믿음은 있었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