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마지막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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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신해혁명<br>1915년 홍헌제제<br>1917년 호법전쟁<br>1926년 북벌전쟁 승전<br>1933년 탕산 격전<br>1937년 한중전쟁<br>1951년 중국내전<br>1968
| 1911년 신해혁명<br>1915년 홍헌제제<br>1917년 호법전쟁<br>1926년 북벌전쟁 승전<br>1933년 탕산 격전<br>1937년 한중전쟁<br>1951년 중국내전<br>1968년 민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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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9일 (금) 13:40 판


중화민국
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국기 국장
오족공화
五族共和
신해혁명 이전 통일 이후
대청제국 중화민국
상징
국기
오색기
국화
모란
역사
[ 펼치기 · 접기 ]
1911년 신해혁명
1915년 홍헌제제
1917년 호법전쟁
1926년 북벌전쟁 승전
1933년 탕산 격전
1937년 한중전쟁
1951년 중국내전
1968년 민주혁명
지리
수도
베이징
최대도시
베이징
위치
지구
동북아시아 중국 북부
주변국
중화민국 국민정부, 만주민국, 몽골,
동튀르키스탄, 티베트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총 인구
약 6억 2800만명
공용어
중국어 (법정 공용어)
공용 문자
한자 (법정 문자)
민족
한족 97%
그 외 3%
국교
국교 없음 (정교분리)
군대
중화민국 국군
정치 · 경제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이원집정부제, 양원제
대총통
차이잉원
부총통
마잉주
여당
인민민주당
경제 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통화
중화민국 위안 (元)
위치
수도 베이징의 전경

개요

많은 피가 흘렀다.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대지에 묻혔다. 피가 대지를 물들였고, 문명의 빛이라 불리우던 땅은 죽음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노예로 살길 원치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득권을 지켜내었다.
언젠가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을 때까지, 그들은 그 땅에서 함께할 것이다.
-이벤트 '회자정리, 거자필반'

중화민국 (Republic of China)


중화민국, 또는 중화민국 북경전민정부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국가로, 남쪽에 있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대조시키기 위해 북중국, 혹은 자유중국으로 불린다.

1915년 홍헌제제를 반포한 위안스카이를 끌어내린 후 차오쿤-우페이푸 연립정부가 설립된 이후 꾸준한 개발독재를 이어갔으며, 1968년 6.8 혁명을 통해 민주화에 성공, 현재 동아시아에서 대한국, 대일본제국의 뒤를 잇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역사

신해혁명

아편전쟁과 조청전쟁, 그리고 의화단의 난까지 혁명 직전 당시의 청조는 기둥만 남은 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남은 기둥까지 뽑게된 사건은 1911년 간선 철도 국유화였다. 국유화에에 반대하여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가 쓰촨에서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며, 10월 10일에는 우창에서 신군이 봉기하니, 거의 모든 성이 이에 호응하여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12년 혁명파는 독립한 17개성의 대표를 소집하여, 난징을 수도로 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여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청조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화북 군벌인 위안스카이를 기용하여 중화민국이라 칭하는 반란군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혁명 정부와 내통하여 자신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는 것을 조건으로 선통제를 퇴위시키니 청조는 결국 붕괴하였다. 이후 수도를 베이징으로 돌린 그는 국회를 해산하여 독재를 강화하니, 혁명파는 그의 타도를 꾀하였으나, 오히려 쑨원이 위안스카이의 정치적 공세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쑨원도 사라지면서 강력해보이는 반대세력이 없어보인 위안스카이는 1915년 홍헌제제를 발표하여 연호를 정하여 태산에 오르나 수많은 반발 끝에 이를 무르고 1916년 병사한다.

홍헌제제 이후 수많은 전쟁, 부원지쟁과 호법전쟁 등을 겪고 정부가 둘로 분열됨에 따라 잠시 중국의 상황은 소강에 들어갔다. 이때 1919년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제국령 구주 총독부에서 발발한 3.1 운동이후 베이징에서 학생들이 5.4 운동을 벌이나 이는 곧 진압된다. 1919년에 안휘군벌의 수장인 쉬수정이 적백내전이 발발함에 따라 외몽골에서 발발한 공산 혁명을 진압하기 위하여 한국과 연합을 하여 몽골로 진공을 시작한다. 이는 1920년까지 지속되며 몽골의 적군이 토벌당하여 외몽골은 안휘의 손에 떨어진다. 이후 1920년 7월 발발한 안직전쟁으로 북경정부 내에서 쉬수정이 세력을 잃자 그가 외몽골로 올라가면서 완전한 안휘의 영지로 남게된다.

1924년부터 대대적으로 통일을 준비하기 시작한 쑨원과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25년 천중밍을 광동에서 완전히 몰아내면서 대대적으로 시작된다. 착실히 내실을 다져 군대를 소집한 국민당은 쑨원이 죽고 그를 계승한 장제스가 북벌을 시도하였다. 북벌군을 조직한 장제스는 파죽지세로 베이징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북벌군은 오성연군과 한차례의 쓰디 쓴 패배를 맞게 되면서 휘청이게 된다. 패배로 약화된 북벌군은 속 빈 강정이나 다름 없었으며 자연스레 와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국민당은 반직동맹을 결성하려 하나 1928년 12월 2일 반직동맹 불발, 직예가 내부의 혼란을 수습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결국 여러 악재가 겹친 끝에 1930년 3월 16일 쑨촨팡이 마지막 북벌군 잔당을 격파하는 것을 끝으로 국민당의 북벌은 완전히 실패하여 광동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북벌의 실패로 장제스는 국민당 내에서 실각하게 되고, 1935년이 될 때까지 국민당 지도부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 또한 국민당의 북벌 실패에 충격받아 협력을 이어가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오성연군의 수장으로 추대된 쑨촨팡은 북벌 이후 어수선한 영내의 안정을 위해 독자적으로 안휘(환계) 계통 인물들을 포섭해서 내실을 다졌고, 이는 북경이 계속해서 오성연군을 불신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내정 속에서 1936년까지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아슬아슬한 합작이 계속 진행되며, 정부는 화북지방의 경제를 대대적으로 증강시키는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지금까지들 존경의 의미로 부르는 유학자 장군 우페이푸는 특유의 청렴함으로 사익을 추구하지 않아 20년대 구가한 중국의 황금기 때 들어오는 많은 투자를 바탕으로 경공업, 중공업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을 일으켰고 이로 나온 경제력으로 한국의 침공을 막아낼 요새선인 우페이푸 선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1936년 강남 통제권을 위임받았던 오성연군의 쑨촨팡 사후 안휘군이 붕 뜨게 되자 이를 기회라고 여긴 정부에서 군을 파병해 강북 안휘로 진군, 장악하는데 성공하면서 점차 잃었던 강남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하였고, 1차 북벌 이후 세가 확연하게 약화된 국민당에게 정식정부로 인정받는 대신 그들의 장강 이남 오성연군 세력 장악에 대해 용인해주면서 새로운 군벌시대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중전쟁

1936년 9월 한국에서 조작한 청도사건을 시작으로 여러 명분쌓기를 통해 한국은 군을 국경지대로 파견하였고, 1937년 2월부터 간간히 있던 도발사건은 한국과 중국 간의 불길한 전운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7월, 오패부 방어선 노구교 인근에서 한국군의 선제공격으로 중국군과 한국군의 최초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양국군 모두 이 일을 쉬쉬하며 덮어가려 하였지만 한 연대장의 독단적인 공격으로 시작되지 않을 수 있던 전쟁은 일어나게 되었다.

대한제국군은 우페이푸가 세워놓은 우페이푸 선을 뚫는 것은 당연히 무리라고 판단하여 조차지인 청도 인근에서 전차 등의 부대를 활용하여 우회, 최종적으로 직예 인근을 전부 포위하는 '뇌격' 작계를 발동, 천진시(市) 점령과 오패부 선 일부 돌파, 동부 산동반도 확보에 성공함으로 일부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완전성공을 해내지는 못하였다. 1개월 안에 북경을 점령시킨다는 야심찬 이 계획은 장장 3개월에 걸쳐 북경공방전을 이어감에 따라 중국이 직예에 세워놓은 군수시설을 전부 후방지역인 낙양 인근으로 옮기는데 성공하여 한중전쟁의 장기화를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우페이푸 선으로 시간을 번 북양정부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들은 바오딩, 톈진, 베이징 등 화북지역에 있는 군수시설과 산업시설, 정부 기관을 후방지대인 뤄양으로 옮겨가며 전쟁을 이어갔으며, 결정적으로 베이징과 지난 학살 이후 혐한감정이 극에 달하며 끝까지 항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리하여 우페이푸와 차오쿤 정부는 각지의 군벌들에게 중국 연합전선의 창설을 제안하였고, 신강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군벌이 동의하면서 8년간 이어질 항쟁이 막을 올렸다.

한편 대한제국은 화북에 중국군의 시선이 몰림에 따라 허를 찌르고자 상하이로의 기습 상륙을 감행하였다. 상하이는 성공적으로 장악하였으나, 우페이푸 정부와의 협조를 하기로 결정한 인근 군벌세력과 국민당 연합군은 자싱시 인근에서 한국군과 수차례 교전을 치루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었고 결국 남쪽을 통해 북양정부의 빠른 항복을 받아낸다는 것을 포기한 한국군은 목표를 바꾸어 국민당과 군벌세력의 토벌을 위해 난징으로 향하였다.

37년 10월이 되어 베이징을 점령한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12월에는 직예 대부분을 점령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일부 전선에서 소소한 패전이 있긴 하였지만 대체로 한국군보다 약한 중국군을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진격하는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중국 정부에서도 항복선언과 평화협정을 할 수도 있다고 한국 정부는 생각하여 중재를 독일에게 맡기고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한국의 무리한 요구와 중국의 결사항전 의지로 결국 파토나고 이강 내각은 전쟁목표를 바꿔, 중국에서의 괴뢰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38년이 되면서 제국군은 중국 중부지역으로 침투하였고, 이때 카이펑, 우한, 그리고 남부 상륙작전인 '화려한 여행길'로 광저우와 포산, 선전 등을 장악하였다. 광저우 지역을 한국군이 점령하면서 많은 잔혹행위 역시 진행되었다. 이때까지 한국이 중국을 그대로 집어삼킬 줄만 알았으나, 전 중국이 오패부와 조곤의 연립 정부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로 모였고, 공간으로 시간을 벌음에 따라 한국은 중국에서의 전쟁을 소모전으로 끌고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개로 한국의 대륙타통작전을 통한 중국 중부지역 침투, 그 외 주요 항구도시 함락을 제외하면 39년에서 41년까지는 별다른 큰 전황의 변화 없이 지속된 소모전만이 이어졌다.

결국 한국이 1941년 미국과의 전쟁을 택하고, 일본까지 공격하게 되면서 세가 점점 약해졌고, 1943년에 전선에서 대대적인 역공격을 감행하며 뤄양을 되찾는 등의 성과를 내었다. 1944년이 되면서 광저우와 선전 등의 주요 항구도시를 되찾았고, 45년 3월달에는 황하를 넘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대한제국이 항복하게 되면서 전쟁은 끝이나게 된다.

북양정부는 한국이 항복했다 하여도 멈출 줄을 몰랐다. 한국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이들은 만주지방으로의 행군을 시작하였으며, 1904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잃었던 러허까지 진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곳에 군정을 실시하고, 많은 한족들을 보내면서 강제동화정책을 펼쳤고, 만주민국이 독립할 때 열하까지는 병탄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영토수복도 어느정도 성공하면서 위신이 높아졌다.

중국 내전

그러나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이번에는 내부 군벌문제가 서서히 튀어나오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유능한데다가 지난 북벌에서의 패전을 교훈삼아 칼날을 갈고 있었고, 결국에는 1951년 전쟁이 끝난지 6년만에 국민당의 선습으로 장장 3년에 걸친 중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난징에서의 포격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국민혁명군의 장강 도하는 당시 전투준비가 안되어 있던 북양군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The Last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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