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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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POLEON I IMPERATOR ERA SCRIPTOR
초대
조르주 펭송
제2대
브누아 렝
제3대
아라 뇌베레이
NAPOLEON II IMPERATOR ERA SCRIPTOR
제3대
아라 뇌베레이
제4대
아돌프 루아
제5대
브라앙 뇌용
제6대
레오넬 메스메르
제7대
미셸 르플레
제8대
몽트 베탕쿠르
제9대
레옹 르 메릴
제10대
레몽 발라뒤르
제11대
에두아르 에로
NAPOLEON III IMPERATOR ERA SCRIPTOR
제11대
에두아르 에로
대행
에디트 페테르게르부아
제12대
미셸 보비니
제13대
누와지 메르디
제14대
세스텅 플라카르
제15대
미카엘 그루스
제16대
장 피에르 델마스
제17대
다니엘 퓌네스
LOSEPHVS I IMPERATOR ERA SCRIPTOR
제17대
다니엘 퓌네스
제18대
키르치크 로카르
제19대
피에르 맥키
제20대
몰리에르 갱스부르
제21대
귀스타브 르클레르
제22대
알랭 프르베르
제23대
피에르 돌토
제24대
프랑수아즈 노아
LOSEPHVS II IMPERATOR ERA SCRIPTOR
제24대
프랑수아즈 노아
대행
코르 쉬르뱅
제25대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제26대
자크 드브레
제27대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제28대
파트릭스 드 루몽
제29대
루이 샤를루아
NAPOLEON IV IMPERATOR ERA SCRIPTOR
제29대
루이 샤를루아
제30대
기오 페트릭스토간
제31대
르네 밀랑
제32대
사디 팔레르모
제33대
쥘 르브룅
제34대
벵상 두메르
제35대
엑상 발레도
제36대
장 산상드뉘베르
제37대
뫼조 애글레
제38대
샤를 리앙
제39대
아르투아르 렌
NAPOLEON V IMPERATOR ERA SCRIPTOR
제39대
아르투아르 렌
제40대
루앙 리모주
제41대
브장송 낭스
LUCIANVS IMPERATOR ERA SCRIPTOR
제41대
브장송 낭스
제42대
조르주 블루아
프랑스 황제 · 부총리 · 알제리 총독 · 알제리 정부수반
TV4 선정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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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프랑스의 민영 방송사 TV4에서 1,200만명의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설문한 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의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 조제프 2세 루이 파스퇴르 장 산상드뉘베르
6위 7위 8위 9위 10위
에디트 피아프 몰리에르 장 자크 루소 필리프 르클레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11위부터는 문서 참조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제25 · 27대 프랑스 총리
Knight 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Le plus grand honneur empirique de France
사르트의 드오트클로크 공
Le seigneur de Hauteclocque de Sarthe
본명 프랑수아 마리 콩트 드오트클로크 경
Sir François Marie Contte de Hauteclocque
출생 1889년 1월 6일
프랑스 사르트 르망
사망 1966년 6월 30일 (향년 77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프랑스
임기 프랑스 재무부 장관
1937년 5월 30일 - 1940년 1월 2일
프랑스 군무부 장관
1940년 1월 3일 - 1946년 9월 12일
프랑스 총리
1940년 1월 3일 - 1946년 9월 12일
프랑스 총리
1948년 5월 7일 - 1953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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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소르본 대학교 (경제학 / Ph.D)
종교 무종교 (무신론)
신체 188cm, 69kg
소속 정당 프랑스 사회당
약력 프랑스 하원 의원
프랑스 재무부 장관
프랑스 군무부 장관
프랑스 거국내각 총리
프랑스 총리
프랑스 사회당 명예 당수

개요

프랑스의 제25, 27대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거국 내각을 이끌며 프랑스를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총리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프랑스의 현대 복지 체제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정계 입문 이전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는 1889년 프랑스 제국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 자제의 집안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났고 공부에서도 큰 성취를 보여 소르본 대학교의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그때까지만해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유럽 내에서 인기를 끌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 좌파 성향을 띄게 되었다. 귀족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대학교 좌파 그룹 내에서 소외당하였지만 나중에는 열렬한 활동으로 오히려 집안에서보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13년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반전주의자로 입대를 거부하였고 고학력자로서 징집 대상에서도 열외였지만 아버지의 지시로 군에 입대해, 아프리카 전선에서 동맹군을 상대로 싸웠다. 하지만 얼마 안가 1915년 서아프리카 전선에서 다리 부상을 당해 의병제대를 하게 되었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종군 기자로 활약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프랑스에 알리려고 노력했고, 여러 전투와 분쟁에 투입되어 생사의 고비를 여러번 넘나들었다고 한다.

전후에는 경제학자로 활동하였고, 사회당에 입당해서 활동했다.

사회당 지도부와의 대립

드오트클로크는 1926년 사회당의 공천을 받고 그의 고향이었던 사르트 지방의 르망 선거구에 하원 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갈리아 민족당 후보에게 단 74표차로 패했다. 그러나 2년 후 해당 의원이 사망하자 치뤄진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드오트클로크는 철저한 사회민주주의자로서 당시 당이 추구하고 있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노선과는 궤를 달리하였다. 이 때문에 드오트클로크는 동료 의원들에게서 위장 좌파, 자본주의적 사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당 지도부와도 갈등을 빚었다. 1930년대 당이 사회민주주의적인 아젠다를 일부수용했을때 그 중심에 있던 의원중 하나가 드오트클로크였는데 이 일에 있어서도 당 내 마르크스주의 파벌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드오트클로크는 유능한 일처리와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얻어 사회당 내에서도 점차 인정을 받게 된다. 이를 반영하듯이 1937년, 전쟁을 직전에 앞두고 드오트클로크는 프랑스의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시 총리직을 맡으면서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곧이어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패닉에 빠지게 된다. 이 당시 나치 독일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드오트클로크가 전시 내각 총리 후보로 점쳐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0년 1월, 드오트클로크는 의원들과 조제프 2세로부터 거국 내각을 형성해달라는 동의를 얻으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의 거국 내각 총리로 취임했다.

1940년경은 나치 독일이 우수한 기동전을 앞세워 프랑스의 평야를 파죽 지세로 돌파해나가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파리 시민들은 물론이고 드오트클로크 총리의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었다. 프랑스 의회는 거국 내각을 비교적 후방인 리옹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나, 드오트클로크 총리는 파리에 남겠다고 선언하며 지하 벙커에 내각을 꾸려 나치 독일에 대항했다. 마찬가지로 조제프 2세 역시 아이슬란드 망명 제안을 거절하며 총리와 함께 파리에 남아, 시민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다. 1940년 12월 나치 독일군은 프랑스 제국군의 반격에 무너지며 다시 라인강변으로 후퇴했고, 기나긴 참호전 끝에 1943년 1월 프랑스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유럽 전선은 막을 내렸다.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은 여전히 캐나다를 점령한채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길어지는 전쟁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전시 내각에서조차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고,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미국에 넘겨주는 대신 나머지 캐나다 영토를 되돌려받자는 여론이 거세졌다. 하지만 드오트클로크 총리는 지하철에서 직접 시민들과의 면담을 통해 민심을 확인한 이후, 휴전을 찬성하는 의원들에게 우리가 파시스트와 평화 협정을 맺으면 파리 시민들이 우리를 단두대에 실을 것이라고 일갈하며 평화 협정을 무산시켰다. 그에 대한 결과로 전쟁은 더 길어졌고 사망자도 속출하였으나, 영프 동맹군의 미국 상륙작전으로 미국이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2차 대전은 연합군 진영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게 된다.

두번째 총리 임기

1946년, 드오트클로크가 이끌던 사회당은 선거에서 우파 연합에 약간 밀려 드오트클로크는 미련 없이 총리직을 떠났다. 그러나 보수인민당이 주축이 된 새 내각은 전후 경제난을 잘 처리하지 못하며 인기가 폭락했고, 갈리아 민족당과 기독교민주당이 연정을 탈퇴한 상태로 2년만에 조기 총선이 치뤄졌다. 이 선거에서 드오트클로크의 사회당과 공산당 선거연합은 450석의 의석중 무려 356석을 차지하며 초압승을 거뒀고, 드오트클로크는 다시 총리직에 복귀하게 된다.

전후에 드오트클로크 총리는 평화, 경제 회복 등을 핵심 가치로 내걸고 현대적 복지 제도를 확립하였다. 무상 의료 복지, 초중등 무상 교육 등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또한 사회 안정 정책을 통해 프랑스의 무너진 인프라를 복구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게도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드오트클로크의 경제 정책에 따라 프랑스는 급속도로 전후 경제난에서 벗어났고, 식민지 주민들의 삶도 전쟁 전과 비교해봤을때 확연하게 탁월해졌다. 드오트클로크 내각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했기 때문에 1952년 총선에서도 사회당은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드오트클로크의 나이가 60줄을 넘은 시기였고 2차 대전 시기 과로한 것의 영향 때문에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953년 일시적 심장 마비로 쓰러졌고 이후 그는 스스로 정치를 하기에는 벅찬 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53년, 주변 각료들과 조제프 2세를 비롯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리직을 사퇴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말년

말년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책 여러권을 저술하고, 조제프 2세와의 개인적 친분도 유지하는 등 대외 활동은 여전히 활발히 하였으며, 당수직을 사퇴했음에도 사회당에서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죽을때까지 사회당의 명예 당수직을 가졌다.

총리직을 사퇴한 이후 13년이 지난 1966년, 총리 시절부터 앓고 있었던 심장병으로 쓰러졌고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 시민들도 크게 슬퍼하였으며 1년전 이미 윈스턴 처칠을 잃은 유럽 시민들은 드오트클로크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제프 2세는 드오트클로크의 기일을 임시 공휴일로 삼았고 수많은 시민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현대적 복지 체제 확립

프랑스 사회 개혁

소탈한 개인적 면모

부정적 평가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

독단적인 정치 생활

여담

  • 평소 귀족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시가를 목숨과도 같이 좋아했다. 그러나 귀족적 배경이 부각되어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그는 공식 석상에서는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 마찬가지로 맥주보다 브랜디를 더 좋아하고,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자 사냥도 즐겨하는 등 상류층의 전형적인 취미를 가졌다.
  • 귀족 출신이지만 매우 소탈한 행보로 유명했다. 총리가 되어서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경호원이 있으면 부담스럽다면서 공적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다른 시민들과 다름 없이 혼자서 산책을 하거나 장을 봤을 정도다. 그러나 그거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소르본 대학교 시절에는 오히려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이 때문에 친구가 생기지 않자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그 결과 귀족 출신이면서도 서민과 같은 생활 방식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 윈스턴 처칠과는 서로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로 정치 성향이 달랐다. 그러나 두명은 2차 대전 시기 영국과 프랑스의 거국 총리로 뜻을 함께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의 정치 성향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윈스턴 처칠이 사망했을때 드오트클로크는 "윈스턴 처칠과 내가 추구한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유럽 시민들의 행복을 바라봤다는 점에서는 하나였다"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1년 이후 드오트클로크 역시 숨을 거뒀다.

조제프 2세와의 우정

처음에 프랑수아 드오트클로크가 거국내각 총리로서 재위한지 얼마 안되었던 젊은 황제였던 조제프 2세를 알현하였을때, 조제프 2세는 다른 황실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당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 드오트클로크 총리를 황실을 폐지하려는 공산주의자, 공화주의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드오트클로크와 여러번 불협화음을 냈지만, 총리와 함께 적국에 맞서 싸우다보니 정도 들고, 드오트클로크 총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성격도 맞는 친구이며 공화주의자는 더더욱 아닌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전쟁이 끝날때쯤 조제프 2세와 드오트클로크는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3년, 드오트클로크 총리가 건강 문제로 정계를 은퇴했을때 조제프 2세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드오트클로크가 정계를 은퇴한 이후 1966년 사망할때까지 조제프 2세와 드오트클로크는 친구로 남았으며, 드오트클로크 총리가 사망한지 얼마 안있어 조제프 2세도 숨을 거두어 평생의 우정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