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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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공식석상이 아니면 군복을 착용하는 것을 꺼렸고, 정장이나 연미복 차림의 모습을 궁 내에선 주로 보였다고 한다. 신채호의 책 '개화논의'를 보면, 이러한 성향은 정확상 젊은 시절 관료생활을 한 경험에 대한 향수가 새로운 관료복인 정장 착용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고, 실제로 이는 꽤 설득력 있는 추측으로 현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융희제 이훈은 군복 착용에도 거리낌이 그다지 없는 모습을 보였다.
생전 공식석상이 아니면 군복을 착용하는 것을 꺼렸고, 정장이나 연미복 차림의 모습을 궁 내에선 주로 보였다고 한다. 신채호의 책 '개화논의'를 보면, 이러한 성향은 정확상 젊은 시절 관료생활을 한 경험에 대한 향수가 새로운 관료복인 정장 착용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고, 실제로 이는 꽤 설득력 있는 추측으로 현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융희제 이훈은 군복 착용에도 거리낌이 그다지 없는 모습을 보였다.


=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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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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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9일 (목) 03:10 판


역대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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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초대 금상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조 광무제 이현| 高祖 光武帝 李鉉
출생 1831년 9월 8일
조선 한성부 경운궁 수인당
즉위 1864년 5월 1일 (30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명정전
사망 1899년 12월 5일 (65세)
대한제국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능묘 홍릉(洪陵)
재위 제 26대 조선국 국왕
1864년 5월 1일 ~ 1877년 9월 17일
초대 대한국 국왕
1877년 3월 2일 ~ 1894년 2월 14일
초대 대한제국 대황제
1894년 4월 7일 ~ 1899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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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제 26대 국왕이자 대한국, 대한제국초대 황제.

흥선군의 세력확장을 염려한 안동김씨 세력이 필사적으로 왕족들에게 압박을 넣어, 가장 정치색이 옅은 종친으로서 으로서 3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 6년째에 프랑스가 조선을 침공했다. 이후 왕도개화파의 정통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조용히 해낸 준비로 안동김씨를 쓸어버렸고, 이를 통해 왕의 권위를 높히는 데 성공하는 동시에 보수파와 진보파의 갈등을 중재하면서 치세를 보냈다.

종합적으로, 그는 음습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던 황제로 평가받는다. 뒷모의와 비밀세력, 막후공작 등이 수도 없이 관련되어 있었고 안동김씨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계략들을 동원한 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이런 정치력과 현명한 판단이 조선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준지라 민주화를 이룩한 효종에 이어 가장 뛰어난 명군으로 평가받는 황제다.

생애

유년기

1831년(순조 31년) 9월 8일, 한성부에서 남연군의 둘째 아들 흥완군 이정응과 부인 대구 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연군의 맏손자였기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3년 전 자식없이 죽은 큰아버지 흥녕군 이창응의 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은신군 - 남연군 - 흥녕군의 제사를 받드는 계동궁의 사손이 되었다.

청년기

나름 야심이 있던 완림군이었으나, 처음에 그는 종친이라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영릉, 선릉의 능참봉으로 일했다. 1853(철종 4)년에는 철종이 춘당대에서 시 짓기 행사를 열었을 때, 부(賦)에서 1등을 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와 교리, 성균관 사성 및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내던 동안 서양 서적 일부를 구입하거나 세계 지도를 몇 개 구비하는 등, 개인적으로 서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겉으로 잘 드러내는 편은 아니였다.

이렇게 조용한 관직생활만이 계속될 줄로 생각되었으나, 철종이 죽고 얼마 뒤 그는 궁궐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었다.

국왕에 책봉되다

당시 안동 김문은 어떻게든 흥선군 이하응의 뜻대로 왕이 정해지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신정왕후 조씨에게 누가 봐도 야심가인 이항응의 친자식을 왕위에 올렸다가는 안동김씨가 박살나는 한이 있어도 풍양조씨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압박을 자객을 통해서 넣었다.

신정왕후는 고심 끝에 자신과 연줄이 있던 흥선군 이하응과 비밀리에 담판을 벌였고, 이 담판에서 흥선대원군의 자식을 올렸다가는 파국이 확정날것이 현재의 상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더군다나 흥선군 본인도 현재 가장 다루기 쉬운 아들인 이명복을 용상에 올렸다가는 추후 왕권 문제로 다시 소란이 나올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이들은 완림군의 중립적인 성향을 이용하여 추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정치적인 모략 속에서 결국 1864년 차기 국왕으로 완림군이 지명되었고,그는 동궁에 입궐했다.

이후 완림군은 창경궁 명정전에서 즉위했다.

소리없는 준비

서학을 접한 경험과 관료생활의 경험이 합쳐져서 그런지, 고조는 겉으로는 많은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탐관오리를 암행어사 파견으로 잡아내거나 오군영에도 연줄을 만드는 등, 소리없이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당시 마이너한 학파였던 왕도개화파를 몰래 방문하여, 때가 되면 그들을 등용할 생각이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눈을 피하면서 겉으로는 수동적인 왕의 행세를 하거나 학문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그들을 속여가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그는 이미 흥선군 이하응과 몰래 접촉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항응은 당시 고조의 비전에 대해 듣고 때가 될 때 세도가를 완전히 박살내기로 약조하였고, 평상시의 태세를 겉으로 내세우며 때를 기다리던 중, 마침내 그 때가 찾아오게 되었다.

병인양요, 그리고 개항

프랑스의 무력에 겁에 질린 안동김씨는 우선 개항을 할 것을 고조에게 부탁했고, 지지층인 왕도개화파의 추후 기반을 위해 고조는 이를 수락했다. 이후 프랑스에 의해서 조선이 불평등 조약까지 체결하자 신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안동김문이 나라를 팔아먹은 게 틀림없다며 왕의 전면복귀를 통한 양이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서서히 민중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안동 김씨 세력은 서양 문물을 도입하여 민생을 달래 보려고 하거나 프랑스 정부에 의존하여 권력을 강화하는 조치도 생각해보는 등 어느정도 대안을 계획하였으나, 프랑스의 목적이 조선의 식민지화라는걸 이들도 안지라 어정쩡하게 협력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풍양 조씨는 더이상 균형을 맞춰줄 필요가 없어진 안동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이하응, 고조와 결탁했다. 동시에 이들의 휘하에 있는 붕당들과 파들은 프랑스에 대한 조치를 의논하기도 하였고, 이때쯤 이들의 협력을 눈치 챈 안동김씨 세력은 반격을 준비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이했다.

왕도개화파의 기상과 겉혀진 장막

문제의 시작은 프랑스의 철군과 궁 앞에서 상소하던 최익현이었다. 당시 국왕의 복귀와 개혁을 요청하는 최익현이 거슬린다며 젊은 안동김씨 자제 하나가 사병들에게 최익현을 끌어낼 것을 명령했는데,끌어내리던 도중 몸싸움이 격해지다가 최익현이 궁 내에서 죽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안동김씨가 해명을 하려 하였으나, 이하응과 풍양 조씨 세력은 아예 안동김씨가 왕에게 충언을 올리는 유자조차 죽이려 든다고 선동을 시작했으며, 곧이어 고조의 지지를 받은 왕도개화파가 일제히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완전히 포섭된 오군영이 안동김씨 자택 등을 단속하기 시작했고, 여기서 주요 안동 김씨들은 역모 누명을 씌워서 유배형이나 극형에 처했다. 세도가에 협력한 이들은 파직을 당하거나 책임을 지고 물러날것을 강요받았고, 이렇게 관직들이 텅 비어버리자 그 자리는 남인과 사파, 왕도개화파들로 채워졌고, 문물만 들어왔던 상태의 조선을 확실하게 개혁해나가기 시작했다.

토지, 민생 개혁과 삼정의 문란을 타파하는 개혁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때쯤, 완전히 패가망신한 중국의 소식을 순선사가 들고 오자 더 이상 중국의 방식만 따랐다가는 망국을 피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대부분의 신하들 내에 퍼져있었고, 나머지 보수파들은 흥선대원군이 압력을 넣으면서 조용해졌다. 고심 끝에 고조는 신료들과 의논하여 우선 프랑스, 일본을 시작으로 서양 각국을 살펴보고 올것을 요청했다. 순방 결과, 보빙사에 포함된 유생들과 보수 인사들까지 서양 문물과 그 강대함에 충격을 받았으며, 조선 내에 들어온 문물로 개화를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고조는 보빙사의 귀국 이후 완전히 개화를 하는 쪽으로 마음이 돌아서게 됬고, 세부 내용을 신료들과 의논한 뒤 임신개혁의 단행을 명령한다.

다행히, 동시기 홍삼의 아편치료 효과도 제대로 알려지면서, 인삼 거래, 회수한 기존 안동김씨 가문의 자금들과 더불어 근대화에 필요한 돈 또한 보충할 수 있었다. 이맘때쯤 개화파 내부에서도 김홍집 같이 거물급 인사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며 개혁이 용이해지기 시작했으며, 보수 세력 또한 개화 자체의 필요성에는 대부분 동감하는 시각을 표하게 되면서 안정적인 개혁과 근대화를 위한 발판이 얼추 마련되었다. 새로운 문물과 개혁들로 생활 수준이 윤택해지자 신민들 또한 새 정부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배를 채워준 개화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도 퍼졌다.

한편,유럽과 일본 순방 이후부터 조선도 지금의 조선으로만 머무르긴 무리라는 의견이 서서히 대두되던 중에, 수교를 원하던 일본제국의 국서가 도착하면서 이 논의에 불이 붙었다. 국서에서 일본 천황이라는 명칭이 진보적인 인사들의 자존심을 자극하면서 칭제 요구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으나 보수파는 말도 안되는 의견이라면서 반박했었다. 이 의견은 나중에 가서는 신민들에게까지 확대되서 칭제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1875년에 들어서는 꽤 커진 상황이었다.

1875년, 고심 끝에 고조는 우선 외왕내제를 도입하고 국호를 제국은 아니나 대한국으로 변경하는 식으로 보수파와 진보파의 논쟁을 종식시켰다. 송나라, 일본을 시작으로 주변국들과 열강들이 새로운 국호를 숙지하는 와중에, 조선의 변화를 매우 못마땅해하는 세력이 하나 존재했으니 바로 조선땅 위의 후금이었다.

후금은 가까스로 통일을 완수하고 영토를 확장한 뒤, 명군들이 조선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내치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후금은 송나라의 성리학 문화가 들어오면서 피어난 성리학적 근본주의와 러시아 침공 이후 생겨난 반외세 감정으로 세를 얻은 만주족 근본주의, 전통적인 부족간의 갈등, 러시아와의 국경문제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여기에 당시 후금 왕의 비인 예허나라 힝전은 국가 제정에 무리가 갈 수준의 사치를 자랑했다.

이러한 후금의 상황과 안동김씨 시대에 농민 억압 정책의 일환으로 남만주 일대에 이미 진출하여 사실상 영토를 만든 조선 농민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조선 내에서는 여진 정벌론이 서서히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 풍조는 정부 내에서도 퍼진지라 결국 1884년 후금에게 통상을 요구하는 칙서가 전달되었으나 예허나라 힝전의 완강한 거부로 거절되었고, 결국 1888년 한국은 사단 몇명을 금나라 영토에 파병하여 교전, 승리를 거머쥐어 금나라의 왕과 강제로 간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89년에는 마침내 고조의 지시로 헌법이 반포되었고, 의회 또한 개설되어 총리대신 선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 전화의 불길이 하나 더 다가오고 있었다.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그리고 칭제

오랫동안 조선과 오락가락하는 외교적 관계였던 순나라는 조선의 개화와 확장을 좋지 않게, 아니, 어쩌면 명분론적으로는 일본보다 위협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아편으로 국력이 둘 모두 약화된 송과 순이라지만 송은 친조선적인 접근법을 보여줬고, 이에 러시아, 송 그리고 일본과 조선에 의한 포위를 방지하기 위해 후금과의 밀착관계를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자연스레 후금과 대결하는것이 기정사실이 된 상태였으며, 일본 또한 순나라와의 대결을 통해 남양 패권을 얻어내야 지속적인 어일신의 진행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개화파 국가들로서 손을 잡고 전쟁 준비를 시작하는데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1893년 송이 한국에게 국호를 조선으로 도로 바꾸라고 강요한 것을 기점으로 순금 연합과 한일 연합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착실하게 군 양성을 통해 전쟁 준비를 해오던 한일 연합의 승리였다. 이를 통해 한국은 동북부 일대의 만주 지역을, 일본은 대만과 팽호 열도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칭제요구가 조정에 빗발치자 고조는 이를 수락, 기존에 쓰던 연호인 광무를 다시 개최해 제국으로서의 광무시대를 환구단에서 선포하였다.

붕어

이렇게 칭제까지 한 고조였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건강은 1890년에 있었던 수학원 제정 논의와 1891,92년의 서원제, 신분제 개편 이후부터, 신료들과 힘을 합쳐 일했음에도 개혁의 막중함으로 인한 과로로 인해 딱히 좋은 상태는 아니였다. 때문에 종종 요양을 1달동안 하곤 했으며, 이 시기동안은 신료들에게 대부분의 일을 맡겼다.

붕어하기 1년 전, 고조는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신의 오랜 정치적 동료이자, 이제는 아소당 누워서 서서히 죽어가던 흥선군 이하응의 병문안을 왔다. 당시 흥선군은 그에게 몇가지 말을 남겼는데, 그 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신은 폐하의 치세에 하늘이 내리신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고, 폐하께서 용상에 계셨기에 황공하게도 대업을 완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당시 고조는 이후 들리지 않는 몇마디를 더 나누다가 퇴궐하였는데, 그날 밤에 올라온 수라상을 거부하고 밤을 새며 용상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날, 완경군 이재원이 아소당에서 나온 뒤 대원군이 사망했고, 고조는 오전까지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다가 그날 저녁 만찬에서 눈물을 보였다고 사관이 기록했다.

이듬해부터, 고조의 병세는 악화일로를 달렸다. 죽을 때를 직감한건지 이때부터 황태자인 이훈에게 여러가지 정보들을 알려주고, 김옥균, 박영효 등 개혁 원로들을 만나 차기 의회와 중추원에 집어넣을 정치인들에 대해서 논했다. 그러던 중 5월 말부터 병세가 극단적으로 심해져 환경전에서 간병을 받는 신세가 되었는데, 죽기 하루 전 그는 1차적으로 황태자 이훈에게서 문안을 받았고, 정사에 대해 의논한 뒤 문안한 김옥균, 박영효와 이완용에게 고조는 불을 꺼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완용이 이 직후 전등불을 끄기 위해 잠시 몸을 돌렸는데, 이 잠깐의 사이 고조는 나머지 두 대신이 보는 앞에서 천붕했다. 죽기 전 작성한 문서를 바탕으로 15일간 상복을 입고 장례 일정을 진행했고, 묘호는 조선의 영광을 높은 탑처럼 굳건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고(高), 주명과 삼한의 것이었던 천명을 다시 계승한 것을 높이사 조(祖)로 정해졌고, 그리하여 고조(高祖)로 결정되었다.

가족관계

평가

어록

여담

생전 공식석상이 아니면 군복을 착용하는 것을 꺼렸고, 정장이나 연미복 차림의 모습을 궁 내에선 주로 보였다고 한다. 신채호의 책 '개화논의'를 보면, 이러한 성향은 정확상 젊은 시절 관료생활을 한 경험에 대한 향수가 새로운 관료복인 정장 착용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고, 실제로 이는 꽤 설득력 있는 추측으로 현대 학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융희제 이훈은 군복 착용에도 거리낌이 그다지 없는 모습을 보였다.

대중매체에서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