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 메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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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내각총리대신
헤이세이 시대
쇼와 시대 내각총리대신
57대 58대 59대 60대 61대 62대 63대 64대
우노 소스케 가이후 토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호소카와 모리히로 무라야마 도미이치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65대 66대 67대 68대 69대 70대 71대 72대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아카츠키 소야민 쿠라하시 리코
73대 레이와 시대 내각총리대신
카토 메구미
사립 토요가사키 학원
아키 토모야 카토 메구미 카스미가오카 우타하
사와무라 스펜서 에리리 하시마 이즈미 하시마 이즈미
현립 츠바키 고등학교
효도 미치루 히메카와 토키노 미즈하라 에치카
모리오카 란코
카토 메구미
加藤 (かと) (めぐ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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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생년 월일 1995년 09월 23일(1995-09-23) (25세)
출생지 일본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거주지 일본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학력 일본과학대학 전기통신학 박사
소속 정당 성장당 (카토파)
일본의 73대 내각총리대신
내각 제1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1차 카토 메구미 개조 내각
제2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3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3차 카토 메구미 제1차 개조 내각
제3차 카토 메구미 제2차 개조 내각
제4차 카토 메구미 내각
제4차 카토 메구미 개조 내각
재임기간 2015년 8월 27일 ~ 2022년 11월 19일
일본의 중의원 의원
선거구 도쿄도 1구
선수 45, 46, 47, 48, 49, 50, 51
재임기간 2012년 ~

카토 메구미(일본어: 加藤 恵 (かとう めぐみ), 1995년 9월 23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성장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자 제73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제21대 자유민주당, 초대 성장당 총재이다.

개요

1995년 9월 23일,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정치국 편집장였던 카토 모토히로(加藤 元浩)와 그 아내 나나에(奈々絵)의 장녀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카토 모토히로가 입학하도록 주장한 토요가사키 계열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과학대학 공과대학 정보통신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아버지인 카토 모토히로를 비롯해 어머니인 카토 나나에, 고조부인 카토 에이사쿠(加藤 栄作), 전 일본 외무대신이자 조부 카토 케이요시(加藤 圭佳), 가정교사였던 오오가미 레이(大神 零), 친척들까지 도쿄 대학 출신이 많았지만 카토 메구미는 무난하게 에스컬레이터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으며, 친인척들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과학대학에 차석 입학하였다.

경력

카토의 집안에는 정치가를 지낸 이들이 있으며, 고조부도 수상을 지낸 정치가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조부는 52대 총리대신을 지낸 카토 에이사쿠(加藤 栄作)이다.

대학 졸업 후 자유민주당 도쿄도 신주쿠구 지방당 위원장(2009~2011)으로 일했고, 자유민주당 도쿄도 도의회 의원(2011~2013)을 지냈다. 자유민주당 도쿄도 선거대책위원장(2012)을 지냈으며, 자유민주당 중의원 의원(2014~현재)를 지내고 있고, 자유민주당 간사장(2014)를 지냈다. 2015년 총리직에 올랐다.

정계 입문

졸업 이후 2005년에서 2007년 까지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정치부 기자를 보냈다. 1년 뒤인 2008년에는 조부이자 외무대신이던 카토 케이요시의 비서로 취임하고, 각국의 수뇌와의 회담에 동석하는 등 후계자 수업을 진행해갔다. 하지만 이후 자유민주당 도쿄도 신주쿠구 지방당 위원장에 발탁되면서 외무성의 일을 내려놓았으며, 이후 도쿄도 도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1년에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조부 카토 케이요시가 급사하면서, 2012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사망한 조부의 지역구였던 신주쿠 1구(당시)에서 출마해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총리가 되기까지

2013년 4월 당선부터 현재까지도 카토 의료재단이라는 민영의료보험을 만들어 독거노인을 위한 노인요양센터에 지원금을 주는 사업으로 카토 메구미가 매년 9000만 엔을 기부해 오고 있다. 또한 인구의 6000만 가까이 차지하는 노인을 위한 일자리가 필요하다면서 기계기술의 확대를 법의 강행돌파로 이루어 내 중견기업과 기술혁신산업체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면서 복지예산의 200%증액을 주장한 네오 아베노믹스를 배격하고 자유민주당 본래의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카츠키 가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총리 후보로는 거론도 되지 않던 2선 의원인 아카츠키 소야민을 아베 신조를 누르고 71대 내각총리대신에 당선시키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중의원의 아카츠키 파벌에게 큰 빚을 안겼고, 카토 파벌이 중의원에서 사실상 아카츠키 파벌을 흡수하게된다.

한편 2014년 말의 자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아카츠키 소야민이 재기하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아카츠키 파벌을 완전히 흡수하였으며 이후 1월 13일 쿠라하시 리코 전 일등육좌를 총리로 올린다. 교육정책의 변화, 중국과의 외교 마찰 등 정치적 리스크가 큰 일들을 모두 쿠라하시 내각에서 이행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쿠라하시 리코는 카토의 이러한 간섭에 실증을 내고 있었으며, 비카토파벌 강경정치인들과 극우의원들을 동원하여 8월 23일 국민개병제를 바탕으로하는 병역법을 개정한다. 결국 내각 지지율을 바닥에 내리꽂혔으며, 27일 사임하고 긴급의결을 통해 카토가 새 총리로 얼떨결에 오르게된다.

취임 후

1차 집권기(15년 8월 ~ 16년 10월)

2015년

쿠라하시 내각의 붕괴가 천명하는 바는 자명했다. 100여년이 넘는 자민당의 공중분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8월 29일, S&P는 일본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강등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자민당의 지지율이 20%를 밑도는 수준이었고, 내각 지지율 역시 30%를 넘기지 못하고 작은 반등과 하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카토는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쿠라하시계의 의원들을 최대한 단죄하고, 자민당 주류 파벌인 굉지회를 끌어안아야한다고 판단했다. 미사카의 당내 영향력 확장이 약간의 문제는 되었지만 결국 16년 1월 굉지회의 영수 자리를 차지했다.

2016년

2016년 1월 굉지회의 영수자리를 차지한 카토는 쿠라하시계 의원들을 곧바로 출당조치하였다. 또한 징병제 법안의 시행을 2016년 1월에서 12개월 유예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내각 지지율은 3월 말 38%까지 회복되었으나, 자유민주당의 지지율은 20% 초반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민진당과 공산당 등 야당의 내각을 해산하라는 거센 반발이 빗발치고 있었다. 결국 3월 28일 NHK의 내각불신임 또는 자진해소가 필요하느냐는 설문조사에서 응답대상자의 55%가 자민당 내각이 국민의 재신임을 물어야한다고 답하면서 정권기반이 흔들렸다.

거기에 더해 미사카 미코토의 분당선언으로 민진·공명 등 여야를 가릴 것 없는 전례없는 대규모 이합집산이 일어나자 카토는 최대한 구 자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기위해 해산을 늦췄다.

이 과정에서 카토 수상은 승부수를 띄우게 되는데 바로 선거권 및 피선거권 연령 대폭 하향이였다. 이를 통해 카토 수상은 청소년 유권자들을 곧 치러질 선거에 대거 포함시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듦과 동시에 각종 청소년 혜택 정책을 잇따라 공약하면서 선거에서 집권여당의 유리함을 이용할 목적이 있었다.

결국 공직선거법이 4년만에 개정되어 만16세였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만13세로 조정하였다. 이로인해 정책이나 정치에 무관심한 층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또한 인기투표적 성향이 있는 이른바 예측할 수 없는 유권자가 뻥튀기 되었다.

결국 2016년 4월의 정계개편 이후 약 4개월 간의 조정기간을 거치다가 결국 내각이 자진해소,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열리게 된다.

2차 집권기(16년 10월 ~ 17년 10월)

2016년

47회 총선거의 결과는 카토의 성장당과 미사카의 과학당이 거의 비슷한 의석을 확보하면서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되었다. 카토는 물밑 접촉을 통해 개표 당일 당선이 확정된 쇼쿠호 과학당 간사장과 협의하여 성장-과학에 이르는 대연정을 얻어낸다.

게다가 의석 수는 과학이 몇 석 더 많음에도 총리를 성장에서 배출할 수 있는 동의까지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국민적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과학당의 적극적 지지천명으로 내각지지율은 처음으로 40%를 넘어서게 되었다.

또한 과학당의 무리한 연정가담으로 오히려 과학당 내의 계파들이 당을 나가는 일이 빈번해지며 2차 정개계편까지 이뤄내는 쾌거를 이뤘다.

한편 11월 미합중국 대통령에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동맹국에게까지 외치면서 외교정책의 노선이 바뀌게된다.

2017년

일미 무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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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가 조급히 선거를 치룬 이유

먼저 카토 내각은 아세안 국가들과 밀접해지기 위해 적으면 1천억 엔 규모로 국채를 매입하였다. 또한 G7에 카토노믹스를 실행하겠다는 경제정책 예고도 모두 마쳤다.

2017년 2분기부터 중국이 미국의 관세철퇴를 맞고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었다. 미 상무부는 5월 25일 일본 역시 미국에게서 막대학 이익을 갈취하고있다고 발언하였다.

이에 외무성은 즉각 반발하며 미국의 도가 넘는 발언은 신뢰관계를 무너트리는 요소로 작용하고있다고 맞불을 놨다. 7월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도요타를 언급하며 미국시장에서 근로자들의 돈을 뽑아내고있다고 게시하며 일본의 주요 기계부품에 5천억 달러 대의 징벌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일미갈등을 촉발시켰다.

일본수출입관리국과 경제산업성은 즉각 기자회견을 소집하며 미국의 이같은 태도는 일본의 인내심을 시험하게한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은행도 미국과 일본이 인구에서는 1억 5천여명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GDP상으로는 거의 동등한 상황이라면서 비경제활동인구가 압도적으로 적은 일본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의 자충수라고 경고하는 서한도 국무부로 전달하였다.

9월 11일 미국은 일본을 환율조작국으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무역제제에 들어갔다. 기계부품을 포함한 1,433개 품목에 3천 억 달러의 관세추징금을 물었다. 이에 외무성은 즉각 중국과 접촉하여 대미희토류수출 중지를 제안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 사안에 긍정적인 의사를 타진하자 카토 수상은 바로 미국의 농축산품을 포함한 1,313개 품목에 1천억 달러의 관세추징금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중국은 대미희토류수출을 사전 공지없이 완전 중단하였다.

미국은 예상치 못한 일본과 중국의 공동대응에 잠깐 당황하는 듯 보였으나 곧바로 일본에는 무비자협정의 취소통보를, 중국에는 적색국가로 지정하여 중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들에 그에 상응하는 보복성 대응을 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와같은 국외적 상황이 지속되자 내각 지지율이 처음으로 60%를 돌파하였고, 대미관계에 대한 대응책으로 야당이 분열되었다. 이에 카토 총리는 전격적으로 의회를 해산, 대내외적 혼란을 이유로 총선승리를 확신했다.

3차 집권기(17년 10월 ~ 20년 9월)

2017년

카토의 의기양양한 해산으로 거행된 47회 총선거는 보수역사에 길이남을 대참패로 마무리되었다. 먼저 1년만에 국회를 해산하는 것에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상당했으며, 해산 이유도 명분이 부족한데다가 오히려 야당 분열을 노리고 꼼수를 써 해산했자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지지율의 1, 2위와는 별개로 46회와는 다르게 성장당이나 과학당을 대신할 지역정당들이 곳곳에 생겨났으며 예상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던 것도 패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토는 대연정을 통해 총리에 재 취임하였으며,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일본의 정권이 흔들림이 없음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선임보좌관을 일본에 급파하여 일미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물밑 접촉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카토 총리는 11월 3일 방문한 이방카를 11월 6일까지 접견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11월 7일에 미국 외무부의 무비자협정 파기를 번복하는 성명이후에야 호시노야 도쿄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후 11월 8일 주일중국대사 청융화와 접견을 통해 중국의 대미 희토류수출 중지조치를 해제하였으며 11월 11일 일미가 상호간의 관세추징금을 거두어들이는 합의를 거친 후에야 미일관계는 다시 원상복귀될 수 있었다.

2018년

1월 1일 카토는 유튜브와 NHK에서 신년사를 낭독하였다. 또한 2020년 그 후를 바라보겠다며, 20년 이후에도 장기집권의 의사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5월의 일한중 정상회담에서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깨질 수 없는 동반자 관계라고 발언하였고,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 역시 한미일 관계는 흔들림없는 공고한 동맹체제라고 언급하면서 시진핑 주석 앞에서 일본과 한국의 우정을 과시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도 동아시아의 주요국으로써 중일한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고, 지난 아시아의 대미 무역분쟁에서의 일한중의 견고한 대응이 미국을 한 발 물러서게 한 걸 다시 기억해야한다고도 이야기했다. 이날 일한중 정상회담은 유래없을 정도로 화기애애했다고 NHK가 전했다.

2019년

레이와 시대 개막 선언
G20 오사카 정상회의 주관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2020년

우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1월 16일 중국발 우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첫 확진자가 일본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CDC가 사태에 개입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초동대처

CDC는 즉각 내각에 중국발 항공·해상 여객을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 경제산업대신과 국토교통대신, 관방장관 등이 너무 과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CDC를 질타했으나, 질병통제센터법의 감염병 확산에 있어서의 센터의 지위와 권한을 법 제정 이후로 처음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각 부의 공중위생과 감염병 통제에 필요한 권한이 CDC에 이관되었으며 수상의 결재 없이 중국발 해상항공여객이 1월 18일 부로 완전 중단되었다.

또한 모든 입국자에 대한 영상감시장비가 공항에 들어섰으며, 감염의심의 경우에는 각 도도부현의 지정입국자격리시설로 격리조치되었다. 이후 일본은 2월 18일 까지 확진자 11명(입국자 10명)이라는 방역에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CDC의 통제로 만들어진 신속진단키트는 신뢰도 95%를 자랑하게 되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추가 확진자가 줄어드는 추세가 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2월 20일 이후부터 소비에트 연방과 비잔틴 제국에서 무더기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내각은 한 번더 선택의 순간에 돌입한다.

완전입국금지 결정

소비에트 1000명, 비잔틴 780명을 돌파한 2월 29일 카토 수상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일본을 세계로부터 봉쇄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일본은 3월 1일부터 무역을 포함한 전 분야에서 해외와의 물리적 접촉이 차단되었다. 동시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휘발유 등 석유와 석탄 자원의 통제를 국가로 일시적으로 이양하였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관공서 및 산업체를 운영, 이외 시간에는 전기 수도 등 모든 자원을 차단하기로 선언하고, 오후 10시부터는 가정에도 전기공급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조치에서 의료기관 및 관련 연구기관, 정부 지정 관공서 및 산업체는 제외되었다.

당시 석유의 비축량은 2월 29일 선언 당시 정부 9억 6330만 배럴, 민간 7억 1110만 배럴로 총 16억 7440배럴이었다. 2019년의 1일 석유 소비량이 994만 배럴이었기 때문에 이 비축량은 168일 분의 비축량이었다. 당장 3월 1일부터는 차량 2부제 운행 및 철항공기 운항편을 대폭 감축하였다. 3월 15일에는 모든 소형, 준중형, 중형 승용차의 운행을 통제했으며 카풀 및 버스 및 철도 대중교통 이용이 장려되고 항공기 운행이 금지되었다. 특히 대중교통비를 일시적으로 50% 국가가 대납하는 고강도 정책을 실시하였다.

3월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세계적 확산추세로 접어들자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한 내각은 열도의 완전봉쇄를 4월까지 연장하였다. 3월 29일 기준 일일 석유소비량은 479만 배럴로 어느정도 석유 절약정책의 효과를 보고있다고 경제산업성이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약 2억 배럴을 소모한 상황에서 남은 석유 비축분은 대략 290일로 크게 증가하였다.

2020 도쿄 올림픽 연기 결정

4월 1일 카스미가오카 관방장관이 전격적으로 도쿄 올림픽을 1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현 우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남은 4개월 안에 진정되기는 어렵고, 참가국이 없는 올림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관방장관의 발표 전날 미국의 확진자수는 20만, 발원지인 중국은 50만을 돌파했다.

미사카 미코토 문부과학상 경질 사태
동북아시아 방위비 분담금 지급 거부 사태

4차 집권기(20년 9월 ~ 22년 11월)

2020년

제도권 은행과의 대립

11월에 들어서면서 카토 수상은 지지율의 반향을 노리기 위해 근 6년간 큰 적자를 낸 도쿄 센트럴 항공의 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에 국토교통대신을 갈아치우면서 당시 2선 의원이던 야치 히토카를 임명하였고, 곧바로 센트럴 항공의 재건안을 세간에 공표하나, 이 것이 센트럴 항공의 채권 3500억 엔 중 70%를 삭감 하는 계획이어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70%를 국세로 막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은행이 70%를 포기하도록 하는 재건안이었기에 더더욱 금융권에서 반발이 거셌다. 국민적으로는 재건안 찬성이 53%로 반대 14%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융자를 실행한 제도권 은행인 개발투자은행, 도쿄제일은행, 산업중앙은행, 도내은행, 칸사이 시티은행이 계획을 따를 것으로 예상했으나, 공개 기자회견에서 주거래은행이었던 개발투자은행과 준주거래은행인 도쿄제일은행이 정부 개선안을 거절해버렸다.

특히 개발투자은행은 바로 1개월 전까지 국영은행으로 민영화가 추진된지 단 26일 만에 정부안에 반기를 든 것이라 더욱 세간의 관심이 몰리게 되었다.

이에 카토 수상의 지지율에 빨간불이 켜지자, 금융청에서 개발투자은행과 도쿄제일은행에 금융청검사 조치를 내렸고 개발투자은행이 다시 꼬리를 내리게 된다. 도쿄제일은행은 검사 도중 부실융자가 발각되어 시정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조치에 반발한 도쿄제일은행은 당시 간사장이던 오리하라 이자야와의 부정한 커넥션을 자폭으로 터트려버렸고 결국 야치 히토카 국토교통상이 채권포기안을 철회하고 사임함으로써 1개월에 달하는 은행과의 대립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40%를 상회하던 내각 지지율은 20%초반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또한 오리하라 간사장은 카토 수상에 의해 정계은퇴를 강요받았으며 재계와 카토 내각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21년

2022년

소드 아트 온라인 사태

퇴임 후

선거 이력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45회(2012) 45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자민당 266,751
52.1%
1 당선 초선
46회(2014) 46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자민당 251,051
45.3%
1 당선 2선
47회(2016) 47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36,553
40.1%
1 당선 3선
48회(2017) 48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21,373
44.7%
1 당선 4선
49회(2020) 49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57,894
46.9%
1 당선 5선
50회(2022) 50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202,325
39.8%
1 당선 6선
51회(2025) 51대 중의원 의원 도쿄도 1구 성장당 199,769
37.9%
1 당선 7선

메이슌 자이언츠 팬

야구의 팬이며, 특히나 메이슌 자이언츠의 팬이다. 본인이 이끌고 있는 성장당이 메이슌 자이언츠를 후원하고 있기도 하고, 어릴때부터 메이슌 자이언츠를 응원했기에 더 그런 면이 있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로는 메이슌이 크게 진 날에 모든 국정 업무를 중단하고 방에 들어가 대성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정치학자는 "카토 메구미는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히 강한 인물인데, 메이슌 자이언츠도 명문 구단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그런 비슷한 처지인 구단을 응원하며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충족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가끔싹 메이슌이 대패하는 날 국회로 감독이나 선스들을 불러 와서 청문회를 열기도 한다. 감독이나 선수들도 이에 대한 반응이 천차만별인데, 죄송하다고만 반복하는 감독부터 당당하게 나오는 선수, 게다가 아예 안나온 선수도 있었다.. 메이슌이 13연패에 빠지자 아예 직접 메이슌 자이언츠에 찾아가 즉석 청문회를 열고 끝난 뒤에도 "13패?! 너희들이 명문구단이냐?!"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1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 뒤 기여코 14연패를 해버리자 아예 구단 버스 앞에 드러누우려 하다가 결국 수행원의 만류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겨우겨우 연패에서 탈출한 날 총리관저에서는 그저 웃음과 울음이 같이 들렸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