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아인할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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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5일 (금) 03:22 판

별빛 속으로

세르바온 공화국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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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바온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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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바온 공화국 2대 원수
세르바온 공화국 41대 총리
루트비히 아인할트
Rudwig Einhaldt
본명 루트비히 세트나 아인할트 알프테어
Rudwig Sedna Einhaldt Albtehr
출생 2821년 4월 5일
세르바온 공화국 알프테어
사망 2855년 4월 22일 (33세)
셰인 정부 아인롱
재임 2대 원수
2849년 3월 27일 ~ 2851년 10월 9일
41대 집정관
2851년 6월 5일 ~ 2851년 6월 30일
배우자 루시아(2836~2855)
자녀 루카 아인할트
약력
세간에서는 그가 마르틴 피르카스의 후손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오랜 혼란 속에서 그것을 확인할 길은 영영 없어졌지만 적어도 영웅의 출현을 바라는 민중의 간절함이 변방의 행성부터 은하의 팔까지 뒤덮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못한다.

개요

세르바온 공화국평화운동의 군인, 정치가.

생애

세르바온 공화국 알프테르 출신으로 농부 출신 부모님의 외동아들으로 태어났다. 4살때 염색공 아버지를 따라 염색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7살때에는 자신이 직접 개발한 방법으로 염색을 하기도 했다. 10살이 되던해 루트비히가 사는 마을의 노교수였던 린화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알프테르의 유명 중등 교육기관인 메이어스 김나지움에 추천서를 써 입학시켰다. 루트비히는 김나지움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메이어스 대학 화학공학과에 재학했다.

18살이던 2839년 징집된다. 하지만 세르바온 군은 알파-1 전투에서 대패 했고 루트비히는 극적으로 함선을 탈출해 7개월간 탈출선을 타고 우주 공간을 표류한다. 이후 사망처리 되었다. 표류하다 도착한곳은 평화운동의 강역이었고 이후 평화운동 수장 마틴의 눈에 들어 그의 밑에서 활동했다. 그동안 병법, 우주선 수리 기술등을 배워 마틴 함대의 선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평가

긍정적 평가

2850년 9월, 레프테노어에서 셰인 정부군을 격파했을때 세르바온 공화국에서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에 몇몇 국민들 사이에서 혼란하고 무능한 기존의 정부 대신 루트비히에게 정치 권력을 넘겨주어 어려운 시국을 헤쳐나가보자는 의견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는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2851년 의회의원, 그해 6월에는 총리직에까지 추대되었으나 그는 군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몇달만에 자신이 신임하는 정치인 엘네틀 라디흐에게 그 직을 넘겼다. 호사가들은 뛰어난 협상 능력등 이후 여러차례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온 루트비히가 정치에서의 중요 직책을 맡았더라도 잘 수행해냈을 것이라고 단언하곤 한다.

부정적 평가

루트비히가 권위주의적인 사령관은 아니었고 오히려 하급 장교 또는 장병들에게 잘 대해주는 온화한 성품의 사령관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인해 감히 그에게 이의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공화국군 내에서 형성되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사후 군 전체가 급격하게 와해되어 대망명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곤한다. 한마디로, 그를 제외하면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사령관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루트비히는 작전회의실에서 부하들에게 세세한 작전 수행방법까지 설명하곤 했다. 이런 이유로 그를 제외하면 절대적인 무능이 군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세르바온 공화국의 혼란한 상황이 우수 장교 육성을 가로막아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루트비히에게만 의존하는 군사 체계가 결국 대망명을 초래했으며 세르바온 공화국이 셰인 정부에게 패해 그들의 지배하에 떨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