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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연호|2019}}년 7월 10일 [[조지 4세]]가 중화제국 원명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지 4세의 사망 이후 가장 적법한 계승자였던 조지 5세는 대영제국의 황제이자, 중화제국의 황제 그리고 인도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의 나이가 18세였고 이는 대영제국 내 최연소 황제라는 기록이었다. | |||
[[대영제국 황제기사]]인 [[헨리 게스코인세실]]도 21세로 매우 젊었고 조지 5세는 그보다도 더 어린 18세의 나이에 불과했기에 간신에 휘둘리기만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오히려 간신들을 모조리 내치는 정책들을 썼다. 대영제국의 법에 있어서 황제는 그야말로 전제군주에 가까운 무한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에드워드 7세]]의 시대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비교적 내각의 입장을 존중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한 것이고 이는 선대왕인 [[조지 4세]]와 조지 4세의 선대왕인 [[프레더릭 5세]]의 치세에도 지켜져온 불문률이었다. 즉 법률적으로는 황제에게 전제적 권력이 있었지만, 사용되지 않은 것인데, 조지 5세는 이 법이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 |||
그는 [[헨리 게스코인세실]]의 휘하에 정보부가 있다는 것을 활용하여, 정보부를 통해 귀족들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라고 지시했고, 이를 통해 수집한 정보들을 이용해 귀족들을 겁박하는데 사용하였다. 겁박함에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고관대작들은 아예 내쳐버리는 식으로 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교체하였다. 보통 황제에 의한 장관 해임은 4년에 1~3번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ref>사실 이것도 적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ref>, 조지 5세의 치세 동안에는 3개월동안 무려 16명의 장관들이 교체되었다. 내각 총리인 [[피터 어린지나소]]는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헨리 게스코인세실]]이 정보부를 통해 월권을 행사하고, 국무부나 전쟁부와 같은 다른 기관이 해야할 일까지 침범하고 있다며 게스코인세실 경을 황제의 명을 빌려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면서 그를 해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도리어 조지 5세는 게스코인세실 경이 정보부를 적극 활용하게 냅둔 것은 자신이라며 어린지나소 총리의 청을 거절하였다. | |||
이후 소위 "게스코인세실 리스트"라고 불리는 명단에 따라, 수많은 귀족들이 부정부패, 탈세,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300명 이상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중 절반 가까이가 실제로 집행당했다. 또한 내각의 구성원들은 전부 갈려나가, [[헨리 게스코인세실]] 경의 측근들로 구성되었으며, 총선에서 정보부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민주당이 승리함에 따라 총리까지 강력한 근황파이자 급진 진보파인 [[뉴트 제이콥슨]]으로 바뀌었다. [[제국은행]]과 총독도 전부 게스코인세실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휘하 부하들로 교체되었다.<ref>[[인도제국 총독]]인 [[조지 허버트 화이트로이드]]는 유임되었는데 아버지의 동생이기도 하고 원래 진보적인 성향이라 냅둔듯하다.</ref> 결과적으로 봤을때 대영제국 정부 구조는 여러 귀족들의 암투로 구성되는 시스템에서 [[헨리 게스코인세실]] 황제기사경의 일인 독재 체제로 바뀌었다. | |||
이 일련의 과정이 모두 [[헨리 게스코인세실]]의 지시 하에 이뤄졌기 때문에 [[황제기사의 난]]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애초에 게스코인세실 경이 그렇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준 것이 바로 조지 5세이다. 즉 전제군주로서 조지 5세의 권한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도리어 자신의 직속 신하가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면서 조지 5세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강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 |||
== 성향 == | == 성향 == |
2021년 12월 9일 (목) 01:56 판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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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제국 제8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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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제6대 황제 조지 5세 | George V | |||||||||||||||||||||
중화제국 제6대 황제 강덕제 | 强悳帝 | |||||||||||||||||||||
이름 | 윌리엄 조지 어터슨 화이트로이드 William George Utterson Whitelloyd | ||||||||||||||||||||
출생 | 80년 12월 17일 (20세) | ||||||||||||||||||||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화이트로이드궁 | |||||||||||||||||||||
대관식 | 98년 8월 20일 | ||||||||||||||||||||
대영제국 아메리카 임페리얼 캐피톨 아일스버리궁 | |||||||||||||||||||||
국적 | 대영제국 | ||||||||||||||||||||
재위 | 연합왕국 국왕 | ||||||||||||||||||||
86년 12월 8일 - | |||||||||||||||||||||
대영제국 황제 | |||||||||||||||||||||
98년 7월 11일 - | |||||||||||||||||||||
중화제국 황제 | |||||||||||||||||||||
98년 7월 11일 - | |||||||||||||||||||||
인도제국 황제 | |||||||||||||||||||||
98년 7월 11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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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영제국과 중화제국의 제6대 황제, 그리고 인도제국의 제8대 황제.
부군인 길버트 아서 화이트로이드가 86년 급사함으로서 어린 나이에 연합왕국 국왕직에 올랐으며, 12년 뒤에는 조지 4세가 붕어함으로서 불과 18세라는 나이에 즉위한 대영제국 역사상 최연소 황제가 되었다.[1]
생애
황손 시절
연합왕국 국왕인 길버트 아서 화이트로이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7대 황제로 즉위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었고, 6살까지는 아무 일 없이 대영제국 황손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런데 그가 6살이었을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평소 건강했던 길버트 아서 화이트로이드의 사망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오갔는데 조지 5세 본인은 정적 귀족 혹은 할아버지에 의한 독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2] 그의 정치적 지위도 덩달아 약화되었지만, 도리어 엄청나게 어린 나이 때문에 권신들이 무엇을 하던간에 꼭두각시가 될 뿐이라는 점을 잘 안 조지 4세의 간신들은 어린 조지 5세를 황태자에게 주어지는 연합왕국의 국왕으로 추대할 것으로 조지 4세에게 건의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어릴때부터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이 할아버지 혹은 그의 간신들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생각하여 대영제국의 체제를 대단히 경멸, 혐오하였다고 한다. 이런 의식을 가지게 된건 10대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간신들에 비해 파워도 적었고 어디까지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15세 때 세인트 조지 군사학교에 보내진 이후로, 이곳에서 후일 황제기사로 서임되는 헨리 게스코인세실을 만났다. 게스코인세실이 기사경이 된 다음 날에 조지 5세는 게스코인세실을 자신의 황제기사로 서임하였다. 서임 당시의 명분은 "날 황태손이 아니라 유일하게 인간으로 취급해준 사람이다" 였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게스코인세실의 급진적으로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하기 위함이었음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황제 시절
98년 7월 10일 조지 4세가 중화제국 원명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조지 4세의 사망 이후 가장 적법한 계승자였던 조지 5세는 대영제국의 황제이자, 중화제국의 황제 그리고 인도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의 나이가 18세였고 이는 대영제국 내 최연소 황제라는 기록이었다.
대영제국 황제기사인 헨리 게스코인세실도 21세로 매우 젊었고 조지 5세는 그보다도 더 어린 18세의 나이에 불과했기에 간신에 휘둘리기만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오히려 간신들을 모조리 내치는 정책들을 썼다. 대영제국의 법에 있어서 황제는 그야말로 전제군주에 가까운 무한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에드워드 7세의 시대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비교적 내각의 입장을 존중했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한 것이고 이는 선대왕인 조지 4세와 조지 4세의 선대왕인 프레더릭 5세의 치세에도 지켜져온 불문률이었다. 즉 법률적으로는 황제에게 전제적 권력이 있었지만, 사용되지 않은 것인데, 조지 5세는 이 법이 있다는 것을 이용하여 귀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헨리 게스코인세실의 휘하에 정보부가 있다는 것을 활용하여, 정보부를 통해 귀족들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라고 지시했고, 이를 통해 수집한 정보들을 이용해 귀족들을 겁박하는데 사용하였다. 겁박함에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고관대작들은 아예 내쳐버리는 식으로 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교체하였다. 보통 황제에 의한 장관 해임은 4년에 1~3번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3], 조지 5세의 치세 동안에는 3개월동안 무려 16명의 장관들이 교체되었다. 내각 총리인 피터 어린지나소는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헨리 게스코인세실이 정보부를 통해 월권을 행사하고, 국무부나 전쟁부와 같은 다른 기관이 해야할 일까지 침범하고 있다며 게스코인세실 경을 황제의 명을 빌려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면서 그를 해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도리어 조지 5세는 게스코인세실 경이 정보부를 적극 활용하게 냅둔 것은 자신이라며 어린지나소 총리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후 소위 "게스코인세실 리스트"라고 불리는 명단에 따라, 수많은 귀족들이 부정부패, 탈세,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300명 이상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중 절반 가까이가 실제로 집행당했다. 또한 내각의 구성원들은 전부 갈려나가, 헨리 게스코인세실 경의 측근들로 구성되었으며, 총선에서 정보부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민주당이 승리함에 따라 총리까지 강력한 근황파이자 급진 진보파인 뉴트 제이콥슨으로 바뀌었다. 제국은행과 총독도 전부 게스코인세실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휘하 부하들로 교체되었다.[4] 결과적으로 봤을때 대영제국 정부 구조는 여러 귀족들의 암투로 구성되는 시스템에서 헨리 게스코인세실 황제기사경의 일인 독재 체제로 바뀌었다.
이 일련의 과정이 모두 헨리 게스코인세실의 지시 하에 이뤄졌기 때문에 황제기사의 난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애초에 게스코인세실 경이 그렇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준 것이 바로 조지 5세이다. 즉 전제군주로서 조지 5세의 권한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도리어 자신의 직속 신하가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면서 조지 5세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강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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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프레더릭 3세가 조금 더 일찍 18세의 나이로 즉위했기에 더 연소하나 그때는 대영제국 황제 직위가 없었다. 대영제국 황제직이 생긴 것은 프레더릭 3세가 72세가 되었을때의 일이다.
- ↑ 길버트 아서 화이트로이드가 기성 체제에 대해 취한 태도는 헨리 게스코인세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기성 체제의 붕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이 암살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심증이다.
- ↑ 사실 이것도 적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다.
- ↑ 인도제국 총독인 조지 허버트 화이트로이드는 유임되었는데 아버지의 동생이기도 하고 원래 진보적인 성향이라 냅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