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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First Republic of Tungus
독일어: Erste Tungusische Republik
러시아어: Первая республика Тунгус
퉁구스 제1공화국
(1875~1889)
通古斯 共和國 / 明完 共和國
국가 자유 찬송가
(중국어: 自由讚頌歌 / 러시아어: Псалмы о свободе)
국목 제비꽃
(중국어: 東北菫菜)
표어 시험받는 동토
(중국어: 試驗東土, 일본어: 試される東土)
수도 남살합림사도 (南薩哈林斯道, 46°57′N 142°44′E)
최대도시 아니와시 (阿尼瓦市, 46°43′N 142°31′E)
면적 161,519 km2 (아시아 27위, 세계 95위, 아시아 0.36%)
이전 국가 - 대완 대완(1752~1875)
다음 국가 - 퉁구스 제2공화국 퉁구스 제2공화국(1889~1893)
- 퉁구스 왕국 퉁구스 왕국(1889~1918)

퉁구스 제1공화국(중국어: 通古斯共和國, 영어: First Republic of Tungus) 혹은 명완 공화국(중국어: 明完共和國)은 1875년부터 1899년까지 사할린(庫頁島)과 북이도(北夷島)에서 존속한 공화정(共和政)이다.

완미통상조약(完米通商條約, 1855), 완러화친조약(完露和親條約, 1858)으로 급작스럽게 문호를 개방하게 된 대완(大完)은 하코다테 전쟁(函館戰爭, 1869)을 거치면서 외세의 침입에 대한 대처가 부실하자, 대대적인 신정권 수립 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절단으로서 미합중국을 방문했던 야율적로(耶律赤露)는 명말청초의 학자, 황종희(黃宗羲)의 유교적 민주 정치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군주정(君主政)을 대신하여 민중의 의사를 대표할 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했다. 이에 호응한 민중과 지식인 계층은 서야혁명(西野革命, 1875)을 일으켜 기존 체제의 유지 혹은 개혁을 주장하던 수구당(守舊黨)과 입헌당(立憲黨)의 세력을 단숨에 숙청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1875년 10월, 반혁명파 숙청에 도움을 준 숭무영(崇武營) 총재 야율이발(耶律以撥)이 공화당(共和黨)의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 지위에 추대되면서 '퉁구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는 4년 임기제를 확립하였으며,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시도하던 수구·입헌 세력에 맞서서 복벽전쟁(復辟戰爭, 1877)을 벌여 공화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또 완러평화조약(完露平和條約, 1879)을 체결해 대외적으로 공화 정권의 수립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완안숙로(完顔淑蘆) 대통령때에 이르러 대완헌법대강(大完憲法大綱, 1884)이 제정되었다. 헌법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가가 인민의 기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것을 명시하면서 민주주의(民主主義) 이념에 대한 가치가 확산되었다. 허나 소선거구제(小選擧區制) 기반의 권력 독점과 파벌 정치로 인해 여전히 기본권을 침해받던 아이누인들을 중심으로 아이누 봉기(阿伊努蜂起, 1885)가 발생하면서 민중혁명을 기초로 수립된 공화 정권은 정통성에서 타격을 받았다. 특히 소로불사리(蕭魯不沙里) 대통령의 무소불위의 월권 통치와 오시마 전쟁(大島戰爭, 1889)에서 일본 해군과의 충돌에서 패배를 겪자 공화정에 대한 회의감이 든 민중과 지식인들은 입헌당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끝내 소수 민족의 권리에 대한 선거권 부여 및 법적 조치에 대한 대립에서 시작하여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제한 선거제 유지[1]를 주장한 공화당과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던 입헌당[2]과의 갈등은 공화당 소속의 육군 총재, 복산유문(僕散有文)이 입헌당의 근거지였던 아니와시(阿尼瓦市)를 선제 공격한 것으로 남북대전(南北大戰, 1899)이 발발하면서 제1공화정은 붕괴되었다.

역사

개항과 혼란

대완에서 본격적으로 서구 열강과의 통상 교역 시도가 있던 것은, 제2차 캄차카 탐험(Вторая Камчатская экспедиция, 1733-1743)에 합류했던 러시아군 소속 덴마크 해군 중위, 마틴 페트로비치 스팽버그(Мартын Петрович Шпанберг)의 천도 열도(千島群島)[3]사할린 방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완 정권을 아우르던 재상 소료불수(蕭瞭不愁)의 이교도 탄압 정책으로 외세와의 접촉은 일절 금지되었으나, 이들과의 비공식적 혹은 상업적 교류가 잦았던 지식인 및 상단 계층에서는 점차 신문물에 대한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구 문물이 비밀리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예수회(Societas Iesu)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천주교(天主敎)가 전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부 지식인들의 학문 연구에 그쳤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퉁구스 최초로 세례성사(洗禮聖事)를 받은 학림사 승지(學林社承旨) 설거야(薛炬夜)가 정례성당(正禮聖堂)을 건립하면서 교세는 점차 확장되었고, 이런 새로운 사상의 등장은 기존 체제에 대한 개혁 및 서구와의 교역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 제국 외교관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Резанов)가 대략 3개월 동안 과이살과주(科尔萨科州)에 머물면서 개국에 대해 요구했으나 조정은 단칼에 거절했으며, 1846년 1월에는 미합중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James Biddle)이 아니부사기주(阿尼夫斯基州)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쇄국 체제에 대한 대외 관계 방침을 이유로 거부하는 등 열강과의 교류를 완전 봉쇄했다.

소료불수의 뒤를 이어 재상 지위를 세습하던 소씨 정권은 소괄륵(蕭适勒) 대에 이르러 점차 늘어나던 열강의 개국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대신들의 의견을 통합하여 쇄국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서 골리곶(骨利串)에 포대를 쌓고 대포를 배치하는 등 해안 방어를 강화했다. 허나 내부적으로는 지식인과 상단을 중심으로 개국 운동(開國運動, 1850)이 거센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를 주도하던 완안답리(完顔理答) 등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하던 지식인들을 규합하여 개국파(開國派)를 조직해 조정에 대항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 매튜 C. 페리(Matthew C. Perry)가 흑선내항(黑船來航, 1853)으로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개국한 후 곧장 과이살과주 해안까지 진입하여 공포탄을 발사하자 조정의 대외 교류 방침은 난처해졌다. 결국 소괄륵개국파와 포함 외교에 굴복하여 페리 원정대의 상륙을 허가한 뒤 직접 회견을 가졌으며, 본국 정부 지시를 관철하는데 성공한 페리 제독은 1년 안에 유예 기간을 거쳐 조약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 통보한 뒤 떠났다.

페리의 퇴항 이후에는 여전히 지방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한 개국파의 급진적인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이에 맞서 조정 관료와 대다수의 농민들은 양이론(攘夷論)을 주장하면서 국내 정세는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국가 의사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소괄륵은 공의정체(公議政体)를 선언했으나, 여전히 개국에 대한 확고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소씨 섭정(蕭氏攝政) 체제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1854년, 일본 내 정세 혼란을 이용한 페리 제독이 그해 3월에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체결하고 7월에는 류큐 왕국(琉球國)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약속대로 이듬해 1월에 페리 제독이 9척에 달하는 함대를 이끌고 재상륙하자, 전쟁으로까지 충돌을 우려한 조정은 마침내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10개조에 달하는 완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대완은 1858년에는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과 완러화친조약을 체결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캄차카 분쟁(堪察加紛爭)에서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소씨 섭정 체제는 붕괴되는 수순을 맞이하기 시작했고, 개화에 반발하던 조정의 관료와 농민들은 기미민란(己未民亂, 1859)을 일으켜 전통 사회 체제의 유지를 주장했으나, 문호 개방에 대한 정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으며, 직접 신종(神宗)이 위민윤음(爲民綸音, 1860)을 내려 해산 조치를 선언하면서 진압되고 말았다.

실권을 장악한 개국파는 개화의 추진 속도를 두고 왕권을 회복하여 전제 정치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려던 보수파(保守派)와 미합중국과 가까운 정치 체제로 개혁하자는 급진파(急進派)로 나뉘었다. 보수파는 이전까지 쇄국 정책에 연장선에서 무역 통제를 위해 설치된 상리국(商理局)에 의해 상업 활동에 방해를 받았던 상단과 왕권 회복을 고대하던 유교·불교계의 유지(有志)들이었고, 급진파는 구미(歐美) 열강의 문물과 사상·제도에 감화된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정치 개혁 및 신정권 수립 운동

추진 방식은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지한 두 집단은 서방 세계에 대한 이해와 문물을 습득하고 개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30여 명에 달하는 방미사절단(訪米使節團, 1860)을 구성해 파견하기로 결정했고[4] 이듬해 1월에 도착하게 되었다. 본래는 약 4개월에서 1년에 달하는 기간을 체류할 예정이었으나, 4월에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이 발발하면서 사절단은 황급히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길지 않은 체류 기간이었으나, 방미사절단은 미국의 다양한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대통령을 접견하여 양국간의 우호 및 통상 교류에 대해 논의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교육 체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일행, 소렴규(蕭廉規)는 유니언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방문하여 추후에 근대 교육기관에 설립 시 교사들의 파견에 대해 요청했고, 근대 농업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구연(李具連)은 농무청(農務廳)의 설립을 건의하고 직접 찰황주(札幌州)에 서구 농작물의 종자 및 가축을 들여와 품종의 개량을 시도했다.

그중에서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고심하던 강우학파(江右學派) 계열의 유학자 야율적로는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추구했던지라 미국 시민들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과 이를 보장하는 정치 체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황종희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1663)》에서 시민 사회 성립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 의식을 강조하면서 북림당(北林黨)을 조직했다. 북림당은 사회 체제에 대한 전면적 개편을 주장하던 급진파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제 통치를 철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는데 있었다.

북림당이 전면적으로 정치 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1867년에 러시아 제국알래스카를 헐값에 미합중국에 판매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크림 전쟁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러시아가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판매한 것에서 비롯하여 캄차카 분쟁에서 포기했던 캄차카에 대한 이권을 돈으로 사들이자는 북방매매운동(北方賣買運動)이 태동한 것이었다. 특히나 알래스카 매매 이전이었던 1860년에는 대륙진출운동(大陸進出運動)이 고조되면서 수복해야 할 땅으로 여기던 연해주(沿海州)가 베이징 조약(北京條約)에 의해 러시아에게 빼앗기자, 반러 감정은 더욱 격앙되었다. 북림당은 백성들에게 열악한 재정에 놓여 있던 조정을 도와 고토를 수복하자는 선동을 벌였고, 실제로 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적대적 감정에서 시작된 북방매매운동은 의외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크림 전쟁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공성전(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оборона, 1854)에서 프랑스 제2제국(Empire français), 영국(British Empire)으로 구성된 영불 연합군의 공격을 당한 경험과 당장에 놓인 재정적 문제로 캄차카 일대를 지킬만한 병력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빚고 있었기에, 태평양의 볼모지를 내주고[5]600만 달러($)에 달하는 개혁 정책 자금을 받을 수 있던 것은 당시 러시아 제국에 입장으로선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오히려 북림당의 도움을 받아 북방 영토에 대한 이권을 되찾은 조정은 '감정적으로 획책한 영토의 부담을 백성들에게 감당토록 만들었다'며 욕을 먹게 되었다.[6]

하여튼 북방매매운동으로 이름을 알린 북림당이 조정의 입김을 강력하게 행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하코다테 전쟁(箱館戰爭, 1868) 이후부터였다. 당시 막부 해군의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는 메이지 정부에 감봉 조치로 많은 막부의 신하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을 우려했고, 이를 막기 위해 기함 카이요마루(開陽丸)를 포함한 8척에 달하는 신식 함선들을 이끌고 함관주(函館州)로 들이닥쳤다. 이에 진경방어사(津輕防禦使) 등수철(藤守哲)이 직접 함선을 이끌고 맞섰으나 석수해전(石狩海戰, 1868)에서 대패하면서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고, 북이도 남부를 막부 세력이 차지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에 영국, 프랑스의 공사들은 각각 에노모토와 대완 조정과의 회견을 가진 뒤 "일본 국내 문제에 대해서 중립을 표하나, 국제 분쟁으로 벌어진 대완 정권과의 대립에선 지지를 표할 의사는 없다."라며 "교전단체로 인정치 않으나, '사실상의 정권(Authorities De Facto)'임을 인정한다.'고 표명했다. 에노모토는 이를 가지고 국제법의 헛점을 이용해 합법적인 교전 단체임을 주장하고서 북이도 남부에 대한 이권 보장을 대완에게 요구했다. 조정은 이에 "일본의 메이지 정부(明治政府)와의 공조를 통해 북이도 침략자들을 처벌할 것"임을 밝히면서도 실질적인 행동 의사를 표현하지 않아 백성과 하급 관료 및 지식인들에게 원망을 샀다.

그해 12월, 핵심 함선이었던 카이요마루가 풍랑에 의해 침몰하자 그동안 북방 사태를 수수방관하던 프랑스가 판매를 유보하고 있던 최신예 함선들을 메이지 정부와 대완 조정에게 판매하면서 에노모토 세력은 우위를 잃었으며, 서양 각국은 앞다투어 "덴노(天皇)를 정점으로 한 메이지 정부만이 일본의 유일한 정권임을 밝히며, 대완 조정의 영토를 불법으로 탈취한 것에 대해 반대한다.'를 공언함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고립하게 되었다. 결국 이듬해 5월에 오릉곽 전투(五稜郭戰鬪, 1869)에서 패배한 에노모토 세력은 항복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혁명과 공화정의 수립

체제 안정 및 헌법 제정

파벌 정치의 전횡과 봉기

쇠퇴와 남북 대전의 발발

관련 틀


역대 퉁구스 제1공화국 대통령
1875~1899
1대 2대 3대 4대
야율이발
(1875~1879)
야율승화고
(1879~1884)
완안승로
(1884~1888)
소로불사리
(1888~1889)
역대 대완 군주 / 역대 캄차카 왕정부 국가원수 / 역대 퉁구스 제2공화국 대통령 / 역대 퉁구스 왕국 군주 / 역대 퉁구스 왕국 총리대신

각주


  1. 상대적으로 공화당의 영향력이 강했으며, 이를 지지하던 지식인들의 주요 근거지였기에 제한 선거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2. 공화 정권에 잇따른 전횡과 소수 민족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이전 왕정 체제에 대한 향수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기에 주장한 것이었다.
  3. 러시아에서 부르는 명칭은 '쿠릴스키예 아스트라바'( 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
  4. 근대화를 위한 필요성의 이유 외에도, 특미전권대사를 파견한 미합중국처럼, 대완 역시도 미국으로 공사관을 파견해야 했다. 재원상 당장은 힘들다고 여긴 개국파는 일단 답례로 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것으로 통보했는데, 그 사절이 바로 방미사절단이었다.
  5. 유일한 수익원이었던 모피 산업은 벌써 러시아 탐험가들과 사업자들의 남획으로 해달과 여우·곰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단물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6. 역사의 아이러니지만, 서야혁명 이후 캄차카 반도에 임시 정부를 세운 왕실과 일부 입헌파·수구파는 세력을 키우며 제1공화정 존속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