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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고 한다. 매 한 번 든 적이 없었던 모양. 가족들한테는 그리도 온화한 사람이 정치범들한테는 원 역사의 중앙정보부 대공분실 마냥 고문을 잘도 했다(...)<ref>직접 고문한 것은 아니다. |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고 한다. 매 한 번 든 적이 없었던 모양. 가족들한테는 그리도 온화한 사람이 정치범들한테는 원 역사의 중앙정보부 대공분실 마냥 고문을 잘도 했다(...)<ref>직접 고문한 것은 아니다. | ||
다만 고문을 명령했을 뿐이지... </ref> | 다만 고문을 명령했을 뿐이지... </ref> <del>그러니까 이걸 우린 양심이 없다라고 하기로...</de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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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9일 (수) 10:5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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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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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령 만주 제4대 민정장관 라정남 Jeong-nam La | |
본명 | 라뇌초 |
출생 | 1924년 3월 20일 |
![]() (現 ![]() | |
국적 | ![]() ![]() |
사망 | 1986년 7월 17일 (향년 62세) |
한국령 만주 요동도 심양시 북구 세원대로 | |
직업 | 정치인, 공무원 |
임기 | 중화인민공화국 요령성 조양현 부서기 |
1969년 ~ 1970년 | |
한국령 만주 초대 경무차장 | |
1970년 ~ 1974년 | |
한국령 만주 3대 교육부장 | |
1974년 ~ 1977년 | |
한국령 만주 5대 민정차관 겸 경무부장 | |
1977년 ~ 1985년 | |
한국령 만주 4대 민정장관 | |
1985년 ~ 198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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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924년 3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 요령성 조양현에서 태어났다. 공부는 매우 잘 했지만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밝아 칭화대, 베이징대, 연변대에서 학석사를 취득하였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조양현 부서기에 임명되었다. 중공측 문서에 따르면 라정남은 행정능력이 좋고 자기관리에 철저하여 실수 한 번 안 했지만 사상적으로는 그다지 열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46세가 되던 해에 동아시아 전쟁이 일어나 한국군이 조양현을 점령하게 되었다. 마침 그는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한국군 군정사령부에 협조하며 군정사령관 채명신의 신임을 얻었다.
한국령 만주의 성립 이후에는 초대 군정장관으로 취임한 채명신에 의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부의 2인자인 경무차장에 임명되었다. 라정남은 중국 민족주의자의 반한 운동을 탄압하면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체포된 반한분자를 전향시켜 스파이로 활용하거나 전향을 거부한 반한분자는 가족까지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동시에 좋은 행정능력을 보여준 라정남은 경무차장, 교육부장, 민정차관 겸 경무부장 등을 거치면서 한국 정부로부터는 신임을, 중국의 좌익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증오를 쌓아갔다. 이것은 한국 정부가 그를 한국령 만주에서 만주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이자 한국인인 군정장관에 이은 2인자인 민정장관에 임명하도록 만들었지만 동시에 중국공산당 동북지부가 그를 제거 대상 1순위로 두도록 만들었다.
1985년 12월, 라정남은 그토록 고대하던 민정장관에 임명되었다.[2] 하지만 1년도 안 된 1986년 7월 17일, 경호원 중 한 명이 숨겨놨던 수류탄을 터뜨려 중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62세. 사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책
채명신이 군정장관을 맡던 시절에는 채명신이 민사작전을 매우 중시하였고 당시 직책이 경무부의 콩라인인 경무차장이었던지라 큰 존재감은 없었다. 교육부장 시기에는 만주의 사학자들을 포섭하여 역사적으로 한국과 만주는 하나였다는 '한만일체론'을 만들어내 한국의 만주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였고 교과서에는 한국군을 '해방군'으로, 구 중공을 '억압자'로, 한국의 만주 지배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묘사하도록 했다. 또한 기존의 한국의 '국민의례'를 모방하여 모든 학생들이 '대한공민[3]의 맹세'를 외우게 하였다.
하나, 우리들은 대한민국의 공민입니다. 둘, 우리들은 마음을 모아 대한민국에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셋,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공민이 되겠습니다. |
대한공민의 맹세 |
쭉 읽다 보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조선에 썼던 정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정답이다. 라정남이 교육정책을 설계할 때 일제의 통치 정책을 적극 참고했기 때문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민정차관 겸 경무부장에 임명된 후부터다. 한국 역사책을 뒤지던 그는 '오가작통법'을 알게되었고 곧바로 민정ㆍ군정 장관에게 건의하여 시행한다.[4]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한 집에서라도 정치범이 나오면 다섯 집을 함께 처벌했다. 이는 주민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만들었다. 정치범은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하였으며 전향한 정치범은 스파이로 활용했다. 또한 경무부 휘하에 '특임단'을 편제하여 한국의 만주 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사들을 포섭하거나 암살했다.
평가
매우 크게 갈린다. 라정남이 한국령 만주의 민정장관 신분이었던 만큼 한국 정부는 나름 대접을 한다. 사후 무궁화 대훈장 다음가는 등급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매년 내무부장관 주최로 간소한 추도식이 열린다.
서중국에서의 평가는 최악이다. 한국에서 민족반역자의 대명사가 이완용이라면 서중국에서는 라정남이다. 서중국의 초ㆍ중등 교과서에는 '모범 군인'인 레이펑과 비교되며 등장한다.[5]
상훈
- 신계훈장 을지장: 신계훈장은 대한민국의 동아시아 전쟁 승전 기념 겸 영토 확장 기념을 위해 제정된 훈장으로 을지장은 광개토장 다음으로 높다. 한국 군정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1971년에 수여받았다. 1만 평의 농지와 현재 가치 환산 50만 아태달러[6]를 따로 받았다.
- 보국훈장 통일장: 보국훈장의 최고등급 훈장으로,빨치산 토벌과 치안 확보의 공을 인정받아 1985년에 경무부장 임기를 마치는 동시에 수여받았다.
-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민훈장의 최고등급 훈장으로, 암살 이후 추서되었다.
가족
아내 소여원(1925년생)은 흑룡강성 출신으로 1950년 결혼했다. 라정남과 소여원은 2남 2녀를 두었다. 첫째 라우재(1952년생)는 사업을 하여 재계 22위인 라우그룹 창업주가 되었고 둘째 라은희(1954년생)는 심양미대 교수가 되었으며 라은희의 쌍둥이 동생인 셋째 라현미(1954년생)는 소설가, 수필가가 되었고 넷째 라금형(1955년생)은 부산으로 이사해 부산대학교병원 원장이 되었다. 라금형의 막내딸인 라하연은 정치인이 되었다.
여담
- 원래는 종교가 없었지만 한국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의 고위직에 개신교도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즉시 개신교로 개종했다. 진짜 신앙이 있어서 개신교도가 된 것은 아닌 셈. 그와 대조적으로 손녀 라하연은 독실한 개신교도다.
-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고 한다. 매 한 번 든 적이 없었던 모양. 가족들한테는 그리도 온화한 사람이 정치범들한테는 원 역사의 중앙정보부 대공분실 마냥 고문을 잘도 했다(...)[7]
그러니까 이걸 우린 양심이 없다라고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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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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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 1967 - 1970 | 정계 입문 |
무소속 | 1970 - 1971 | 통일전쟁으로 탈당 |
1971 - 1986 | 입당,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