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일상 속 사람들)/역사


개요


2012년 MBC 제18대 대통령 선거개표방송에서 나온 대한민국의 현대사 (1분 14초)[1]

(히스토리 채널)south korea a nation to watch

유튜브 영상 '대한민국의 기적 - 한국을 아십니까?'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만큼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겪은 국가.

대한민국일제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해방 정국 속에서 벌어진 혼란한 시국 아래에서 냉전 초기의 극도의 이념 대립의 중심 속에 정부를 세웠다. 이후 6.25 전쟁을 거쳐 나라 전체가 극빈함에 시달렸으며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몰아냈으나, 그 후 세워진 제2공화국박정희군사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제3공화국을 세움에 따라 박정희, 김종필로 32년동안 이어지는 군사 독재 정권이 시작되었고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거센 요구가 계속됨에 따라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을 거쳐 6.29 선언에 따른 8차 개헌을 통해서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석달만에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을 완전히 해체시키면서 군부 독재와 그 잔해는 완벽하게 끝이 나게 된다.

그 와중에도 경제 개발을 시작하여 GDP 1만 달러 돌파, OECD 가입 등으로 1990년대 중반은 경제 부흥으로 대한민국의 자신감이 가장 부풀어올랐던 시기였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충격을 받은 뒤, 한국 국민들은 언젠가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부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2만 달러대까지 성장한 뒤 현재는 3만 달러대 돌파를 앞두었으며, 지금까지는 탄탄한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민주화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으며 21세기에 들어서 선진국으로 들어선 몇 안 되는 국가이다. 또한, 원조를 받던 수원국에서 원조를 주는 공여국으로 바뀐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시대가 빠르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면서 많은 사회 문제들이 생겼다. 그리고, 조금씩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내부에서 여러가지로 해결해야 될 산적한 문제들이 많이 사회 밑바탕에 남아있다.

시기별

1910년대 ~ 1940년대

35년 간의 고통스러운 일제강점기, 그리고 8.15 광복신탁통치, 미군정 시대


대한제국경술국치로 주권을 상실한 뒤,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30~40년 동안 수난과 고통의 일제강점기 시대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1945년 연합군의 몰락 작전 실행으로 오사카와 나고야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함으로써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승전국들이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에서 합의한 바대로 해방과 동시에 38도선이 그어짐에 따라 한반도는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둘로 점령되게 되었다. 여운형과 좌우익의 각 인사들이 모여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부정되었으며 38도선 이북 역시 소련군정의 정치가 계속 되고 있었다.

한반도 전체가 신탁통치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급속한 이념의 대립에 따른 분단의 불안감, 여러 정치세력의 투쟁과 정적에 대한 무력행사, 무질서한 경제 등 사회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 등이 있었으나 유엔총회 후 38도선 이남은 소련의 38도선 이북에 대한 총선거 반대에 따른 유엔의 결정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했고 제헌의회를 구성, 의회 간선제를 통해서 미군정한국민주당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의 수립이 당면 과제로 부각되자, 국내외 독립지사 29명이 1919년 4월 10일 밤, 중국 상하이의 허름한 셋집에 모여서 그들의 모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1일, 역사적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국호를 무엇으로 정하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이 짧은 기간 안에 망했으므로 '대한' 대신 '조선'으로 칭하자."라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의견이 임정 요인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한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 열린 1948년 7월의 제헌 국회에서도 대한·조선·고려 등의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투표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이미 자유조선에서 '조선'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탓도 있긴 했었다. (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그리고,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확정하였다.

이에 반응해 38도선 북부에서는 소련 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일성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워 대한민국과 대결 양상을 벌였다.

분단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이 남북을 하나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미소 양국의 이해관계와 이승만, 김일성으로 양분되어 만들어진 남북 분단 체제를 바꿀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일성 둘 다에게 거부당하고 중도 성향의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이 하나 둘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되자, 통일된 한국을 만들려는 노력은 사그라들게 되었고, 남북은 각각 군대를 창설해 38도선을 경계로 중소규모의 국지전을 벌이게 되는 위험한 상황을 지속하게 되었다.

1950년대

끔찍한 6.25 전쟁과 이념전쟁, 그리고 최빈국으로 추락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5년 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 6.25 전쟁을 겪게 된다. 여러가지 요인이 겹친 덕에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패망시키고 승전하였으나, 6.25 전쟁은 수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이 시기의 가난함은 한강의 기적 참고. 1961년 쿠데타 직후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된 기사를 보면 말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전후 상황을 알 수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토대로 공산화된 지역의 자본주의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았고, 이의 선례가 된 대한민국을 덜레스 플랜 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적, 기술적인 지원을 쏟아 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에는 먹을 거리가 없어서 자기 몸의 때을 먹었다는 증언도 있을정도로 너무나도 끔찍했다. [1].

1953년, 종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 대한민국은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백두산 일대에 철책을 치고, 군사분계선을 지정한다. 이후 이 군사분계선은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 출범으로 연해주 인근은 데탕트의 일환으로 철거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군사분계선은 이 때부터 2017년 현재에 이른다. 한편, 패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세력은 압록강을 넘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한다. 이들은 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아 동북 3성 일대에 조선족 자치령, 이하 자유조선을 세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 너머로 무수한 도발 행위를 하고 있다.

1960년대 ~ 1970년대

피의 4.19 혁명5.16 쿠데타, 급속한 경제성장, 6.3 항쟁, 부마민주항쟁 등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10월 유신 친위 쿠데타

이승만 정권은 개헌을 반복하며 집권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3.15 부정선거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2]하게 되고 장면을 행정부 수반 총리, 윤보선을 군통수권자 대통령으로 4.19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제2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제2공화국 참조.

그러나,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수천여명의 군인, 장교들을 선동하여 5.16 쿠데타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박정희 소장은 제2공화국에서 준비해두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가져다가 내포적 공업화로 변질시키고 미국몰래 화폐개혁을 저질렀다가 산업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등 여러 실수를 거듭, 1961~1963, 3년 가까이 정치인을 탄압하는 등 폭력적인 군사독재를 펼치며 집권 연장을 준비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참고.

3년간의 통치를 통해 정치 기반을 다진 박정희는 정치자금을 받아서 선거를 준비하였고 상대의 중공몰이를 역으로 이용, 전라도와 경상도 농민들의 표를 받아 마침내 1963년 12월 국민 선거를 통해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대일차관기업의 부실화와 자금문제는 골칫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수교에 의한 물품과 기술의 유무상 공급, 고강도 노동 및 월남전 참전 특수, 제2공화국에서 준비해두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와는 다른 중공업 중심의 개발정책을 미국의 반대에도 추진한 것에 따라 경제 규모는 커졌고 노동집약형 경공업과 조선, 자동차 등 노동집약형 중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제3공화국 참고.

70년대에 이르면 미국은 베트남을 상대로 처음부터 무리를 두고 있었던 행동을 실행하기 시작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상하이 공동혁명이 발표되는 등 냉전이 종식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에비해 박정희는 내적으로 경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는 오늘날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따라하고 UN에서도 아프리카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정한 새마을운동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내며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으나 이 와중에 잡다한 이유를 들어 비상계엄령을 통해 출판, 언론, 방송에 대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정치활동, 집회의 자유를 불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 52%의 득표로 7대 대통령에 취임해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헌법의 선포를 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로 전 세계를 강타한 1차 오일쇼크의 발생과 그를 극복하기 위해 건설업체들이 중동지역에 진출함으로써 오일달러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1970년대에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1977년에는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하며 신흥공업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종신집권의 욕구를 실현했다고 평가받는 10월 유신은 곧, 각종 반발로 강하게 이어졌으며 유신독재 정부는 긴급조치들을 선포해 이를 탄압했다. 그러나 YH 사건 등으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떨어진 와중에, 박정희는 충복에게 총을 맞고 숨진다. 제4공화국 참고.

어두운 측면으로는 군사독재시대 그 자체와 사회문제에 대한 함구령, 문화에 대한 검열언론 탄압이 있다. 제2공화국 시대에 이르러 미군정기 및 6.25 전쟁 시절에 있었던 양민학살과 정치범죄들에 대한 국민들의 조사요구가 커져갔으나 군사쿠데타로 독재정부가 집권한 이후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묻혀버렸고 학살 • 범죄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피해자임에도 반정부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시기에는 지금으로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문화탄압하고 시민에게 폭력, 그리고 군인들이 거리에 나와서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박정희 정권 이후의 군사독재정권 시대에도 이런 기조는 유지되었으나 이 시기가 더욱 혹독하였다. 결국, 군사정권들의 암울한 역사 덮어두기는 21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진상조사가 벌어져서 소수 사례가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다수의 금지곡들이 생겨났으며 일반인에 대해서도 두발 규제를 하였고 복장 규제를 하였다. 여성들의 의복을 이슬람 국가처럼 규제한 것이 대표적 의복 규제라 하겠다. 대표적인 것이 미니스커트 길이를 단속하기 위해서 무릎 위를 자로 잰 것이다.

이에 따른 병폐도 상당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가 존중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이끈 제조업의 주역인 노동자의 처우는 심각하게 나빴다. 이에 대해 1970년 평화시장에서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널리 알려져있다. 정확히는 전태일 본인은 당시 기준으로 높은 월급을 받고 본인또한 본인의 처우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으나 나이어린 여공들의 처우를 지적하는 편지를 박정희에게 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중간에 검열로 인해 끝내 전해지지 못하고 전태일 열사는 분신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또한, 한일협정으로 받은 배상금은 도의적으로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돌아갈 몫이었으나 군사정부는 이를 포항제철소 등 국가기반시설의 건설에 썼으며 이후 포스코 등이 한국경제의 발전에 여러모로 큰 공헌을 하게 되나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내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도의적인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할 수 있다. 때문에 그 후로 한국의 좌파에서는 군사정권이 착복했으니 제대로 배상받은게 아니라며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이 끝난게 아니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으며 이는 현재 최악으로 치닫은 한일관계의 원인 중 하나다. 이런 행위를 해놓고도 경제발전에 성공 못했으면...[3]

그저, 결과만을 위해 탈법적인 수단마저 가리지 않고 얻어낸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할지 각 개인에게 맡긴다. 다만, 영국 등 서구열강과 일본의 산업화 과정도 역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1980년대

하나회12.12 쿠데타5.18 광주 민주항쟁, 그리고 26년의 군사독재정권을 끝낸 6월 항쟁제5공화국 시대

1980년대의 사건
시기 사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항쟁
1981년 5월 28일 국풍81
1981년 9월 30일 88올림픽고속도로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 해제
1982년 3월 27일 한국프로야구가 출범
1983년 1월 11일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전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
1983년 8월 3일 삼성반도체, 64KB D램 개발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1984년 5월 1일 과천 서울대공원 개원
1984년 9월 6일 김종필, 대통령 전후 처음으로 일본 방문
1985년 9월 30일 63빌딩 개장
1986년 5월 3일 5.3 인천사태
1986년 9월 20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7월 5일 이한열 사망 사건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김영삼 당선
1988년 3월 9일 군내 사조직 척결
1988년 8월 13일 금융 실명제 실시
1988년 8월 15일 문민정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추진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1988년 9월 17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1989년 5월 10일 이철규 의문사 사건
1989년 7월 12일 롯데월드 개장
1989년 11월 1일 대한민국과 폴란드가 외교관계를 수립
1989년 11월 3일 우지 파동

10.26 사태가 터짐에 따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군대 내 불법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가 헌정 사상 제 2의 군사 쿠데타을 일으켰고, 당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필두로 한 일부 장성들이 쿠데타 진압 작전에 나서 하나회 세력은 제압되어 처형된다.

이후 최규하는 진압 작전에 나섰던 장성들과 힘을 모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아닌 3공화국 시절과 같이 직선제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를 파면하고, 장태완 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진기 헌병감을 긴급체포한 뒤 김종필을 대통령으로 재선출한다.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김종필의 입을 빌려 5.17 비상계엄 을 선포한다.

1980년대 말, 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 정책과 시장경제로의 전환 등에 힘입어 고성장 기조가 계속해서 유지되었고 여기에 엔고에 의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시대의 이른바 삼저호황까지 겹치며 80년대 말~90년대 초중반까지의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 호황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1986년에는 서울에서 제 10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당초 1970년에 개최하기로 했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개최권을 반납함에 따라 태국 방콕에서 대신 개최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종 악법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난무했다. 정치풍토쇄신특별조치법, 제3자개입금지법 등이 제정되었으며, 반공법 폐지 이후 사회안전법을 만들어 정적이었던 정치인사들과 무고한 국민들을 억압하였다. 이러한 악법들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는 도중에 결정적으로 1986년 7월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터졌으며,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역사다시보기 -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김종필 대통령을 허수아비 삼은 군사정권이 헌법 중 대통령 간접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이제껏 쌓여왔던 국민들의 분노가 강하게 폭발했고 이는 26년간의 군사독재정권을 종결시키도록 만들었다.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이후 여러 독재관련 피해 사건들이 재심을 받은 뒤 무죄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현재까지 한국 정치와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1988년은 격변의 시대였다. 제 5공화국이 출범하며 군내 사조직 척결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시작을 알렸고, 금융 실명제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광복절에 경복궁을 가로막고 있던 일제의 잔재를 폭파 시키는 것으로 올림픽 시작 전 일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 160개국이 참가하게 되었고, 특히 당시 동서냉전으로 갈등과 분쟁을 벌여왔던 미국소련, 그리고 서유럽동유럽 국가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서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은 종합 4위를 달성하면서 주최국으로서의 강한 저력을 발휘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더욱 선진화되고 불굴의 신화를 입증하는 한강의 기적과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부터 주식시장에 대한 제한조치가 풀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공산권의 몰락에도 일정 영향을 끼쳤는데, 미국-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서구권과 동구권 국가들은 몇 년 동안 올림픽에서 서로 마주하지 못하다가 서울에서 결국 올림픽에 함께 모여서 참가하였고, 동구권의 국가들은 직접 '서울'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한민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8.15 광복이 되었지만 6.25 전쟁으로 박살났고, 1950년~1960년쯤에는 거지들이 들끓는 서울이었는데 전혀 딴판으로 변한 것이었다.

1990년대

OECD 가입과 제 1의 사고공화국, 그리고 끔찍한 1997년 외환 위기헌정 역사상 두번째 평화적 정권교체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비롯한 초대형 사고가 잇달아터지자, 미래의 정부는 언론으로부터 사고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1990년대, 첫번째 문민정부로 꼽히는 김영삼 정부와 그 후 미래의 정부의 시대를 열게 된 이종찬 정부는 민주화와 더불어 군사독재정권 시대에 누적되어있던 여러가지 어두운 문제점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미성숙한 국회에서 일어난 병폐,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으로 대표되는 사고 공화국이 바로 그 것이다. 그리고, 1993년에는 대전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1997년, 이종찬 정권은 IMF 사태[4]로 대미를 장식했고, 그 이후 15대 대선이 실시되어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고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권영길 대통령의 권영길 정부가 그 뒤를 이어가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두번째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이러한 부분은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까지 "현 시대의 정치"에 가깝다.

1999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파급력을 호칭하는 '한류'라는 단어가 중국의 언론 등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류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거론하는 고유명사로 각인된다.

2000년대

IMF 극복기와 문화부흥, 그리고 한류의 유행, 그러나 저성장과 취업난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

한국 영화 산업도 2000년대 들어서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5]

예를 들어,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신세대들과 과거 가난을 겪으며 자라거나 보수적인 사상에 익숙한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들간의 세대갈등부터 지역개발의 차이에서 오는 지역갈등같이 사회문제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나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성장을 위한 지나친 경쟁사회로 인해 일어나는 인간소외현상, 지나친 개발로 인한 자연파괴 등이 있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에서 FIFA 월드컵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종합순위 4위를 달성하면서 4강 신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같은 해에 부산에서는 제 14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였다. 2000년대 들어 1인당 GDP는 2만 달러까지 진입하게 된다.


ペ・ヨンジュンBYJ, Ardent love?! Report Image!

그리고, 2000년대 초 일본에서도 겨울 연가를 시작으로 일본의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배용준의 욘사마 신드롬과 함께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급속도로 영향력이 커지면서 일본에서도 한류라는 단어가 전해지게 된다.

2008년에는 2기 북부 신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함경남도 원산시에 춘일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었으나, KDB대우건설의 무단 개발과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발견된 균열에서 괴생명체들이 출현한다. 이로 인해 재개발중이던 원산 구도심 내 거주 시민들 다수가 사망하고, 정부는 이 일대를 특수경계지역으로 선포하며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의 비무장지대와 같이 철통같은 격리를 지시한다.

2010년대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과도기. 사고공화국의 재림과 헌정 사상 최악의 민간인 국정농단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그로 인한 6월 항쟁을 뛰어넘는 촛불집회최초의 대통령 파면. 그리고 제5공화국세번째 정권교체. 그리고 계속되는 저성장과 취업난

사고공화국의 정점을 찍는 해양사고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역대 최악의 민간인 국정농단 정치 스캔들로 얼룩지다.

2010년대 한국은 놀라운 경제성장 덕분에 국제 사회에서 엄연한 선진국으로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워낙에 발전 속도가 빠르다 보니 그로 인한 후유증이 곳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11년 8월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했으며 2012년에는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2014년에는 인천광역시에서 제 17회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으며 2018년에는 강원도 평창군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2010년에서 2011년 사이에는 K-POP을 중심으로 신한류라는 단어도 등장하였다. 특히 2012년에는 싸이강남스타일이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게 되었고 한국 음악 역사상 처음으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음악이 전세계의 음반 시장을 뒤흔들었다고 하나, 일부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중남미,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일부에서는 이미 퍼져있던 한류가 더욱 확산되었다.

2010년 11월 11일에는 G20 정상회의가, 2012년 3월 26일에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가 개막하면서 경제와 안보분야 국제회의에서도 의장국이 되었다. 누가 뭐래도 국위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경제적으로는 2011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저축은행 중 한 곳인 삼화저축은행PF로 인한 부실을 털어내지 못해서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되는 등 다수의 상호저축은행들이 건설사들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2012년 3월 15일한미 FTA가 발효되었다.

2012년 9월 15일에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건설 도중 차원 균열이 발생하여 대피 소동이 발생한다. 하지만 원산 사태때와는 달리 다른 차원의 사람들과 소통의 장이 열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국방부만 대응하던 차원 문제를 외교통상부와 인천국제공항공사도 대응할 수 있게 대통령령이 개정되었다.

이후 국방부의 차원 균열 조사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를 필두로 한 국제연합 외교 부처들의 차원 외교 회담으로 차원 교류의 서막이 오른다.


여러 안전불감증 관련 사고[6], 중공의 뒤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자유조선의 위협 재증대에 더해, 장기적 불경기로 인하여 사회적인 갈등이 심화되었다.

2016년 말에는 사상 초유의 민간인의 국정농단 정치 스캔들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대한민국이 추구했던 성장중심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나게 되었다. 2016년 12월 3일 6월 항쟁의 참여인원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사 최대 인원인 232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어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함으로써 12월 9일에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어 공식적으로 직무가 정지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명의 만장일치탄핵이 인용되어 박근혜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2017년 5월 9일, 조기 대선으로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고 기호 1번 더불어민주당문영현 후보가 득표율 41.1%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헌정 사상 4번째 정권교체이뤄냈다. 이는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 차이로 당선되었으며, 이전까지는 531만 7,708표 차이를 기록한 17대 대선이었지만, 이번 19대 대선에서 1, 2위간의 득표 차이가 557만 951표를 기록하면서 갱신됐다.

대한민국에서 개최했던 주요 국제 행사

대한민국의 정치사

관련 링크

(한국어 위키백과)한국의 역사 (영어 위키백과)한국의 역사

관련 문서

  1. 영상 속에서 나오는 음악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오프닝이다.
  2. 당시 언론계부터 학계, 교육계를 비롯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이 망명이라 표현한다. 심지어 이승만 본인도 하야 직전에 학생 대표들과 면담하며 원하는 것이 내가 망명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3. 여담으로, 이 당시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은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의 절반으로, 한국경제 발전에 요긴하게 쓰였다.
  4. [[2]]
  5. 이 덕분에 1940~50년대 태생이신 분들은 전 세계에서 흔치않게 농업사회, 공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모두 겪은 케이스로 불리기도.
  6. 대표적으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있다. 그리고, 사고 공화국의 재림이라는 말을 빼놓을 수가 없다. 4.16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아산 오피스텔 붕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