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바니아 지방
중부의 풍요로운 평원

타나반
나스반, 그리고 나스반의 대도시
사다로케아 섬
폭풍 속의 섬들
이시하논 왕국
나스바니아의 통일왕국
나달리반
나스바니아의 소왕국들

나스바니아 지방발바라의 오랜 문화권이다. 원래는 나스바니아가 아니라 나달리니아(닻말:Nadalrinia, 산이 없는 땅)라고 불리기도 했다. 영웅 나스반 테라시테움의 등장 이후로 이 땅에는 여신교와 그의 사상이 전해졌고, 이 풍요로운 평원에는 용기와 지혜를 갖춘 덕목의 위인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이 지방은 산맥에 둘러쌓이고 그 중간에 키르시안의 강이 존재하기 때문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는데, 3시대에는 이를 눈독 들인 다른 세력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스바니아는 견뎌내었고 그 굳건한 위세를 언제나 감추지 않았다. 나스바니아에 있는 여러 왕국 중 맹주의 역할은 동부 해안에 위치한 나스반이고, 그 외에도 여러 세력과 왕국이 자리잡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은 여러 나달리아와 이시하논 왕국 정도다.

문화와 사회

나스바니아 지방은 풍족한 자원을 바탕으로 세노스의 영지와 자주 비견된다. 특히 동부에는 약간의 저산맥이 서저동고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대대로 타리곤 무리가 사는 땅이었다. 고대의 나달리니아에서는 타리곤을 신과 같은 영물로 대했으므로, 이것을 길들이지는 않았고 닭·돼지나 부유하면 소 등을 바쳐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때 타리곤을 부르기 위해서 높은 종탑을 지어 종을 쳤는데 이것이 훗날 문화가 되어 크고 작은 종들이 도시 곳곳에 세우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나스반의 상징 중 하나는 방패와 탑, 종이라고 할 정도다.

방패수의 나라

독특한 특징으로 나스바니아 중, 나스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방패다. 관례행사에서 의례·의전용에도 사용하는 방패는 물론, 실제 전선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방패가 있는데 그 품질이 일품이다. 또 사람들은 나스반의 의지와 무예를 이어받아 그것을 무술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방패수다. 방패수는 체력이 뛰어나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전술마법사 집단으로, 기본적으로 대열을 갖추어 공격을 막고 방어하는 것에 집중한다. 마법사의 특징을 고려해보면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외로 효과적인 방법이다. 대외적으론 방패 군단이란 호칭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다.

타나반

나스반의 왕국의 대도시 타나반 내지는 타나반도라나스바니아 지방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이자, 안탈레냐 종탑이 있는 도시다. 2시대 말 가라시온의 여왕과 베실라의 왕자가 이곳에서 혼인을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쌓인 이 대도시는 도시의 중심에 거대한 강 줄기를 끼고 있고 무려 성채 곳곳에는 타리곤이 착륙할 수 있는 입구마저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채에 약 40·50년간 타리곤의 배설문제로 인해 성채하부가 지나치게 더러웠고[1] 이것이 권위에 피해가 된다는 주장 하에 착륙장의 위치가 변경되었다.


사다로케아 섬

사다로케아 섬 내지는 사다로케아 군도나스반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영토로 가장 극동에 위치한다. 이곳은 실제로는 본토와 멀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나스반의 영토가 되었다. 2시대 당시 나스반에 있었던 비극적인 사연 때문인데, 이후 이곳에 위인을 기리는 신전이 세워지면서 왕래가 잦아졌다. 하지만 벨리언의 지속적인 침공이 이어지자 강력한 왕권으로 이곳에 사탈리아 요새가 건설되었고 그 요새는 4시대 악수의 저항에 기반이 된다. 사탈리아는 거친 파도와 늘 흐린 날씨 때문에 우중충한 분위기인데 그래도 덕분에 식수 공급이 넉넉한 편이다.


  • 사탈리아 요새

본질적으로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규모는 작았으나 몇 백년에 걸쳐서 증축되었다. 벨리언이 강력하던 시기에는 전쟁을 불사했는데, 아마 역사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나스반은 사탈리아는 커녕 사다로케아 섬을 보유 하지도 않았을[2] 정도였다. 그 만큼 사탈리아는 지출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는데, 많은 방패수들과 기사, 장군들이 이곳에서 전투, 전쟁을 경험했고 그 경험은 교본으로 정리되면서 전술로서 이용되었다. 특히 사탈리아 요새의 축조는 페탈 건축가들의 지원까지 받은 당시로서는 첨단에 가까운 요새였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이후 사탈리아는 전간기를 거치면서 다시 규모가 축소되었고 일부 해적들을 막는데 그친다. 또 중세 이후에는 다크 투어리즘의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 4시대에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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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하논 왕국

나스바니아이시하논 왕국(Kingdom of Ishihanon)은 3시대 초기 지역의 맹주였던 사도롬이 세운 여신교 국가다. 본래 소왕국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나스바니아에서는 대국의 건국이 어려웠는데, 그는 중부의 번영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통일전쟁[3]을 수행했다. 한때 이시하논은 나스반에 필적할 만큼의 대국으로서 성장하기도 했었지만 국가 말 교회의 착취와 폭정으로 다시 무너졌다. 지역의 색상이 강한 나스바니아의 왕국들은 이시하논이 기울어지자 소속을 이탈했고 다시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시하논은 나스바니아에 손을 뻗는 바놋드세노스의 외세를 물리쳤으며 나스바니아만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


  • 이시하논의 교회와 생활

남부의 가라시온의 교회가 성대하고 화려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이시하논의 영향력이 닿았던 영역에서는 검소한 건설과 그에 맞는 생활이 요구되었다. 이 문화는 나스바니아의 중심지인 나스반 왕국에게도 수출되면서 나스바니아의 검소한 교회는 그 수가 점점 많아졌는데, 많은 사제들이 이를 반대했다가 묵살을 당했다. 반면 대중에게는 나스반의 고전적인 사상인 집단 정신과 이시하논 교회의 검소가 결부되어 중부 여신교의 교파가 발달하는 배경이 된다. 이시하논 교파는 여신에 대한 찬양 이전에, 여신의 사상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실천하는 행동에 더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이는 대중에게 주도된 반면 오히려 기존의 사제들은 여신교의 권위가 추락한다며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후 사도롬 사후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으면서 다시 남부 중심의 교회사상이 권장되어 큰 갈등에 휩쌓이기도 한다.


  • 4시대의 이시하논 세력

선왕에 비해서 부족했던 후대의 왕은 결국 지역의 소왕들에 의해서 폐위당했다. 하지만 선조(사도롬)가 내세운 가치인 이시하논 교파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 정신은 나스바니아 전체의 사상으로 발달한다. 재앙의 시대 당시 악수팔기의 침공 하에 나스바니아 지방이 상대적으로 오래[4] 버텨낸 건, 이런 사상적 배경이 기반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남부 교회가 중부 교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이야기다….

나달리반

앞서 나달리니아(닻말:Nadalrinia, 산이 없는 땅)의 뜻처럼 나달리반 역시 산이 없는 마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정확히는 나스바니아의 소왕국들을 지칭하는 중부의 고유명사인데, 약어로 나리라고도 부른다.[5] 나리의 수는 2시대 초에는 열댓이었고, 가장 번영했던 시기에는 약 40개, 나스반이 대국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변화를 반복하다 4시대에는 안정적으로 7개의 나라만이 남았다. 하지만 모두 강한 위세나 나스반과의 큰 차이점은 없었고 단지 지역을 복속한 왕(지주)들의 차이였을 뿐이다. 이 점이 바놋드와 차이이며 실질적으로는 그들의 맹주가 나스반이었단 점에서는 완전한 독립체제가 아니란 점을 시사한다.

  1. 귀족들로부터 하소연이 쏟아졌다
  2. 하지만 애초에 살지 않는다면 치지도 않았겠다
  3. 이시하논 통일전쟁
  4. 물론 북부 지방은 더 오래버텼다
  5. 재미있는 점은 세노스 지방도 자국을 지칭할 때 나리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