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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國
나는 기숙사 옥상에 올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저녁의 스산한 바람이 내 볼을 스쳤다. 저 멀리 긴자의 밝은 네온사인들이 보였다. 나는 그 핑크색으로 빛나는 불빛들을 눈요기 삼아 주머니에서 한 갑을 더 꺼내 피웠다. 옥상에는 국기 게양대가 있었는데 그 아래의 적당한 높이의 턱이 반질반질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앉기 좋았다. 가방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산 휴대용 라디오를 꺼내 저녁 뉴스 주파수로 맞추었다.
"...학생들의 휴학이 잇따라 심화되는 가운데... 고노에 수상께서는..."
어제도 들은 내용이다. 내 룸메이트는 어제도 이 소식을 듣고 휴학하는 학생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자기 앞에서 휴학이니 혁명이니 떠드는 자식이 있다면 한 대 패주겠다고 얘기했다.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회주의니, 나치즘이니. 잘 아는 바가 없다. 나는 지리학과를 나왔다. 어릴 때부터 땅바닥에 세계 지도를 그리거나 자연 경관을 담은 엽서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는 배낭을 싸 홀로 조선 반도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던 때라 가족들이 만류했지만 금강산이란 것을 한번 보려고 다녀왔다. 그때도 난 정치라는 것을 들으면 하나도 몰랐다. 다만 그때도 총리의 이름이 고노에였던 것은 기억이 난다.
기숙사는 학교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니다. 전쟁 때는 군용 병원으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한 부자가 건물을 매입해 기숙사로 만들었다. 모든 기숙사생은 남자이며 사감 역시 퇴직한 늙은 교사다. 2인 1실을 쓰고 있고 방은 5평 정도이다. 2명에서 쓰기엔 좀 좁다고 할 수 있지만 기숙사비가 비싸진 않은 편이라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특히 내 방은 시내 쪽으로 탁 트인 시야라 더 좋다.
라디오에서 하는 가요 무대를 기다리다가 담배가 어느새 동났다.
"별 수 없지."
텅 빈 담뱃값을 구겨 던지고는 라디오를 챙겨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들어와 보니 마침 9시였다. 기숙사 통금 시간이 10시까지이고 룸메이트는 항상 어디서 뭘 하는진 모르지만 통금 시간에 맞춰 들어오니 적어도 1시간은 내가 방을 혼자 쓸 수 있었다. 난 작은 책장에서 지도집을 꺼내 좀 보다가 물을 데워 우롱차를 탔다. 담배도 피웠는데도 차를 마셔서 그런지 노곤해졌다. 여름임에도 창문을 열어 놓으니 스산한 바람은 방까지 흘러 들어왔다. 나는 지도집을 안대 삼아 침대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룸메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들었다.
"젠장, 좀 깨워달라고 했잖아. 이노우에 군. 늙다리 교수 강의에 이번에도 지각하면 큰 일이라고."
룸메이트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며 내게 투덜거렸다.
"나한테 깨워달라 할 거면 알람 시계는 왜 산거야? 게다가 밤 늦게까지 안 자니까 늦잠을 자는거지. 아직 9시 10분이야. 서둘러서 가면 10시 전까진 학교에 갈 수 있을거야."
적당한 말로 타일러 주고는 나는 방을 나왔다. 오전까지는 강의가 없어 친구나 좀 만나러 골목 카페로 갔다. 물론 사감에게 들키지 않으려 룸메에게 내가 방에 있는 척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긴 했다.
"이쪽이야! 타카히로!"
저 멀리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보였다. 카페 입구에서 손짓을 하며 내게 소리쳤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며 친구와 함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는 늦은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몇몇 노인들이 있는 자리를 제외하곤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카페의 창가 사이로는 아침 햇살이 비추었다.
"타카히로. 너 여자 소개 받아볼 생각 없어?"
"글쎄. 요즘 대학 다니기도 바빠. 소개 같은 건 좀 무리지 않을까..."
"우리 학과의 곤도 선배 알지? 그 곤도 선배의 여동생이 이번에 우리 학교에 입학했대. 얼굴도 이쁘장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 해서 인기가 많은데 남자 친구가 없나봐. 한번 소개 받아 보는게 어때? 곤도 선배도 너라면 괜찮다고 이미 얘기했어."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로 서빙되었다. 나는 커피에 각설탕을 풀며 잠시 딴청을 피우다가 말했다.
"좋아. 알겠어. 언제 만나면 좋지?"
"다음 주 토요일 오후 1시. 이 카페에서."
"...알겠어."
카페 계산대 위에는 키우는 듯 한 고양이가 라디오를 베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하도 먹은 모양인지 살이 매우 쪘다. 그 옆에는 전축기가 있었는데 번스타인의 앨범이 돌아가고 있었다. 테이블 옆에는 오늘 배달 된 조간신문이 떨어져 있었다.
신문에는 큰 글자로 고노에가 치안출동을 명령했다는 글이 써져 있었다. 노인들은 하나 둘 씩 신문을 가져가 읽었다. 나도 하나 챙겨 읽어 볼까 하다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건 아니다 싶어 친구와 함께 자리를 떴다. 친구는 곧 수업이 있다며 학교로 향했고, 나는 골목을 둘러볼 겸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골목의 구석 담장에는 붉은 글씨로 낙서들이 적혀있었다. 대개는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과 최근 행해지는 동맹휴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내용들이었다.
"뒈져라, 후미마로!"
"대학동맹휴학은 깨어있는 청년의 의무이다!"
...등의 문구였다. 공무원들은 그 담장의 낙서를 지우느라 고생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머리만 아파 이내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저기요. 학생!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안경을 낀 공무원 하나가 나를 불렀다. 30대 초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굉장히 예스러운 말투였다. 장장해보이는 모습과 달리 사무라이 같은 말투를 쓰는 그 모습이 내심 웃기기도 하였다. 그는 나에게 철수세미를 하나 가져다 줄 수 없냐고 물었다.
"학생, 정말 미안한데 이 근처의 잡화점에서 철수세미 좀 하나 구해다 줄 수 있겠소? 개인적으로 사례는 꼭 하겠소."
학교가 이 근처이기도 하고 시간도 여유가 있어 철수세미를 구해다 주었다. 공무원은 연신 고맙다며 꼬릿해보이는 바지에서 구겨진 명함을 건네주었다. 젠장, 강의 들으러 가야 한다.
강의를 듣고 나서 관련 자료를 찾느라 도서관에 갔다. 금방 지도집을 꺼내어 들어 대출 창구로 갔다. 대출 카드를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요전에 안경 쓴 사무라이 공무원의 명함도 같이 집혔다. 대충 지도집을 빌리고 도서관을 나오며 생각하는데 어쩐지 명함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곤도 고이치로..." "곤도..."
우리 학과에도 곤도 선배가 있다. 그리고 그 곤도 선배에게는 여동생이 있다. 이 명함의 주인도 곤도이다. 그 사무라이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어쩐지 곤도 선배와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까 곤도 선배나 친구에게 그 사무라이와 관련이 있는지 물어볼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사례를 핑계 삼아 저녁 쯤에 사무라이에게 연락해 정보를 좀 묻는다던지, 등.
카페 입구의 풍경은 며칠 전과 다르지 않았다. 늦여름의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비스듬히 때리고 있었고, 살찐 고양이는 여전히 전축 옆에서 라디오를 배고 졸고 있었다. 번스타인의 음반은 이번에도 같은 곡, 비제의 아를의 여인 중 '파랑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난 곤도 양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익숙한 테이블에 앉아,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약속은 1시였지만, 시계는 이미 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노우에 타카히로 군?"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시선은 곧 정지했다.
그녀는 교복 같은 단정한 원피스 차림에, 짙은 감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는 정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인상이 고요했다. 눈동자는 깊었다. 어딘가 혼자서 오래 생각하는 사람 같은, 그런 고요함이었다.
"곤도 미사코. 제 이름이에요."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아, 반가워요. 곤도 선배 여동생이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둘은 맞은편에 앉았고, 짧은 인사 후에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미사코는 우유를 넣지 않은 블랙을 마셨고, 나는 습관처럼 각설탕을 두 개나 넣었다.
"지리학과라 했죠? 세계 지도나 풍경을 보는 거 좋아하세요?"
그녀가 가벼이 말을 꺼냈다.
"네, 어릴 때부터요. 지도책 넘기며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어요."
"세계는, 참으로 다양한 풍경을 가졌죠. 그런데, 그 중에서 ‘사라진 풍경’에 관심은 없으세요?"
"...사라진 풍경이요?"
"전쟁으로, 혹은 정치로 인해 지워진 도시들. 원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그 위에 덧칠된 것들. 예컨대, 파리나 바르샤바 같은 곳."
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투는 나긋나긋했지만, 그 내용은 묘하게 무거웠다. 이상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대화를 곁에서 들었다면 단순한 소개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 그런 생각을 깊이 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을 보는 쪽에 가까운 걸요."
"그렇군요. 전 그 반대예요. 없는 것을 보는 사람.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잊히지 말아야 하는 장면들. 사람들도 그렇죠."
그녀는 커피잔을 천천히 들고, 내 눈을 바라봤다.
"잊혀진 사람들에 대해, 타카히로 군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글쎄요... 어렵네요. 전 누굴 잊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결국은… 대부분 다 잊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웃지도,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당신은 기억하는 쪽에 서 있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제가요?"
그 이후로 우리는 몇 번이고 더 만났다. 캠퍼스를 함께 걷고, 책방에 들러 책을 고르고, 가끔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대화 속에서 나는 그녀를 점점 더 알고 싶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봄의 어느 날, 변화의 기류는 학교 안에서도 감지되었다. 학생회는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일부 강의에 대한 동맹휴학을 제안했고, 복도 곳곳에 빨간 전단들이 붙기 시작했다. 대자보에는 "제국주의적 교육을 거부하자"는 구호도 적혀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평소에는 정치 따윈 관심 없던 내 룸메이트마저 들썩이며 말하길, “우리 학교에도 빨갱이들이 숨어 있었던 거야.”
어느 날, 나는 도서관에서 나와 뒷길을 지나던 중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되었다.
미사코였다.
그녀는 학교 담벼락 근처의 공터에서 몇몇 학생들과 무언가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 붉은 전단이 들려 있었고, 주변에 모인 학생들에게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한쪽 벽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지식인은 침묵하지 않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봤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단어— 사회주의자. 그리고 고노에 수상.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반복된 뉴스. 수많은 휴학생들.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간 학생들.
나는 문득, 그녀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아니, 처음부터 가까웠긴 했던 걸까?
며칠 전, 도서관 앞 벤치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낙서를 지우느라 열심이었다. 곤도 고이치로. 사무라이 말투의 공무원, 그리고 곤도 미사코의 친오빠.
"저번에 봤던 학생, 맞지요? 정말 고마웠어요. 제 동생하고도 만나는 듯 하던데요."
"아, 예. 곤도 씨."
그는 익숙한 고개 인사로 반겼다. 내가 처음 받았던 명함 속 모습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였다. 어깨에 작은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눈가엔 미세한 다크서클이 짙어져 있었다.
"시간 괜찮으면... 근처에서 담배라도."
"이것만 지우고 가도 될까요? 일은 일이다 보니까요."
"예, 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낙서를 지우고 우리는 조용한 공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담배를 조금 늦게 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미사코 씨 말인데요."
그는 담배를 들던 손을 멈췄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는, 담뱃재를 한번 털어놓고는 한참을 생각하듯 천천히 말했다.
"미사코는요..."
그는 말을 멈추고 하늘을 봤다. 햇살이 싱그러운 나뭇잎들을 부드럽게 스치고 있었다.
"...작은애 때부터 좀 달랐어요. 남들 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선생님이 말하는 걸 의심했고... 누가 울고 있으면 같이 울던 아이였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을 기억하려 했어요. 신문에 이름도 안 실리는 사람들,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지워진 것들을 붙잡으려고 애쓰던 아이였죠."
그의 말투는 역시 사무라이였지만, 점점 어두워져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이가 붙잡으려는 게 너무 커져버렸어요. 이상한 사상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그는 한 손을 뻗어 라이터를 굳게 쥐었다.
"나는 그게 무섭습니다. 그 아이가 어디까지 갈지, 누구를 잃게 될지... 아니, 언젠가는 저와도 등을 져야 할 거라는 걸 압니다."
"곤도 씨는… 미사코 씨를 설득하려 하진 않나요?"
그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했지요. 수없이. 나름대로 다독이고, 달래보고, 때로는 화도 내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떨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는, 그 아이 앞에서 내가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어요."
나는 그 말에 무거운 침묵으로 답했다. 그가 단지 공무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오빠으로서,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어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곤도 미사코를 만날 때마다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말로는 하지 못한 염려, 체념,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
그 주,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정부는 치안 유지와 질서 회복을 위해 도쿄 시내 전역에 걸쳐 치안출동을 발령했습니다. 모든 대학 캠퍼스는 임시 폐쇄되며, 외부 선동자의 접근이 차단됩니다...
미사코를 만나기 전이라면 그러려니 할 뉴스였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내 삶과 직접 닿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저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선동’, ‘출동’, ‘반체제 세력’ 같은 말들은 내가 사는 세계 밖의 이야기 같았었다. 그러나 미사코를 만나고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 현재, 난 그 뉴스가 계속 신경쓰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녀가 사라졌다.
약속된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기숙사 선배에게 물어봐도 "요즘 학교엔 잘 안 보인다"는 말뿐이었다. 구청으로 찾아가 곤도 씨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치안출동으로 인해 바쁜 모양인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늦은 밤 기숙사 근처 골목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쳤다. 그녀는 검은 마스크에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었고, 손엔 전단지가 든 가방이 들려 있었다.
"...미사코?"
그녀는 순간 움찔하며 돌아봤다. 눈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에 내가 알던 그 맑고 투명한 눈이 아니라, 매일 어디선가 도망치듯 살아가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이노우에 군... 여기서 보면 안 돼요."
"무슨 일이야. 며칠 동안 안 보였잖아. 걱정했어."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출동 조치 이후로, 몇몇 친구들이 체포됐어요. 나는 아직 괜찮지만... 아마 오래 못 버틸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괜히 얽히지 말아요."
"...무슨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려는 전단지를 붙잡았다.
그 순간, 그녀는 내 손을 밀쳐내며 말했다.
"당신은... 나랑 다르잖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도 되잖아. 그냥 평범하게... 조용히 살 수 있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체제와도 싸워야 한다는 걸.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라디오를 끄고 잤다. 아무런 음악도, 뉴스도 없이. 귓가에는 오로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날 이후로 미사코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라디오에서는 비상 속보가 흘러나왔다.
"고노에 수상이 국회로 이동하는 중 괴한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숨졌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C 대학의 재학중인 여성 공산주의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여성. 총격. 공산주의자. 나도 모르게, 미사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이 지났다. 곤도 고이치로 씨와의 연락은 끝내 닿지 않았다. 곤도 선배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기숙사 주변에는 감시가 더 붙기 시작했고, 거리는 자위대원들로 가득 찼다. 신문에는 ‘도쿄 적색 테러 사건’이라는 말이 굵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미사코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의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구도 그녀의 행방을 말할 수 없었다. 누구도 그녀가 정말 그 일을 했는지 증언할 수 없었다.
나는 도서관 책상에 앉아 그녀가 내게 건넸던 수첩을 꺼냈다. 거기엔 짧은 한 줄이 남아 있었다.
"당신은, 사라지는 쪽이 아니라 기억하는 쪽이었으면 해요."
나는 그것을 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끝내, 사라지는 쪽이 되기로 한 것 아닐까. 그것만이 자신이 믿던 것을 지키는 마지막 방법이었다면.
나는 기숙사 옥상에 올랐다. 도쿄의 밤은 언제나처럼 네온사인으로 밝았다. 하지만 그 빛이, 처음으로 차갑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는 하늘로 흩어졌다. 그녀의 목소리처럼, 그녀의 이름처럼.
곤도 미사코.
나는 잊지 않기로 했다. 지워진 사람의 그림자까지도 기억하기로 했다. 끝내 사라졌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은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