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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
러시아 어느 이름 모를 도시, 강제수용소의 음울한 풍경 속, 유대인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새로운 현실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그들의 신앙이었다. 더 이상 신의 시험이라 믿기엔, 독일의 승리는 너무나 명확하고 절대적이었다.
어느 날 밤, 수용소의 작은 지하실에 몇몇 유대인들이 모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기도 모임을 가지곤 했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기도가 아니라 격렬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아," 다비드가 첫 번째로 입을 열었다. 그는 원래 그리스 출신 랍비였지만, 전쟁과 수용소의 참상을 겪으며 더 이상 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박해자들이 승리했다네. 바빌론과는 달라. 신은 바빌론에 벌을 내렸지만 지금의 박해자들에겐 벌을 내리지 않고 있어. 오히려 박해자들은 신형 무기를 개발해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고 있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신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다비드, 조용히 하시오!" 로만스키가 말했다. 그는 여전히 신앙을 붙들고 있던 노인이었다. "신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시네. 이것은 그의 더 큰 계획의 일부일지도 몰라."
"더 큰 계획?" 레아가 고통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젊은 여자였다. "우리는 가족을, 마을을, 역사를 잃었어요. 그리고 독일은 이겼습니다. 신의 침묵은 끝이 없어요. 그가 우리를 버린 건 아닐까요?"
방 안은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비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신이 있다면, 그는 박해자들의 신일지도 몰라. 그들이 이렇게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었잖아. 우리가 믿었던 신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야."
로만스키는 그 말을 듣고 크게 한숨을 쉬며 되내였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마저 악에 무릎 꿇는 것과 같다... 믿음은 우리의 마지막 방패다... 신을 잃는다면, 우리는 진정 끝난다..."
그 순간, 멀리서 독일 군가가 울려 퍼졌다. 그 저주 받을 갈고리 십자의 휘날리는 그림자가 지하실 벽에 드리웠다. 그들은 서둘러 흩어졌지만, 각자의 마음엔 씻을 수 없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는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내버려 두었는가?
그 질문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토라 조각처럼,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혔다.
회색 늑대
베를린의 거리에서는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 "회색 늑대"를 기념하는 잡지 등의 매체를 간간히 구할 수 있다. 그는 전선에서 탁월한 전략과 냉혹한 결단으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제국의 전쟁 영웅이 되었다.
병원 침대에서 급작스럽게 깨어난 그는 단지 요한 슈미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보고서 상의 이름, 『요한 슈미트』. 전투 중 머리를 다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말했다.
“슈미트, 당신은 제국을 위한 영웅입니다. 당신의 용맹함 덕에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피투성이의 손과 불타는 건물들, 그리고 울부짖는 목소리뿐이었다.
깨어난 요한은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종종 라디오에서 인터뷰를 가졌고, 길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밤이 되면 끔찍한 악몽이 그를 괴롭혔다.
꿈속에서 그는 한 마을을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 누구도 살아남게 두지 마라.”
그는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몸이 떨렸지만, 그것이 단순히 환상인지,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요한은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전쟁 중 자신이 속했던 부대의 기록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영웅으로써 쌓은 인맥을 통해 군의 기록 담당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과거 작전 보고서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수 장이나.
한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루마니아 전역-제12차 작전: 1947년 4월 X일, XXXX 마을 파르티잔 전면 소탕. 민간인 포함 400명 이상 사망. 요한 슈미트 소령의 지휘 아래 완벽히 수행됨.”
요한은 서류를 읽으며 손을 떨었다. 그가 지휘했던 작전들은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이 있었다. 불타는 마을, 살해된 가족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제국의 승리"를 위해 행해졌다.
그는 충격에 휩싸여 자리를 급히 떠났지만, 그날 이후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로 이런 일을 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가?"
요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칭송받는 전쟁 영웅이 아니라 잔학행위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중이 자신을 찬양하는 동안 그는 점점 더 깊은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꿈에서, 그는 자신이 학살했던 마을에서 생존한 한 여성을 찾아갔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당신이 그 괴물이군요. 우리 가족을 죽이고 우리 마을을 불태웠던 바로 그 사람.”
요한은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왜 그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당신의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녀의 말은 요한의 마음을 깊이 찔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울부짖는 목소리가 되었다.
“당신이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계속 맴도는 목소리, 목소리가 점점 절규와 분노로 가득차는 순간 요한은 꿈에서 깼다. 시계의 시침은 새벽 3시에 있었다.
"나는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아니,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요한은 결국 스스로를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잔학행위"를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해 제국의 당국에 제출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감사도, 처벌도 아니었다.
“당신은 그냥 영웅으로 남으면 됩니다. 당신이 한 일은 모두 조국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담당 공무원이 말했다.
요한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제국이 자신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내 이름은 요한, 요한 슈미트. 애초에 나의 이름은 요한 슈미트가 맞는가?"
"당신은 틀림 없는 요한 슈미트죠. 게다가 이명은 회색 늑대. 정말 멋지네요."
공무원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곤 부하 직원에게 손짓했다.
그림자 예술가
이탈로는 밀라노의 명망 있는 회화 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칭송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에 꿈을 품었고, 그 꿈은 지금까지도 그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창조하는 모든 꿈은 정치적 선전이 되어야 했다. 용맹한 군인의 전투, 혁명의 승리, 지도자의 위대함.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그려졌다—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
이탈로는 항상 갈등했다. 예술이란 개인의 내면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은 늘 국가가 요구하는 것에 갇혀 있었다. 그는 그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국가가 그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색은 국가가 원하는 색이 되어야만 했다.
그의 작업실에 앉아, 붓을 손에 쥐며 이탈로는 벽에 걸린 그림을 응시했다. 그것은 두체가 무섭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가장 처음 그린 그림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었다. 억지로 그림의 눈길을 피하며 그의 손이 떨리며 붓을 잡은 채, 그는 점점 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마치 기계처럼 느껴졌다. 작업실에서 그는 두체와 가장 가까웠다. 창작의 세계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면 두체의 모습은 실재하지 않았다. 멋드러진 양복을 입은 노인, 가게에서 파스타를 먹는 부부, 즐겁게 뛰노는 부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청년...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했다. 사람들에게서 정치적인 요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거리 벽에 붙은 파시스트당의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일상은 평화로웠지만, 거리 벽의 예술은 전쟁과 선전으로 가득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이탈로, 이 그림은 언제 끝낼 수 있겠나?” 감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이탈로가 그려야 할 작품에 대해 언제나 명확한 지침을 내렸다. "국가의 이상을 담고, 이탈리아 민족의 승리를 그려야 한다. 더 이상 미뤄지면, 이 작품은 공공의 전시회에서 빠지게 된다."
이탈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붓을 놓고, 한숨을 내쉬며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은 흐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에서 지나갔다. 그들에게 예술은 그저 국가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은 국가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탈로의 마음속에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는 서방 세계의 예술을 동경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이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스위스에서 유학하던 친구가 보내온 남부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전시회 사진을 보며, 그는 그들의 그림에서 자유와 혁신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정치적 제약 없이, 인간의 내면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하나의 정치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탐색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의 예술은 집시와 히피들의 낙서라고 비판했다.
“남쪽은 다를 거야,” 이탈로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는 남쪽으로 향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예술가로서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자유의 예술 세계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꿈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현실은 그를 철저히 감시했고, 그는 정부의 눈을 피해 몰래 작업을 하기도 했다. 때로는 작품을 마치고, 그것을 지하에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이탈로는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용맹한 군인들이 아닌,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민간인들, 배고픔에 굶주린 아이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가족들. 이 그림은 그에게 비밀스러운 기쁨을 주었다. 그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 작품이 결국 정부의 눈에 띄게 되었다. 비밀경찰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그림은 압수되었다. 그는 체포되었고,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았다.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조사관이 물었다. “국가의 이상을 왜곡하는 거냐?”
이탈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두려움이 밀려왔다. 체제에 맞서 싸우는 것이 과연 그에게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저 예술을 통해 자유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꿈꾸던 자유는 결국 그를 감옥에 가두게 만든 것이었다.
감옥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파란 달빛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오늘따라 더욱 희미해 보였다. 철창을 통해 보이는 파란 달빛... 분명 남쪽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