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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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33, 34대 내각총리대신
유진산
柳珍山 | Yu Jin-san
출생 1905년 10월 18일
전라도 진산군
(現 조선성 금산군 진산면)
사망 1972년 3월 20일 (향년 66세)
황도특별시 중구 총리공관
본관 문화 류씨
재임기간 제33대 내각총리대신
1970년 9월 2일 ~ 1971년 1월 21일
제34대 내각총리대신
1971년 1월 21일 ~ 1972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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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헌경후(憲景侯)
아호 옥계(玉溪)
부모 아버지 유경덕, 어머니 김경하
배우자 김현신
자녀 유한열 외 4명
학력 한성고등보통학교
한성국립대학 (정경학부, 졸업)
종교 무교
소속정당
의원 대수 중: 20
민: 20, 21[1], 22, 23, 24, 25, 26, 27
약력 군수청 장관 겸 조병국장
상공부대신
내무부대신
내각부총리대신

개요

한국의 정치인. 33대, 34대 총리를 역임하였다. 본명은 유영필(柳永弼)이었으나, 자신의 출신 지역인 진산으로 이름을 개명했다.

생애

유년기부터 상공대신 시절까지

1905년 전라도 진산군의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14살이었을 당시 12.10 운동이 터졌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걸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집안의 곡식을 계속해서 훔쳐갔다고 하며 집안이 박살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 유진산은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1921년, 집안에서는 유진산을 혼인시키자마자 한성으로 보냈다. 머리가 좋았다고 평가받은 것에 비해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교사 추천을 통해 1924년 한성국립대학교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에서도 공부를 하기 보다는 대한국민당의 정치인들에게 기웃거렸다고 하며 대학가와 출신 고등보통학교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청년학생조직을 결성해 국민당 정치인들에게 공짜로 용역을 제공하거나 경호를 하는 활동을 했다. 이때 관선 한성부윤을 지내고 있던 김창암의 눈에 들어 1926년 국민당 한성지부 청년국장에 보임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섰다.

1928년 대학 졸업 이후에는 한성지부 청년국장을 사임하고 고향인 진산으로 내려와 농촌교육[2]에 힘쓰다 당시 도시로 한참 발전하고 있던 회덕군(현 대전시)으로 올라가 상공대신으로 영전한 김창암의 지원을 받으며 또다시 이 지역의 청년조직을 이끄는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현재 대전지역과 금산, 진산지역은 그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1931년 대한국민당 소속으로 대전읍의회와 진산군의회 의원에 동시 지명[3]된 그는 대전읍에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를 위한 고등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역설, 교육대신이 된 김창암에게 요청하여 1933년 회덕산업기술전문학교(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대전지역의 높은 지지를 받게된 그는 1934년 초순 비관료 출신 최초로 회덕군수와 대전읍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두달만에 내려와야 했는데 이동휘 내각은 새로운 회덕군수를 보냈다가 여론이 싸늘해지자 다시 유진산을 임명하려 하였으나 사회당 정권에서 일할 수는 없다며 고사하고 한성으로 올라가 국민당 부총재를 지내던 김창암의 비서를 지내기 시작했다.

1937년 12월 5일 조기총선에서 대전회덕금산진산 지역구에서 국민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였지만 이듬해 전쟁이 터지면서 장춘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자신의 지역구민 20만명중 18만여명을 피난시키고나서야 자신도 가족과 함께 피난 열차에 탑승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지역을 떠나와 장춘으로 가까스로 정착한 그였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하는데 이승만 총리가 한강 교량 폭파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평소 유진산이 따르던 김창암 부총리가 총리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진산은 총리 비서실 부실장에 임명되어 내각 사무를 보좌하게 된다.
1938년 10월에는 군수청 장관과 조병국장을 겸하게 되었는데 최용덕 공군부 최고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공포를 집중 생산하고 해안포를 점검, 설치하여 방어 총력 전술을 수행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아울러 조선소 신설 계획을 전방에 가까운 대련에 건설하는 대신 영구(현 영관시)에 건설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 선택은 39년 9월 일본군의 대련 공습 이후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이런 군수행정 능력 덕분에 당해 10월 상공대신에 임명되어 34살의 젊은 나이에 국내 군수업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고향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각오로 유진산으로 개명한 것은 또한 이때의 일이다. 후방인 할빈과 눈강(현 치치가르)에 대규모 공업지구를 건설하였고 윤근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횡단철도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변방중의 변방이었던 평흥이 전후 유수의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도 유진산 덕분이다. 함경도 북부의 무산철광을 개발하여 철 수급률을 높이는 한편 둔화와 무산을 잇는 장무선을 부설하였다. 한국이 전차를 개발한 것도 유진산 재임기였으나 그는 산이 많은 조선반도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전차보다 견인포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 전차는 견인포보다는 조금씩 생산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생산여유량이 커지자 1941년 3월부터는 중국 대륙을 지원하기 위해 전차의 생산량도 대폭 증가시켰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40년 4월경부터는 한국의 무기보유량, 생산량이 일본을 추월했고 10월에는 두배 정도로 대폭 늘어났으며 한국은 이를 바탕으로 대대적으로 반격해 41년 1월에 사리원과 원산을 수복, 41년 9월에는 36도선 이남으로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유진산은 전후 정권교체기까지 상공대신직을 유지했으며 퇴임 이후에는 세조 황제로부터 일등태극장을 수여받아 공적을 인정받았다.

내무대신, 그 이후

상공대신을 퇴임하고도 불혹밖에 되지 않은 그는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 전후 재건에 힘썼다. 22대 총선에서도 넉넉하게 당선된 그는 대전이 교통의 요지인 점을 내세워 여운형 내각과 협상하여 상당한 전후 복구 재원을 확보하였으며 사실상 지역 행정에 대한 전권까지 넘겨받았다. 1952년 24대 총선으로 김창암 총재가 다시 집권하자 내무부대신에 보임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민당 내부의 권력 분쟁이 일어난 것도 이시기의 일로 조병옥과 윤보선이 주축인 구파와 이기붕, 이범석을 주축으로 하는 이승만의 후계인 우남계, 장면을 주축으로 하는 혁신계가 나뉘어 김창암 총리 이후의 국민당 내부 권력을 누가 가질 것인가 암투가 벌어졌다. 47세로 상대적으로 젊은 유진산이 내무대신이라는 요직을 맡게 된 것도 이런 분쟁속에서 그나마 중립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산은 중립적인척 하며 구파에 더 기울어 있었고 결국 1954년 12월 7일 이를 지적하는 우남계와 혁신계와의 마찰로 내무대신을 사임했다. 이후 당내 분쟁과 멀어져 국무실장(현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하였으나 55년 2월 전당대회에서 갑자기 우남계인 이기붕을 총재로 지지했다.(진산 파동) 못해도 구파의 3인자는 되던 그가 이기붕을 당총재로 지지하자 구파는 급격하게 와해되었고 결국 전당대회에서 이기붕이 총재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유진산의 이러한 결정은 조병옥의 양해를 미리 구한 것이었으며 3차 김창암 내각 내내 국민당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정권 교체를 직감하고 우남계에게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기붕의 부총재 요청도 고사한 그는 당내와 내각의 모든 직책을 사임하는 동시에 대전으로 내려가 1956년 25대 총선까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혁신계 장면과 접촉하는 모습을 노출하며 자신은 통합을 위해 이기붕을 지지했으며 승리를 이끄는 것은 이 총재 지도부라고 발언하는 등 책임을 회피하는 동시에 중도통합론자 이미지를 얻으려는 언론플레이도 잊지 않았다. 총선 직전에는 휘하에 있는 실무진들을 이용해 장면을 부추겨 그의 입으로 이기붕 지도부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폭탄발언까지 하게 만들었다.

유진산이 예측한대로 25대 총선은 국민당의 패배로 끝났다. 이 직후 우남계는 사실상 국민당 내에서 그 입지를 완전히 잃었으며 당내 파벌은 구파와 혁신계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구파는 장면의 총선 직전 발언으로 인해 당이 패배한 것이라며 혁신계를 몰아붙였고 결국 혁신계도 당권에서 밀려났다. 이 시기부터 유진산도 총리에 대한 야심을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기붕 지도부가 사퇴하고 다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조병옥이 총재, 윤보선이 부총재로 선출되었고 유진산은 원내총무가 되었다. 구파 일색의 지도부가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조병옥의 존재로 인해 유지되던 구파 내의 권력 균형은 1959년 조 총재가 세상을 떠나며 깨지고 말았다. 원래 해평 윤씨 가문은 근대화 이후 계속해서 유력 관료와 정치인을 배출해왔으나 총리를 배출하지 못해 윤보선과 윤치영에게 기대가 가득한 상황이었다. 반대로 유진산은 유력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당시의 통념이던 관료 출신 정치인도 아니었으며 본인도 유력 가문에 의해 정계가 좌우되는 것을 싫어해 두 세력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윤보선은 성향은 달랐지만 일반적인 관료 출신 정치인인 장면을 인정한데 반해 유진산은 유력 정치인에 빌붙어 '정치질'을 해왔다고 생각해 경멸했다고 한다. 결국 두 세력은 1959년 9월 치러진 긴급 전당대회 전후로 격돌했다.

이 둘의 갈등은 4월 조병옥 총재의 별세 직후 터져나왔다. 윤보선 부총재는 선거가 1년도 남지 않은 만큼 부총재의 권한대행 체제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진산은 하루빨리 전당대회를 치러 새로운 지도부 체제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대한국민당의 지지율이 사회민주당을 조금 앞서고 있어 정권 교체 가능성이 상당한 상황이어서 어떤 사람이 대표가 되느냐에 따라 총리직이 걸린 중대한 일이었고 따라서 국민당 내에서도 그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윤보선 일파는 이번 총선을 총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유진산과 장면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유진산에게는 부총리 겸 재무대신 직을, 장면에게는 외무대신 직을 약속하여 계파 안배 내각을 꾸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유진산은 당권을 윤보선에게 순순히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장면과 접촉하여 윤보선의 제안이 '윤씨 일가의 밀실정치'이며 이것이 혁신계가 추구하는 가치인지 재고해보라고 설득했다. 며칠뒤 장면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윤보선의 입각 제안이 있었으며 이것은 전당대회를 치르지 않으려는 밀실정치라고 비판했다. 유진산이 장면의 입을 빌어 윤보선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뒤이어 유진산도 윤보선의 제안은 전당대회 개최 요구를 무마하려는 술책이라고 직접 비판했다. 이렇게 유력 인사들이 언론을 통해 윤보선에게 맹폭을 가하자 결국 1959년 5월 19일 윤보선 부총재는 전당대회 개최에 합의했다. 하지만 윤보선은 유진산과 장면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이들과의 경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해옥전쟁[4]

그럼에도 윤보선은 장면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전당대회 개최 합의 이후에도 윤보선은 장면에게 꾸준히 부총리 직과 차차기 총선 이후에 총리직으로 올라가는 데 일조할 것을 약속했다. 장면도 관료 정치인이었고 행정 능력은 인정받아왔기에 윤보선 입장에서는 놓치기 아쉬운 인사였다. 게다가 혁신계의 주요 인물의 공천도 약속하여 결국 장면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6월 13일 총재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장면을 총재 후보로 지지하려 했던 유진산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만 것이다. 유진산은 일단 장면을 정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제하고 윤보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이어 유진산은 장택상을 총재 후보로 지지하였으나 장택상은 조병옥 총재와 친밀한 구파이긴 했지만 몇차례 장관을 지낸 것 외에는 당내 영향력은 별로 없었다. 전당대회 기간 내내 유진산은 전국을 돌며 윤보선을 밀실 귀족정치인이라고 비판하였고 장택상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결국 7월 전당대회에서는 윤보선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장택상과 불과 1.91% 차이로 승리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진산은 전국적인 영향력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윤보선 체제는 처음부터 흔들렸다. 윤보선은 우선 국민당 지지세가 높은 지역에 자신의 파벌인 해위계를 공천해야 하는 동시에 자신을 지지한 장면과 혁신계까지 챙겨야 했고 동시에 진산계를 견제하려 했다. 윤보선은 우선 국민당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 위주로 해위계를 공천하는 동시에 진산계 현역 의원들 지역구 다수에 혁신계 의원들을 공천하였다. 유진산을 비롯한 진산계는 공천 학살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일부는 탈당까지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논쟁은 총선 직전까지 이어졌고 결국 해위계, 혁신계 공천에 밀려난 현역 진산계 의원은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를 결정했다. 그동안 유진산 본인은 이런 사건들에 대해 언론에 직접적 언급을 삼갔다. 오히려 윤 총재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며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진산계 의원들의 탈당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거나 탈당한 의원들에 대한 선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국민당과 윤보선은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고 총선 승리도 불투명한 상황이어서 윤보선의 결정을 겉으로 따르는 척을 한 것은 국민당이 총선에 패배한다면 해위계를 아예 몰아낼 명분을 쌓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진산은 진산계 의원들이 무소속 출마한 지역의 대부분을 사민당 후보에게 넘길 생각으로 선거에 임했다.

결국 26대 총선에서 국민당은 패배했다. 유진산의 계획, 예측대로 진산계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지역의 40% 정도는 국민당 지지층의 표심이 갈리면서 사민당에게 넘어갔고 나머지 지역구의 대부분은 진산계가 사민당과 국민당 후보 모두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유진산은 이 기회를 당연히 놓치지 않고 물밑 당권 장악에 나섰다. 국민당과 표가 갈렸음에도 살아남은 진산계 의원들은 물론 혁신계, 윤보선을 비판하던 중립 인사들까지 규합했다. 총선이 끝나고 하루만에 윤보선은 총재직을 사임했고 장택상이 총재 서리를 맡아 뒷일을 수습하기로 했다.

유진산은 일단 반윤 단일 전선을 구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26대 국민당 의원들의 45% 정도는 해위계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일단 60년 7월 장택상이 긴급 전당대회에서 총재가 되긴 했지만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명목상의 갈등 조정자 역할에 불과했고 26대 임기 내내 해위계와 진산계는 계속해서 대립했다. 유진산과 윤보선 모두 본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각자의 파벌을 동원해 간접적으로 갈등했으며 1963년 18회 중추원 선거 공천에서도 옥신각신 하다가 장택상 총재의 결정으로 해위계가 공천에서 밀려나고 대부분 진산계와 혁신계로 채워졌다. 이에 64년에 있을 27대 국민원 선거를 앞두고 해위계도 무언가 시도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지만 해위계도 윤보선과 윤치영의 대립된 의견으로 분열됐다. 윤보선은 해위계가 공천에서 밀려나더라도 60년 진산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탈당후 출마는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었으나 윤치영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의견을 피력했으며 결국 대다수 해위계는 윤치영의 의견에 찬동하여 윤보선이 한발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장택상 총재는 현역 해위계 의원들을 대거 공천 탈락시켰고 해위계는 1960년의 진산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탈당 후에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진산계도 자신들과 같은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27대 총선에서는 26대와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사민당이 169석으로 제1당을 차지하긴 했지만 조봉암 내각의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과반확보에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국민당 후보와 무소속 해위계가 붙은 지역구 대다수에서 국민당 후보가 승리하며 국민당은 26대 117석에서 136석으로 오히려 의석수가 증가했다. 유진산이 어마어마한 사비까지 들여가며 선거운동에 나선 덕분이었다. 국민의 지지와 의원직까지 대거 잃은 해위계는 27대 총선 이후 사실상 국민당 주류에서 밀려나 소수파로 전락했으며 이후 정국은 주류인 진산계가 혁신계를 비롯한 기타 계파를 조정해나가며 주도한다.

국민당의 대부

27대 총선 직후 장택상 총재는 사임했으며 그 뒤에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장면이 신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물론 유진산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주요 지역에는 진산계를 우선적으로 공천하고 혁신계에게는 국민당 약 우세~경합 지역 위주로 공천한 탓에 혁신계 의원은 진산계보다 그 수가 현격하게 적었다. 결국 국민당의 당권은 실질적으로 유진산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의석수 과반에 미달하여 32석의 대한공산당과 간신히 연립정부를 구성한 사민당도 유진산의 권력이 국민당 바깥에까지 미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공산당은 원래 사민당과 사이가 안좋았을 뿐더러 고엽부, 동강성, 북강성, 솔빈성등 뚜렷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는 정당이라 사민당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이 이들 지역을 소외시키거나, 불리하다면 곧바로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공산당은 1950년대 초반부터 해삼포평흥을 잇는 삼흥고속도로 추진을 요구했다. 해삼포에서 평흥을 가려면 우수리강 강변의 좁은 국도들을 이용하거나 반드시 계서를 거쳐 용강성 동부를 종단하는 고속도로를 이용해 돌아서 가야 했다. 하지만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됨에도 삼흥고속도로의 착공은 계속 미뤄졌다. 60년대 중반까지도 전쟁의 피해를 전부 수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당, 사민당 정권 할 것 없이 ‘긴축’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65년 예산안 편성시에도 삼흥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인 해삼포-솔빈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 예산만 편성되었을 뿐이었고 공산당은 예산안 처리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다보니 사민당은 국민당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고 예산안은 국민당의 입맛에 맛게 일부 항목이 가감되어 통과되었다. 이렇게 유진산은 매년 말엽 예산안 처리 시기만 되면 거의 부총리에 준하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휘둘리던 사민당 정권은 인기를 잃고 12년만에 무너진다.

1968년 28대 총선에는 불출마하고 장남인 유한열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그는 장면 총재 체제 하에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에 힘썼다. 국민당은 360석중 201석을 얻으며 12년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으며 유진산은 총재가 장면이었음에도 장택상을 총리로 추천하길 원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장택상 내각에서 재무부대신을 맡게 된 그는 이 시기부터 지방자치제도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이듬해 중추원 선거에 출마하여 충청 3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9월 12일, 장택상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는 장면이 총재직과 총리직을 이어받았으나 그 또한 1년도 채 되지 않은 1970년 8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9월 2일 부총리였던 유진산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드디어 권좌에 오른 것이다.

총리 재임기

총리에 취임한 직후인 10월 5일 그는 대한국민당에서 특정 민족만을 위하는 느낌이 강하다며 ‘대한’이라는 이름을 떼어내 ‘국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고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10월 16일 국민원을 해산했다. 거물 정치인이 두명이나 연달아 세상을 떠나 가라앉은 당내 분위기를 환기하고, 구심점을 잃은 각 계파를 모조리 몰아내고 진산계가 완벽하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1월 5일 겨울에 실시된 국민원 선거에서 두 명의 총리의 잇따른 죽음에 대한 동정여론, 사민-공산 연합의 분열, 고조되는 중동발 위기로 인해 우세한 정권 연장 여론에 힘입어 국민당은 360석중 227석을 얻으며 압승했다. 재밌게도 이 선거가 유진산이 정식 총재로서 치르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가 되었다.

34대 총리로 다시 임명된 그는 지방자치제도의 실시, 범민족회의와 공식적 연립정부 구성, 소수민족 복지를 위한 정부기구 설립, 한국내 각 민족의 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민족대표 정당들의 허가[5],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더 잘 반영되게 하기 위한 차기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의석수 대폭 증가등의 정견을 발표했다.(유진산 구상) 이 당시로써는 대단히 진보적인 구상이었고 그것이 보수정당의 수장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미 1960년대 초반 사민당 정권에서도 이런 구상을 내놨었고 실현하려 했으나 사민당 내의 보수파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소수민족들은 이런 구상을 발표한 국민당에게 큰 지지를 보내게 되었고 이 구상 이후 한국내 소수민족들은 국민당의 주요 지지기반이 된다.[6] 이후 유진산 정권은 지역 유지들과 소수민족들의 높은 지지를 누리며 손쉽게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퇴임하기 전까지 지역 주민들의 손으로 지역 대표를 선출하게 될 것이라는 야심찬 선언까지 덧붙였다.

아울러 여운형 총리가 세운 ‘국가재건공사’를 ‘국민건강보험공사’로 개칭하고 예산을 대폭 증가시켰으며 각종 복지 예산 또한 늘렸다. 동시에 북강과 몽골 지역의 대규모 개발을 결정하여 기업들의 새로운 활로 또한 모색하였다.

이처럼 국민당은 유진산 집권기에 급격하게 중도 노선으로 바뀌었다. 농민과 전통적 기업가를 대변하고 보수주의를 고수하던 국민당은 소수민족과 저소득층도 포괄하는 실용주의 정책과 진보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유진산 사후 장준하 내각이 들어서며 국민당은 다시 보수화된다.

훗날 한국 정치의 주축이 되는 정치인들, 대표적으로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등의 정치인들이 유진산 내각에서 중책을 맡는 등 여러 정치인을 발굴해냈다. 장준하는 부총리 겸 문교부대신을, 김영삼은 국민당 부총재 겸 대변인, 김대중은 한국방송 사장 겸 공보처장등을 맡은 것이다.

사망

역설적이게도 10년 넘게 배후에서 당을 쥐락펴락하던 그는 정작 본인이 권력의 정점에 오른지 1년 반만에 세상을 떠났다. 1972년 3월 20일 오전 7시경 총리 관저에서 급서한 것이다. 29대 총선이 끝난 직후인 71년 초부터 담낭염으로 고생하던 그는 몇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워낙 업무가 과중한 탓에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고 71년 10월에는 결장암까지 진단받았다. 72년 1월부터는 장준하 부총리가 사실상 총리직까지 대신 수행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결국 1972년 3월 20일 유진산 총리는 세상을 떠났다. 총리 서리는 부총리였던 장준하가 맡게 되었다. 10년 넘게 국민당과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노회한 정객답게, 비서와 국민당 중역들을 곁에 두고 내뱉은 그의 생애 마지막 말은 향후 20여년간 한국 정치를 뒤흔들게 되었다.

장 군을 수상으로, 김 군이 그 다음
서거 직전 비서들에게 남긴 말

유 총리 사후 김 군이 대체 누구인가에 대한 추측이 이어졌다. 김대중김영삼 둘 중 하나를 두고 한 발언인 것은 확실했지만 둘 중 누구였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유 총리가 예언을 한 것이든 특정 인물을 두고 지명한 것이든 양김은 모두 총리직에 오르며 그의 말은 실현되었다.

3월 25일 황도에서 의회장과 국민당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뒤 이튿날 정치적 고향인 대전에서 노제를 치렀으며 고향인 금산의 선산에 안장되었다.

평가

1960년대 초반 대한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하여 10년 가까이 막후 실세로 군림하였으며 실권없는 정치적 선배들을 얼굴마담으로 갈아치워가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키운 끝에 총리직에 올랐으나 1년 6개월만에 병환으로 타계하였다. 그가 떠난 이후 30년동안 유진산 이후의 국민당 계열 총리는 모두 유 총리가 발굴했거나 유 총리 아래서 활동한 정치인들이었다. 후임인 장준하, 김대중을 거치며 진산계 인사는 거의 숙청되어 그의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소멸했으나 국민당 역사의 한축을 담당한 거물 정치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관료 정치인들이 주류였던 한국의 정치 문화를 직업 정치인들이 주류가 되도록 바꾸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유 총리 이전의 총리들은 여운형을 제외하면 모두 고등문과시에 합격하여 관료를 지냈고 이를 계기로 정계에 진출하여 수상에 오른 인물들이었으나 이후의 총리들은 이회창, 홍남기를 제외하면 모두 비관료 출신들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계에 진출해 총리까지 오른 그의 행적 덕분에 훗날 한국 매체에서 '노회한 정객'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되었다.

긍정적 평가

유진산 집권기는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으며 전국민 갖고있던 전근대적 시대정신을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시대정신이 서서히 대체하고 있는 시기였다. 유진산은 이러한 흐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소수민족 차별적 정책 철폐, 지방자치제 실현 구상, 성평등 정책 추진등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으로 실현해냈다. 관료 정치인이 지배하던 수백수천년간의 관행을 깨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민중의 정치인으로서 총리에 올랐고 이에 걸맞는 친민중 정책을 펼쳐 지지에 보답하였다.

전후 보수주의로 일관하던 국민당 내에서 중도 실용주의 정책 노선을 제시한 것은 혁명적 발상이었으며 향후에도 국민당이 장기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실제로 장준하의 뒤를 이어 강경 보수 성향을 보이던 김대중 총리도 97년 경제위기 후 집권 2기를 수행중일 때 유진산 전 총리의 유연한 중도보수 실용주의 노선이 옳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장준하 내각에서는 다시 보수주의로 회귀한 국민당은 유진산이 추진하던 정책중 지방자치제와 소수민족 차별 철폐 정책 외에는 모두 폐기하였으며 결국 90년 총선에서 자유당에게 패해 정권교체당하고 만다.

부정적 평가

유진산의 가장 큰 잘못을 꼽자면 정재계 유착을 심화시킨 것이 있다. 유진산 본인은 청렴했을지 몰라도 특정 지역을 개발하여 얻는 이익을 그 특정 지역의 특정 인사들만이 전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취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국민당 내의 반대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본인의 사재를 털어 진산계를 지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선거자금은 유진산에게 여러 이권을 보장받은 지역 유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여담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37 제20대 국민원의원 선거 대전·회덕·금산·진산
125,752 (70.1%) 당선 (1위) 초선
1941 제21대 국민원의원 선거 무투표 당선 재선
1945 제22대 국민원의원 선거 79,752 (81.5%) 당선 (1위) 3선
1949 제23대 국민원의원 선거 109,992 (82.4%) 4선
1952 제24대 국민원의원 선거 135,742 (77.8%) 5선
1956 제25대 국민원의원 선거 165,423 (78.1%) 6선
1960 제26대 국민원의원 선거 209,992 (68.3%) 7선
1964 제27대 국민원의원 선거 254,876 (66.2%) 8선
1969 제20회 국민원의원 선거 충청 3구 325,247 (57.6%) 초선
  1. 전쟁으로 인한 무투표 임기 연장
  2. 말이 농촌교육이지, 지역사회에서 엘리트로 각광받던 자신의 이미지를 이용한 정치활동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이 당시에는 지역의회는 선거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관선 시장, 군수, 읍장들의 하부 기관이었고 이들이 지명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동시에 다른 지역의 의회의원이 되는 경우도 가능했다.
  4. 윤보선의 호 위(葦)와 유진산의 호 계(溪)의 앞글자에서 하나씩 따왔다.
  5. 유진산 정권 이전까지 소수민족을 위한 개별 정당을 새우는 것은 허가되지 않았으며 모두 범민족회의 산하의 단체로 들어가야 했다. 소수민족 단체를 결성한다 해서 처벌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정당을 세울때는 아예 허가가 나지 않았다.
  6.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범민족회의가 사분오열되면서 정치성향 갈등이 표면화 되었고 몽골족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각자의 정치성향에 따라 지지정당이 완전히 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