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피르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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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세르바온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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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바온 자치령 초대 집정관
Martin Pircas
마르틴 피르카스
본명 마르틴 앙헬 피르카스 모리예 세첸
Martin Angel Pircas Morille Sechen
출생 2661년 2월 6일
카타드 연방 세첸 계 랑왕
사망 2713년 5월 1일 (52세)
세르바온 자치령 아르노-피아나 체리노
재임 초대 집정관
2698년 10월 17일 ~ 2705년 5월 4일
배우자 수지 몰리나 델로이

개요

원래 현실은 이상주의자들에게 가혹한 법이었고, 그건 훗날을 살아갈 모든 이에게 자신의 편린을 아로새긴 대영웅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르틴 피르카스편 중에서

카타드 연방세르바온 자치령의 혁명가, 정치인. 세르바온 자치령의 초대 집정관을 역임했다.

광산 노동자 출신으로 카타드 연방 정부를 상대로 혁명을 주도하여 세르바온 자치령을 성립시켰다. 이후 초대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자치령 내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사임했으며 훗날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

세르바온 공화국에서는 국부, 그것을 넘어 대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그런 평가가 사실상 소멸한 현재도 인류 역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혁명 전쟁기까지

세첸 계의 랑왕이라는 소도시 출신이다. 부모와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12세에 가족과 함께 세르바온으로 이주했고 어린 나이부터 소행성 기지의 광부일을 했으며 16살인 2677년 4월 경(세르바온 기준시)에는 귀환 추진체가 고장나면서 33세의 동료 광부인 세빌로 타베인(Sevillo Tabein)과 함께 광산에 고립되었다가 159일만에 구출되었다. 타베인의 증언에 따르면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기계들을 손봤고 복잡한 물리학 및 수학 계산을 척척해내면서 귀환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고 한다. 아무튼 수학과 물리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2678년 연방 정부에 의해 세르바온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83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피르카스는 이렇게 정부가 자신의 처우를 높여준 것을 선전으로 규정하며 자신을 통해 광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소년노동자들의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그는 87년 연방 정부 기술제도국 공무원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세르바온에 남아 광산 관련 엔지니어이자 기술 고문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귀환 체계를 전반적으로 손봐 사고율을 낮추고 노동자들의 사망율을 이전 대비 80% 가까이 줄이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던 2690년 급작스레 반역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수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측에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잘들어주지 않고 노동자 친화적 고위 엔지니어인 그에게 겁을 주며 길을 들이려는 속셈이었지만 석방된 뒤 그는 본격적으로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평생 느껴볼 두려움은 소행성에 고립되었을 때 다 느꼈다며 카타드 정부를 조롱했다. 석방된 직후 그는 세르바온에 있던 지구 원로원령의 정보원과 접촉, 원로원령의 지원을 받아 2691년 1월 4일 ‘세르바온 노동자협회’를 조직하였으며 카타드 연방의 다른 성계들에 파업에 동참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튿날 세르바온의 노동자들은 노동착취, 수익분배에 있어 불공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대규모 파업을 전개했다. 연방측은 즉시 진압 명령을 발동하였으나 원로원령은 무력 진압시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연방측은 원로원령의 결정이 평화헌장 위반이며 5국위원회 긴급회의를 개최해달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타라즈 왕국살로시오 공화국의 반대로 5국위원회 회의는 개최되지 않았다. 원로원령이 카타드 연방이 정치 위기로 영향력이 약화될 시 하부지대로 진출 가능한 알짜배기 일부 지역들을 그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속에 연방 정부는 세르바온의 대규모 파업을 저지할 적절한 시기를 놓쳤고 이 소식을 들은 타 성계에서도 파업과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피르카스를 포함한 각 성계의 시위지도자들은 9월 6일 ‘민중권력당(Partio de la Popola Potenco, PPP)’을 결성하였고 그는 중앙집행위원 10인중 하나로 선출되었다. 연방 정부는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23일 전격적으로 시위대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온건파와 과격파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연방 내의 모든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의 수준과 그간의 처우 문제의 정도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었다. 새르바온처럼 생사를 넘나듦에도 착취에 가까운 처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고 그저 세율이 높은 수준에서 그치는 타 행성계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보자는 온건파와 타협은 없고 ‘해방’을 논하는 과격파의 분열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피르카스는 민중권력당내의 주요 인사 정도의 위치였으나 비타협노선을 확고하게 견지하면서 순식간에 민중권력당 급진파의 수장격으로 올라선다. 하지만 급진파에 찬동한 것은 세르바온을 비롯한 몇개의 행성계 뿐이었고 결국 2692년 2월 6일 전열을 정비한 카타드 정부군이 세르바온을 침공하면서 세르바온 혁명 전쟁이 발발한다.

피르카스는 우선 장교 출신 인사들을 모으고 노동자들을 징병하여 적군(赤軍)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원로원령의 도움을 받아 세르바온은 빠르게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게다가 카타드 정부군은 수십년간의 평화로 그다지 무력을 사용할 일이 없어 전력 운용에 있어 노하우가 상당히 무뎌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형 고속함으로 치고 빠지는 적군의 게릴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또한 카타드 공국에 부역하던 일부 지역 유지들을 혁명 이후 일정 권력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포섭하여 반대로 내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공세 능력 저하를 넘어 역으로 수세에 몰리자 정부군은 7월 8일 일단 군대를 물린 뒤 5국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5국이 만장일치로 세르바온 사태 직접 개입을 천명하게 된다. 자신들에게도 이른바 ‘혁명 도미노’가 일어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원로원령도 직접 충돌을 불사하겠다고 밝히면서 본격적인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때 피르카스는 혁명군 총사령관 지위에 올라 세르바온에 계속 머물며 군행정과 외교를 도맡았다.

장장 5년에 걸친 전쟁과 저항 끝에 5국 연합군은 패배하였고 혁명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2697년 4월 13일 5국위원회는 카타드 공국을 제명하였고 카타드 가문 하부지대로 망명했다. 혁명전쟁은 제1차 인류 대전 이후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끝에 가장 많은 사상자 수가 나온 참혹한 전쟁이었다. 피르카스는 예상보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원로원령의 입김이 강해질 것을 예상하여 최대한 그들의 지원을 줄이려 애썼으나 무위에 그쳤다. 게다가 원로원령은 하부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세르바온을 어떻게든 영향권 아래 두려 했기 때문에 피르카스가 원한 것처럼 ‘세르바온 인민의 자율적 통치’는 실현되기 매우 어려워졌다. 97년 말엽에는 ‘레짐 체인지’에 대한 공공연한 압박도 들어왔다. 결국 수많은 논쟁 끝에 그는 현실을 받아들여 원로원령과 타협하였으며 공화국 독립을 포기하고 지구인류연합 산하의 자치령 지위를 수용하였다.

2698년 10월 1일 첫 인민평의회 성립 이후 자치령이 선포된 후 같은 달 17일 초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원래는 자치령 선포와 동시에 집정관 선거를 했어야 하지만 각 세력별 지도자가 집정관 후보를 자처하면서 늦어졌다. 보다못한 원로원령이 개입하여 30여명의 후보중 27명을 정리하여 피르카스를 포함한 3명을 추리고 나서야 본선이 치러졌다. 그마저도 2460명의 의원중 피르카스가 받은 표는 1063표로 43%에 불과했으며, 피르카스의 집권기는 불안하게 시작했다.

집권기

집권 직후 재정비 로드맵 3가지를 제시하였다. 군의 재정비, 경제의 재정비, 외교의 재정비였다.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그의 정책은 시작부터 삐걱였다. 집정관은 행정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각 부의 장관에 인민평의회내 여러 세력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단행해야 했다.

집정관은 명목상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유명무실했다. 자치령이 실질적으로 운용가능한 함선은 소형 고속 전투함 정도였고 실질적 주력이 되는 중대형 함선은 모두 원로원령이 운용하였다. 카타드 공국의 중대형 함선을 노획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운용 노하우를 쌓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자치령에 남은 카타드 출신 장교들도 협력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건조기술을 독점해오던 성계도 정권내의 상당한 지분을 요구했다. 원로원령 조차 세르바온의 독립을 가능한 막기 위해 군의 재정비를 탐탁하찮아해 최소한의 협력만 지속했다. 이러한 상황속에 군의 재정비는 얼마 못가 사장되었다. 경제의 재정비도 세르바온, 세첸등 민중권력당 급진파의 근거지가 된 몇몇 성계만 국유화를 받아들였으며 대다수 성계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국유화를 수용한 옛 소유주들조차 매년 생산량의 일정한 지분을 요구했다.

피르카스의 집권 초기부터 자치령의 여러 지역은 그에게 불만을 품고 독립적 움직임을 꾀하려 했으나 원로원령의 감시로 인해 감히 독립을 선포하지는 못했다.

여담

  • 서주원루트비히 아인할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으나 루카 아인할트는 자신의 목표를 사상적으로 부정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원로원령의 도움은 받았지만 어느정도 거리를 두려고한 분리주의자에 가까운 피르카스를 통합주의를 내세운 루카 아인할트가 존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