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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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공식 포스터
213년 7월 (7월 2일)
18대 대선
217년 7월 (7월 7일)
19대 대선
221년 7월 (7월 15일)
20대 대선
투표율 78.7% ▲3.6%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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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민주당
권남국
자유당
유송윤
미래전진당
송지연
대한인민당
송영균
득표율
49.4% 19.0% 14.3% 12.5%
득표수 17,953,405 6,910,450 5,189,105 4,545,690
당선인
민주당
권남국

21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217년 7월 치러져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로 사전투표는 217년 6월 셋째주와 넷째주 총 두 차례, 본 투표는 7월 첫째주에 실시되었다. 이 날 당선된 권남국 후보의 제19대 대통령 임기는 당선 이후 3일 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임기가 개시되었다.

16대 대선에서 자유당유영호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명재 대통령에 이어 보수 정권이 연장되었고, 17대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면서 무려 8년동안 정권을 잡았다. 216년 여론조사에서 권남국 민주당 공동대표가 차기 후보 선호도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후 권 대표가 출마하면서 사실상 차기 대선의 잠룡으로 부상한다. 자유당에서는 비유영호 성향의 유송윤 전 자유당 최고위원과 친유영호 성향의 박미하의 경선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유송윤 전 최고위원이 경선에 승리하였다. 미래전진당은 216년 9월 최연소 후보인 송지연 전 미래전진당 대표가 경선에 승리했고, 평화전진당은 216년 11월 정일구 전 민의원 의원이 경선에 승리하였으나 216년 12월 여론조사에서 정일구 후보가 1.3%인데 비해 송지연 후보는 11.9%로 큰 차이를 보여 결국 정일구 후보가 217년 2월 대선 불출마와 함께 송지연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열린진보당사회당은 대선 준비를 앞두고 진보 단일화를 통해 김장연 전 사회당 공동대표가 대선에 출마하였고 공화당에서는 조영춘 전 공화당 사무총장이 출마하였다. 하지만 이들 모두 권남국 대세론을 이기지 못했으며 김장연 후보는 10.3%에 불과한 반면 조영춘 후보는 아예 한자리 수 밖이었다. 결국 김장연 후보는 권남국 후보를 지지했으며 조영춘은 조기 불출마하였다.

한편 과거 자유당에서 정치 활동을 하다 무소속으로 탈당한 정영균이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인기가 미미한데다가 정영균이 당시 자유당 시절 각종 막말 논란이 재조명되면서 불출마를 선언했고, 진보 무소속으로 출마한 심소혜 역시 과거 민주당을 비난한 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사퇴를 결정하였다.

이로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선 권남국·유송윤·송지연 3자 구도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선거 처음으로 무소속 후보가 없는 대통령 선거가 되었다. 출마자는 총 6명으로 확정되었으며, 사전투표에는 31.3%라는 가장 큰 투표율을 기록하여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점차 커졌다고 평가된다.

투표 결과 권남국 후보가 49.4% (12,393,405)를 기록하면서 19%를 기록한 유송윤 자유당 후보, 14.3%를 기록한 송지연 미래-평화 단일 후보를 누르고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송영균 대한인민당-국민정당 단일 후보는 12.5%, 김종후 대한공산당 후보는 1.9%, 영천경 대한기독당 후보는 2.9%를 기록하였다.

배경

유영호 대통령의 고령화와 정계 은퇴

유영호는 자유당 소속의 대한민국의 제17·18대 대통령으로 반이명재 세력에 속해있고 당 내 개혁을 추진해오던 정치인이었다. 이명재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각종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명재 대통령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16대 대선에서 6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되면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임기 3년차 후반부터 급격한 노화가 시작되었고 지지율은 40%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보였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공직선거법상 대통령의 임기는 8년으로 4년의 임기가 지난 후 대통령이 한번 더 선거에 출마하는 4년 중임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17대 대선에서 51.4%로 홍영길 민주당-시민민주당-정의당 진보연대 단일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자 17대 대선은 부정선거 음모론과 유영호 퇴진 시위 등 말이 많았던 선거였다. 이 때부터 유영호 대통령은 전보다 온건성향, 중도화되면서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을 택했지만 정책 비판론과 옹호론은 물론, 퇴진찬성론과 반대론으로 나뉘어 국론 분열을 막지 못했다. 대선이 다가오자 유영호 대통령은 19대 대선을 217년 3월로 지정하면서 이를 공고,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또 유 대통령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대통령 자리를 떠날 것이며 다음 세대가 이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연설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고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대선 이후까지 임기를 채웠으나 제19대 대통령의 당선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사표를 내면서 제9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218년 3월 유영호가 다시 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고, 급기야 5월에 치러진 제9회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해 총재로 선출되었다.

권남국 대세론

210년 정계에서 다시금 등장한 권남국이 개혁주의와 실용주의를 주장하며 친권을 주도했으며 213년에는 전당대회에 승리하면서 민주당의 당권을 잡았고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한다. 이후 민주정당 통합론을 통해 시민민주당, 국민의당과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을 이끌어냈다. 이후 차기 대선 선호도에서 1위를 기록하였고, 권남국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이번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차기 대권주자가 되었다. 이후 4월에 열린 경선에서 유력 후보인 문재윤, 심유박, 강규일, 노상진, 정구영 등을 누르고 최종 대선후보로 올랐으며, 보수의 유송윤 후보, 진보의 송지연 후보와 3자 구도를 형성하면서 경쟁을 펼치게 되었다.

야권 정계개편과 야당 돌풍

216년과 217년은 각각 야권 정계개편제25대 민선이 있은 해였다. 민주당이 시민민주당, 국민의당과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을 출범하고, 대한정의당이 사회당에서 이탈한 사회민주당, 노동당 분열 이후 노동당과의 다툼에서 승리한 온건 민중혁명파 세력의 좌파당, 시민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강성 친노유천 세력의 시민참여당, 온건 TSF 세력의 3세기혁명당과 합당하면서 열린진보당을 출범하였으며, 사회당은 신좌파 세력의 청년민주모임, 민중혁명파 세력의 민중사회당, 중도좌파 세력의 노동연대와 합당하면서 이름은 유지된 채 통합되었다. 덕분에 민주당과 열린진보당, 사회당은 25대 민선에서 야권연대를 형성하여 400석을 넘을 정도로 압승했으며 이번 대선에서도 민주-열린진보-사회 단일화를 이루었다.

또, 미래전진당과 평화전진당도 지지율을 합친 미래+평화의 지지율이 13.6% (10.1%+3.5%)로 10%대를 기록했고 사회당도 7.7%를 기록하여 9%를 기록한 태양당 지지율을 노리고 있다. 민주당은 39.9%로 자유당과 0.1%p차로 접전을 벌였고, 진보층이 민주당은 물론 열린진보당, 사회당, 미래전진당, 평화전진당으로 흡수된 사이 중도층, 보수층 역시 민주당으로 흡수되면서 1위를 탈환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민주당이 217년 1월 첫째주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고 자유당은 2위로 밀려났다.

투표 제도

199년 7월 이전에 출생한 만 18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182년 7월 이전에 출생한 만 35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일 현재 4년 이상 대한민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 피선거권을 가진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온라인상에서의 선거 운동이 가능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기호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는 투표 인증샷도 SNS 등을 통해 공유할 수 있다. 다만 오프라인 선거 운동은 투표소로부터 100m 안에서 투표 참여를 권유하는 행위, 기표소 안에서 기표 유무에 상관 없이 투표지를 촬영하는 행위, 투표지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선거 운동을 할 수 없다.

후보자

선거일 기준으로 4년 이상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24세 이상의 국민은 후보 등록을 할 수 있다. 이때 공무로 외국에 파견된 기간과 국내에 주소를 두고 외국에 체류한 기간은 국내거주기간으로 본다. 후보자의 등록에서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일 전 22일부터 4일간, 민/참의원 선거와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선거일 전 20일부터 2일간 관할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에 서면으로 신청하여야 한다.

217년 1월에 미래전진당-평화전진당의 송지연이, 2월에는 자유당의 유송윤, 3월에는 열린진보당-사회당의 김장연 후보가, 4월에는 민주당의 권남국과 대한인민당-국민정당의 송영균이 공식 대통령 후보로 등록되었다. 이후 4월 하순에는 공화당의 조영춘 전 사무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밖에도 대한공산당에서는 김종후, 녹색당에서는 유영추, 대한기독당에서는 영천경, 대한새벽당에서는 김현이 후보로 등록되면서 후보등록 마감일인 5월 상순을 남기고 모든 후보가 등록되면서 헌정 사상 최초로 무소속 후보가 없는 대선이 되었다.

민주당

민주당은 217년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 5:1:4 (당원:여론:국민)로 반영한 경선을 실시하고 그 결과 유효득표수의 과반을 흭득한 권남국 후보를 후보로 선출했다.

자유당

자유당은 217년 2월 안에 국민 경선 90%, 여론조사 10%를 반영한 경선을 실시하고 그 결과 유효득표수의 과반을 흭득한 유송윤 전 최고위원을 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경선 중에 테러 미수 사건과 양 후보 간의 스캔들 공방으로 한동안 논란이 되었었다.

미래전진당

미래전진당은 216년 8월부터 216년 9월까지 당원 투표 30%, 국민 투표 20%, 온라인 투표 50%로 반영된 경선을 실시했고 그 결과 송지연 전 당대표를 후보로 선출했다.

열린진보당-사회당

열린진보당과 사회당은 "대선 준비를 위한 진보 단일화 회의"를 통해 100% 전당원투표를 실시한 결과 김장연 전 사회당 공동대표를 후보로 선출했다. 이후 김장연 후보는 진보연대-민주 양자 토론회에서 권남국 후보를 지지함에 따라 사퇴하였다.

평화전진당

평화전진당은 216년 9월부터 216년 11월까지 국민 투표 50%, 현장 투표 30%, 여론 20%로 반영된 경선을 통해 정일구 전 민의원 의원을 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216년 12월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한 자릿수로 뒤쳐지자 217년 2월 대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송지연 후보를 지지하였다.

공화당

공화당은 조영춘 전 사무총장을 경선 없이 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조 후보를 원하지 않았고, 결국 비난만 받은 채 조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군소 후보

사퇴한 후보

  • 정영균 전 자유당 최고위원장은 217년 1월 대선 출마를 위해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후보 등록을 통해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하지만 자유당 시절 각종 막말 논란이 다시 재평가를 받자 지지율 하락을 이기지 못하고 그 해 2월 사퇴를 결정하였다.
  • 진보 무소속으로 출마한 심소혜 후보 역시 217년 1월 대선 출마를 결정하였으나 213년 7월 국민당 최고위원 시절 민주당을 "배은망덕한 정당"이라고 비난했다는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불거지면서, 2월 사퇴를 결정하였다.

후보 등록과 마감

선거 운동

포스터와 공보, TV 광고

후보자 TV 토론회

여론조사

출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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