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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일본 육군대신


대일본제국 육군 관동군 사령관
대일본제국 제70대 육군대신
다카기 마사오
高木正雄 | Taikagi masuo
출생 1917년 11월 14일
대일본제국 게이쇼호쿠도 싯코쿠군
(現 대일본제국 다이큐현 키비시)
사망 2002년 8월 2일 (향년 84세)
도쿄도 치요다구
국적 일본 일본
재임 기간 대일본제국 육군 관동군 사령관
1961년 3월 18일 ~ 1967년 8월 30일
대일본제국 육군 제17방면군 사령관[1]
1967년 8월 30일 ~ 1969년 10월 26일
대일본제국 육군 제12방면군 사령관[2]
1969년 10월 26일 ~ 1973년 9월 20일
제70대 육군대신
1973년 9월 20일 ~ 1978년 6월 14일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다카기 에이슈
자손 장남 다카기 시반[3]
장녀 다카기 킨에[4]
차녀 모스다 킨료[5]
학력 키비공립보통학교 (졸업)
다이큐사범학교 (졸업)
만주군관학교 (졸업 / 2기)
육군사관학교 (편입 / 75기)
육군대학교 (졸업 / 79기)
신장 약 164cm
종교 불교
군사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75기)
복무 대만주제국 육군
1942년 ~ 1945년
대일본제국 육군
1945년 ~ 2002년
최종계급 원수
주요 보직 관동군 보병제2연대장
관동군 참모장
관동군 사령관
제17방면군 사령관
제12방면군 사령관
병과 보병
주요 보직 지나사변

극동 출정

개요

육군대신 시절. 훈장 착용 사진

다카기 마사오는 일본의 군인이며, 관동군 사령관과 육군대신을 지냈다. 조선 출신 육사 편입생으로서 일본 육군의 최고위직까지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로, 지나사변, 독소전쟁, 극동 출정 등 쟁쟁한 전쟁에 참전하였다. 또 현재까지도 단 3명 뿐인 조선계 육군대신 중 1명이다.

1978년 육군대신에서 물러난뒤 전역 대신 원수로 진급하여 일본 육군의 원로가 되었고, 84세의 나이로 2002년 사망했다.

생애

1917년 11월 14일, 반도의 게이쇼호쿠도(현 다이큐현)의 싯코쿠군에서 태어났다. 조선식 이름은 박정희(朴正熙, ぼくせえき). 그는 원래 군인이 아닌 싯코쿠군 보통학교 교사였으나, 교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군인이 되고자 하였다. 당시 1938년부터 조선인의 일본군 지원병제가 실시됐었음에도, 사병이 아닌 장교가 되고자 했던 그는 막 개교했던 만주국 만주군관학교에 입교를 신청했다. 이때 나이 제한이 걸리게 되자 혈서를 써 입교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입교를 위해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해 이것이 그의 이름이 됐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며 만주국 강덕제에게 직접 하사품을 받을 정도로 성적과 품행이 뛰어나, 만주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4년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 허용과 동시에 조선인 인재들을 육사에 편입시키는 과정에 포함, 육사 75기로 편입했다. 전시였기 때문에 1945년 바로 일본군 소좌로 임관했다. 그의 부대는 다이렌의 관동군으로 배정되었다.

1945년 7월부터 지나사변 전장에 직접 출전하여 참전하였으며, 이때 중국군에게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으로서 불릴 정도로 잘 싸웠다. 1947년 9월 충칭 전투에도 산증인으로서 참전한다. 이후 지나사변이 종결되자 그는 만주로 돌아왔으며, 1948년 지나사변 종군기장과 욱일대수장을 쇼와 덴노에게 직접 수여받고, 관동군 사령관 세지마 류조의 눈에 들면서 "만주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이때 같은 조선 출신이던 시라카와 요시노리[6]와 세지마 파벌에서 만나 교우 관계가 되었다.

1950년 고향으로 잠깐 돌아갔을 때 부인 다카기 에이슈를 만났으며 결혼한 뒤 만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1952년 다이렌에서 장녀 다카기 킨에를 낳았다. 1955년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58년엔 세지마 류조와 함께 극동 출정을 단행해 시베리아 정복에 이바지하며 본격적으로 만주의 실력자를 넘어 도쿄에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가

일본

중국

어록

도시나 마을을 점령해도 주민을 해하지 말라. 사소한 것 하나도 취하지 말고, 부녀자는 보호하라. 우리 황군은 역사를 거쳐 승리만을 거듭했다. 그에 걸맞는 품위를 보여라. 독단적인 행위는 용서치 않는다.
1958년 극동 출정 당시 내린 전진훈
대동아공영의 꿈은 오늘날 너무나 아름답게 이루어졌다. 유색인종이 이토록 높은 권익을 누린 시절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바로 우리 대일본제국, 그리고 그 현인신 폐하의 치세 덕이다. 제군들은 그저 그 하늘과 같은 임금님(大君)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복무하라.
1964년, 관동군 사령관 당시 신병에 대한 훈시
조선은 이제 대일본의 불가분의 일부이며, 또한 대일본의 보석이다. 조선인인 내가 이렇게 육군대신이 되었다. 지금도 조선인은 우리 사회 각처에서 일하고 있다. 조선과 본토는 동조동근. 조선인은 이제 한 나라 지붕 아래 은혜입은 몸이다.
1973년 육군대신 취임사 中
무타구치 렌야 원수의 빛나는 무공으로 인도는 빛을 찾았다. 지금 다시 반역의 무리가 인도를 어둠으로 밀어넣으려 하는 것이다. 이 어둠을 저지함은 그대 병사들에게 달려있다.
1974년 임팔작전 30주년을 맞아 인도전쟁 참전 장병을 격려하며
얄류샨 열도를 무력으로 침공해온다면 뉴욕에 핵 몇발 쏘는 것은 일도 아니다.
1975년 미국과의 얄류샨 열도 분쟁에 대한 발언
  1. 미나미조센(南朝鮮) 담당
  2. 도쿄 담당
  3. 高木志晩
  4. 高木槿惠
  5. 申田槿姈, 다카기 킨료였으나 남편 모스다 도교쿠와 결혼하면서 성을 바꿨다.
  6. 주: 백선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