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군주당 (영어: Liberty Monarchist Party of Saculechia, 自由君主黨, LMP)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집권여당이자 자유군주주의, 강성 국민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상징색은 핑크, 정식으로는 자유군주 핑크이다.

중앙이세계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있으며 선관위에서는 이 당을 보수 5, 즉 우익, 극우로 분류된다. IY 200년 8월에 친귀족 성향의 자유귀족당, 전체주의,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제국당, 대안 우파 성향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여 통합군주당이 되면서 소멸되었다.

IY 116년 2월 사클레치아 왕국을 지도하던 헨리 4세가 끝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2월 혁명으로 폐위되고, 이를 주도한 세력들이 군주당에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전제군주제를 주장하는 율리우스가 세력과 국가주의 성향의 친엠페로우 세력으로 분열되었으나 당대회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저 1세가 당선됨에 따라, 117년 4월 자유군주당을 출범시킨다.

120년 4월 제12대 의회선거에서 35석으로 선전하였으나 자유당을 막지 못했으며 124년 4월 율리우스 카이저 1세 사후 카이저 2세가 취임하였으나 일명 필리노이의 난이라는 반군주당 운동이 터지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고 농노들과 일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이 백성의 지지를 크게 얻고 130년 7월 제13대 의회선거에서 13석으로 추락하면서 소규모 정당이 된다. 그러나 140년 12월 제14대 의회선거를 계기로 율리우스가 세력들이 중도파들이 잡고 있던 당권을 잡기 시작했고, 141년 6월 카이저 4세가 사클레치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독재 정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제15대 의회선거부터 다수당이 되었으며 이는 제19대 의회선거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195년 5월 초대 사클레치아 지방선거에서 1,100석을 흭득하면서 승승장구하였고, 198년에는 자유귀족당, 제국당과 선거연합인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결국 200년 3월 자유귀족당과 제국당 뿐만 아니라 일부 엠페로우파가 탈당하여 결성한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게 된다.

제18대 의회선거에서는 자유군주당이 89석을 흭득하여 제1당이 되었는데, 그 중 35명의 엠페로우파 의원들이 율리우스파의 독자 행보에 반발하여 탈당을 결심하여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조직했으며 제19대 의회선거에서는 이 당이 15석을 흭득하게 된다. 제1대 지방선거에서도 출마한 후보 500명 중 312명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역사

사클레치아 2월 혁명

앵글로색슨계와 사클레치아계 사이에서 태어난 사클레치아 왕국의 왕인 헨리 2세는 IY 100년 3월 간접선거를 통해 38세의 나이로 취임하면서 그 동안의 국정 운영 방식이 아닌 자본가, 평민, 여성, 외국인, 노예, 군사지도자 등 각 대표를 통한 국정 운영으로 나라에 대한 기틀을 다졌고, IY(이세계년) 109년 11월에는 신생 정당인 자유당과 손잡고 함께 연립 정부를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귀족들과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사클레치아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헨리 2세가 망쳤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어 110년 3월 두 번째 간접선거에서 헨리 2세가 재선을 하게 되었으나 곧바로 경제 침체가 일어났다. 그래서 헨리 2세는 새로운 경제 계획인 헨리 계획을 발표하는데,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과 유사하다. 당연히 대부분의 대표는 찬성표를 던졌고 이에 대한 경제 안정화를 시작하게 된다. 한편, 평범한 그리스계 농민이었던 율리우스 이메타리우스가 살고 있는 북부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흉년이 일어났는데, 율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가축이 모두 굶어죽자 농민으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자신이 그동안 모은 여행 자금으로 수도인 일리오스로 떠난다. 그 후 율리우스는 일리오스에 와서 그의 형제였던 올리베르를 만났고, 올리베르는 자본가, 농노, 평민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해보자는 제의를 한다. 율리우스는 이에 수락하였고 이렇게 해서 신흥 조직인 을 만들게 된다. 율리우스는 이 때부터 어느 자유주의 학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올리베르는 헨리 2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다. 115년 3월 다시 만난 두 형제는,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우리는 전통을 파괴시키는 헨리 2세로부터 사클레치아의 전통을 지키고 자본가들과 함께 자유주의를 퍼뜨릴 것이다!"라는 공보를 써 일리오스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나 헌병군에게 걸려 반역죄로 체포되는 일도 빈번했었다. 그러던 115년 5월 자본가들이 두 형제의 집에 찾아와 함께 헨리 2세를 몰아내자는 동맹을 제안했고 그 결과 의 회원 수는 300명으로 늘어나 여기에 군주주의자, 중도주의자,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시민단을 조직한다. 한편 농노들은 영주들의 가혹한 행위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서 자유시민단은 더 많은 자본가는 물론, 국수주의자, 국민주의자, 귀족들과 합류하여 헨리 2세의 폐위를 요구했다. 115년 11월 헌병군의 대대적인 시위 진압으로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본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원래 목적이 헨리 2세의 폐위가 아닌 사클레치아 왕국의 체제를 바꾸자는 것으로 태세전환했으며, 116년 2월, 마침내 300만명이 무기를 들고 일리오스 궁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니, 바로 사클레치아 2월 혁명이다.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참수형으로 처형당했고, 각 국정 대표들도 세르도피아 왕국, 엘레프 공국 등으로 탈출했다. 한편 헨리 2세가 국왕이 되기 전 입당했던 자유당 측은 반발하였고 이메타리우스 형제를 반역자라고 주장하였다.

자유군주당의 탄생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향후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대해 율리우스는 "자유군주제"를 주장했고, 올리베르는 "절대왕정"을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의견 때문에 자유시민단은 결국 분열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이 둘이 일반 군주제를 지향하는 군주당이라는 정당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자유시민단 회원들도 형제들을 따르겠다며 군주당에 가입하게 된다. 한편 군주당의 지도자인 밀로스 욜라키치는 저 불순세력들에 의해 군주당이 큰 위기에 빠졌다며 두 형제와 그 지지자들을 내쫒으라고 했으나 상황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밀로스와 그 간부들은 쫒겨났고, 끝내 당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둘은 자유시민단을 흡수하면서 곧바로 자유군주당을 탄생시킨다. 올리베르는 "황제"라는 뜻의 엠페로우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율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저 1세라는 이름으로 임시 국왕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17년 5월 율리우스가 이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올리베르는 지지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모아 엠페로우 이클립스를 조직하게 되었으며 율리우스 세력과 경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120년 4월 12대 의회선거에서, 전체 의석인 100석 중에 35석을 흭득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55석+10석 (무소속)을 얻게 되면서 자유군주당은 제2당이 되었다. 120년 8월에는 율리우스가 자동으로 국왕이 되면서 탈당 처리되었으며 율리우스의 동생인 율리우시아 이메타리우스가 최고지도자가 된다.

필리노이의 난과 13대 의회선거 참패

120년 8월 율리우스 1세는 국정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헨리 2세가 추진해온 헨리 계획을 폐기하고 신경제계획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신경제계획이란 계획 경제가 아닌 유럽/미국식 시장 경제, 자본화를 추진하여 사클레치아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자유당은 이에 대해 "과도한 자본화는 신분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비판했으며 당내에서도 갑론을박이 일어나기도 했다.

121년 6월 인도네시아계 사클레치아 백성이었던 필리노이가 이 당에 입당하였고, 율리우스파를 따르기 시작했다. 필리노이는 부지도자를 맡게 되었고 중도파 정치인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재무부 장관을 맡게 된다.

그러나 123년 11월 율리우스 1세는 오크리아강에 댐을 건설하겠다며 예산 89만 보루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자 필리노이는 댐 건설에 들어가는 과도한 예산은 국고를 낭비하는 짓이라고 반대했다. 분노한 율리우스 1세는 필리노이를 재무부 장관에서 내쫒았고 동시에 모든 직위에서 제명을 내리면서 필리노이에게 입당 금지 명령을 내렸다. 필리노이는 결국 무소속인 상태가 되었으며 필리노이는 해방당을 조직한다. 이후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내각에 실망한 백성들이 이 당에 점점 들어오게 되었고 124년 1월에는 당원 수가 10만을 넘어 중소정당이 되었으며 준군사조직인 "해방조직"을 결성한다.

124년 2월, 자유군주당은 위기를 맞는다. 중도파들은 댐 건설을 즉각 중단하라는 논평을 발표했고 이에 중단하지 않을 시 탈당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엠페로우파는 필리노이 측에 가담한 중도파들을 일부 배제시켰다. 한편 해방당은 자유당과 굳건한 동맹을 맺으며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1세를 몰아내자는 의미로 정당연합까지 가게 된다. 한편 율리우스 1세는 건강이 쇠약해지며 국정 지지도까지 떨어지자 결국 율리우스 1세는 조기 퇴임을 결정하였고 그의 동생도 당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 124년 4월 율리우스 케로베스가 국왕이 되었고 동시에 카이저 2세가 되었으며 동시에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율리우스파 내 중도파와 온건파의 갈등이 절정에 달한다. 124년 5월 새벽, 필리노이 장군을 중심으로 무려 3만 명의 백성들과 해방조직원들이 일리오스 시내를 점거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리오스를 지키고 있던 헌병들은 이들의 진압에 나섰으나 강력한 해방조직으로는 역부족이었고 당사에서는 중도파와 온건파 정치인들이 점거를 강행하기도 했다. 한편 간부들은 율리우스 2세에게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강경 진압을 요구하자 율리우스 2세는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을 색출해내어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무고한 백성들을 시위 참여자 즉 반역자로 몰려 처형을 당하는 일이 많아졌고 오히려 시위대의 수가 많아졌다. 심지어 헌병의 수가 시위대에 비해 적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해방조직이 자유당과 손을 잡고 시위를 이어나가자 더 이상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가 없었던 율리우스 2세는 결국 스스로 물러난다. 자유당의 지지도는 이 시점부터 70%를 넘었고 한스 케르노치가 임시 국왕이 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 상태였으며 자유군주당은 존폐 위기에 몰렸다. 그러던 중, 율리우스 1세가 백혈병으로 죽게 된다. 율리우스 1세 사망 이후인 126년 5월 한스의 지지도는 50%를 넘어섰고 자유당의 지지율의 상승세도 점점 가파른 상태였으나 자유군주당은 북쪽 마을의 귀족,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 원내 진입 5%를 넘으면서 9%를 기록했다.

129년 6월 한스는 자유당에 입당했고 동시에 최초로 국왕이 옷에 특정 정당 심볼을 달고 나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윌리엄스 1세를 계기로 과거 정치에서 독립성을 가진 국왕도 정당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율리우스파가 끝내 힘을 잃기 시작하자 엠페로우파는 잠시동안 당권을 잡고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30년 3월 자유군주당의 당원인 페페르치니 베뢰스티 (엠페로우파)가 자유당 내부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제명되자 엠페로우파가 조금씩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지지도도 7%를 기록하면서 원내 진입률 5% 이하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당 쇄신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당 쇄신을 시작했다며 당내 비판이 이어졌으며, 결국 13대 의회선거에서는 13석을 기록하면서 대참패를 당했으며 결국 엠페로우파는 이 과정에서 두 파벌로 쪼개진다. 초국가주의와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과격파와 국민주의를 주장하는 온건파로 분리되었는데 서로가 선거 결과에 책임지라고 주장했고 일부는 몸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한편 엠페로우파의 창시자 올리베르는 율리우스 1세의 사망, 엠페로우파의 분열과 처참하게 패배한 자유군주당의 상황을 보고, 비상회의에서 "우리 당은 이제 끝났을 것이다. 오늘로써 나는 더 이상 정치와 자유군주당에 참여하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 평범한 농민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밝혀 탈당 및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율리우스 1·2세의 사임, 필리노이의 난, 엠페로우파 분열로 인하여 자유군주당은 정당 창당 13년만에 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 내 혼란 극복, 14대 의회선거 약진

130년 11월 전당대회를 열고,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는 다시 경쟁 세력이 되었다. 엠페로우파에 유리 소크토라바, 율리우스파에 율리우스 컬리지 주니어, 중도파에 앙리 존슨이 출마하였으며 새 최고지도자에 율리우스 컬리지 주니어가 선출되었다. 존슨은 2위, 소크토라바는 3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엠페로우파의 온건파 대부분이 컬리지를 선호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율리우스 카이저 3세로 당 내 최고지도자가 된 컬리지는 당 내 혼란을 잠재울지 주목된다.

일단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의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었고, 그 결과 양 파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기 시작했다. 131년 6월 자유당의 한스 케르노치가 국왕 자리를 같은 당의 윌리엄스 1세로 넘겨주게 되었으나 군주당 지도부는 한스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31년 8월에는 한스가 대법원 판결 결과 무죄로 판결나자 역풍을 맞게 되었다.

133년 5월 자유당이 신생정당인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려 하자, 자유군주당은 어떻게든 반대를 외치면서 자유당-미래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을 방해하려고 했다. 만약 자유당이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할 경우 55석인 자유당은 미래당 7석을 합친 62석이 되며 개헌선 (60석)을 넘게 된다. 그러던 중 윌리엄스 1세의 내각 중 일부가 각종 사건에 휘말리면서 지지도가 40%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 때를 노린 자유군주당은 미래당을 구색정당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미래당 대표 타치바나 겟코는 반발하면서 자유군주당을 비판했으나, 나중에 군주당 당원들이 미래당을 장악하면서 겟코마저도 자연스레 군주당의 당원이 되어버린다. 겟코는 군주당을 "무능한 정당"이라고 비판하면서 탈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래당은 자유군주당의 구색정당이 되었으며 191년 5월 원외 보수정당인 신화당과 합당하여 미래신화당의 전신이 된다.

136년 5월 윌리엄스 1세가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자유당은 이 사건의 배후에 자유군주당이 있다고 주장했고 자유군주당은 이를 부인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14대 의회선거의 이슈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율리우스 카이저 3세를 맡은 쿨리지는 슬그머니 왕좌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급기야 전제정치를 실시한다. 각 장관들이 반발하자 쿨리지는 이들을 물갈이시키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쿨리지의 행보와 자유군주당을 비판하였으며 일부 군소정당들도 동참하여 자유당은 반군주당 연합이라는 선거연합을 구성하게 된다. 137년 4월 자유군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원내지도자에 율리우스 네막시스, 부지도자에 율리우스 마르키스를 선출했으며, 9월에는 극우정당인 파시오당을 흡수합병했다. 138년 6월에는 쿨리지가 이번 선거가 자신의 당과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140년 7월 14대 의회선거에서는 39석을 얻어 자유당 (20석)을 넘게 되었고 미래당도 11석을 얻어 50석을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제1당을 차지한다. 쿨리지는 "이번 선거에 대해 동감하며 하늘에 계시는 주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140년 9월 중도파와 온건 율리우스파 의원들이 간선제로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직선제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140년 10월 자유당 대표 빌헬름 폰 에른스트와의 회동을 끝으로 찬성 85인, 반대 3인, 기권 22인으로 과반수를 넘겨 건국 114년만에 간선제가 폐지되고 직선제를 실시하게 된다.

성향

자유군주당은 전제군주제와 자유주의를 지향하며, 율리우스파는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를, 율리우스파보다 파시오 성향이 강한 엠페로우파는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 다만 양측 모두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율리우스파는 유럽식 경제 철학을 혼합한 시장 경제를 국가의 경제 체제로 내세우자는 반면 엠페로우파는 사클레치아만의 시장 경제를 주장한다. 그 중 극소수는 시장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중도-중도진보 세력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자본가, 성직자, 귀족, 영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길드도 이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세계 가톨릭교회를 내세우는 당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지지 세력도 대부분 존재한다. 농촌, 중소 도시, 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하는 자유당과는 달리, 자유군주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강경 스탠스를 취하며 동성애를 추방시키거나 동성애 시민은 아예 백성이 아닌 반역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카이저 4세가 "동성애는 우리나라를 망치는 반역자들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 후 실제로 사클레치아의 동성애 비율은 4%에서 0.1%로 줄어드는 결과를 보이게 되었다.

이들은 사클레치아의 주변국에 많이 분포하는 엘프인들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며 이들마저도 반역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엠페로우파의 경우 오크족들은 소수의 인간보다 우월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오크 우월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율리우스파는 오크족과 인간들의 평등을 추구한다며 오크와 인간간의 평등주의를 주장한다.

공화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율리우스파는 자국의 소수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나 다름이 없다며 소수 공화주의자들의 척결을 주장하지만 엠페로우파는 공화주의를 아예 사회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저 3세가 사회주의를 "사회에 적응적이지 못한 인간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철학은 다 거짓이다. 오히려 자신들 목적을 위해 테러를 일으킬 뿐"이라며 증오했는데, 양측 모두 사회주의 척결을 주장한다. 자유주의 색채도 강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실상은 모든 평민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 중 자본가경제협의회, 사클레치아 경제인연합, 캐피탈리스트 유니온 등의 친자본가 길드 단체들과 기독교신앙회, 신성자유단, 하나님의 축복단 등 이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신흥 종교 교단들도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

계파

과거에는 율리우스파의 파벌 중 급진파, 중도파, 온건파, 중진파 등 다양했으나 중도세력은 인도네시아 출신 중도파 정치인인 필리노이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벌인 필리노이의 난으로 인해 중도파와 온건파가 비주류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중도파와 온건파는 카이저 5세부터 입지가 좁아지더니 결국 대부분이 쪼그라들고 사실상 사라졌으며 충성파는 초기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신생 충성파, 구 급진파 세력들이 다수 들어오면서 주류 세력이 되었다.

각주


사클레치아 국민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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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국민의회 220.02 ~ 221.10
호르스트 엘벤 내각
221.09 ~ 221.10
여당

통합군주당
56석

공명연단
3석

미래신화당
1석
야당

민주당
26석

자유당
10석

무소속
3+1석
재적 100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