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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독일어: 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1904년 3월 7일 ~ 1972년 1월 1일)는 대게르만국의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그는 국가보안본부(게슈타포, 형사 경찰, SD 등)의 책임자였으며, 뵈멘-메렌 보호령의 총독대리, 국가보호자. 국제형사경찰위원회(ICPC)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2년 1월 반제 회담을 주관하여 독일이 점령한 유럽 지역에서 모든 유대인의 추방과 대량 학살에 대한 계획인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공식화했다.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이라 분류할 수 있는 그는 1938년 9월 9일, 요아힘 안델란케에 의해 힘러가 친위대 본부에서 축출당하게 되면서 그의 위치와 처우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라이드리히는 자신의 측근들과 힘러 충성파를 규합하고 헤르만 괴링과 화해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국방군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1947년 8월 2일, 무장친위대 내부에서 OKW와 국가수상부도 존재를 알지 못했던 비밀연락망의 존재가 내부자에 의해 밝혀지며 게르마니아는 발칵 뒤집혔고, 이 사실의 은폐와 증거 인멸을 시도한 관련 친위대 기관 중 일부는 해체되었고, 안델란케는 게르마니아의 경질을 받게 되나, 연말에 SS전국지도자 전속 참모진 본부 회의에서 유출된 내부 회의 내용 중 아돌프 히틀러 퓌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대화 내용이 하이드리히측 친위대 요인에 의해 밝혀지며 하이드리히 충성파로 간주된 무장친위대 1개 대대의 감시하에 가택연금에 처하게 되나 이 결정은 곧 15시간 뒤 철회된다. 하이드리히는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목상 친위대의 총지휘자인 SS전국지도자로 임명되나 그의 영향력은 수도 게르마니아와 원래 그의 충성파가 주둔 중이던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1954년 1월, 히틀러의 소집으로 개최된 제581차 퓌러 회의(독일어: Führerbesprechungen)에서 "불충한 자들에 대한 해결책" 안건의 결과로 안델란케와 그에 충성하는 일부 친위대 인사들에 대한 포괄적인 추방 조치가 결정되었고, 이 계획의 검토와 진행은 당시 자리에 참석한 하이드리히가 도맡게 되었다.
1954년 10월 22일 설립된 부르군트 SS 기사단국의 표면상 존재 의의는 프랑스에 대한 견제였으나 하이드리히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곳이 안델란케와 그의 똘마니들을 위한 수용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델란케와 그에 충성하는 절반의 친위대가 독일을 떠나며 대게르만국 국내에서 하이드리히는 국방군과의 긴밀한 협력을 제하면 엄연한 하나의 정치 파벌로 성장했다. 제1대 퓌러의 건강이 최악을 달리고 게르마니아가 혼란에 빠지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1963년 10월 15일, 아돌프 히틀러 퓌러는 후계자를 지명할 새도 없이 서거했고, NSDAP을 손에 쥐고 있는 국가대통령, 마르틴 보어만은 자연스레 최고지도부를 꿰찼고, 이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 3인방은 권력 독점에 반발하며 차대 퓌러직을 두고 정부, 당, 군부의 참모급 인사들을 모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선출하기를 요구한다. 보어만은 셋의 요구에 응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10월 21일 새벽에 군사를 보내 이들 셋에 대한 암살 시도를 감행한다. 이 사건으로 제국원수 괴링은 피살되었고, 하이드리히와 슈페어는 대피할 수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은 내전의 문턱에서 대치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이드리히는 사망한 괴링을 대신해 국방군을 장악한 페르디난트 쇠르너에 접촉했고, 국방군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1963년 10월 24일, 하이드리히는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며 친위대와 국방군 내에 충성파를 끌어모아 보어만에 대한 대응 방책을 마련하고 있었고, 반면 슈페어는 동프로이센 지방을 거점으로 그의 개혁 이념에 찬성하는 시민, 학생 연합과 소수의 군부 협력자들을 규합해 적극적인 무장 투쟁에 돌입했다. 1964년 초입까지 셋의 대치 상황은 이어졌고, 독일 전국은 정전, 단수를 비롯한 크고 작은 행정체계의 붕괴로 큰 혼란에 빠져, 이 상황은 하이드리히가 보어만을 체포하는데 성공한 1964년 4월 27일까지 이어졌다.
1964년 4월 27일, 게르마니아 정부 청사 시가지에서의 격렬한 총격전 끝에 도주하던 보어만의 경로에서 잠복 중이던 제35SS경찰척탄병사단에 의해 그는 기적적으로 포위되었고, 체포된다. 게르마니아를 장악한 하이드리히에 저항하는 슈페어 세력의 저항은 1964년 8월 9일까지 이어졌으나 결과적으로 항복을 결정하면서 철의 밤으로 회자되는 장장 293일간 이어진 군사 대치는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
1964년 9월 1일, 수도 게르마니아 폴크스할레에서 개최된 차대 퓌러 선출에 대한 회의에서 친위대와 국방군의 만장일치, 그리고 물밑으로 포섭된 당내 주요 인사들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대게르만국의 제2대 퓌러로 추대하는 것에 찬성했고, 이미 권력 구도에서 완전히 탈선한 슈페어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그 결과로 9월 1일부터 하이드리히 쪽 인사인 페리 브로드는 임시적으로 퓌러대리직에 올랐고 정치적 안정성이 보장된 1964년 10월 1일, 전과 같은 수도 게르마니아 폴크스할레에 하이드리히는 이전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의 수선된 제복을 착용하여 18만 국민 청중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퓌러직을 공식적으로 승계하며 대게르만국 제2대 퓌러로 등극하게 된다.
생애
참고
외부 문서
- ↑ 헤르만 괴링의 계급을 이양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