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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건국된 미합중국은 1800년대 두각을 드러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1860년대에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산업화 중심의 북부 간에 노예제 확대 문제를 두고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지만 미국 내에서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CLBI)|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 (CLBI)|추축국]]에 패배하면서 미국은 몰락했고, 전후 국토의 6할을 잃었다. 3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잃었던 고토 수복에 성공했고, 이후 [[미연합국 (CLBI)|미연합국]]이 출범하면서 전신이 되었다. |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건국된 미합중국은 1800년대 두각을 드러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1860년대에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산업화 중심의 북부 간에 노예제 확대 문제를 두고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지만 미국 내에서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CLBI)|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 (CLBI)|추축국]]에 패배하면서 미국은 몰락했고, 전후 국토의 6할을 잃었다. 3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잃었던 고토 수복에 성공했고, 이후 [[미연합국 (CLBI)|미연합국]]이 출범하면서 전신이 되었다. | ||
== 역사 == | == 역사 == | ||
[https://en.wikipedia.org/wiki/Franklin_D._Roosevelt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932년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당선되었지만, 그의 [https://en.wikipedia.org/wiki/New_Deal 뉴딜 정책]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기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Works_Progress_Administration 공공사업진흥국(WPA)]과 [https://en.wikipedia.org/wiki/Agricultural_Adjustment_Act 농업조정국(AAA)]등의 신설로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으나, 급진적인 재정 확대에 대한 회의감은 미국 보수층뿐 아니라 중도층까지도 자극했다. 특히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행한 제1차 5개년 계획이 수백만의 아사자를 낳으며 실패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부 개입” 자체에 대한 반감이 미국 사회에 깊게 자리 잡았다. 루스벨트의 좌파 개혁은 “미국판 볼셰비즘”이라는 비난까지 받았고, 이에 따라 193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무려 80석을 추가 확보하며 하원 주도권을 탈환하게 된다. | |||
민주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었다. 특히 남부 출신의 보수 민주당원들, 일명 [https://en.wikipedia.org/wiki/Dixiecrat 딕시크랫]은 연방정부의 권한 확장을 불신하며 뉴딜 법안에 반복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로 인해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은 빠르게 약화되었고, 그는 1940년 3선 도전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는 뉴딜 정책의 핵심 설계자이자 절친한 보좌관인 [https://en.wikipedia.org/wiki/Harry_Hopkins 해리 홉킨스]를 민주당 대선후보로 밀었지만, 보수 성향의 언론과 산업계, 그리고 월스트리트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온건 보수 성향의 공화당 후보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E._Dewey 토머스 듀이]에게 패하고 말았다. | |||
듀이 행정부는 경제자유주의와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강화했지만, 1941년 말 [[대일본제국 (CLBI)|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CLBI)|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은 이미 콘월 해안에 [[독일 국방군 (CLBI)|독일군]]이 상륙하면서 패색이 짙었고, 스탈린이 체결한 독소 불가침 조약은 모스크바 방어 실패 이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미국은 외교적 고립주의를 고수하다 전쟁에 휘말렸고, 1942년 이후 태평양 전선과 대서양 전선 양방향에서 고전했다. | |||
1944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듀이가 전시 지도자의 연속성을 호소했지만, 민주당은 루스벨트 정권의 체계적 정비 능력을 회상시키며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Farley 제임스 A. 팔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https://ko.wikipedia.org/wiki/헨리_A._월리스 헨리 A. 월리스]가 급진 좌파 성향의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Party_(United_States,_1948–1955) 진보당]을 창당하며 표를 분산시켰고, 이로 인해 듀이가 재선되었다. 하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독일군이 [[캐나다 공화국 (CLBI)|캐나다]]를 통해 뉴욕 북부까지 진출하는 상황에 이르자, 미국의 국내 정치 구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 |||
194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https://en.wikipedia.org/wiki/Harry_S._Truman 해리 S. 트루먼]을 전면에 내세워 복귀를 노렸고, 보수 공화당의 상징인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A._Taft 로버트 A. 태프트]와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선거는 정당 정치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막이었다. 남부의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S._Patton 조지 S. 패튼] 장군이 '국민당(National Party)을 창당하고 강경한 반공, 반독 노선을 주장하면서 남부 유권자들을 흡수했고, 좌파 유권자들은 월리스의 진보당에 결집했다. 선거 결과 트루먼은 간신히 승리했으나, 국내 정치 지형은 완전히 파편화되었다. | |||
트루먼은 독일군의 상륙 이후 수도를 워싱턴 D.C.에서 덴버로 이전하고 “산맥 방어선” 구축했으나, 이미 전략 자산의 상당수가 파괴된 상황이었다. 1949년 내슈빌이 함락되면서 여론은 급속도로 반전했고, 결국 같은 해 가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종전 협정<ref>1949년 6월 동안 워싱턴 D.C.에서 일본측과 독일측이 영토 분활에 대해 협의했고, 최종 종전 확정 조약은 각각의 점령지인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 8월 13일, 생방송에서 공동으로 서명했다.</ref>에 서명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패전국이 되었다. | |||
패전 직후 트루먼은 참전 결정과 전략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임기 도중 사임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https://en.wikipedia.org/wiki/Burton_K._Wheeler 버튼 K. 휠러]는 1952년까지 위기 대응에 집중했으나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 해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신진 정치인 [https://en.wikipedia.org/wiki/Everett_Dirksen 에버릿 덕슨]이 승리했으나, 민주당, 진보당, 국민당이 각각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정당이 본선에서 의미 있는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 |||
1956년 대선에서는 이 같은 정치 혼란 속에 신생 진보당과 국민당을 주축으로 군소 정당들이 [[주권연합 (CLBI)|주권연합]]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며 반민주·반공화당 전선을 구축했고,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M._Jackson 헨리 M.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선된 헨리 M. 잭슨 대통령은 “강한 연방, 회복하는 경제, 존엄한 평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미국 재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주권연합은 전쟁 패배 이후 정치적 신뢰를 잃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대체해 급부상했으며, 잭슨은 이 새로운 정치 연합의 중심 인물로서, 전시 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질서 있는 회복을 이끌었다. | |||
1960년에는 주권연합 내에서 남부 보수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조지 월리스 (CLBI)|조지 월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월리스는 ‘전시 비상령’을 이유로 1964년 대선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주요 언론 기관을 국유화했다. 이에 반발한 오대호 주변 주(미시간,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는 연방에서의 이탈을 선언하고 [[오대호 정부 (CLBI)|오대호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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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6일 (월) 22:5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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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미합중국(영어: United States of America, USA), 약칭 미국(영어: America)은 북아메리카에 존재했던 연방제 공화국이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건국된 미합중국은 1800년대 두각을 드러내며 영토를 확장했다. 1860년대에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산업화 중심의 북부 간에 노예제 확대 문제를 두고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지만 미국 내에서 인종 간의 갈등은 여전히 문제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에 패배하면서 미국은 몰락했고, 전후 국토의 6할을 잃었다. 3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잃었던 고토 수복에 성공했고, 이후 미연합국이 출범하면서 전신이 되었다.
역사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932년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당선되었지만, 그의 뉴딜 정책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초기에는 공공사업진흥국(WPA)과 농업조정국(AAA)등의 신설로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으나, 급진적인 재정 확대에 대한 회의감은 미국 보수층뿐 아니라 중도층까지도 자극했다. 특히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행한 제1차 5개년 계획이 수백만의 아사자를 낳으며 실패한 것이 알려지면서, “정부 개입” 자체에 대한 반감이 미국 사회에 깊게 자리 잡았다. 루스벨트의 좌파 개혁은 “미국판 볼셰비즘”이라는 비난까지 받았고, 이에 따라 193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무려 80석을 추가 확보하며 하원 주도권을 탈환하게 된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었다. 특히 남부 출신의 보수 민주당원들, 일명 딕시크랫은 연방정부의 권한 확장을 불신하며 뉴딜 법안에 반복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로 인해 루스벨트의 정치적 기반은 빠르게 약화되었고, 그는 1940년 3선 도전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는 뉴딜 정책의 핵심 설계자이자 절친한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를 민주당 대선후보로 밀었지만, 보수 성향의 언론과 산업계, 그리고 월스트리트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온건 보수 성향의 공화당 후보 토머스 듀이에게 패하고 말았다.
듀이 행정부는 경제자유주의와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강화했지만, 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은 이미 콘월 해안에 독일군이 상륙하면서 패색이 짙었고, 스탈린이 체결한 독소 불가침 조약은 모스크바 방어 실패 이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미국은 외교적 고립주의를 고수하다 전쟁에 휘말렸고, 1942년 이후 태평양 전선과 대서양 전선 양방향에서 고전했다.
1944년 대선에서는 대통령 듀이가 전시 지도자의 연속성을 호소했지만, 민주당은 루스벨트 정권의 체계적 정비 능력을 회상시키며 제임스 A. 팔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헨리 A. 월리스가 급진 좌파 성향의 진보당을 창당하며 표를 분산시켰고, 이로 인해 듀이가 재선되었다. 하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독일군이 캐나다를 통해 뉴욕 북부까지 진출하는 상황에 이르자, 미국의 국내 정치 구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4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해리 S. 트루먼을 전면에 내세워 복귀를 노렸고, 보수 공화당의 상징인 로버트 A. 태프트와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선거는 정당 정치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막이었다. 남부의 조지 S. 패튼 장군이 '국민당(National Party)을 창당하고 강경한 반공, 반독 노선을 주장하면서 남부 유권자들을 흡수했고, 좌파 유권자들은 월리스의 진보당에 결집했다. 선거 결과 트루먼은 간신히 승리했으나, 국내 정치 지형은 완전히 파편화되었다.
트루먼은 독일군의 상륙 이후 수도를 워싱턴 D.C.에서 덴버로 이전하고 “산맥 방어선” 구축했으나, 이미 전략 자산의 상당수가 파괴된 상황이었다. 1949년 내슈빌이 함락되면서 여론은 급속도로 반전했고, 결국 같은 해 가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종전 협정[3]에 서명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패전국이 되었다.
패전 직후 트루먼은 참전 결정과 전략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임기 도중 사임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버튼 K. 휠러는 1952년까지 위기 대응에 집중했으나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그 해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신진 정치인 에버릿 덕슨이 승리했으나, 민주당, 진보당, 국민당이 각각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4개 정당이 본선에서 의미 있는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956년 대선에서는 이 같은 정치 혼란 속에 신생 진보당과 국민당을 주축으로 군소 정당들이 주권연합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며 반민주·반공화당 전선을 구축했고, 헨리 M.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선된 헨리 M. 잭슨 대통령은 “강한 연방, 회복하는 경제, 존엄한 평화”를 기치로 내세우며 미국 재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주권연합은 전쟁 패배 이후 정치적 신뢰를 잃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대체해 급부상했으며, 잭슨은 이 새로운 정치 연합의 중심 인물로서, 전시 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질서 있는 회복을 이끌었다.
1960년에는 주권연합 내에서 남부 보수파가 주도권을 장악하며 조지 월리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월리스는 ‘전시 비상령’을 이유로 1964년 대선을 무기한 연기했으며, 야당 활동을 금지하고 주요 언론 기관을 국유화했다. 이에 반발한 오대호 주변 주(미시간, 위스콘신, 일리노이 등)는 연방에서의 이탈을 선언하고 오대호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정치
참고
비고(Obsidian)
외부 문서
- ↑ 이스트 코스트(East Coast) 지역은 전역이 국가판무관부에 합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상징적인 일부 도시들은 독일식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로, 뉴욕(New York)이 노이 이오르크(Neu Iork)로, 워싱턴 D.C.(Washington D.C.)가 비스마르크슈타트(Bismarckstadt)로 개칭된 것이 있다.
- ↑ 임기 도중 사임
- ↑ 1949년 6월 동안 워싱턴 D.C.에서 일본측과 독일측이 영토 분활에 대해 협의했고, 최종 종전 확정 조약은 각각의 점령지인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 8월 13일, 생방송에서 공동으로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