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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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한국
관련 문서
[ 정치 · 군사 ]
[ 역사 ]
[ 사회 ·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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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대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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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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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우산국 건주위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한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남북한
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한
시대
태봉 후백제 후신라
고려
시대
고려
조선
시대
조선 요동도독부
광무 시대
대한제국
융희 시대
성덕 시대
연합군 군정
태시
시대
대한국
명화
시대
동아시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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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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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대남)
(선말한초)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대금

대청
대청제국
(괄호는 외왕내제 왕조)

UN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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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大韓國 | Korea
국기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오얏꽃
국조
참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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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독립선언문 반포
1894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 전쟁
1933년 한성진군, 비상계엄령 발표
1934년 일심 체제 시작, 몽골출병 종료
1936년 4국 동맹 체결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발발
1945년 포츠담 선언 수용, 연합군 점령
1946년 대한국 헌법 공표, 대한국 출범
1955년 조선공산당 쿠데타 미수
2010년 명화제 이순 즉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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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최대도시
황경 한성부
면적
375,025km²
내수비
2.9%
위치
동북아시아 대한반도, 남만주 일대 및 부속도서
주변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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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20,659,885명(2023년)
민족 구성
한민족 96.7%
만주인 0.92%
일본인 0.83%
중국인 0.75%
러시아인 0.26%
캐나다인 0.24%
태국인 0.11%
기타 0.27%
인구밀도
311.5명/km²
출산율
1.22명
기대수명
84.4(2024년 기준)
언어
공용어
한국어사실상
공용문자
한자, 한글
종교
국교
없음(제정분리)
종교 분포
무종교 50.8%
불교 21.3%
기독교 19.7%(가톨릭 14.4, 개신교 5.3)
천도교 2.7%
대종교 1.3%
그 외 5.2%
군대
대한 국방군
주둔군
주한미군, UN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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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도
2경(京) 27부(府) 22도(道)
군현방
272군(郡) 331현(縣) 50방(坊) 548구(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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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자유민주주의, 의원내각제, 다당제(사실상 일당우위제), 양원제, 단일국가
국가 원수
(대황제)
명화황제 이순[1]
정부
요인
내각총리대신
(정부수반)
안철수
중추원 의장
김영남
중서원 의장
진병욱
대법원장
조희대
민주주의 지수
163개국 중 17위,완전한 민주주의[2]
여당
연립여당
국성
전주 이씨(全州 李氏)[3]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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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명목 GDP
전체GDP
4조 5200억$(2024년 기준) |세계 4위
1인당 GDP
34,038$(2024년 기준) |세계 32위
GDP
(PPP)
전체 GDP
5조 1009억$(2022년 기준) |세계 6위
1인당 GDP
57,453$(2022년 기준) |세계 18위
국부
25조 2675억$(2024년 기준) |세계 4위
수출입액
수출
7,212억$(2024년 기준) |세계 4위
수입
6,874억$(2024년 기준)
외환보유액
1조 2,747억$(2024년 기준) |세계 3위
신용등급
무디스 Aa2

S&P A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대한국 원(圓,₩)
ISO 4217
KW
국가예산
1년 세입
1조 6578억$(2024년 기준)
1년 세출
1조 1,654억$(2024년 기준)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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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명화(明和)
시간대
UTC+9(한국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운전석(통행 방향)
오른쪽(우측통행)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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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56년 7월 25일
수교국
195개국
ccTLD
.kr, .한국
국가코드
408, KOR
국제전화 코드
+82
위치
대한국 수도 황경 한성부의 전경

서경 평양부의 전경

개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은 신(信)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종 문황제

7년의 밤은 새벽녘에 저물어가고, 아침의 근화향(槿花鄕)에 꽃이 피도다.

대한국(大韓國/Korea), 통칭 대한, 혹은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대한반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1392년에 대한 태조 고황제에 의해 건국된 왕조 국가인 대조선국을 전신으로 하며, 본래 이 시기동안 중국 대륙의 국가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굳혀가던 중, 약 60년간 지속된 중국의 4호 6국시대에 효종의 주도로 상당한 군사적 · 국력적 증강을 이루었다. 이후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해 서방 세계에 문을 연 이후, 흔히 임신대경장이라 알려진 총체적인 개혁을 실행, 번국으로서의 지위를 벋어던지고 대군주가 다스리는 자주국인 대한국을 선포한 뒤, 1894년에는 당시 중화제국으로서의 자리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순나라를 상대로 극동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한 단계 위의 국위인 대한제국을 자처했다.

이후 러한일 전쟁, 대청 병합과 제 1차 세계대전에서의 백군 잔당 유치 성공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으나, 일전부터 급격한 근대화로 인한 정치적인 혼란과 시민운동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 진 데 이어 1929년에 찾아온 대공황에서 촉발된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새로히 즉위한 고종 성황제의 결정으로 인해,끝내 근황주의 파시즘 일민주의를 신념으로 삼은 충정일심회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 일심 체제의 막이 올랐다. 일심 체제가 지속된 동안 대한제국은 1937년 한중전쟁의 서막을 올려 뒤이어 참전한 대일본제국과 난징,상하이를 경계로 중국을 분할할 목적으로 침략전쟁에 열을 올렸다. 전쟁이 장기화되던 중 끝내 1941년에는 소련을 상대로 동시베리아 전쟁을 개시, 태평양 전쟁에서도 북태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선전하는 듯 했으나 서부전선을 주도했던 독일의 졸전을 기점으로 전세가 악화됐다. 결국 1945년 동래, 한성과 평양에 연달아 대규모 공습을 당한 뒤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며 항복을 선언, 그렇게 대한제국의 폭주는 끝을 맺었다.

전후 대한반도에는 군정이 들어섰으나, 대황제는 항복을 사실상 직접 주도했다는 점과 한국 국민들에게 받는 지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 고려되어 폐위를 면했다. 그러나 한국이 다시 극단주의화되는것을 원치 않았던 미군의 간접지배하에 헌법이 개정되어 한국의 황제는 국민적 통합자로서만 명시되었고, 암묵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진 당시 황제는 태상황으로 올라 사실상 폐위되었다. 그 외에도. 또 다른 당사국인 소련의 의견에 따라 최중요 식민지였던 대한제국령 만주 또한 자주독립국가인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조선시대 당시 개척한 요동과 간도를 제외한 모든 해외 영토를 상실했다.

이후 1951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어 제1세계로 편입된 뒤, 중국 내전을 비롯한 외부 특수를 이용한 수출업으로 경제적 호황을 이룩, 끝내 재기하는데 성공하였다. 근대를 지나 현대 대한국의 정치 · 외교는 이때부터 재형성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정치적는 황실의 재량권이 아직 잔존해 있는 궁내부와 그 산하기관을 제외하면 황제의 정치적 권한이 상당히 축소되었기에, 실질적인 정치는 황제를 국가원수로만 두고 실권은 관료들에게 쥐어진 의원내각제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의 집권여당은 1955년 대규모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인 신진민주당이며, 최고 실권자인 현임 내각총리대신은 안철수다. 신민당의 경우 1955년에 집권한 이래 국민당 출신의 김대중이 제 45대 내각총리대신직을 역임한 시기를 제외하면 집권 여당의 자리를 계속 지켜왔는데, 이를 신민천하 시대라고 부른다

외교에 있어선 제 1세계에 속하여 동북아의 중요한 균영추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한 친미/친서방 외교를 고수해 왔고, 소련과 중경정부와의 신냉전이 본격화된 2010년대 후반 이후론 서방 세계 내에서 신뢰받는 대중국 전략 파트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상징

국호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옛날에 화인(華人)이 아사달(阿思達)을 칭한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上曰: 我邦乃檀君之地, 三韓續大統. 而國初受命, 統合爲一。 今定有天下之號曰‘大韓’, 未爲不可。 且每嘗見各國文字, 不曰‘朝鮮’, 而曰韓者, 抑有符驗於前, 而有竢於今日, 無待聲明於天下, 而天下皆知大韓之號矣。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단군의 땅인데, 삼한(三韓)이 그 대통을 이어받았다.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한 나라로 통합을 .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나라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고조 태황제 실록》광무 원년(1877년)[4] 양력 4월 13일 3번째 기사: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이하의 관리들을 인견하다
상이 이르기를 "국호는 이미 일전의 개원 때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조 태황제 실록》광무 18년(1895년) 4월 18일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国)'이다. 약칭으로는 '대한'과 '한국'이 사용되었는데, 보통 대한의 경우 미시적인 용도에서 사용되거나 예스러운 느낌, 혹은 애국심을 드러낼 일이 있을때 주로 사용한다. 반면 일상과 여타 한자문화권의 국가에서는 대한 대신 한국이라는 약칭이 더 자주 사용되는 편. 다만 1960년대까지는 국내에서도 대한의 사용률이 높은 편이였다.

구 헌법에서 보이듯 성문화된 국명으로서의 사용은 선말한초시기부터, 단어 자체는 삼한을 일컫는 다른 말로써 한반도 전역을 이르는 말로 예전부터 사용되었다.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의 군주가 한(韓) 씨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후 건마국의 군주가 될 때 한왕(韓王)을 자처한 대서 한(韓) 국호가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후 한반도 중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은 삼한으로 불렸다. 마진변한이 사라진 지 이미 수백년이 지난 삼국시대 후반부 당시에는 의미가 변형, 확장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셋을 삼한이라고 불렀고,[5] 이것을 통일신라와 고려가 통일할 때 스스로 삼한일통이라 했기 때문에 '한'은 한민족의 영역 전체를 의미하는 별칭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삼한이 원래 삼국시대 초반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여러 나라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밝혀졌지만, 관용적 용법은 계속 이어져 이후 대한 시대가 열리고, 현대로 이어지기까지 삼한이란 단어는 지금의 대한을 의미했기에 고조는 한(韓)을 정식 국호로 정한 것이다.

영어명인 Korea는 대한 시대가 개막한 이래 사용해온 영문표기법으로, 고려에서 기원한 말임을 껄끄러워한 한국 정부가 여러번 타국에 Dai Han이나 Dae Han으로 표기법을 수정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미 Korea가 한국을 뜻하는 말이 된지 수백년이 지난터라 바뀌지 않았다. 결국 1945년 이후부터는 내부에서 사용하는 영문 표기를 Dae Han으로 하던 법칙도 포기하고, Korea(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를 수용하여 국내외 모두에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 한국인들이 자국을 칭하던 표현들 중 사장된 것에는 황국(皇國), 제국(帝國) 등의 호칭이 있었다. 다만 해당 칭호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에 사용된 것들이다보니 주권까지 황제에서 국민에게로 이양된 현대의 대한국에서는 암묵적으로 삼가거나 사실상 금지하고 있으며, 대금 등 제국주의 대한에게 피해를 입은 국가들은 더더욱 사용하지 않는[6] 호칭이다.

국기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국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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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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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황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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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한의 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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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국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남북국
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
시대
태봉 후백제 후신라
고려
시대
고려
조선
시대
조선 요동도독부
광무 시대
대한제국
융희 시대
성덕 시대
연합군 군정
태시
시대
대한국
명화 시대

태조 고황제의 개국과 조선시대

왕건이 세운 고려의 정국을 신진사대부들이 장악한 데에 이은 1392년, 마침내 고려의 마지막 왕이였던 공양왕이 양위를 선언하며 개성 왕씨를 주축으로 해 이어져 오던 고려의 역사는 474년간의 흐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역성혁명으로 엎어진 고려의 옛 터에는 새로운 왕조국가인 조선이 세워졌고, 그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 사람이 바로 이성계, 후일 반천년을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전주 황실의 시조인 대한 태조 고황제다.

성리학과 중앙집권을 국시로 삼았던 왕조인만큼, 오늘날까지 대한국에 남아있는 예절 및 유교적 풍습 등이 실실적으로 태동을 하던 시대다. 비교적 최근에 정립된 개념인 소위 유자예 또한 기원을 따지자면 조선시대의 시작부터 태동한 유교적 풍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 대마도 해전만주에서의 전쟁이 끝난 시기를 기점으로는 중국과 만주족의 영향력이 모두 증발한 틈을 삼아 요동 방면에서의 비밀스러운 영토 증대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는 1622년 경 총기와 제지 무역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상인들과의 접선이 이루어졌고,그렇게 조선에는 알게 모르게 서양의 문물이 흘러들어올 틈이 마련되었다.

영묘조 대에 들어간 1776년부터는 동아시아의 안정화와 경신대기근 이후 잠시 세가 꺾였던 상공문화의 발전이 증세 정책으로 인해 재개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더불어 정조의 탕평책의 실패로 장동 김문의 세도 정치가 부상한 이래 국시인 성리학적 질서와 삼정의 문란, 사회적인 발전과 격차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조선의 쇄국은 오직 네덜란드와 동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와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는 듯 견고해보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사화

자세한 내용은 병인양요,벽두의 변,신미사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들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다. 1865년 동래진의 화관(和館)에서 인삼을 밀매하려다가 발각되어 강제로 추포된 프랑스인 몇명이 본국으로 도망쳐 조선 정벌을 요구하였고, 이에 프랑스 정부가 응하면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된 장동 김문은 프랑스와의 공조를 도모하거나 군국기무처의 설치, 부분적인 근대화 정책의 도입 등을 통해서 정권의 연장과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미 몇십년간 삼정의 문란으로 곯아온 정국을 타파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펼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날히 높아지고 있었고, 흥선군 이하응 등과 결탁한 국왕의 정치적 공세 또한 장막 속에서 그 윤곽을 밖으로 들어냈다.

끝내 1871년 어느 장동 김문 자제에 의한 이항로 살해 사건을 기점으로 신미사화로 인해 조정 내 정파와 당시 국왕이였던 [고조 태황제 이현 (아침해의 원유관)|고조 태황제에게]] 탄핵을 받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사태를 끝으로 조선의 세도정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임신대경장과 대한시대의 개막

자세한 내용은 임신대경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편 프랑스와의 압도적인 무력 차이의 경험과 서서히 흘러들어오던 서구의 문물은 이제 개항장을 넘어 한양의 조정에도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사상을 퍼트리고 있었고, 국왕을 비롯한 당시 고위직들의 위급한 정국에 대한 경각심이 합쳐지며 이내 보군불난(補君払難), 즉 나라의 국본이자 실권자인 군상을 더욱 보필하여 위기를 타파해 나가자는 표어 아래에 대대적인 개혁이 실행되게 되었다. 1873년 파견된 보빙사의 일원들이 귀국한 이래 가뜩이나 높아져가던 개화론은 서구 문명에 대한 충격과 함께 정점에 달했고, 신미사화를 통해 권위를 높인데다가 조정 계파들을 하나로 뭉친 뒤 충성심을 얻어낸 고조 태황제는 이내 개화론을 수용, 그렇게 관료들과 결탁한 국왕의 지시 하에 위로부터 아래로 전해내려오는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단순히 서구화의 결정이 시찰만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이미 개항 한참 이전부터 이양선의 출몰이나 아편전쟁, 월남의 사례 등이 화관의 서적등을 통해 전해지며 개화 여론은 꽤 비대하게 형성된 상황이였고, 이 시기 척사를 외치던 인사들이 병인양요로 큰 충격을 받은 와중에 거두인 이항로가 사망하며 척사파가 소위 동도서기파로도 불리는 보국파로 흡수되거나, 일부는 아예 급진적인 개화를 지지하는 여론으로 선회한 와중에 이러한 조정 내 세력들이 안동김씨 타도와 국왕의 권위 회복 등의 슬로건 아래에 뭉친 상황을 정세와 대국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던 국왕인 고조가 친위세력 및 지지기반으로서 잘 이용하였던 것이 결과적으로 근대화 시작 및 그 성공의 큰 요인이다. 이 무렵 프랑스, 영국 및 미국을 포함한 유럽 열강 대부분이 외부 및 내부 문제로 개입할 틈이 없었다는 것 또한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던 중 1874년 도착한 일본의 국서는 또 다른 파동을 불러일으켰다. 국서의 승인 자체는 그저 형식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약간의 소음과 함께 넘겨졌지만, 내심 명나라의 종막 이래 중원의 통일 왕조가 긴 세월동안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사대부들로부터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독자적인 국호를 제정하여 독립의 치세를 떨치라는 상소문이 빚발쳐 올라왔고, 결국 논의 끝에 새로운 국호인 대한으로 결정. 대외적으로는 대군주의 작위를 선포하고, 내부에서는 부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등 외왕내제의 예법이 상용화되었다. 한편으로는 1877년얼 기점으로 독자적 연호인 광무(光武)가 상용화되면서 실질적인 대한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그렇게 조선 시대동안 끝낸 삼정의 문란 타파 등의 개혁을 뒤로하고, 임신대경장의 성과에 이은 체제의 대개편은 어느새 1873년의 사민평등 등 여러 서구적 개혁과 맞물려서 이루어졌다. 1877년에 이루어진 국학선포(國學宣布)의 칙령과 같은 성리학의 근대화 조치도 있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일부 사대부들의 반발 및 성리학의 근황론적 도그마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추후 근대적 해석에 기반한 유학적 세계의 확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제국주의와 1차 동아대전, 극동전쟁

자세한 내용은 제 1차 동아시아 전쟁,제 1차 극동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후 대한국이 내치 정리를 끝내고 개혁으로 인한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정한 방안은 마련한 방법은 바로 외부로의 확장이였다. 1885년 북간도 사건으로 후금에 대한 개입의사를 드러냈고, 이후에는 당시 또다른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어 대대적인 전쟁을 개전, 승전국으로서 패전국의 일원이였던 후금의 영토를 추가적으로 할양했다. 전쟁 이후인 1894년에는 환구단을 건설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격을 높였고, 이는 추후 제정된 광무 국헌에도 반영되었다. 1900년에는 웨이하이와 요녕 등을 통과해 자금성에 입성하기도 하는 등 외부 출병에도 관심을 보였고, 의화단의 난이 종결된 이후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 국가예산에 투자했다.

이러한 와중 대한제국의 팽창에 방해되던 국가가 바로 러시아 제국이였는데, 만주 전역이 한국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던 러시아 제국은 후금의 아이신기오로 자이톈 가한의 광서신정에 참여하는 등 만주에 한국의 입김이 닿는 것을 막으려는 행보를 보였다. 이에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대한제국은 1901년 영한일동맹의 체결로 영한일관계를 밀착시키며 응수했고, 결국 1904년 극동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나 극동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을 쓰러트린 뒤 연해주의 도독부 설치 등 이권을 보장받은 대한의 무패행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을미사변 등 여러 정치적 공작과 내부의 친한인사들을 포섭한 대한제국을 막을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한청의정서 체결에 이어 1909년 무신조약을 통해 후금의 뒤를 이은 대청제국을 완전히 합방했다.

세계대전, 그리고 시베리아 개입

자세한 내용은 제 1차 세계대전,대한제국의 시베리아 개입,금관작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한제국군은 중립을 유지하며 전쟁특수를 통한 이득을 보던 중, 영한동맹에 의거하여 동맹국에게 선전포고문을 공포한 뒤 독일령 교주만(청도)를 점거했다. 덕분에 대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유리한 외교적 입지를 점할 수 있었고, 비록 전쟁특수의 근원지가 끊기긴 했지만 비슷하게 물자수출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본 일본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대호황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후 1920년에는 프리모예 일대에서 항전을 하던 백군을 지원, 일본에게는 캄차카 반도 점령을 묵인하는 것을 대가로 소련군의 시선을 끌 병력을 가라후토 해역 근해의 극동 방면에서 마련할 수 있었고, 이후 하바롭스크 조약을 통해 스타노보이 산맥을 포함한 기존 연해주 이권지대를 아우르는 친한-친영-친일 성향의 백군 정권인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을 건국, 소련과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금관작전을 통해 구 러시아의 막대한 정통성을 가진 로마노프 황가의 마지막 후손들의 신변을 확보한 것은 덤이였다.

보통 근현대 대한사에서는 이 시기까지를 , 즉 광무~ 융희 시대 중후반까지를 대한제국의 전성기로 본다. 정치적으로도 자유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경제, 국제적 위상 또한 한껏 올라간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

정치적 극단화와 호국 체제,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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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5년에 들면서 사상누각에 불과한 호황은 끝을 맺었다. 한껏 오른 국위가 무색하게 근대화와 부국강병이라는 명분 하에 법가적으로 개혁된 성리학인 국체유학은 기존 조선의 민본주의적 요소를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산업화로 인한 빈부격차 확대와 겹쳐져 농민과 빈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는 곧 사회에 불만이 쌓인 사람들의 증대와 민권 확대 등을 외치는 사회운동,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탄생 등을 초래했다. 하지만 사실상 작은 환국이나 마찬가지인 의회 내 내 당파 싸움과 정권교체, 내각에 힘을 발휘하는 또 다른 세력인 종친과 황실이라는 변수는 당대 대한제국 정부가 제국보안법 제정 등 강경한 대책들을 내세우는 결과를 불러왔고, 여기에 연달아 일어난 을축대홍수로 인한 수재와 세계대공황은 대한제국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렇게 의회정과 문민정치의 무능에 질린 대한인들은 서서히 옛 조선시대와 같은 군주의 전면 통치를 통한 치국의 평안을 내심 바라기 시작했고, 하필이면 정국을 주무를 수 있는 대황제의 자리에 앉을 황태자 이영 또한 이 흐름에 휩쓸린 상황이였다. 춘생문의 변으로 동생인 하나뿐인 동생인 예친왕을 잃은 황태자의 의회정 및 원훈 관료들인 공신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결국 일이 어떻게 돌아가건 차후 대한제국이 개막한 이래 3대째 직계로 이어져온 사직을 이어받은 그가 용상에 앉을 경우, 대다수가 노환으로 사망하거나 은퇴한 공신들이 현 정세를 불신하는 젊은 황제의 독단적인 행보를 견제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러는 중 만주에서의 성공과 1932년 벌어진 몽골 출병을 감행을 통해 번국 형식의 괴뢰정부의 수립을 코앞에 두게 되자 한껏 기세를 높인 군부 내부에는 대세인 근황과 반공을 외치는 파벌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결국 1933년 말, 군 내 거대 파벌인 북진회와 백의단으로 알려진 근황 단체가 손을 잡고 기사정변을 일으킨 뒤, 대황제의 재가를 받아내어 종친과 의회를 무시한 권위 확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34년부터 잔뜩 자신감에 찬 상태로 정계에 손을 뻗치기 시작한 군부와 근황계는 대황제의 칙임권으로 유명무실해진 의회를 사실상 장악했고, 검계 색출이나 확장정책 홍보 등 포퓰리즘적인 정책과 대황제의 권위 신장 계획 등으로 민중과 황실 양쪽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렇게 군국주의의 수렁에 빠진 대한제국은 대륙 진출과 소련 견제를 위해 1934년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의 군벌계 인사들을 후원해 복고 쿠데타를 사주, 당시 황녀였던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를 차리나로 즉위시켜 제정 러시아의 복고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끝내 독일, 이탈리아 및 일본과 반공협정을 체결,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거듭나며 사실상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로의 변신을 마쳤다.

2차 동아대전과 동시베리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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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서히 폭주해가던 대한제국은 끝내 1937년, 중화민국과의 국경 인근에서 자국 병사가 사라진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한중전쟁, 후일 2차 동아대전의 발판이 되는 전쟁을 개전했다. 얼마 안 가 동남에서 진격을 감행한 일본 제국과의 협의로 사실상 중국을 국가로 취급하지 않기로 결정한 양국 연합은 북경대방화, 난징대학살 등 무참한 폭력을 행사하며 중국 내륙으로 진군해 들어갔고, 결국 이는 일본과 한국의 동아시아 패권 장악을 경계한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를 초래했다.

이에 곤란에 처한 군부는 때마침 전달된 독일로부터의 전보를 수락해 1941년 7월 10일에 할하사변을 일으켜 한소전쟁을 개전했고, 얼마 안 가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남방작전과 미드웨이 해전 등에도 동맹국으로서 참전하며 본격적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대전쟁이라는 장작에 불을 지폈다.

동시베리아 전쟁을 통해서 사실상 동시베리아의 점령을 완료한 한편 북태평양을 사실상 가로막아 알래스카에 폭격기가 도달하게 만드는 공작까지 성공시킨 대한제국은 이내 연전연승에 기세가 등등해졌지만, 얼마 못 가서 연합한대를 따라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전함의 손실과 시베리아의 동장군으로 인한 진군 약화가 시작되며 서서히 전쟁의 화력이 바닥나가기 시작했다. 대한과 일본을 상대로 처절한 항전을 계속하기로 택한 국민당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거세져갔고, 이로 인해 사실상 발이 묶여버린 중국전선은 의미없는 소모전이 강요되는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한제국은 임전무퇴 전술이나 결사보위정신, 만세 돌격같은 처절하고도 잔인한 기행을 반복하며 동시베리아와 중국에서 몰려오는 군인들을 상대했고, 대한반도를 폭격하기 위해 날아오는 미군의 전투기들을 상대로 의미없는 싸움을 계속했다. 결국 한국의 끝없는 항전을 멈추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은 그해 2월 한성과 부산을 대상으로 대공습을 감행했고, 6월에는 점령한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를 이륙시킨 뒤 평양을 대폭격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결국 이에 충격을 받은 성덕제가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대한제국을 피로 물들인 전쟁은 끝을 맺었다.

그렇게 수많은 피를 흘리고 한성, 평양과 동래 등 주요 대도시 3개가 모조리 잿더미로 변해린 대한제국은 끝내 연합군 측에 항복을 선언했고, 2달 뒤 최후의 추축국이였던 일본 제국이 항복하며 태평양의 위협 요소가 사라지자 본격적인 연합군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전후 재기와 진정한 전성기

패전 후 황실의 폐지를 염려한 성덕제는 맥아더를 붇잡아두고 몇시간 가량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미국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미국은 이미 이 대화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대한에서의 원활한 지지도 확보를 위해 황실 폐지는 차선책으로 안배한 상황이였다. 그렇게 황실이 폐지되지 않은 채 황권을 대거 강탈하는 것을 조건으로 유지되었고, 이후 연합군의 군정을 거치게 된 대한을 옛 조선과 같은 농본국가, 즉 '동양의 우크라이나'로 만드는 계획이 처음에는 고안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연합군의 세력이 안빈낙도하기에는 아직 전란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였다. 1950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재개된 것에 이어 만주의 국부인 우미예순이 이끄는 만주 공산당 세력은 1950년 헌법을 반포할 정도로 성장하여 만주에서 직접적으로 서방이 활동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고, 코앞에서 존재 자체로 소련을 자극하고 있는 연해주의 백러시아 정권의 배후지를 오로지 바다 건녀편에만 두는 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당시 전후처리국에 해당됬던 일본을 해상반공국가로 개조한 데에 이어 한국을 UN군의 병참기지 겸 육상반공국가의 선봉으로 만들기로 계획을 수정하였고, 이렇게 벌어들인 전쟁특수는 폐허가 된 예전의 대한제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현대의 대한국 위에 다시 새로운 인프라를 건설해 나갔다. 또한 당시 군비증강을 도모하던 이승만 총리가 시위로 인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대한국 사회운동의 시조격이 되는 사건인 안보투쟁이다.

이후 시작된 여러 정당들의 대연정 계열 정당인 신민당 정권은 국내의 전쟁 피해 회복에 힘을 썼고, 러시아 차르국을 지원하는 한편 국가적 차원에서 반혁명정책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의 신뢰도를 얻어갔다. 그렇게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미국의 마셜플랜 정책이 겹쳐지며 경제에는 다시 회복의 빛이 밝아왔고, 이내 경제적 초호황이 도래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경제발전을 주도한 신민당이 계파를 막론하고 큰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이는 훗날 신민천하 시대의 초석이 되었다.

1960년대 되어서는 서독을 제치고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의 자리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했고, 이후 1965년에는 한성올림픽을 통해 대한국이 전후의 어둠을 뚫고 다시 재기하였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후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 불리는 3저호황이 막을 올리면서 국민소득이 소비에트 연방을 돌파해 세계 3위로 올라갔고, 이 시기 개최한 행사들 및 국가적 홍보를 통한 예전의 추축국으로서의 부정적인 면모나, 환도와 총대를 휘두르며 황제의 보위를 부르짖는 미치광이 동양국가에서의 모습을 어느정도 탈피했다.

1980년대의 경제 초호황, 플라자 합의와 불황의 10년

1980년대에 들어서자 베트남 전쟁 등으로 미국의 경제가 악화된 틈을 타, 동아시아에서의 경제적 성장은 미국에서 경제황화론이 등장할 수준으로 빛을 발했다. 당연히 이 대열의 선봉에 서 있던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였는데, 이 시기 대한국은 증시의 최고치가 경신되면서 사실상 미국과 비등한 경제적 위상에 올랐다. 이 시기 태어난 세대가 흔히 쌍황세대라고 알려진 한국 세대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난 해기도 하다.

대중문화의 발전 또한 정점을 달렸다. 1984년 대한제국 시기 최후의 황제이자 당시 대한국의 태상황제였던 고종이 붕어하자 서서히 퍼져가던 자유주의는 이내 기성 정서로 인한 한계를 뚫고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부터 서서히 활동을 시작한 한국의 아이돌과 밴드 시장 또한 이 시기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편으론 옛 시화나 남상들이 화공들을 고용한 것을 시작으로 발전한 풍속화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사업 또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고, 국제적 위상이 오르며 이러한 대중매체들이 역으로 해외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이 풍조는 태시 시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그 결과가 오늘날 흔히 알려진 대한국의 거대한 소프트 파워 시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국의 호황은 1985년 플라자 합의가 체결되며 이내 먹구름이 끼게 된다. 당시 비정상적일 수준으로 비대해진 일본, 한국, 독일의 경제를 경계한 미국은 화폐의 가치를 올리는 플라자 합의를 체결해 엔,원,유로저현상을 타개하고자 하였는데, 이로 인해 경제적인 이득의 원천 중 하나였던 원저현상이 끝을 맺게 되었다. 다행히 플라자 합의 체결 이후 내각이 다급해져 경기부양책을 남발하는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으나, 어찌 되었든 플라자 합의로 인한 원화의 환율 증가는 그대로였기에 완만하지만 꾸준한 내리막길이 펼쳐지게 되었다. 극도의 디플레이션은 물가의 상승을 늦추다 못해 그대로 멈추게 만들었고, 그렇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한국의 경제는 장장 10년간의 침체의 시기를 겪게 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1억명이 넘는 인구를 통한 거대한 내수시장은 아직 건재하였고, 문화적인 사업들 또한 무사하였다.

김종인의 정계 개편과 태시 시대의 끝, 그리고 현대

불황의 10년이 20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으며 불황의 20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장기화되던 중, 2000년 경 크리스마스 선언을 끝으로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냉전 종식의 기세를 몰아 1990년대 중반 당시 국민당김대중에 의해 최초로 정권교체가 일어날 정도로 쇠락해가던 신진민주당의 당세 회복을 노린 노무현 총리대신이 복리대신 투신사건으로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 이후, 2005년 신림파 소속의 김종인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총리대신직에 올랐다.

집권 이후 '경제민주화'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 김종인 내각은 대중수출 증가 및 경제개혁, 국민당과의 합작 등을 통해 신진민주당의 여당으로서의 지위와 경제가 살아날 발판을 마련하였다. 뒤이어 집권한 이인제 총리는 본인의 정치적인 화력과 김종인으로부터 계승받은 경제 대계를 이어받아 장기간의 집권기간동안 불사조 호황으로 알려진 경제호황을 잠시나마 이루어냈고, 이후 대한국의 정계는 이낙연, 김무성, 유승민 등이 차대 총리대신으로서 집권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신민당 내 온건파가 위축되는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강경파 및 중립파 내각 집권 시기 확실한 경제적 성과가 나타났기 때문. 때문에 현재까지도 신림파나 안봉파 등이 대한국 국민들의 표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2010년을 끝으로 태시제가 90세를 넘긴 나이로 붕어하며 장장 63년간 이어진 태시 시대가 끝을 고했고, 뒤이어 전후세대 출신인 황태자 이순이 밝을 명(明), 화목할 화(和), 명화(明和)를 연호로 하여 제 4대 대한국 대황제이자, 대한 황조의 30대 군주로서 새 시대를 개원했다. 이에 따라 2011년 7월 13일부터는 명화 원년이다.

비록 경제적인 전성기는 그 불꽃이 꺼져버린 상황이였지만, 새천년이 시작된 이래 대한국의 문화산업과 기술은 여전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전해 나갔다. 2000년에 스티브 잡스가 공개한 애플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전산화와 PC통신이 활성화 열풍이 불며 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이 흐름에 동참한 대한국 또한 대규모 인터넷 사이트들과 애니메이션, 만화등을 비롯한 여러 대중매체가 명작들의 탄생화 함께발전하였다. 특히 호황의 종료 이후에도 미국을 뛰어넘는 세계 2위의 규모와 매출을 자랑하게 된 애니메이션 사업의 위상은 어마어마하였는데, 냉전의 종식 이후 대금민국을 비롯한 국가들과의 관계가 활성화되며 자연스레 한국의 대중매체가 타국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별개로 2D 서브컬쳐 매체의 경우에도 자유주의 풍조와 근방의 일본에서 흘러들어온 외부적 유행을 타고 큰 성장을 이루었는데, 이때 탄생한 해당 분야의 마니아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로 십덕(十德)이다.

연호로 명화 19년인 2020년 8월 15일에는 서경 평양부에서 2020 평양 G20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시기 코로나 19의 여파로 인해 대한국 또한 피해를 입었고, 한편으로는 당시 집권중이던 유승민 내각의 연임을 불가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따라 2021년 경 유승민은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났고, 제 54대 총리대신인 안철수의 임기가 시작되며 현재에 이른다.

국사의 공교육 과정

교육과정 사회과 과목 중 고등학교 과목인 국사에서 대한국의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다. 다음은 금흥출판사에서 발행한 교과서의 예시다.

제 1부:고대시대

  •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 고조선의 성립과 삼한의 탄생
  • 삼한통일과 남북국의 성립
  • 고대 문화와 대외교류

제 2부:중세시대

  • 후삼한시대와 고려의 성립
  • 무신정권의 성립과 농민봉기
  • 대원항쟁과 자주화의 열망
  • 중세 문화와 대외교류

제 3부:근세시대

  • 조선의 성립과 통치 제도 정립
  • 조선의 변화와 발전
  • 조선의 정치와 사회
  • 근세 사상과 문화

제 4부:근현대시대

  •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 병인개화와 근대국가의 수립
  • 양차대전 사이의 아시아
  • 점령과 주권회복
  • 경제 성장과 발전
  • 현대 대한과 세계

자연환경

지리


 
대한국은 만주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반도 지역인 대한반도(Korean Peninsula)에 위치해 있다. 총 면적은 대략 37만 5,025km²로, 바로 옆인 일본 열도의 면적(37만 7,975㎢) 과 비교하면 3,000㎢ 정도의 차이로 작지만, 영국(24만 3,981㎢)이나 이탈리아(30만 1,340㎢), 독일(35만 7,022㎢), 러시아(16만 5,900 km2)의 국토 면적은 손쉽게 능가한다.

상대적으로 바로 옆 중국 대륙에 위치한 양경정부중경정부소련과 비교했을 시 작아보일 수 있는데, 지도를 정확히 보면 면적 자체에 걸맞게 나타난다. 단지 대부분의 경우 중국과 러시아가 크게 표기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인 셈이다.

그 외에도 기용면적상에선 비교선상에 자주 놓이곤 하는 비슷한 크기의 일본 열도를 능가하는데, 섬으로 구성된 열도 지형과 달리 대륙에 붙은 반도로 구성되어 육면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서 그렇다. 하지만 산지가 많은 건 일본과 비슷해서 기용면적이 절대적으로는 부족한 편에 해당하는 케이스.

지형의 대부분은 오랜 기간 침식된 평탄한 지형으로 분류되며 안정돼 있으나 예외적으로 관서 지방 이북부터 시작되는 요서 지방부터는 중부의 드넓은 평원지대와 서부의 구릉지들이 밀집된 지형이 특징이다. 태평양과 반도 사이를 가로막는 일본 열도의 존재로 인해 해류의 영향은 미미한 반면, 소위 '반도 4대 기단'이라고 불리는 기단들의 존재때문에 기후 변화가 사계절에 따라 명확한 편인데, 전반적으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또한 상당히 추운 기후를 가졌으며, 특히 북부지방으로 가면 냉대 대륙성 기후가 나타나는지라 유빙이 얼고 겨울철의 최저 온도가 영하 20°C를 수시로 이룩하는 등, 대한반도 남부의 추위가 장난으로 보일 수준의 기후가 펼쳐진다. 다만 요동 지역의 경우 강수량이 가장 적은 시기에 추위가 급상하는것이고, 여름의 경우 일조량이 많은 편이라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선 특별히 추위를 느끼기 힘들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와 바로 접경한 용천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다만 이러한 기후적 특성 탓에 역설적으로 외국에서 관심을 끄는 기후기도 한데, 명확한 사계절과 북방에서 나타나는 한대기후적 특성으로 인한 관광요소가 생겨났기 때문. 여기에 긴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서 철도를 여럿 배치하고 그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다보니 여행지로서의 주목도가 높아지기도 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요동, 요서, 용천, 함경이나 통안 지방은 현재 대한국의 전신인 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영역이 아니였다. 고구려 등 고대 한반도계 왕조들이 점유했던 역사는 있지만 이는 과거의 이야기이고, 조선 초기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4군 6진이 세종 무황제의 주도로 개척되고 나서야 전통적인 대한반도 강역의 시초인 8도제가 확립된 것이다. 이후 건주여진이 주도하던 후금, 명나라의 세력이 요동에서 사실상 공멸한 시점인 17세기에 요동, 요서, 용천이 대한반도의 강역에 들어왔다.

강이 매우 넓고 길다. 크게 전국 5대 강으로 꼽히는 압록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 금강이 있는데, 어지간한 강들보다 크기가 넓다보니 건너기 위해선 다리를 대규모로 설치해서 건너가야 할 정도. 이 때문에 한국인들이 외국에 방물할 시 강으로 유명한 지역에 가봤다가 면적이 어째 생각보다 작다며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지역


 
대한반도는 크게 관북,관서,해서,강원,충청,영남,호남,제주,요동,용천,요서 등 11개의 관외지역들과, 수도 한성부가 위치한 경기 지역으로 나뉜다. 이 중 남부 지방에서 제일가는 부유함을 가진 지역은 황경 한성부가 위치한 경기 지역이며, 북부 지방의 경우 서경 평양부가 위치한 호남지방이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힌다.

한국에선 스스로 12도(十二道)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는데, 과거 조선 시대에 요동 병합 이후 확립된 후 만들어진 12도(十二道) 행정구역 체제가 그 시초다. 그 이전에는 8도라는 명칭이 쓰였지만,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의 주도로 인구가 사민될 대로 사민된 요동도독부가 본토로 편입된 이후에 도의 개수가 늘어나며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여기서 8도라는 명칭의 경우엔 과거 조선 전국의 행정구역이였던 경기도,충청도,전라도,함길도,평안도,황해도,경상도,강원도를 통틀어서 부르던 말이다.

다만 이러한 명칭들과는 별개로, 현대의 대한국은 행정구역상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면 22도 시스템이 체택되었다.

인문환경

인구

인구는 120,659,885명에 달하며, 수치적으로 보면 세계 13위,아시아에서 보면 6위에 달하는 막대한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필리핀보다는 1000만면정도로 살짝 많고, 유럽 국가와 비교하자면 영국과 이탈리아의 인구를 전부 합한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인구적 풍부함에서 나오는 내수시장덕에 19세기부터 인구에 기반한 사민정책이나 산업화 과정에서 비교적 인구적 어려움을 무시할 수 있었고, 전후 식민지의 인구가 다 떨어져나간 시점에서도 약 6000만에 달했던 본토의 인구 덕에 다시 재기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 결과 8천만명, 이어서 70년대에는 인구가 1억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만 현재는 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출산율의 감소가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고점에 머무르는 상태는 아니다.

인구 밀도가 311.5명/km²다보니 국토의 면적을 고려하면 아예 꽉 차서 사람들이 끼일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붐비는 감이 없지는 않다. 특히 수도인 한성부의 경우 인구가 자그마치 15,000,000명에 달하는데, 수도권이라는 점과 전통적으로 서울로 상경하고자하는 욕구가 강했던 한국인들의 성향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렇게 나온 별명중 하나가 한성국.이 탓인지 한성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고개발 메트로폴리스로 유명하다. 다만 1900년대 후반부터 한성부의 집값이 살인적일정도로 늘어나다보니 차선책으로 평양이나 동래같은 다른 대도시로 이사가는 경우도 늘어났고, 나머지 인구는 남부의 다른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중앙과는 멀지만 과거 여러 정책적인 이유 때문에 공업적 개발이 꽤 이루어진 북부 지방으로 이사가는 경우도 있다.

민족 구성

대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은 한민족(韓民族)이 인구의 약 96.7%를 차지하고 있다. 남은 타민족계 인구는 3.3%를 차지하는 극소수에 해당하는 관계로, 인류학적 구분상 대한국은 단일민족 국가에 해당한다.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대대로 거주해 온 민족으로, 언어로는 기본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한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키가 큰 편에 속하는 민족이기도 한데, 아시아 전체로 확대해도 인종적으로 백인에 가까운 서아시아인과 함께 가장 큰 편에 속한다. 그래서 보통 외국으로 나가면 한국인은 키가 크다는 인식이 잦은 편. 특히 키가 작은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에 가면 이러한 인식이 더 강해진다.

한민족을 제외한 기타 민족에 3.4퍼센트에 달하는 인구인지라 대부분은 한국 문화의 영향력에 묶여있고, 그래서 문화적인 이유에서의 갈등은 거의 없는 편이다. 다만 가끔 출신적인 이유로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가 드문드문 존해하기는 한다.

인구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집단은 크게 만주계,일본계,러시아계와 중국계다. 이 중 만주계(滿洲系, 만주 할라), 혹은 강북계(江北系, 안가비 할라)는 대금민국이 위치한 만주에서 온 민족으로, 넓게 보면 조선시대부터 몇몇 만주의 부족들이 한반도의 북부지방으로 이주하거나 귀화하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만주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잠시 이민인구가 나진 등에서 늘어나는 등, 시대를 막론하고 주로 북부로의 이민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기존의 주 생활권인 북부를 넘어 남부까지 내려올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이지만, 반대로 그 탓에 만주인에 대한 사회적 우월감을 가진 몇몇 한민족과의 갈등도 잦은 편. 특히 대금민국과의 관계 경질에서 나오는 대한국 사회 내 만주계 차별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서북 지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평양의 경우 그만큼 이주한 만주계 인구가 많은 편에 해당하는데, 일대에서 발흥한 만주계 검계 탓인지는 몰라도 보쌈집에서 혐금 행위가 벌어지는 등 만주인과의 갈등이 높아진 추세다.

일본계, 혹은 화인계(和人系, 와진카이)는 문자 그대로 일본에서 건너 온 인구를 뜻한다. 이들은 주로 20세기 즈음에 바다를 건너 자국 식민지인 복건으로 갈 돈은 없던 이들이 비록 외국 식민지지만 토지가 넓은 만주로라도 경유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들렸다가 그대로 정착하게 된 경우, 혹은 그 외에도 넓게 보면 에도 막부 수립 이후, 좁게 보면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우호적인 외교관계 탓으로 인해 한반도에 건너와 살게 된 이들로 구성된다. 동래부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지방이나 요서도와 같이 해양과 인접한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어묵을 비롯한 일본식 식문화 일부를 이러한 해양도시들을 통해 한국에 들여오기도 했다. 대개는 일본을 떠나면서 한국 사회에 동화되었지만 서경이나 황경이 중심이 되는 한국의 특성상 관심도가 덜한 동래 등지에 일본인 타운을 형성해서 집성촌을 연성시키듯 문화를 보존한 경우도 더러 있는데, 이 탓에 해안지방에 가면 일본어의 인지도가 꽤 높은 편이다. 특히 동래부 중구의 경우 전통적으로 왜관이 자리잡고 있었던지라 리틀 재팬이라 불릴 정도로 일본인 타운이 크게 형성되어있다.

러시아계, 혹은 백계(白系) 한국인은 근대에 들어서 수가 늘어난 민족으로, 대한국의 제국주의 시대 당시 소련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한국의 연해주 자치령 등으로 떠난 다수의 제정 지지자들과 그들이 거느린 식솔들, 또는 만주에 망명한 트로츠키의 추종자를 비롯한 러시아인들이 모인 것에서 초기 인원들이 결집되었다. 이들 중 당시 식민지인이였던 만주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싫었거나 러시아에서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이들이 대한반도 본토로 이주했는데, 주로 경흥부나 용정부 등 동북지방에 위치한 도시들로 이주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바로 근방인 러시아로 넘어갈 인구는 진작에 러시아가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자 넘어간 관계로, 시간이 흘러 한국 문화에 동화된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마지막으로 다룰 다수민족인 중국계는 화교, 만주를 통해 이주한 중국인 인구들이 구성한다. 만주를 통해 들어왔어도 원래부터 만주 내의 중국인 인구는 만주인들과의 차이가 있는만큼 소수민족으로서 섞인 대한반도에서도 따로 갈라서는 경향이 잦고, 그래서 둘의 구분은 확실하게 되는 편이다. 지리적인 특성상 만주와 가까운 양경정부나 만주계 화교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언어

한국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단일민족국가인 대한국의 특성상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인구는 미미한 수준이고, 그래서 국제적으로는 고립어로 분류된다. 세계 인구 중 1억 2천만을 조금 넘는 숫자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 9위에 달하는 사용률에 속한다.

문자로는 크게 한글[7], 한자가 사용된다. 작성법 중 가장 큰 특징으로는 모아쓰기가 있는데, 풀어쓰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이 경우는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 잘 보이진 않는 편이다. 그 외에도 한자어 및 고급 어휘를 표현할 때 한자를 겹쳐서 넣는 경우도 있다.

행정구역


경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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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京)

황경 한성부

서경 평양부
부(府)

인천부

개성부

동래부

대전부

대구부

포항부

광주부

전주부

군산부

함흥부

원산부

경흥부

의주부

삼화부

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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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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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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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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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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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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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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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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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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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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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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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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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부
도(道)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황해북도
황해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요서도
심요북도 심요남도 통안북도
통안남도 용천북도 용천남도
제주도


대한국의 행정구역인 경부도(京府道)제는 2개의 경(京)[8][9]과 22여개의 도(道)[10], 27개의 부(府)[11]로 이루어져 있다. 있다. 이 27개의 부 중 2개의 부는 경급으로 분류되는 수도권으로, 한성과 평양 2개가 존재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급격히 성장한 동래부를 경으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늘었으나, 아직 대한국 의회는 동래부가 차후 어떻게 될 것인지 의사를 표한 바가 없다.

부는 기본적으로 도 아래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경으로 승격된 부들은 한국 내에서 최중요 도시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서도의 경우, 조선 시대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승전을 통해 확보한 영토이나 한국인 인구 비중과 국경선 상의 문제로 인해 추가적인 군정 기간을 거친 뒤 다시 한국에게 반환시켰다. 그래서 행정구역상 다른 지역들과는 차이가 있는 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행정구역이 존재하였으나, 본토가 아닌 외지(外地)로서 행정구역이 구분되었다. 이 행정구역들은 훗날 식민지들이 광복을 맞으며 폐지되었다.

정치

대한민국의 기본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75점 | 2023년,세계 6위
언론자유지수 68.31점 | 2024년,세계 64위
민주주의지수 8.65점 |2024년,완전한 민주주의

대한국의 정치제도는 1947년 기존의 광무국헌에 이어 새로 제정된 대한국 헌법에 기초한다. 대황제가 명목상 국가 원수로서 존재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임에 따라, 국회의 지명을 받은 국회의원이 총리대신으로 발탁되어 실질적인 정치를 담당한다. 다만 대황제에게 주어진 별개의 정치적인 권한은 오직 황실의 생활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의 인사배치권에 한해서 작용하고, 그 외의 국사행위는 전부 내각의 승인을 얻어서 행사하는 관계로 사실상 대황제가 맡은 업무는 궁내부와 대황제직의 유지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상징군주제에 가까운 입헌군주제를 체택한 것과는 별개로, 대한국 내에서 황실에 대한 폐지여론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역사적으로 초기 한국의 근대화에는 고조로부터 내려오는 대황제의 식견이 크게 기여하기도 했었고, 당장 3대 거대 정당인 신민당국민당은 600년간 내려온 사직이 국민적 통합과 국가의 진보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지, 군주정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이 아니다. 이는 대개의 야권에서도 받아들여지는 주장으로, 예외를 꼽으라면 제정 폐지를 하나의 당론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대황제의 궁내부 간섭권 또한 정교분리 원칙의 위반이니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한공산당이 있다.

입법부인 국회는 양원제로, 크게 중서원(하원)과 중추원(상원)으로 나뉜다. 양원인 중서원, 중추원은 각자 행사하는 권한이 다르며,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중서원에는 중추원보다 더 많은 권한이 쥐어져있다. 서열상으로야 상원인 중추원이 더 높으나 조약 승인권, 내각총리대신 지명, 불신임결의권과 예산안 책정 승인권이 모두 중서원의 관할에 있고, 헌법상 중서원이 가결한 법률을 중추원이 기각시키더라도 얼마든지 중서원의 재결의에서 2분의 1 이상의 찬성이 나오면 법률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한국 정계는 중서원이 우세한 성향을 띄고 있다.

그렇다고 중추원에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서원과 더불어 중추원에는 주요 인사의 임명에 대한 동의권이 부여되어있으며, 이 권한이 특히 두드러지는 임명식은 내각 외의 기관, 예를 들면 대한은행 총재의 임명 등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도 중서원과 중추원이 양원을 이루었다. 다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승정원 등 기타 고위기관과 연계되어있던 중추원의 권한이 상원답게 더 강한 편이었으나 1945년 이후 중추원이 유지는 되었으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며 자연스럽게 중서원의 권력 우위도가 올라갔다. 이는 당시 황제로부터의 특수 지위 수여와 권세를 통한 중추원 의원들의 압박, 그리고 군부 및 우파들의 지지로 집권했던 김창암 정권의 집권방식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까지도 독일식 귀족 과두정같은 성향이 남아있어 비교적 강력한 편이었던 한국 내 사족들의 권한을 줄이려는 목적이였다.

내각총리대신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내각총리대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국 역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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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김홍집 박정양 박영교 홍순목
제5·6대 제7대 제8대 제9대
김옥균 유길준 박영교 이완용
제9·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이완용 박영효 홍영식 김옥균
제14대 제15·16대 제17대 제18대
서재필 조중응 박제순 박중양
제19대 제20대 제21대
이동휘 이진호 홍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홍진 박영효 이항구 최린
제25대·26·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김창암 송병조 이강 이승만
제31·32대 제33대 제34대 제35대·36대
이승만 백두진 안창호 여운형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장면 조봉암 변영태 유창순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허정 김종필 김영삼 이회창
제45대 제46대 제47·48대 제49대
김대중 노무현 김종인 이인제
제49·50대 제51대 제52대 제53대
이인제 이낙연 김무성 유승민
제54대
안철수
의정대신

고구려 (좌우보 · 국상 · 대막리지) · 백제 (좌우보 · 상좌평) · 신라 (대보 · 시중 · 상대등)
발해 대내상 · 태봉 시중 · 고려 문하시중
조선 영의정 · 대조선국 의정대신 · 대한 내각총리대신
제 54대 내각총리대신 안철수

내각총리대신은 대한국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내각의 수장이다. 대한국이 입헌군주제를 체택한 관계로, 형식적으로는 대황제의 신하의 위치에 있다.

국가의 실권을 가진 인물인만큼 경각부청을 관할하고 각부의 국무대신을 비롯한 각료들과 대법원장을 임명하거나 면직할 수 있으며, 군대의 최고 통수권 또한 총리가 쥐고 있다. 그 외에도 중추원의 해산권 또한 보유하고 있다.

총리대신의 지명은 국회에서 중서원, 중추원 총선을 통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내보낸 대표가 임명되지만, 관례상 그 정당의 당수가 주로 총리에 임명된다.

대한국 국회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국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국 중추원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 중추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국 중서원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 중서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법원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 대법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법원(大法院)은 대한국 전역의 재판소(법원)를 통솔하는 기관으로, 대한국의 사법기관에 해당한다. 본래는 평리원(平理院)이라 알려진 대한제국 법부 산하의 기관이 최고법원으로서의 역할을 맡았지만, 패전 이후 사법부의 독립이 이루어지며 기존 법부의 평리원이 폐지, 대법원을 신설하는 방식으로 사법권의 독립조치가 이루어졌다. 형식상 대황제에 의해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원의 고위 인사들이 임명되며, 이 인사들의 장인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이고, 중임은 불가능하다.

경각부청(京各部廳)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 경각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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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관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국가공안위원회 경무청 개인정보 보호위원회
유흥업관리청 총무처
검찰청 공안조사위원회 국세청 조달청 소비자청 금융청 통계청 소방청 공해방지청 출입국청 재외민족청
운수안전위원회 개발청 관광청
해상경비청
국방사무청 병무청 관리청 중앙노동청 고용위원회 방역청 복지위원회
농촌진흥위원회 수산청 민간공업청 중소기업청 특허청 우정청 원자력관리위원회 기상청 산림청 문화재청 문화진흥청 체육청 아동가정청
각부대신(주무대신) · 특별법에 따른 국무대신 · 의정부 특명찬정대신
경각부청 내각총리대신 직속 기관 독립 중앙 행정기구


대한국은 경각부청(京各部廳)이라 불리는 행정각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정책 결정기구로는 내각을, 이 내각의 장으로서 존재하는 직책이 바로 내각총리대신이다.

경각부청 혹은 경각부라고 불리는 한편 13개의 부(府,ministry)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부서들을 대표하는 각부대신직들에는 주로 국회의원이 임명된다. 원칙상 민간인도 대신이 되는 것은 가능하나, 다만 그 수가 각료 총원의 5분의 1 이상을 넘는 경우는 불허된다. 공통적으로 각부의 대신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형식적인 임명장을 수여받고, 그 이후부터 정식 대신으로서의 업무를 보게 된다.

통상적으로는 중서원 출신에서 대신 및 총리를 선출하며, 상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출신의 의원들도 대신직을 역임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나, 대신직을 맡아 내각에 입각 시 중추원 출신 의원의 각료수가 전체 내각의 4분의 1 정도만 입적되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다.

각 경각부청의 국무대신들과는 차이가 있는 일종의 비정규직 대신직도 존재한다. 이를 특명찬정대신(政務贊政大臣)이라고 부르는데, 통상적으로 집권 중인 내각의 총리의 재량에 따라 정권에서 중요한 과제라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업무를 집중적으로 처리한다. 당연히 정권마다 중요한 문제가 바뀌는 만큼 특명찬정대신은 내각에 따라서 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직책이기도 하다.

내각

자세한 내용은 국가행정조직/대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대한국 국무대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국 내각 각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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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내각은 대한국의 최고정책결정을 담당하는 조직이다. 내각은 중서원에서 지명을 거친 후 대황제가 임명하는 총리대신과 그 외 국무대신들이 자리를 채우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대부분은 각 경각부청의 장을 겸임하지만 참정대신이나 찬정대신처럼 직접적으로 부처의 장이 되지 않고 내각의 공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내각의 장인 내각총리대신의 경우 대한국 국회의 국회의원이면 그 누구든 임명될 수 있다. 현재 상원인 중추원에서는 총리가 배출되지 않고 있지만, 패전 이전에는 중추원 출신의 총리들도 간간히 나오곤 했다. 또한 총리직의 임명에 대해서는 반드시 문민이여야 한다는 조건과 황실의 핵심적인 국정 불간섭 원칙에 의거한 종친들[12]의 총리 임명에 대한 제한이 존재한다.

대한국 특유의 능력주의 문화 탓에 민간인에서 국회의원 신분에 올라 대신직으로 가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민간에서 직속으로 대신직에 오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다만 제 46대 총리대신인 노무현의 경우 민간인 인사를 여럿 두는 방식으로 내각을 운영했었다[13].

중앙관료제

대한국의 정치적 특징 중 가장 도드라지는 점은 바로 특유의 관료정치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투명하고 공정한 정치적 운영과 민봉정치적 유화책으로 가능한 한 오차를 최대한 줄여, 때에 따라 대한국에 가장 맞는 해결책을 내는 시스템인 한편 정치적인 수직화를 초래하기도 하는 단점을 가진 한국식 관료제의 역사는 옛 양반들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던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임신대경장을 비롯한 서구화 이후에도 자잘자잘한 변화를 거치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 현대 대한국의 관료제다.

중앙에서 일을 처리하고 일사분란하게 아래로 지침을 하달해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는 한국의 관료제는 특히 내정과 외무에서 그 빛을 발하기로 유명하다. 내무의 경우 기존에 마련한 민심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정영화된 대응법이 준비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중앙에서 새로운 변수를 포착하고 신속하게 하부구조로 수정사항을 내려보내 새로운 위기를 대처하기도 한다. 특히 외교나 통상의 경우 제대로 당하게 될 시 치가 떨릴 수준이라는 평이 자자한데, 만약 상대국이 통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면 먼저 숙이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미 그 뒤에서 인사진을 통해 대응 전략을 하나하나 다 마련해둔 상황이고, 통상에서 상대국보다 입지가 유리할 시 곧바로 대응 방안과 함께 우직지계(迂直之計)그 자체인 외교적 공세를 감행한다. 때문에 한국과 통상을 진행하는 국가들 중 을의 위치에 있는 국가는 정보력에 기반한 신들린듯한 외교공세에 파멸로 치닫기 십상이고,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국가들도 모르는 새에 대한국이 이미 원하는 바를 이루고 통상을 끝냈거나 사실상 결렬시키기 십상이다. 예제로 미국이 대한국과의 경제협정을 일부 중단했던 당시, 한국은 미국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뉘앙스의 담화를 발표하는 한편 협정의 중요사안들을 동결시켜 원래 미국을 협정에 참여시켰던 이유를 그대로 지켜냈다. 이후에 한동안 동결된 사안에 반응하지 않다가 미국이 협정 제채결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자연스러운 외교구도를 연출한건 덤.

다만 이러한 관료제의 특성상 위계구조로 인해 국민들이 직접 관료세력에 목소리를 호소하기가 쉽지 않으며, 대금민국이나 중국 등에 비하면 전산화 작업이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지적도 2010년대 이래 꾸준히 받아오고 있다. 특히 경각부 중에서도 보수적이기로는 제일로 정평이 나 있는 궁내부계열 관료들의 우표, 대면식 업무 처리나 반드시 도장을 요구하는 등의 업무처리 등에서 나타나는 고착성은 한국 정계에서 유명하며, 그 외의 부서들도 장년층간의 업무처리방식을 들여다보면 전산화가 신입 관료들에 비해 진전이 낮은 편이다. 오죽하면 전산화 유무로 관료의 세대가 결정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

관료가 되는 방법은 중졸 이상 학력의 18세 이상의 국민이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한 국가공무원임용청(國家公務員任用庁)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통과하면 된다. 고위직 공무원을 공채하는 국가고등고시와 하급 공무원을 공채하는 일반고시로 나뉘며, 여기서 국가고등고시의 경우 크게 정치, 탁지, 법제, 외교로 나뉘는 시험들을 통과하면 된다. 일반고시의 경우 그저 시험을 통과하기만 하면 공무원에 채용될 수 있으며, 합격 후 말단 공무원인 참사(參事)나 주임(主任)직에 오르는 방식으로 보통 관료생활이 시작된다.

입헌군주제

1890년 고조 태황제의 칙령 하에 한국사 최초의 헌번인 ' 흠정대한국 국헌 '을 발표하면서, 헌정이지만 군주의 권위를 중시하는 프로이센을 참고한 입헌군주제가 도입되었다. 다만 사실상 대한이라는 시스템을 설계한 인형사인 고조와 공신들이 모두 살아있던 시기에는 의회와 내각이 대황제가 공신을 통해 안건을 통과시키는 어용기구나 다름없었고, 이후 세대 교체와 몇몇 공신들의 정치적 은퇴, 고조에 비해 정치적은로 신료들을 존중하는 마인드가 더 강했던 순종 효황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일반적인 입헌군주정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잦은 정권교체 등 태생적 위태함과 공신들의 노환으로 계속 잡음을 내던 민주정은 끝내 1930년 기사정변으로 인해 근황계와 결탁한 군부가 대황제의 지지를 받아 집권하며 무너져내렸고, 그렇게 대황제와 그 비호를 받은 군관, 정치인들의 위상은 나날히 커졌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위의 상승과 겉으로 보기엔 정상화된 국가의 상황에 취해버린 대황제가 어느 순간부터 정무를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이러한 '성과'를 이룩한 군부와 근황계에게 위임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결국 김창암을 비롯한 몇몇 근황계는 서서히 권력에 취해 폭주가 가속화하기 시작했고[14], 뒤늦게 이 신흥 신료들이 만들어낸 사태를 직감한 대황제가 김창암을 정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사상누각 만인지상'의 시대는 끝을 고했다.

대금민국을 비롯한 대한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이나 한국 내부의 보수파들은 고종을 대한제국의 침공 선봉에 서 있던 마왕 등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징성으로는 선봉이 맞아도 결국 근본적으로 고종은 자신의 권위상승으로 인한 행복의 고취와 근황 쿠데타를 일으킨 계파들에 대한 근거 없는 신뢰감으로 인해 전권을 쥐고 있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였다. 다만 결국 일심회 집권의 원인과 동시베리아 전쟁 등 전쟁국가로서 대한제국이 폭주한 데에는 고종의 동의와 상황 무시가 있기도 했고, 비슷하게 파시즘 정권이 집권한 이탈리아 국왕과 권위는 프로파간다와 여러 덕에 확실하게 오르는 등 이득을 보았다. 결론적으로, 그에게 최고 결정권자이자 대한제국 폭주의 원인 제공자로서의 책임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후 더글라스 맥아더는 추후 대한국에 들어설 민주정권을 상징적인 면에서 보조하도록 하는것이 황실을 폐지하는것보다 판단한 연합군 군정의 결론은 대황제를 동아시아 북방 민주주의의 수호자반공의 정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택하였고, 몇년 뒤 성덕제에게 양위를 받아 강조 태시제 이연이 즉위하자 그 물살을 타 여러 정치적 개혁이 시행, 헌법을 개정한것을 마지막으로 한국의 국정에서 대황제에게 보장된 국사행위를 축소시켜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하나 둘 철수해나갔다. 그렇게 철수가 계속된 결과 대한국에서 대황제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전제적인 지배자에서, 유교사상에 기반한 전통적인 한국의 사회관에서 대한인들의 임금이자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강화,강력한 입헌군주로서의 성격을 띄게 된 오늘날의 지위로 거듭났다.

지방자치

정치적 선진국가다보니 지역 정치 문화가 꽤 발달했지만, 일본처럼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 요소가 강하던 나라들에 비하면 지방자치제의 역사가 짧다. 이유는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을 중시하던 조선의 체제 탓에 율령제가 잘 정비되었기 때문. 그나마 임신대경장 이후부터 사상적 중앙집권화를 담보로 일부 풍습이 새롭게 도입되거나 전반적인 국부의 증대가 이루어지면서 여유가 생기자 자연적인 지역별 개별화 및 문화가 피어나기는 했지만, 이조차도 정치적 지방자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패전을 맞게 되었고, 1947년을 계기로 지나치게 중앙에 모든 것이 집중된 한국의 체제[15]가 일부 개정을 거치면서 지방자치제도의 시작을 알렸다.

주로 북방으로 갈수록 지역정당이나 풍습 등이 개성있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남부로 갈수록 그런 기세가 약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같은 경급 행정구여도 서경인 평양부와 황경인 한성은 근본부터 다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다만 중앙집권이 잘 이루어진만큼 적어도 양식만큼은 잘 통일되어 있어서, 지방과 수도권 모두에서 어지간한 행정절차는 빠르게 진행된다.

현대 대한국은 크게 요동도독부 편입 이후부터 내려온 것을 분화한 22개의 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밑에는 거대도시인 경 혹은 부, 다시 그 밑을 군현방이 구성한다. 각 경도부와 군구현방에는 그 행정구역의 대표를 맡는 직책이 있으며(각 도의 관찰사,경,부윤, 군·현·방·구장), 이들은 주로 각 기관의 후보자들을 선거를 통해서 선출한다. 모든 지방단체장의 임기는 4년으로 동일하다. 특이사항이라면 임기제한이 없다보니 연임이나 재임도 가능하다는 것. 다만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장기간 단체장을 맡을 시 지역과의 유착이 심화되는 현상 또한 일어난다.

국내 선거

주요 정당

대한국 국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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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국 국회의 의석을 보유한 정당은 8개로, 이 중 2개의 정당이 연정의 형태로 신규 내각을 조각해 집권한 상태다.

1956년 안창호 등 기존 정계 원로들이 마지막 불꽃을 불태워 이룩한 대통합으로 탄생한 신민당[16] 우위 체제가 몇십년간 내려오고 있으며, 제 1 야당은 크게 국민계민정계로 알려진 정당들이 대대로 양분해왔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체제가 만들어진 가장 큰 계기인 사회당 계파의 중앙정계 입성이 일어났던 때가 가장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다만 이미 8월 종파 사건박헌영을 사장시켜버린 사태로 인해 한 풀 진압이 가해진 상황에서 진행된 운동이였던지라 사회를 전복시키기엔 부족했으며, 오히려 사회주의계열 정당들이 애매하게 고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안정화된 정치구조 특성상 보통 대한국의 정치는 신민당 내의 다양한 계파들이 서로 정치투쟁을 벌여서 결정된다. 제 1 야당이 누가 되느냐는 보통 그 해 새로 취임할 내각 및 그 내각의 주류 파벌과의 경쟁, 협력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는 대한국 정계는 젊을수록 보수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고령층의 신민당 지지도가 낮은 편도 아닌데, 이들은 주로 한국의 전 국토가 황폐화된 어려운 시절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가난과 전쟁에 대한 무서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 여기에 신민당 자체가 상대적으로 내부 스펙트럼이 다양한 상황에서 첫 출발을 했다보니, 신민당을 뽑아도 진보적이거나 전후헌법을 지지하는 노년층도 많다.

현재 정계에서 주요 정당으로 여겨지는 세력들의 구도는 다음과 같다.

경제적 자유주의&협동주의와 자유주의 등을 표방하는 빅 텐트 정당이다. 1956년 안창호 등 구 개화당과 대한입헌당의 원로들이 자유당의 타협파, 사회당과의 대연정을 통해서 창당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유연한 처신을 보이는 한편 내치에서는 집단 하에서의 자유보장, 주류 당론으론 강경한 외치론이 주를 이룬다. 다만 세 파벌의 합당으로 시작된 정당인 만큼 당 내 온건파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는 중도파에 해당하는 신림파가 당 내 균형추의 역할을 하는 관계로 기존의 구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및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우익 정당이다. 자유당 타협파를 제외한 강경 성향의 자유당 인원들이 1957년 자유당을 해체하고 만든 국민자유당이 그 시초이며, 내외치를 포함한 보수주의와 강경론 등으로 유명하다. 다만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신민당에 비하면 인재나 규모가 부족한 편이라 현재까지 김대중을 제외하면 따로 내각총리대신을 배출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현재는 안봉파와같은 신진당 내 강경파들과의 교착을 긴밀히 하는 방식으로 내각에 당의 인사를 보내는 방식으로 당세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신민당 내 몇몇 파벌들과 구 한국사회당의 당원들 중 잔류를 택한 정치인들이 모여서 창당한 정당이다. 사회민주주의와 입헌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을 포함한 불교계와의 연줄 또한 있는 게 특징. 덕분에 한국 내 불교 신자들로부터 지지세를 확보하기도 한다. 국민당의 라이벌 격 정당이다.

평양, 평안도 등 기독교 신자가 많은 대한국의 북부 지방을 지지층을 기반으로 둔 지역주의 정당. 성향은 보수적이며, 대한국 내 기독교의 입지 확보나 북부 지방의 중앙정계로의 진출 또한 주 당론이다. 현재 당대표인 김정은이 전설적인 대한국의 영화감독인 김정일의 아들이여서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영화 및 영상업계와의 교류가 활발한[17] 정당이다.

유교적 보수주의와 대황제의 대권보장을 촉구하는근황사상을 주창하는 정당으로, 전후 세력이 이리저리 흩어진 황국협회의 사실상 후신 격 정당으로서 1946년에 창당되었다. 내외정에 대해 가부장주의에 기반한 보수주의 노선을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와중에도 유교사상에 기반한 복지정책을 꾸준히 내세우고 있는데, 덕분에 상대적으로 사고가 보수적인 시골이나 지방에서의 지지도가 은근히 높은 편이다. 복지권 확대에 대해서는 비슷한 주장을 제시하는 대한공산당과 손을 잡기도 한다

외교

한러관계

한일관계

한중관계

한만관계

한미관계

한프관계

경제

특징

산업구조

무역

한국 원

사회

사회 전반

일상생활

대외인식

공휴일

대한국의 법정 공휴일
[ 펼치기 · 접기 ]
일요일 새해 첫날 설날 연휴 건원절
1월 1일 음력 1월 1일 전후 3월 5일
천추경절 석가탄신일 계천기원절 어린이날
3월 21일 음력 4월 8일 4월 17일 5월 5일
단오 성덕기념일 칠석 칠일 즉위예식일
음력 5월 5일 6월 10일 음력 7월 7일 7월 13일
묘사서고일 개국기원절 추석 연휴 만수성절
7월 22일 8월 14일 음력 8월 15일 전후 9월 8일
천성절 공자탄신일 문화진흥의 날 천건절
9월 13일 9월 28일 10월 1일 10월 3일
가갸날 제헌기념절 성탄절
10월 9일 11월 27일 12월 25일
※ 공직선거법 제34조에 따라 임기 만료에 의한 선거를 진행하는 날 (중서원 선거일, 지방선거일)
※ 대한국 내각에서 수시로 지정하는 날 (임시공휴일)
※ 공휴일인 국가 절일과 어린이날이 토요일 또는 다른 공휴일과 겹치거나 설/추석 연휴가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대체공휴일)

공휴일(公休日)은 대한국의 휴일이다. 현재 총 25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 3월 21일 천추경절(千秋慶節):황태자의 탄신일. 현 황태자인 이청의 생일이다.
  • 음력 4월 8일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불교 성인인 석가모니의 탄신일.
  • 4월 17일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환구단을 쌓고 대황제 직위를 선포한 날.
  • 어린이날(兒童節):어린이들의 성장을 축복하는 날.
  • 음력 5월 5일 단오(端午):1년 중에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지내는 공휴일이다.
  • 6월 10일 성덕기념일(聖德記念日):본래는 고종 성황제의 탄신일이였지만, 워낙 논란이 많은 황제다보니 그의 사후 은근슬쩍 성덕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대한국 대황제들 중에선 최초로 탄신일의 통칭이 바뀐 케이스.
  • 음력 7월 7일 칠석(七夕):동아시아의 민간설화인 견우와 직녀 전설에서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서 1년에 한 번 만나는 날이다.
  • 7월 13일 즉위예식일(卽位禮式日):대황제의 즉위를 기념하는 날로, 현재 기념하는 날짜는 현임 대황제인 명화제의 즉위일이다.
  • 7월 22일 묘사서고일(廟社誓告日):1894년 고조 태황제가 황제 즉위를 종묘에 처음 고한 날로, 실로 국가의 중대사가 있던 날이라는 의미에서 제정되었다.
  • 8월 14일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대한국의 전신인 조선의 건국일, 정확히는 태조 고황제가 국왕으로 추대되어 새 나라를 연 날을 기념한다.
  • 음력 8월 14일, 15일, 16일 중추가절(仲秋佳節):흔히 알려진 추석이다. 3일에 걸쳐 공휴일로 특별하게 지정되었으며, 대한국 최고이자 최대의 연휴이기도 하다.
  • 9월 28일 공자탄신일(孔子誕辰日, 9월 28일):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탄신일.
  • 10월 1일 문화진흥의 날(文化振興의日):반천년을 넘어가는 역사를 가진 대한국의 문화진흥을 기원하며 만들어진 공휴일이다. 1912년 순종 효황제가 실행한 전국순행에서 기원한다.
  • 10월 3일 천건절(天乾節): 단군이 최초의 한민족국가를 개창한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 10월 9일 가갸날():세종 문황제가 한글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1969년에 제정되었다.
  • 11월 27일 제헌기념절(制憲記念節):대한국 헌법의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다. 1955년에 제정되었다.
  • 12월 25일 성탄절(聖誕節):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휴일이다.
  • 설날 전일, 설날 당일, 설날 차일음력(12월 말일, 1월 1일, 2일):설날 기념

문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문화 강국 중 하나이다. 큰 범주에서는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확연하게 구분할만한 키포인트들이 특징이며, 기존의 보수적 인사들을 포섭하던 과정에서 전통, 그중에서도 유교적인 의식 등을 꽤나 유지시킨지라, 근대 시기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나라임에도 오래된 문화가 꽤 많이 남겨져 있으며 전통과 외래의 문화가 섞여있는 현대문화가 현재 한국의 문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 문화는 서양 문화, 특히 모자를 비롯한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는 부분에서[18] 영향을 많이 끼쳤으며, 현대에 과장 및 각색으로 새롭게 재해석된 선비들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한국 문화는 일본의 와패니즈에 이어 에노리안(Enorian)[19]들을 양산하였다.

문화 전반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반도에 위치한 국가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주변국들이 침략을 일삼지 않던 안정기에도 반도라는 지형은 한국이 끊임없이 국경을 맞댄 나라들과 상호작용을 오고가게 만들었고, 특히 그 중 중국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많이 받았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와 더불어 뚜렷하게 구분되는 날씨와 기후, 자연환경의 다양함과 소탈한 문화 등이 합쳐졌고, 여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불교와 도교의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17세기 전후로 중국에서 순과 송을 위시로 한 남북조시대가 시작되며 더 이상 중국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를 통해서만 발전을 이룩하는 것에 차질이 생겨났고, 시대적으로 요구된 대안은 곧 2차적인 발달양상으로 접어들었다. 명나라, 중국의 문화와 기존 조선의 예법으로 해외 문화를 수용한다는 기존의 경우가 일종의 틀을 형성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게 된 셈인데, 이는 사상적으로는 소중화사상의 부각과 반도국가 특유의 수용성에 새겨진 묘한 배타성이 생기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국 사회에선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격세지감을 체감해도, 사람과 사회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을 종종 접할 수 있다. 문물의 발전속도는 동아시아의 선진국답게 빠른 편이고 그에 따른 디지털화도 이루어지지만 군데군데 보수성이 유지되며 불변하는 현상이 나타나곤 하며, 특히 '관습적인'부분에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해진다. 일상적인 것에선 빠른 변화를 체감해도, 본질과 관습은 상대적으로 서서히 변화하거나 옛 모습을 유지하는 셈이다. 물론 세대갈등이 벌어지는 여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암묵적, 정신적으로 보수성이 강하게 나타나곤 하는 대한국의 문화에 반감을 보이는 풍조도 젊은 세대에선 존재하곤 한다.

유교 문화권

기본적으로 대한국의 전신인 조선시대부터 대한반도는 유교문화권에 속해있었다. 현대에는 국체유학이 전후 혁파되면서 유학이 사회에서 가지던 수구적인 권위가 대폭 약화된 관계로 주자학의 특징 중 하나인 수구성을 보기는 힘든 편이지만, 여전히 유교의 기초적인 행동원리는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에서 큰 영향을 가지고 있다.

신분제의 잔재

언론

교육

대중매체

스포츠

서브컬쳐 및 애니메이션

군사

자세한 내용은 대한 국방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 국방군
대한국 육군 대한국 해군 대한국 공군


한국군, 정식 명칭 대한국방군(大韓國防軍)은 대한국의 국군이다. 육군, 해군, 공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병역 제도로는 1950년에 정식으로 창설된 이래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북쪽으로 대금민국과 접하는 등 육상에서 잠재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국가들이 더 중요한 관계로, 동아시아에서 중경정부양경정부의 뒤를 잇는 질의 육군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주변에 육군 병력이 강한 국가들이 많다보니 딱히 눈에 띄지는 않는 편.

그러나 공군은 규모에서나 질에서나 아시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우수한 군대로 여겨진다. 기존 대한제국군의 우수한 공군을 어느정도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인데, 현재 공군의 주 임무를 요약하자면 크게 주변국으로의 정찰 및 국가간 항공지대의 보안 확보 등이 있다.

내각총리대신에게 통수권이 있는 국방군과는 별개로, 법적으로 황실의 땅으로 지정된 경복궁 주위의 치안을 담당하는 시위대는 형식상 대황제에게 통수권이 주어져 있다. 다만 애초에 궁 내부의 치안은 경찰청 산하의 황궐친위본부가 맡고 있어서, 형식적으로 남은 것에 가깝다.

단위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SI 단위를 사용하며, 간혹 노년세대나 지방 깊숙한 곳에서는 척관법이 사용되기도 하나 흔한 경우는 아니다. 그나마 대한제국 시기 척관법을 미터법과 혼용하여 사용한 경우는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대한국 헌법이 발효된 1947년 시점에서도 척관법의 사용률은 이전 시대들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낮아진 상황이였다.

군주제 국가로서 황제가 제위하는 만큼, 공식적으로는 서력보다 연호를 주로 사용한다. 총 5개의 연호인 광무(光武),융희(隆熙),성덕(成皇),태시(太始),명화(明和)가 현재까지 사용되었으며, 이 중 태시, 명화부터는 대한국 헌법이 발효된 이후 대한국의 시대에 포함된다. 2024년 기준 현재 사용중인 연호는 명화(明和)다.

대중매체에서의 대한국

통상적으로 유교, 선비 및 고도의 경제력과 기술로 대외적으로는 알려진 나라다보니, 동아시아에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미국,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같이 한국에 우호적인 성향의 국가에서는 대체적으로 전쟁 관련 영화라 대한 제국 시기의 파시즘을 묘사하는 게 아니면 어딘가 옛스러운 문화와 높은 경제력에서 비롯된 첨단기술의 조화 등으로 묘사하는 케이스가 많은 편.

반면 대금민국이나 중국의 양안정부 같이 한국에게 피해를 본 나라들의 경우, 민족주의정서가 강한 편이라 대체적으로는 제국주의자, 군국주의자, 근황 파시즘, 제국 시절 한국의 국학으로 숭상되던 국체유학과 일민주의같은 당시의 광신적인 사상에 기반한 전쟁범죄 등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부각된다.

《아토믹 하트》에서는 소련의 재빠른 진격으로 남한인 대한국과 북한인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고 간략하게 언급된다.

전략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도 대한제국 시절인 8대 열강의 일원으로서 등장한다. 시작 시 지도자는 김창암, 국민정신 중 하나로 성덕제가 들어가 있는 것은 덤.

해당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대전의 유산》에서는 침체기를 겪었으나 아직 열강의 자리는 유지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정상 비동맹주의 중점을 계속 찍은 뒤 시간이 지나면 비대한 식민지를 소화하지 못한 것과 경제불황, 토지 개혁 부재와 민권문제 등이 합쳐지면서 생디칼리즘 내란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내란이 성공하면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되고, 각각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분리된다.

《사이버펑크 2077》에서도 메가코프 중 하나인 대산의 배후국가로서 잠시 등장했다. 관료와 일체화된 3대 재벌들이 각각 경제, 행정, 군사 3정을 모두 장악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실상 새로운 세도 가문이나 다름 없는 존재로 거듭나 일종의 신양반주의 사회를 건설했다는듯. 문제는 그 재벌 중 하나인 대산[20]이 대한제국 시기의 천조사상도 계승한 것인지, 유라시아 전역을 무릎꿇릴 제 3차 동아대전을 준비중이라는 맥거핀이 있다.

대체역사에서

대금민국의 드라마 《더 가한:불변의 군주》에서는 작중 시점 대청제국의 주요 라이벌 국가들 중 하나로 언급된다.

소설 《배틀로얄》의 대조선제국이 대한국을 모티브로 한 나라다. 오랜 동맹인 대동아공화국과는 반소,반미의 기치 아래 미묘한 협력중이긴 하나 패권이 겹치는 관계로 대립관계. 매해 승경도라는 정치적 행사를 개최해 끝까지 살아남는 참가자를 정부의 고위직으로 특급승진시키는 정책이 시행되는 듯 하다.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시베리아에서 독일과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시베리아를 수많은 직할령과 번국으로 삼은 여러 군소국가들로 통제중이고, 승전의 대가로 앵커리지와 알래스카를 할양받아 도독부를 설치해 두었다는듯. 덕분에 캐나다 이권을 노골적으로 탐내게 되면서 일본과는 서로 가스와 석유로 협박을 주고 받는 악우지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드라마의 경우 시즌 4 시점에 나온 뉴스에서 대황제가 직접 시베리아 철수를 명령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이후 알래스카에서 반군이 봉기했다는 묘사를 보아 결국 일본과 사이좋게 식민지 통제권을 상실해버린 듯 하다.

《홈프론트》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신묘한 외교술에 굴복해 환태평양 중화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나온다. 다만 600년이 넘어가는 사직의 철폐로 인한 후폭풍을 중국 정부가 부담스러워한지라 비주권 군주를 옹립하는 방식으로 황제제도는 유지됬다는 듯.

대금민국의 대체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역사가 개변되어 연합군에 들어갔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 만주 식민지가 건재하다.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도 차르국이 아닌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 체제라는 듯. 다만 이로 인해 2010년대 기준으로도 대황제의 칙임권 한번에 내각이 으스러지는 등 전제군주적 국가의 모습을 띄고 있다.

중화민국 출신 대체역사 소설 작가인 다이밍의 작품 《호접지몽의 천하》에서는 임진왜란에서의 패배, 어째서인지 산해관을 넘어가 중화권 왕조로 거듭난 후금의 침공 등으로 인해 완벽하게 국력이 몰락해버렸고, 결국 1910년 일본에게 병합당하여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이 이루어지고나서야 독립하여 미국식 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독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충격과 공포.[21]


  1. 2024년 기준
  2. 8.65점
  3. 영어로는 Imperial House (of) Yi.
  4. 이당시까지 사용된 연호는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국 부황으로서의 연호다. 공식적으로 제국을 칭하며 황제국의 예법을 전면 도입한 시기는 천명이 옛 기자의 땅으로 이동했다고 광무 정부가 해석한 1894년부터다.
  5. 마진변한에 포함되지 않는 고구려인의 묘지명에서 스스로나 고구려인을 삼한이라고 부르는 금석문 자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변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진 묘지명, 고현 묘지명 등이 있다.
  6. 다만 황국협회제국익문사등 근대 대한사에서 황국이나 제국이 들어간 용어들은 그대로 해당 표현을 사용한다.
  7. 예스러운 표현으로는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을 적은 글' 언문(諺文)이라고도 한다. 이 경우 사대모화자가 숭상하던 한자를 칭하는 또 다른 명칭인 진서(眞書)와 대조를 이룬다.
  8. 경의 위치에 따라서 작명방식이 달라지는데, 주로 별격으로서 황경으로 지정된 한성부의 기준으로 오방 중 어느 방위에 위치했는지를 기준으로 경의 명칭이 정해진다. 예를 들어 평양부의 경우, 한성부의 서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서경(西京)으로 지정되었다.
  9. 영문표기는 Metropolitan Prefrecture다.
  10. 영문표기법은 Provinence다.
  11. 영어로는 Prefrecture다.
  12. 단 이미 황적이탈령으로 종친 작위를 상실했거나,친왕가의 장남이 아닌 자손의 5대손 이상인 후손부터는 이론상 출마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현재 유지된 친왕가들 중 5대를 넘은 친왕가는 없다보니 어디까지가 가정의 영역에 해당한다.
  13. 어차피 노무현이 속한 당파인 정경파가 당시 기준 겨우 파벌을 유지하고 있던 시점이기에 그가 내놓은 조치다. 실제로 노무현은 재임기간동안 이례적으로 그가 속한 파벌을 잘 믿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그게 독이 된 탓에 안희정 스캔이 터졌을 당시 파벌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한계가 뚜렷했고, 결국 정경파와 노무현 모두 이 내각을 기점으로 장기간 리타이어되면서 신림파의 강경류에 속하는 김종인이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4. 다만 1930년대의 승정원 일지의 내용 중 김창암이 승정원에 출입할 당시 제복을 입고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본 승지들이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면 제지하자, 그 직후 탈의실에 가서 환복했다는 기록을 보아 적어도 30년대까지는 김창암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근황을 외쳐서 나왔고, 그렇기에 황제보다 자신이 을이라는 사실은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5. 이 조치의 일환으로서 본래는 육조대로에 위치했다가 공습으로 불타버린 양의원 청사의 후신이 될 신규 국회의사당은 여의도에 지어졌다.
  16. 저 3 파벌 자체가 기존 개화당과 입헌당의 후계격 정당들인지라 실질적으론 기존 대한제국 정계의 정당 대부분의 세력을 크고 작게 흡수해서 만들어졌다. 때문에 신민당의 별명 중 하나가 "키메라 정당"일 정도.
  17. 예를 들어 선거철 당시 당 홍보 영상에 감독을 동원하기도 했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용산에서 지지율을 올리는 등의 전략을 쓰기도 했다.
  18. 1920년대 당시 미국의 페도라에 갓마냥 무늬를 희미하게 그려넣는 스타일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먼저 제작을 했는지는 두루뭉술해서 자세한 정보가 없으나, 가장 유력한 이야기로는 당시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의 제자 중 하나가 대한제국에 방문해서 갓을 시험 삼아 구매한것이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19. 선망한다는 뜻의 영어단어 envy와, 한국의 영어권 표기법인 Korea를 합친 신조어이다.
  20. 작중 대산의 회장인 민순성이 불리는 이름 중 하나는 '여민부원군'이다. 즉, 실질적인 유교 사회의 중심인 황실과도 혈연적 연줄을 맺고 있는 기업이라는 뜻.
  21. 사실 이 외에도 해당 소설은 기괴한 줄거리가 많은 편인데, 칼리닌그라드 특별행정구의 최대 콜라수입업자가 서기장이 되어 소련을 붕괴시키거나, 중국에 만주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단일 사회주의 국가가 자리잡는 등 상식을 벗어던진 전개로 유명하다. 다만 유고 내전에 대한 묘사 등에선 공포스러운 유고슬라비아의 최후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가 대다수. 자세한 내용은 호접지몽의 천하 문서에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