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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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대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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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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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의 역사
大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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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민족: 예맥, 삼한, 한민족

상고
시대
고조선(단군조선) 진국 주호국
부여 고조선(위만조선)
원삼국
시대
한사군* 마한 변한 진한
고구려 옥저 동예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탐라국
남북국
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
시대
태봉 후백제 후신라
고려
시대
고려
조선
시대
조선
대한제국
시대
대한제국
현대
시대
대한국
*: 한국사에 포함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학술적인 논쟁이 있음.
한자문화권의 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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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야마토)

일본
대일본제국
일본국
(대월) → (대남) 대한
대한제국
대한국
대한국
관련 문서
[ 정치 · 군사 ]
[ 역사 ]
[ 사회 · 경제 ]
[ 문화 및 사상 ]
[ 기타 ]

대한국
大韓國 | Korea
국기[1]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동시베리아 전쟁 이전 동래 강화조약 이후
대한제국 대한국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오얏꽃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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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 전쟁
1930년 한성진군으로 김창암 집권
1936년 4국 동맹 체결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발발
1944년 헌정복귀
1955년 조선공산당 쿠데타 발생
2010년 명화제 이순 즉위
지리
수도
한성부
최대도시
한성부
면적
340,744km²
위치
동북아시아 한반도, 남만주 일대 및 부속도서
주변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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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8700만명
공용어
한국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법정 문자)
민족
한국인 92%
러시아인 6%, 그 외 2%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종교 분포
무교 37%, 기독교 26%, 유교 20%,불교 15%, 그 외 2%
군대
대한 국방군
정치 및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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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
정부 수반
내각총리대신
국가 원수
(황제)
명화황제 이순[2]
민주주의 지수
163개국중 17위
(완전한 민주주의)[3]
여당
대한사민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명목 GDP 전체 GDP 4조 2500억$세계 4위
1인당 GDP 32,038$세계 32위
GDP(PPP)
전체 GDP 5조 1009억$세계 6위
1인당 GDP 57,453$세계 18위
통화
한국 원 (圓)
위치
대한국 수도 한성부의 전경

서경 평양부의 전경

개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광명이 빛추는 천지로, 이제는 또 다른 새로운 해로.
2020년 12월 31일, 한성 TV 보신각 새해기념 방송 中

7년의 밤은 새벽녘에 저물어가고, 아침의 근화향(槿花鄕)에 꽃이 피도다.

대한국, 통칭 대한,한국은 동아시아의 한반도와 남만주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황해에 면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동중국해와 면하고 있다. 현재 대금공화국과 간도 지역 일부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상태에 있다.

전근대와 중세 시대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중국 대륙에 지나치게 가까운탓에 중원국가들에게 국력을 억제받았으나, 1592년 부산 전투에서 조기에 왜란을 막아낸것과 명나라와의 합동작전인 만주대첩을 시작으로 국력을 점차 증강하여, 결과적으로 중국이 분열된 상태에서 다시 조각나 부족들이 난립하는 만주를 울타리로 삼는 동북면 방면의 패권을 기반으로 상당한 국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개항 요구에 응하여 서양 열강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서히 모순점이 드러나던 안동 김씨 세도가[4]는 근왕개화파 세력에 의해 몰락하였다. 1873년에는 임신개혁을 단행하여 구시대적 대조선국 체제를 끝내고 대한제국 체제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후금, 순나라와 후송보다는 먼저, 일본보다는 조금 늦게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수용하고 체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한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울타리 정도로만 생각하던 만주의 남부는 완전히 합병, 나머지는 식민지화 시키는 동시에 일본과 연해주를 점령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일본에 버금가는 동아시아 열강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29년 발발한 대공황으로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1938년 김창암을 위시한 파시즘 세력의 집권을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과 몽골 침략에 나섰고, 1941년에는 독일의 비밀제의로 소려과 동시베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나, 결국 1944년 영친왕 이택의 김창암 세력에 의한 피살을 기점으로 황실과 문민세력의 합공작전으로 인한 김창암 내각이 붕괴하면서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게 된다.

전후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영토에는 군정이 들어섰으나, 이미 내전으로 파시즘 세력이 축출된 한국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미국은 일본과 같은 직접지배보다는 보다 간접적인 지배를 택했다. 미군의 간접지배하에 헌법이 개정되어, 조선시대때 확보한 영토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토해냈으며 한국의 황제는 국민적 통합자로서만 명시되었다.이후, 1949년에 체결되고 이듬해 발효된 부산 강화조약으로 완전한 국권을 회복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맺어 제1세계로 편입된 뒤, 많이 남은 편이었던 인프라들을 이용하여 중국 내전과 루스 차르국의 정상국가화에대한 투자 등으로 호황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의 정치 · 외교는 이때부터 재형성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국 헌법 제1조는 황제의 지위를 '대한국의 상징이고 한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일부 눈치채기 힘든 방면에서는 황제의 권력이 유효하다[5]. 실질적인 정치는 의원내각제로 운영되며 최고 실권자는 내각총리대신으로 현직은 안철수다. 외교에 있어선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바탕으로 한 친미/친서방 외교를 고수해 왔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6] 신냉전이 본격화된 2010년대 후반 이후론 서방 세계 내에서 신뢰받는 대중국 전략 파트너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7].

상징

국호

한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이전에는 조선, 대조선국등의 국호가 사용되었고, 이후 삼한을 계승한 새로운 자주적 제국이라는 의미해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신설하였다. 다만, 연합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는 제국주의 색채를 뺀다는 명목으로 제국이라는 국호는 사용하지 않게되었다.

줄여서 부르는 말은 한국 또는 대한으로, 1960년대까지는 대한이 주로 쓰였으나 이후부터는 한국이 주로 쓰인다. 중국, 대금민국과 일본등 한자문화권에서는 ‘한국’이라고 표시하며, 러시아 차르국에서는 ‘Корейская империя(대한제국)’이라고 예외적으로 제국이라고 표기한다.

국기

대한국/국기 문서 참조.

국장

대한국/국장 문서 참조.

황실

대한국/황실 문서 참조.

황제

대한국/황제 문서 참조.

사회

민족 구성

한국의 민족은 한국인과 소수의 러시아인과 일본인, 그리고 만주인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순서대로 가장 많은건 한국인, 그 다음으로 많은 러시아인과 일본인 그리고 일본인이며 이 중 한국계가 사회의 주류를 차지한다.

한민족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첫번째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반도 본토에서 거주하던 이들이며, 두번째는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한반도에 동화되기 시작한 남부 만주인계들로 이루어져있다. 다만 이 때문에 만주계 한민족이더라도 차이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할 수준인지라, 사실상 현재 한국의 한민족은 하나의 분파만 있다고 봐도 될 수준이라고 추측된다. 러시아계 한국인들은 근대에 들어서 수가 늘어난 이들로, 제국주의 시기 당시 소련의 탄압을피해 한국의 연해주 자치령 등으로 떠난 다수의 제정 지지자들과 그들이 거느린 식솔들, 또는 만주에 망명한 트로츠키의 추종자를 비롯한 러시아인들이 모인 것에서 초기 인원들이 결집되었다. 이들 중 당시 식민지인이였던 만주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싫었던 이들이 한반도 본토, 혹은 연해주에 위치한 백러시아 정부로 건너가면서 정식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현재도 동네 하나에서 러시아계 한국인을 한두명은 볼 수 있는 수준의 인구수를 유지하고 있다.

외국에 대한 인식

조선시대에 한국은 초기에 서양을 상대로 전면개항을 하기 전까지는 자국 내의 진보적 유학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었다. 초기에는 동도서기라는 이름으로 정의되었으나, 전면개항 이후부터 시대의 논리에 따라 새로 정립된 해당 사상의 경우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래 문화의 장점을 따서 흡수하는 방식이 결국 기본적인 방식이고, 한국 정서에 맞지 않다고 는 문화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는지라 외래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적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힘든감이 있다. 다만, 지리적으로 외국의 영향을 좀 더 많이 받는 특성 때문에 섬나라 특유의 제노포비아가 있는 옆나라 일본보다는 확실히 개방적인 편.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외국에 대한 인식은 그 나라의 국력, 자국과의 관계 및 국가적 위상을 보고 태도가 바뀌는 편이다.

그래서 한국에선 취업을 하거나 살려고 하면 외국인이 국적에 따라 적응하기가 천차만별이다. 특히 만주 출신들의 경우 한국 내부에서 천대, 혹은 혐오감정이 있는 편인지라 적응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편. 예시로 한성부 근처의 식당들을 보면 일부 식당에 금나라인 출입금지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경우도 있다...

다만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는 금류 붐이 일어나는 등, 대금민국과의 인적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도 금나라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사라진 편이다.

비교적 작고 소박한 유럽식을 굉장히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일본과 달리 미국 중심의 큰 집, 큰 차 등의 많은 생산, 많은 소비를 특성으로 하는 생활 환경과 문화를 주로 즐긴다[8]. 예시로 근대에 지어진 유럽식 건물이라 할지라도, 일본이 지은 것에 비해 한국의 근대건축물은 마치 경쟁하듯이 그 크기나 화려함이 더 심하기로 유명하다. 고층 건물이 일본보다 더 빨리 지어졌으니 말 다한 셈. 한국인들 사이에서 미국과 맞먹는 동경심을 가진 나라는 프랑스와 독일로 꼽히는데, 특히 프랑스가 개항을 시작하며 최초로 만난 대상이기도 하며, 외교관계가 좋은 점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호감이 큰것도 있다. 또 만화, 애니메이션 업계의 프랑스에 대한 애정도 상당한 편. 이 때문에 교복 등 제복 문화는 프랑스,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영향을 받은 면이 크다면, 소비나 제조문화는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만, 2차 대전 이후로는 소비, 제조등의 부문이 아닌 곳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는 사례들도 많이 늘어난 편이라고 평가받는다.

정치

한국의 정치 체제는 내각총리대신이 실권을 행사하는 의원내각제 국가임에 따라, 국회의 지명을 받은 국회의원이 총리로 발탁되어 실질적인 정치를 담당한다. 또한, 양원제를 따르는 시스템인지라 입법부인 국회는 민의원(하원)과 중추원(상원)으로 나뉜다. 민의원, 중추원은 각자 행사하는 권한이 다르며, 대부분의 일은 민의원에서 처리한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민의원에는 중추원보다 더 많은 권한이 쥐어져있다. 서열상으로야 상원인 중추원이 더 높으나 조약 승인권, 내각총리대신 지명, 불신임결의권과 예산안 책정 승인권이 모두 민의원의 관할에 있고, 헌법상 민의원이 가결한 법률을 중추원이 기각시키더라도 얼마든지 민의원의 재결의에서 2분의 1 이상의 찬성이 나오면 법률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한국의 정계는 민의원이 우세한 성향을 띄고 있다.

그렇다고 중추원에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의원과 더불어 중추원에는 주요 인사의 임명에 대한 동의권이 부여되어있으며, 이 권한이 특히 두드러지는 임명식은 내각 외의 기관, 예를 들면 대한은행 총재의 임명 등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민의원은 중의원(중민원)과 중추원이 양원을 이루었으며, 이 당시까지만 해도 중추원의 권한이 상원답게 더 강한 편이었으나 1945년 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받은 조건으로 인해 중의원이 민의원으로 변경되었고, 중추원은 유지는 되었으나 권한이 대폭 축소됐다. 이는 당시 황제로부터의 특수 지위 수여와 권세를 통한 중추원 의원들의 압박, 그리고 군부 및 우파들의 지지로 집권했던 김창암 정권의 집권방식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까지도 독일식 귀족 과두정같은 성향이 남아있어 비교적 강력한 편이었던 한국 내 사족들의 권한을 줄이는 목적이 있었다.

내각총리대신

대한국/내각총리대신 문서 참조.

행정각부

대한국 국가행정조직
大韓國國家行政組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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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국가공안위원회
경찰청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유흥업관리청
금융청
국세청
조달청
소비자청
통계청
소방청
공해방지청
재외민족청
검찰청
공안조사위원회
출입국청
국방장비청
병무청
관리청
시종청
규장각
돈녕청
장례청
중앙노동청
고용위원회
농촌진흥위원회
수산청
민간공업청
중소기업청
특허청
원자력관리위원회
기상청
산림청
문화재청
문화청
스포츠청
운수안전위원회
개발청
관광청
해상경비청
질병관리청
복지위원회
아동가정청
특별법에 따른 국무대신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중앙행정부 내각총리대신 직속 기관 독립 중앙 행정 기관


국내에서는 중앙행정부라고 불리는 16개의 부(府,ministry)가 설치되어 있으며, 해당 부서를 대표하는 각부대신직들에는 주로 국회의원이 임명된다. 원칙상 민간인도 대신이 되는 것은 가능하나, 다만 그 수가 각료 총원의 5분의 1 이상을 넘는 경우는 불허된다. 공통적으로 각부의 대신직에 임명되는 이들은 모두 황제로부터 형식적인 임명장을 수여받고, 그 이후부터 정식 대신으로서의 업무를 보게 된다.

통상적으로는 민의원 출신에서 대신 및 총리를 선출하며, 상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출신의 의원들도 대신직을 역임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나, 대신직을 맡아 내각에 입각 시 중추원 출신 의원의 각료수가 전체 내각의 4분의 1 정도만 입적되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다.

각부대신과는 차이가 있는 일종의 비정규직 대신직도 존재한다. 이를 특명담당대신(政務担当大臣)이라고 부르는데, 통상적으로 집권 중인 내각의 총리의 재량에 따라 정권에서 중요한 과제라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업무를 집중적으로 처리한다. 당연히 정권마다 중요한 문제가 바뀌는 만큼 특명담당대신은 내각에 따라서 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직책이기도 하다.

입헌군주제

1893년 고조 광무제 이연의 칙서를 받은 제 6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한제국헌법'을 발표하면서 귀족정과 황제를 위시로 하는 프로이센 방식의 입헌군주제가 초기에 도입되었다. 순종 효황제 이훈의 치세 당시에 자유주의 열풍과, 이웃나라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로 변화하였다.

본격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고 평가받는 시대는 의외로 1938년 김창암의 대한백의단이 공종 의 재가를 받아 정권을 잡은 시기로, 파시즘의 열풍과 이영 본인의 소심한 성격이 합쳐진 결과 김창암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하는 일도 벌어졌었다[9]. 대금민국을 비롯한 한국 제국주의의 피해국들이나 한국 내부의 보수파들은 공종을 대한제국의 침공 선봉에 서 있던 마왕 등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징성으로는 선봉이 맞아도 과연 건강이 심각할 수준으로 좋지 않던[10] 공종 본인이 제대로된 판단을 내렸을지가 의문이라는 이야기 또한 존재한다. 그가 사망한 지금 진실은 저 너머에.

내전 이후 들어선 민주주의 세력도 황실인사가 지도부인 성격을 띄고 있었고, 이에 따라 친미파인 정치적 지도자 양연군 이현이 권력을 잡은 한국보다는 기반이 적은 일본과 러시아 차르국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 판단한 맥아더 장군의 환태평양 사령부의 결론은 한국의 황제를 동아시아 북방 민주주의의 수호자반공의 정점으로 이용하는 것을 택하였고, 몇년 뒤 성덕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 이강과의 협의로 헌법을 개정한것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영향력을 하나 둘 철수해나갔다.

이현 개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화된 황권과 합쳐져, 구국자로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대신[11] 권력을 낮추는 성과를 내었고, 이현의 치세가 종막에 저물 무렵에는 완전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입헌군주제 확보에 성공하였다.

경제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의 대표적인 선진국이자 강대국 중 하나다. 원화는 세계 무역결제통화 비중의 10~15%를 차지하며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신뢰성이 높은 통화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원화는 미국 달러, 유로, 엔과 함께 세계 4대 통화로 꼽힌다. 한국의 GDP는 세계 5위이며, PPP는 세계 6위, 금 보유고 세계 9위, 주식시장 규모 세계 4위, 대외순자산 규모 세계 2위 및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은 세계 3위다. 몇 안되는 비서양권 국가 중 G7 회원국이자 북동아시아 경제연합 주도국, 유네스코 예산 분담률 3위로서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 국가이다.

이러한 한국의 경제 배경은 중국 내전 당시의 지원과 만주 소비에트 전쟁에 대한 군수물자 특수로 채워졌다는 의견이 많은 편. 실제로 옆나라인 일본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더 처참한 상황을 타파하였고, 베트남 전쟁에도 중화민국을 통한 간접 물자 수출식의 지원을 하여 최종적으로 한국의 경제력을 앞질렀다.

행정구역


도·경성·부급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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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황해북도
황해남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대련도
심요북도 심요남도 제주도
통안북도 통안남도
경성(京城)급
서경 평양부|서울 한성부
부(府)급
인천부 개성부 원주부
대전부 대구부 포항부
광주부 전주부 군산부
함흥부 원산부 경흥부
의주부 삼화부 동래부
교상부 수궁부 안산부
강호부 안산부 동화부
평본부 금산부 서림부


대한국은 도부(道府)제를 시행중이며, 20여개의 도급 행정구역과 총 25개의 부급 행정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있다. 이 22개의 부 중 2개의 부는 경성급으로 분류되는 수도권으로, 한성과 평양 2개가 존재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동래부를 경성급으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늘었으나, 아직 대한국 의회는 동래부가 차후 어떻게 될 것인지 의사를 표한 바가 없다.

부는 기본적으로 도 아래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경성급 부들은 한국 내에서 최중요 도시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련특별시의 경우, 조선 시대 이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승전을 통해 확보한 영토이나, 한국인 인구 비중과 국경선 상의 문제로 인해 추가적인 군정 기간을 거친 뒤 다시 한국에게 반환시키는 대신, 민족특수성을 고려하여 부 외의 행정구역으로 취급하는 조건으로 행정구역에 돌아왔다.

대한국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행정구역이 존재하였으나, 본토가 아닌 외지(外地)로서 행정구역이 구분되었다. 이 행정구역들은 훗날 식민지들이 광복을 맞으며 폐지되었다.

외교

한러관계

러시아 제국과의 수교는 1872년에 체결되었다. 이후 러일전쟁 때 한국이 일본의 편을 들면서 잠시 단절됬었다가 이후 복귀됬으며, 적백내전 이후에는 소련과 극동 공화국을 혁명을 통해 갈라진 별개의 국가로 본다는 입장을 취해 양국 모두와 수교를 맺었다.

동시베리아 전쟁 당시, 소련을 한국이 공격함으로서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었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 이후에 겨우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은 러시아 차르국과는 긴밀하게, 소련과는 무난하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중이다.

소련이든, 러시아 차르국이든 한국과 러시아의 문화적 교류는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근대시기 한국 문학의 형성에 도움을 준 러시아발 문학을 칭하는 아라사담이라는 말이 한국에 정식 용어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 교류는 오래된 것으로, 러시아 또한 한국의 매체 소비량이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이다.

경제적으로는 러시아 차르국과 더 가까운 편으로, 동북아 경제 연맹에 양국이 모두 다 가입해있다. 다만 이 경우는 사실상 한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경제적 상국이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하는지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내릴 수 있는 판단이 다양한 편.

주러한국대사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소한국대사관은 모스크바에 위치해있다. 양국의 대사관들은 모두 한성부에 위치해있다.

한일관계

1875년에 수교한 관계지만, 이전부터 수천년간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특히 명나라의 부재와 순의 애매함으로 통일된 중원국가가 장기간 등장하지 않으면서 무역 등을 통해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후 동양전쟁, 한러일 전쟁 등을 거치고 연해주를 사실상의 분할로 경영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이 관계에는 양국 모두 입헌군주제라는 동질감 또한 이유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1940년대에 대마도로 도주하여 정부를 세운 김창암 정권을 일본제국이 지지하면서 수교가 끊긴 적이 존재하였으나, 이후에도 냉전 시기에는 반공 파트너로서 협력하거나 히로히토 천황이 한성을 방한하는 등 친밀한 외교를 유지중이다. 다만, 수백년간 이도저도 아닌 땅인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근대 시기가 되서야 일본에 반환된 대마도에 대한 역사적 해석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도 존재는 한다.

문화적으로도 교류가 상당하며, 특히 양국의 경제성장 이후 본격화된 애니메이션 방면에서의 교류가 주목할만하다. 경제적, 특히 근대 시절 자원 무역에서부터 기원한 IT협력도 상당히 발달되어있는 편.

또한, 현재 동아시아 안보에서 가장 큰 위협인 타이완을 상대로 주기적으로 항공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주일한국대사관은 도쿄에, 주한일본 대사관은 한성에 위치해있다.

한중관계

수천년간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서로에게 있어 각자의 교류를 제외하면 외교를 논할 수 없을 지경으로 긴밀했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의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의 무관심이 서서히 증가했고, 최종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시점의 대륙에서도 왕조 2개가 존재하는 지경이 되자 조선은 문자 그대로 '명목상으로만' 중국을 상국으로 대우하는 수준으로 변화했다.

두 왕조 중 송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비교적 경직된 편이었고, 송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거리 차이때문에 닿기 힘들었지만, 전조인 명의 후계자들의 피가 섞인 황제가 황통을 이어가고 있었기에 꽤 좋은 편이었다.

본격전인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 시기는 근대로, 중화의 두 왕조 모두 중화사상이라는 오만에 빠져 파멸로 치닫게 되자 조선 내부에서는 정말 순수 그대로의 중화질서만이 답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이후 조선이 개항을 시작하고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878년에 체결된 한송수호조규였다. 당시 한국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맹주라 여겨지는 중원국가들과 대등한 근대 조약을 맺음으로써, 이를 근대식으로 개조한 유교사상과 연대해 국내에서의 급격한 근대화에 대한 반발을 돌릴 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반면, 순송 2개국 입장에서는 서두를 게 없는 상황이었고, 체급도 맞지 않는데다가 중원이 통일되지 않았어도 인식적으로 번국으로 취급되던 같은 아시아 국가가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아닌 근대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에 대해 각국 조정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의 강유위는 우선은 한국과의 좋은 관계를 굳이 깰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수호조규를 맺는것을 승낙하였다. 반면 송나라의 이홍장은 일본의 수교 제의를 거절해봤자 원한만 살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조정 내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수교 제의를 거절했다.

비록 송나라만이 허락한 것이지만, 명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없는 중원국가가 조공책봉관계로 조선을 다루지 않겠다는 선언은 실로 남아있던 조선 내 유학도들에게도 큰 충격을 줄만한 변화였고, 그 자체만으로도 근대화를 막 시작한 한국의 대,내외적 위신을 확립시켜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893년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당시 한국이 일본과 연합하여 금나라, 순나라를 완전히 박살내면서 중국 내부에서는 큰 충격이 일었고, 이어서 한러일 전쟁으로 아예 제 1의 번국이 열강의 반열에 진입하자 전통적인 중국-한국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과 사이가 양호한 편이었던 송나라는 말할것도 없고, 사이가 좋지 않던 순나라를 시작으로 중국 내에서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일본과 한국을 개화의 모델로 보게 되었다.

만주를 병합하고, 중국에서 서구 열강들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한데다 전통적인 위신이 크던 중국 왕조들이 혁명으로 무너지자, 천명이 완전히 조선반도로 넘어왔다는 민중의 인식과 정부의 정책이 합쳐지면서 한국의 중국에 대한 태도는 고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도중 벌어진 칭다오 전투와, 종전 직후 한국이 칭다오를 아예 합병한것을 주장하는 등, 적어도 북중국 방면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의사를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몽골 출병, 대명국 지지, 제 2차 동아시아 전쟁이 발발하며 양국의 관계는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변하였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야만인이나 다름없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 북중국 도시 일대에서 전란의 불길을 몰고 온 한국의 태도는 현 중화 2개국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요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결국 중국은 북중국에서의 사투를 끝으로 일본을 몰아내기 전에 한국의 영향력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현대에 들어서 한국은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양국과 서서히 관계를 개선 및 정상화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희토류를 수입하고 있으며, 중화민국과도 활발한 교역을 진행중이다. 중국 양국 역시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편. 특히 중화민국의 경우 문화적 교류도 높은 편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이 강한 동시에 같은 유교 문화권으로서 한국에 많은 문화를 수출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은 2개국 모두와 수교한 상태로, 주한중화민국 대사관과 주한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은 모두 한성에 위치해 있다.

한만관계

썩 좋다고 하지 못할 관계를 보내고 있다. 아무래도 20세기 중반동안 식민지로서 한국의 심한 수탈과 파시즘으로 인한 억압을 겪었고, 만주 내의 반한감정으로 인해 수교도 1990년대나 되서야 정식으로 진행된 역사가 있기 때문.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부터 만주는 공산정권의 지배가 주를 이룬 데 반해 한국은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의원내각제였던지라, 체제적인 이해도도 서로 떨어지는 편이다.

한미관계

1868년에 국교가 수립되었고, 만주 내에서의 이권 문제를 다룰 때나 러한일 전쟁 당시 포츠머스 조약 등의 미국측에 의한 중재를 제외하면 그닥 큰 접점은 없는 관계였다. 다만, 미국 유학파들에 의해 들어온 미국식 소비문화 열풍으로 페도라가 일찍 유행하거나, 고층건물 열풍이 부는 등의 문화적인 현상이 1920년대에는 한창이었으나, 이후 한국과의 관계는 경직되기만 할 뿐이었고, 급기야 제 2차 동아시아 전쟁당시에 한국이 일본을 지지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석유금수조치를 받자 이후 일본 해군과 연계하여 알레스카를 폭격하여 국교가 완전히 단절되었었다.[12] 이후 한성 내전의 종결되어 한국이 연합국에 가입하면서 다시 수교가 복원되었고, 환태평양 사령부 통감청 체제에서는 미군이 한반도에 일부 진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냉전 시기에 대륙 지역의 반공국가가 필요했던 미국은 한국에게도 투자를 감행하는 등 친한적인 정책 또한 펼쳤고, 이 때문에 한국은 오늘날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육상 파트너 중 하나로 인정받는 우방국이다.

경제적, 군사적 교류가 상당한 편으로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한국 육군의 현 편재는 민주화 이후 미국의 양성방식을 따와 교정한 것이다.

문화적인 교류도 꽤 활발한 편이다. 일본 문화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은 편이지만 나름대로의 확실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며, 영어교육 또한 한국에서 활발한 편이다.

주한미국대사관은 한성에, 주미한국대사관은 워싱턴 D.C에 위치해있다.

한프관계

1867년 국교가 처음으로 수립되었다. 당시 근대화가 생존을 위한 국가적인 목표였던 초기 한국의 가장 큰 외교적인 고객 중 하나이기도 하였으며, 1차대전에서는 독일령 식민지 일부를 협공하기도 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었다. 그러던 중, 1940년에 비시 프랑스 정부가 들어선 뒤 독일은 한국에게 자유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를 단전할것을 요구하였으나, 한국은 두 프랑스 모두와의 수교관계를 유지하는 선택을 내렸다. 이후 1941년에 들어서야 자유 프랑스가 먼저 대한제국에게 선전포고 하면서 외교관계가 완전히 끊어졌고, 한동안 프랑스를 대상으로 한 외교적인 업무는 비시 프랑스와의 업무로 전부 교체되었다. 이 상태가 끝난 것은 1944년 다시 민주화된 한국이 연합국에 가입하면서였고, 이후에는 큰 변동 없이 친밀한 외교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2018년 마크롱 대통령이 방한 중 명화제 이청을 직접 알현하거나, 보빙사 파견 당시의 모습이 프랑스에서 파견 기념 130주년 당시에 재현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양국의 교류는 상당히 활발한 편으로, 한류가 가장 흥하는 유럽 국가가 프랑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20세기 이래 한류 붐이 강한 편이다. 한국 또한 제2 외국어에 대한 학습 선호도가 러시아어, 일본어에 이어 프랑스어가 3위를 기록하거나, 문화개혁 당시 프랑스 검열법을 일부 참고하여 개방을 진행하는 등 역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주한프랑스대사관은 한성에, 주불한국대사관은 파리에 위치해있다.

문화

기본적인 문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문화 강국 중 하나이다. 큰 범주에서는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확연하게 구분할만한 키포인트들이 특징이며, 기존의 보수적 인사들을 포섭하던 과정에서 전통, 그중에서도 유교적인 의식 등을 꽤나 유지시킨지라, 근대 시기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나라임에도 오래된 문화가 꽤 많이 남겨져 있으며 전통과 외래의 문화가 섞여있는 현대문화가 현재 한국의 문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한국 문화는 서양 문화, 특히 모자를 비롯한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는 부분에서[13] 영향을 많이 끼쳤으며, 현대에 과장 및 각색으로 새롭게 재해석된 선비들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한국 문화는 일본의 와패니즈에 이어 에노리안(Enorian)[14]들을 양산하였다.

언론, 대중매체

교육

서브컬쳐 및 애니메이션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초기에는 제작 시 검열과 제한이 특유의 사회가치관으로 인해 일본에 비해서 더 심한 편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가 상당히 풀리면서 꽤나 자유로운 서브컬쳐 매체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대중매체에서의 한국의 모습

통상적으로 유교, 선비 및 경제력과 기술로 대외적으로는 알려진 나라다보니,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 미국, 유럽권같이 한국에 우호적인 성향의 국가에서는 대체적으로 전쟁 관련 영화라 대한 제국 시기의 파시즘을 묘사하는 게 아니면 어딘가 옛스러운 문화와 높은 경제력에서 비롯된 첨단기술의 조화 등으로 묘사하는 케이스가 많은 편.

반면 대금민국이나 중국 같이 한국에게 피해를 본 나라들의 경우, 민족주의정서가 강한 편이라 대체적으로는 제국주의자, 파시스트, 국체유교시기 당시의 광신적인 사이비 유교에 기반한 전쟁범죄 등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부각된다.

전반적인 매체에서

<더 킹, 대초원의 군주>에서는 근대화에 성공한 대청제국의 주요 라이벌 국가들 중 하나로 언급된다.

금나라 영화<우러구우처본:세 형제 이야기>의 배경이 단둥 산골에 위치한 한국식 저택[15]이다. 이 영화의 음산한 배경미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이 많은 편.참고로 실제로 존재하는 저택으로, 과거 만주에 살던 한국 사족 일가가 거주하는 용도였으나 전부 결핵으로 단절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만주가 해방되자 새로운 집주인도 떠나면서 완전히 빈집이 되었다고 한다.

웹툰 원작 애니메이션<하나의 하루>의 배경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서 추가된 언급을 보면, 개화기에 노비제 폐지로 인한 일부 양반가의 불만을 대처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늑인제도를 애매하게 도입한지라, 늑인에 대한 대우가 비정상적일 수준으로 세계에서 낮은 편이라는듯. 결국 늑인 인신매매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내각이 총사퇴하고, 인신매매를 묵인한 전임 총리 및 관료들이 연속으로 검거까지 되고 나서야 대우가 나아졌다.

소설 <배틀로얄>의 대조선제국이 한국을 모티브로 한 나라다. 오랜 동맹인 대동아공화국과는 미묘한 협력중이긴 하나, 사회 자유도는 더 양호한지라 이쪽으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는듯.

대체역사에서

<조지 부시의 위대한 미국>에서는 졸지에 가능성이 있던 간도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대금민국과의 관계가 전보다는 나아졌고, 러시아 차르국에 대한 영향력도 다시 키우는 데 성공했으니 나름 수혜국인 셈.

<만주,혁명의 시대>에서는 현실적인 전개와 고증 때문에 대청제국과의 긴밀한 동맹 중 하나로 나왔다. 남만주 전역과 연해주, 추가적인 시베리아 영토를 합병한 상황에서 당장은 만족하고 있으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공작으로 인해 잃은 것도 많은지라, 독자들은 차후 한국의 행보를 걱정하는 중.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시베리아에서 독일과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점령한 땅인 시베리아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서(...)생각보다는 통제가 쉬운 모양. 그렇지만 시즌 4 시점에 나온 뉴스에서 시베리아 철수를 명령했다는 내용이 나온 걸 보아, 결국 일본처럼 식민지 통제권을 상실해버린 듯 하다.

전략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모드<카이저라이히:대전의 유산>에서는 처음에는 식민지를 잘 유지하는듯 보이지만, 예정상 시간이 지나면 비대한 식민지를 소화하지 못한 것과 경제불황, 토지 개혁 부재와 민권문제 등이 합쳐지면서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되고, 각각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박헌영과 트로츠키의 내전을 진압하면 다시 반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것이 가능하다.

<검은머리 미국 대원수>에서는 호시탐탐 김유진을 섭외하려 드는 역할로 나왔으나, 정작 회유할때마다 김유진에게 돈만 뜯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미군정 간접통치 치하에서 박헌영의 쿠데타 시도가 조기 적발되는 것으로 추가적인 등장은 종료.

<홈프론트>에서는 대만의 외교술에 굴복해 대아연맹의 일원이 되었다고 나온다. 황제제도는 유지됬다는 듯.

<아토믹 하트>에서는 소련의 재빠른 진격으로 남한인 대한국과 북한인 대한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는 언급이 나왔다. 묘사를 보아 이 세계 한국의 미래는 그닥 밝지는 않을듯.

대금민국 소설<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역사가 개변되어 연합군에 들어갔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 만주 식민지가 건재하다. 연해주의 러시아 차르국도 차르국이 아닌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으로 계속 유지되는 중.


  1. 1902년 이재황에 의해 최종적으로 고안된 이래로 사용된 태극기
  2. 2024년 기준
  3. 8.65점
  4. 대한제국 시기의 후작가 사족 안동 김문이 바로 이 가문이다. 다만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후작위를 하사받고 난 뒤에는 주기적인 녹봉만 수령하고, 직접적인 정계 진출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5. 이는 국내에서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거두가 당시 양연군으로도 알려진 태시황제 이현이어서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6. 소련이 서방측이기는 하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딱히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있는지라 소련을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제 2세계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다만, 최소한 소련은 중국이 그랬듯이 최소한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하지는 않았다.
  7. 다만,일각에선 한국의 현 영향력이 제국 시대에 만주지역과 연해주에 기반을 다져 놓고, 그 기반으로 대금민국과 러시아 차르국을 조정해서 현 외교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반서방 기질이 강한 편인 러시아 차르국이 한국의 눈치를 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제 2세계 진영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게 아니냐는것. 물론, 대금민국과 한국의 관계는 실제로는 껄끄러운만큼 단순히 주장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8. 개항 과정에서 한국이 미국과의 접점이 그리 크다고 보기는 힘드나, 당대의 유학파들 중 미국에 다녀온 분파가 한국에 미국의 소비문화를 일부 퍼트린것이, 땅과 집을 중시하는 한국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학계에서는 거론된다.
  9. 다만 백범일지의 내용 등을 분석해보면, 집권 초기의 김창암 본인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자신보다 상관으로 인지한 것 같기는 한것으로 보인다.다만 집권 후기부터 황제의 권위를 깔보는듯한 모습도 보였는데, 예시로 《공종실록》中성덕 10년(서력 1942년) 4월 3일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본인이 엄연히 황실의 권한인 사관 임명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가지려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해당 권한은 융희시대 당시에도 침해된 적이 없었고, 이에 성덕제가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김창암도 해당 발언을 철회했다고 한다.
  10. 공종은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것도 있지만, 어릴때부터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서정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11. 단, 전범이나 김창암 세력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황실 인사들에 대한 격하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하였다.
  12. 이 시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미국을 미 제국주의자들이나 코쟁이, 일본발 멸칭인 귀축미영이라고 칭하는 등 반미감정을 조장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한국계 미국인들을 자택 내부에 감금하거나 수용 시설에 보내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13. 1920년대 당시 미국의 페도라에 갓마냥 무늬를 희미하게 그려넣는 스타일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누가 먼저 제작을 했는지는 두루뭉술해서 자세한 정보가 없으나, 가장 유력한 이야기로는 당시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의 제자 중 하나가 대한제국에 방문해서 갓을 시험 삼아 구매한것이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14. 선망한다는 뜻의 영어단어 envy와, 한국의 영어권 표기법인 Korea를 합친 신조어이다.
  15. 정확히는 근대 시절 한옥과 서양 건축을 혼용한 한양풍, 또는 한양절충 양식의 저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