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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크로아티아 독립국(크로아티아어: Nezavisna Država Hrvatska, NDH)은 1941년부터 1969년까지 존재했던 동남유럽의 크로아트 민족 국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해체된 직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사 개입 하에 독립국가로 수립되었으며, 크로아트 민족주의 조직인 우스타샤가 정부를 구성하였다.
역사
1941년 4월 10일, 독일군이 자그레브에 진입한 직후, 우스타샤의 부지도자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는 안테 파벨리치를 국가 지도자로 내세우며 "크로아트 민족의 이름으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5일 뒤인 4월 15일, 파벨리치는 이탈리아에서 귀국하였고, 4월 16일 자그레브에 도착하여 '포글라브니크(크로아티아어: Poglavnik)'의 지위를 공식 수락하고 수상직을 겸임하였다.
국가 건국 직후,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부는 군주제 수립을 요구하였고, 파벨리치는 이에 응하여 사보이 가문의 아이모네 공작(제4대 아오스타 공작)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아이모네는 '토미슬라프 2세'라는 이름으로 명목상의 왕위에 올랐으나, 본인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실질적으로 크로아티아를 방문하거나 국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군주제를 외형상 유지하였으나, 실제 권력은 전적으로 파벨리치 중심의 체제에 집중되었다.
1945년 이후, 크로아티아 독립국 내부에서는 안테 파벨리치의 강경 민족주의 노선과 전후 행정 능력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었다. 독일 당국은 파벨리치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탈리아는 그를 일정 수준 통제 가능한 정치 인물로 보았으나, 실질적인 조율에는 실패하였다.
1950년대 초반부터, 우스타샤 민병대 사령관 출신인 유레 프란체티치와 외무 관료 믈라덴 로르코비치를 중심으로 한 실무 관료 그룹이 정권 핵심을 점차 장악하였다.
1959년 2월 14일, 안테 파벨리치는 히틀러의 묵인을 바탕으로 한 공작의 일환으로, 자그레브 외곽에서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권 핵심에서는 파벨리치의 제거를 계기로 체제 재편이 가속되었으며, 우스타샤 중앙위원회는 즉시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브라니미르 옐리치를 총리 서리로 지명하였다.
같은 해 3월 5일, 옐리치는 체제의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포글라브니크 직위를 잠정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는 해당 직책이 "개인 숭배적이며 자의식 과잉의 정치적 유산"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3월 7일 이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그와 동시에, 보다 제도화된 국가 운영 체제를 명분으로 '크로아티아 대통령(크로아티아어: Predsjednik Hrvatske)' 직위를 신설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옐리치는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겸임하였으며, 1960년 3월 12일, 민병대 최고사령관 유레 프란체티치를 후임 총리로 임명하였다.
정권은 이 과정에서 브라니미르 옐리치를 수반으로 한 친이탈리아계 내각과, 프란체티치가 이끄는 민병대 군사세력이 병존하는 이중 권력 체제로 전환되었다. 국가 수반은 여전히 국왕 토미슬라브 2세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우스타샤 중앙위원회와 민병대 참모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후 크로아티아 체제는 전시 행위에 대한 정당화 노선을 유지하면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숙청 정책을 지속하였다. 과거 강제수용소였던 야세노바츠 등은 명칭만 변경된 채 정치범 및 소수민족 수용 시설로 재활용되었으며, 세르브계 및 보스니아 무슬림 중 비협조적 인물에 대해서는 재교육, 추방, 숙청 등이 단행되었다.
1950년대 후반, 우스타샤 민병대는 국가의 치안 기능을 흡수하면서 실질적인 국가 내 국가로 성장하였고, 통제 체계는 점차 안정화되었다.
외교적으로, 크로아티아는 추축국 승전 이후에도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균형 외교를 시도하였다.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의 종속화를 원했으나, 프란체티치 체제는 점차 독일과의 정보·기술 협력을 강화하면서 자율성을 추구하였다.
1963년 3월, 프란체티치는 우스타샤 중앙위원회와 조율하여 정권 재편을 단행하였다. 총리 브라니미르 옐리치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하였고, 민병대 주도의 국가재조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프란체티치는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탈리아와의 외교 단절은 회피하면서 대독 협력 확대와 정책 중립성 유지 사이에서 균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63년 5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세르브계 주민 봉기가 발생하면서 정권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다수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였다. 해당 지역은 사실상 계엄령 하에 놓였고, 우스타샤 민병대가 자치권을 박탈하고 직할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잔존 유고슬라비아계 파르티잔 세력과 세르브 민족주의 단체는 크로아티아 남동부 산악지대에서 재결집하여 반파시스트 무장조직을 형성하였고, 이는 196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저강도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1968년 12월 24일, 독일은 페터 작전을 개시하면서 슬로베니아 및 바나트 전선에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전면 침공을 단행하였다. 12월 26일, 이탈리아가 즉시 "마레 노스트룸에 대한 도전"이라 반발하며 아드리아해 북부와 알프스 병력을 움직여 국방군 제지를 시도했으나 되려 3월과 4월 알프스 구릉지 작전구역과 아드리아 연해지 작전구역이 설치되는 치욕을 겪고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1969년 6월 19일, 크로아티아군 최고사령부는 전군에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고 교전 행위를 종료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면서 독일에 항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