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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는 과거를 통제한다. 그리고 현재는 원자력이 통제한다.
1961은 유럽에서의 최종승리를 이룩한 대독일국과, 태평양 전쟁 이후 태평양과 대서양, 자유 세계의 수호자로 등극한 미합중국, 그리고 중일전쟁에서 승전하여 동아시아 대륙 패권을 장악하고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중화민국, 세 초강대국의 냉전을 다룬 1961 팀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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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ld Info

중화민국


민국의 위대한 국부 쑨원삼민주의 사상을 중국에 남기고 세상을 떠남으로서, 중국 국민당에는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중화민족이 가야 할 길인 민족, 민권, 민생의 원리를 제시한 삼민주의 사상은 중화민족을 풍요롭게 할 쑨원의 유산이었습니다. 특히 토지 개혁과 독과점 자본을 반대한 민생주의 이론은 당 내의 우익과 좌익의 의견 차이를 정리하고 해법을 제시함으로서 중국 국민당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국민당은 토지 개혁 등 민생 안정에 힘쓰며 북쪽의 군벌들을 몰아낼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1926년 시작된 북벌. 즉, 국민혁명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하는 것으로 완수했습니다. 이후 황금십년이라 불리우는 10년간의 태평성대를 통해 중국은 고도로 성장하며 아편전쟁 이후 비로소 다시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7년, 통제파가 장악한 일본의 중국 대륙을 향한 야욕은 커져만 갔습니다. 1932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을 향한 야욕을 드러내오던 일본이 1936년 루거오차오에서의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침략했습니다. 8년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의 우방 독일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중국을 지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은 패퇴를 거듭했으며, 개전 1년도 채 되지 않아 수도 난징을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수도를 적에게 내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화민족의 항일전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민정부는 항전을 계속했고, 1941년에는 일본이 미국과 개전, 45년에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력의 힘을 선보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중화민족은 다시 한번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기근에 시달렸고, 인플레이션은 종잡을 수 없이 커져갔습니다. 미국과 독일이 중국에 대한 영향을 확보하고자 수 차례의 원조를 제공하여 상황이 나아지긴 하였으나, 이러한 원조는 중국을 세계 무대에서 곤란히 만들었습니다. 전통적 우방이던 독일과 새로운 동맹인 미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 판단한 정부는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산업 복구에 주력하며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습니다. 이는 성공하였습니다. 정부와 인민의 노력으로 중국은 7억 인구를 보유한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이제는 미국, 독일과 경쟁하는 강대국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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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일국


1914년의 대전쟁에서 패배를 경험한 독일의 독수리는 1930년대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력으로 조약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비상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연합국의 계속 되는 실패로, 독일은 유럽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달성했습니다. 파괴적인 전쟁 기술을 통해 대서양의 영국을 분쇄하고, 저항하는 크렘린에는 원자력의 폭풍을 선사해 천년제국의 운명을 달성했습니다. 고고히 빛나는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중심으로 유럽에는 신질서가 도래했습니다. 파리, 런던, 빈, 바르샤바, 암스테르담, 밀라노, 그리고 모스크바까지. 한때 위대했던 유럽의 도시들은 이제 라이히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비록 과거의 적이었던 미합중국이 원자력을 이용해 라이히와 다시 경쟁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가들이 라이히의 패권에 경외심을 품고 있습니다.
악화되는 총통의 건강과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경제 능력이 라이히의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저 라이히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 비상할 뿐 입니다.

미합중국
중화민국
대독일국
미합중국
3대 열강 국가
타임라인
희생
민권
고국
서고
중화민국의 정치 상황

중화민국 입법원

중화민국은 중국국민당의 일당 체제이다. 다만 국민당 내부에서는 우익 계열인 민권(民權)계, 좌익 계열의 민생(民生)계 2개 파벌로 입법원에서의 대립이 일어난다. 현재 민권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는 후스, 민생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는 저우언라이이다.

중화민국의 경제 상황
중화민국의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다. 장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경제 개발을 통해 항일전쟁의 상처를 겸허히 씻어내고 비상하였으며, 현재는 미국, 독일과 경쟁하는 경제 강국이다. 내수 경제 뿐 아니라 중화민국 본토와 한국, 베트남, 시암, 인도네시아를 아우르는 경제권을 이끄는 국가이기도 하다.
등장 팩션
티저 · 크레딧 · 편집지침서 · 가이드

이집트 군사정변
1952 Egypt Coup

▲이집트 자유장교단을 축출하는 영국군 수비대
기간 1952년 7월 23일 ~ 1952년 7월 25일
장소 이집트 왕국 카이로, 수에즈
원인 이집트에 대한 영국 망명정부의 과도한 내정 간섭, 이집트 민족주의의 발흥
결과 가말 압델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의 쿠데타
영향 나세르의 축출, 영국 제2차 철기대의 이집트 정부 전복, 영국군의 이집트 완전장악
교전국 이집트 왕국 자유장교단
이집트 왕국
영국 이집트 망명군
자유장교단
지휘관 이집트 왕국 자유장교단
파루크 1세
데이비드 스털링
휴 다우딩
†가말 압델 나세르
†무하마드 나기브
안와르 사다트
병력 6,000명 3,500명
† 표시는 사망

개요

이집트 군사정변은 이집트의 자유장교단 세력의 혁명에 대항한 영국군 수비대의 친위 쿠데타이다.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이 혁명을 선포했으나 7월 24일 영국군 수비대에 의해 진압 및 계엄령이 발효, 25일 영국군 수비대가 주요 정부 조직을 장악하여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무기한 계엄상태에 들어갔으며 영국군에 의해 직접 통치되게 되었다.

배경

1941년 런던이 함락되자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약화됨에 따라 이집트의 반제국주의자들이 소규모 봉기를 지속했다. 이후 브리튼 섬에서 이집트로 망명해 온 영국군의 수가 크게 늘었고, 급기야 영국군 일부가 브리튼 섬을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제2차 철기대를 조직, 이집트 내정에 더욱 간섭하자 이집트 내의 반영 감정은 늘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영국군은 카이로를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런 영국군을 묵인한 왕실에 대한 감정도 나빠졌다. 1947년 독일이 지브롤터를 장악, 지중해의 연합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일부 차단시키자 이집트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게다가 1949년에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들어오던 미국의 지원을 영국군이 빼돌린 사건이 발생하자 이집트의 반영 감정은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집트 좌익 민족주의 계열의 군인들이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자유장교단에는 좌익 군인 뿐 아니라 지식인, 일선 관료, 심지어 영국 노동당 출신 망명자들까지 참여했다.

전개

7월 23일

1952년 수에즈 운하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이집트 경찰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군은 이집트 경찰들을 향해 공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집트 전역에 퍼지며 봉기가 일어났다. 영국군은 캐나다의 망명정부로부터 병력을 증원 받았고, 이 봉기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7월 23일 카이로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을 받아온 자유장교단이 혁명의 바람이 불 때라고 판단, 군사 행동을 개시해 영국군 참모부와 왕궁을 공격하며 이집트 혁명이 발생했다.

7월 24일

왕궁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참모부 본부를 지키던 영국군의 방어를 뚫어낼 순 없었다. 게다가 상황이 길어지자 키프로스 섬과 몰타에서 발진한 영국군 폭격기들이 자유장교단과 봉기 세력에게 무자비한 폭격을 가하며 상황은 급변해갔다. 파루크 1세는 폭격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왕궁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영국군의 보호를 받았고, 수에즈에서도 봉기를 진압한 영국군 1개 중대가 카이로로 향해왔다. 같은 날 이집트 전역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7월 25일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유장교단의 장교 나세르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집트인들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영국군의 공작으로 전파가 끊겨 전달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카이로 전역이 영국군에 의해 통제되는 상황이 오자 나세르와 나기브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며 사망했다. 안와르 사디트는 남은 혁명군을 이끌고 영국군에 항복하며 상황은 끝마쳐지는 듯 했으나 영국군은 멈추지 않고 사태 종료 및 안정화까지 발효 예정이라 발표한 계엄령을 무기한으로 연장할 것을 선포했고, 파루크 1세를 가택연금 시키며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는 완전히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민족주의 운동 또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이런 반민주적인 행태를 지켜본 미국에서의 영국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 같은 해 잉글랜드에서는 선거가 시행되며 반전된 모습을 보였다. 독일 또한 이집트 아랍 민족의 독립을 짓밟은 무자비한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