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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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군
1814 - 1828
조선 국왕 · 조선 총재 · 대한 황제
조선 12대 국왕
明宗 · 명종
왕세자
1548년 1월 23일 ~ 1558년 5월 15일
경종 4년 12월 3일 ~ 경종 15년 4월 18일
국왕
1558년 5월 15일 ~ 1581년 8월 30일
경종 15년 4월 18일 ~ 명종 23년 7월 22일
상왕
1581년 8월 30일 ~ 1581년 10월 9일
명종 23년 7월 22일 ~ 명종 23년 9월 2일
출생
1539년 2월 27일
혜종 1년 1월 29일
즉위
1558년 5월 15일 (19세)
경종 15년 4월 18일
사망
1581년 10월 9일 (42세)
명종 23년 9월 2일
본관
전주 이씨
적 · 翟
부모
혜종 / 정현왕후
형제자매
1남 2녀 중 장남
왕비
정희왕후
묘호
명종 · 明宗
시호
현문광무강유돈효대왕
賢文光武康裕敦孝大王
12대
명종
1558 - 1581
조선 12대 국왕
明宗 · 명종
왕세자
1548년 1월 23일 ~ 1558년 5월 15일
경종 4년 12월 3일 ~ 경종 15년 4월 18일
국왕
1558년 5월 15일 ~ 1581년 8월 30일
경종 15년 4월 18일 ~ 명종 23년 7월 22일
상왕
1581년 8월 30일 ~ 1581년 10월 9일
명종 23년 7월 22일 ~ 명종 23년 9월 2일
출생
1539년 2월 27일
혜종 1년 1월 29일
즉위
1558년 5월 15일 (19세)
경종 15년 4월 18일
사망
1581년 10월 9일 (42세)
명종 23년 9월 2일
본관
전주 이씨
적 · 翟
부모
혜종 / 정현왕후
형제자매
1남 2녀 중 장남
왕비
정희왕후
묘호
명종 · 明宗
시호
현문광무강유돈효대왕
賢文光武康裕敦孝大王
1. 개요

명종(明宗, 재위 1558~1581)은 양부이자 숙부인 경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한 조선의 제12대 국왕으로, 조선 왕조 역사상 이례적인 양위 승계를 거쳐 안정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선대 경종의 실용주의적 정책 노선을 계승하여 통치 초기부터 정치적 내홍 없이 실무 관료층의 중용과 제도 정비에 주력했다. 그는 특히 기술 발전과 학술 진흥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서양의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압인기(인쇄기), 삼각측량기(측거의), 천리경(망원경) 등 여러 혁신적인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였다. 대외 정책으로는 선왕의 탕구(蕩寇) 정책을 계승하여 왜구 소탕과 해상 교역로 확보를 목표로 히라도(平戶島)와 히젠국(肥前國)을 성공적으로 정벌하였으며, 서양 국가와의 교류를 통해 삼각돛 범선 도입 등 해상력과 국제 교류의 확대를 이루었다. 또한 일본 내 오우치 테루히로의 난에 개입하여 지역 내 조선의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경제 개혁으로는 임차가점 도입, 순판선 운영, 어음과 투자 개념을 활용한 재정 조달 방식 혁신 등을 통해 상공업 활성화와 화폐경제의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 명종은 치세 후반기에 《대전통편》과 《명종국정대계》를 편찬하여 국가 제도와 법제를 통합 정비하였고, 정보기관 ‘조서’를 개편해 왕권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명종의 치세는 조선의 성장기를 마무리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명종은 1558년 숙부 경종의 선위로 즉위하면서, 조선 왕조 역사상 이례적인 양위 승계를 경험하였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경종이 병으로 국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세자에게 물려준 것으로 공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선왕 현종의 뜻에 따라 혜종의 적장자인 명종이 왕통을 잇는 정통성과 경종 치세 동안 대리청정을 맡아온 경륜을 모두 인정받은 결정이었다. 즉위 당시 명종은 19세의 젊은 군주였으나, 이미 1556년부터 경종을 대신해 국정을 대리하며 실무 경험과 신료들의 신망을 쌓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즉위 자체는 비교적 평온하게 이루어졌으나, 새로운 통치 질서에 대한 일부 보수파 사대부와 종친들의 우려와 견제도 존재했다. 경종은 생전에 “국통(國統)은 덕에 있고 적통(嫡統)은 예에 있다”며 조카인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명분을 적극 피력하고, 반대 세력을 회유 또는 지방으로 전출시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명종은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바탕으로 즉위 초반 큰 내홍 없이 권력을 승계하였고, 상왕이 된 경종 역시 1564년 붕어할 때까지 후궁과 친자들을 별궁으로 이주시켜 권력에서 멀리하게 하고, 국정 조언만 비공식적으로 하는 등 새로운 군주의 통치를 뒷받침하였다. 이러한 상왕 경종과 명종의 협조 관계는 명종이 초기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여, 명종은 비교적 견고한 왕권 하에 개혁 정책들을 추진할 기반을 얻었다. 즉위 초기 명종의 통치는 경종 대의 실용주의 노선 계승에 초점이 맞춰졌다. 경종 치세에 이미 토호 세력과 훈공신을 견제하고 기술관료와 실무 관료들을 중용하는 정치 개혁이 시작된 바 있었으며, 명종은 이를 흔들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어받고자 했다. 예컨대 경종 대에 설치된 육서(六署)와 실학파 인재 등용 기조를 유지하며, 중앙과 지방 행정의 유기적 협조를 도모했다. 즉위 초 몇 년간 명종은 급격한 인사 개편이나 새로운 법 제정보다는 기존 제도의 정비와 보완에 주력하였다. 혜종~경종 연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공사집성》 등 각종 국정 문헌과 제도 지침서를 직접 숙독하고, 이를 바탕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게 했다. 또한 선왕들이 추진한 과거제 개혁(실과 설치로 기술·실무 인재 선발 확대)과 관료 봉급 개편(하급 관료와 군사의 녹봉을 쌀 대신 동전 등 화폐로 일부 지급)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실무 관료층의 사기를 높이고 국정 운영의 유연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명종은 즉위 직후 대신들과의 신뢰 구축과 행정 체계의 내실화를 중시하며, 경종 치세의 점진적 개혁 성과를 제도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특히 1550년대 경종이 추진한 일련의 탕구(蕩寇) 정책 – 왜구 소탕을 위한 해상 정벌 – 은 명종 통치 초기 대외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경종은 1540년대 후반부터 대마도(対馬島) 정벌(1546년 병오동정)과 이어진 이키섬 정벌, 1556년 고토 열도 원정 등을 통해 왜구 근거지를 공격하고 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해상 질서를 주도한 바 있다. 이러한 성과로 조선 수군의 해상 통제권 확보와 무역로 안전 보장이 이루어졌고, 명나라도 이를 치하하여 조선의 위상이 높아졌다. 또한 경종대에 왜구 토벌을 계기로 서양 상인(洋夷)들과의 접촉이 시작되어 조선에 신식 무기와 기계 기술이 유입될 수 있었다. 명종은 이 점에 주목하여 즉위 초기부터 기술 혁신과 학술 진흥을 국정 과제로 삼았다. 경종 말기에 실무 관료들이 주도한 신무기 개발 시험과 기계 보급이 사량진왜변(1544년) 대응과 대마도 정벌 때 효과를 보였던 만큼, 명종은 이를 한층 발전시켜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자 했다. 명종 즉위 초반에는 우선 과학기술 연구 기관과 교육 조직을 정비하였다. 선대부터 설치된 격서와 홍문관 등을 중심으로 수군 무기, 농업 기계, 천문기기 개발을 계속 장려하고, 경연과 육학(六學)을 통해 기술에 밝은 인재를 특별 선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종 본인도 신기술에 깊은 관심을 두어, 격서 기술자들과 자주 면담하며 연구 성과를 보고받았다. 1560년대 초반에는 서양 상인으로부터 들여온 렌즈(곡경, 曲鏡) 가 궁중에 비치되어, 명종이 직접 망원경 원리를 배우고 신하들과 토론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하며, 이는 훗날 천리경(망원경)과 안경의 국내 제작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활판 인쇄술 개선에도 착수하여, 1560년경 격물청과 교서관의 협력을 통해 기존 목활자에 금속 활자 주조와 압인기 개발을 시범 적용하였다. 이 **압인기(押印機)**는 서양의 인쇄기를 본떠 만든 일종의 프레스 장치로, 금속및 목판 활자를 틀에 조립하고 잉크를 자동으로 묻혀 연속으로 찍어낼 수 있어 인쇄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기술 혁신들은 명종 초반에는 시험적 단계로 도입되어 궁중과 관청에서 실험적으로 활용되었으며, 각 관청의 업무 효율을 올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압인기의 도입은 법령과 지침을 대량 인쇄해 빠르게 전국에 배포할 수 있게 하여 통치력 강화를 도모했고, 거울을 이용한 **삼각측량기(측거의)**의 발명은 토지 측량을 정확하게 하여 조세 공정성을 높일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유학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신기술에 대해 “잡학에 치우친다”며 회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명종과 개혁파 관료들은 *“기술과 문장은 나라를 살찌운다”*는 성종조 격언을 인용하며 과학기술의 국정 활용을 정당화했고, 기술 정책이 부국안민의 실용적 수단임을 꾸준히 설득하였다. 토호 세력과 수구 신료들 역시 초기에는 새 기계 보급으로 인한 변화에 반발했으나, 경종대 왜구 토벌의 성공과 증가하는 조세, 명종의 확고한 왕권 앞에서 공개적인 저항은 미약했다. 오히려 명종대에 이르러 지방의 영세 향리들과 농민들은 관청이 나서서 물레, 방직기, 수차 등을 보급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 명종은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임금의 도리”라는 통치 철학을 내세워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명종 치세 초기의 경제 정책은 대대적인 개혁보다는 시범 운영과 준비 작업에 집중되었다. 경종 말기부터 조세 기반 확충과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일부 지역에 농기계 보급과 상업 장려가 이루어졌는데, 명종은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체계화하기 위해 우선 화폐 유통과 상업 활동의 여건을 점검하였다. 당시 조선은 성종~현종 대에 와서 화폐 경제의 기틀을 놓았으나, 여전히 지역 간 경제 격차와 은괴·동전 등의 유통 한계가 있었다. 명종은 즉위 초 암행어사와 상서 보고를 통해 각 도의 장시(場市) 현황과 유통 화폐량을 파악하고, 난전(無허가 상행위)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강구했다. 그 결과 1560년대 중반 경 임차가점(賃借假店) 제도를 일부 지역에서 시험 도입하였는데, 이는 보부상 등의 난전을 일정한 임차료를 받고 합법화해주는 제도로서,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허가증을 받은 상인이 지방을 순회하며 상품을 판매하도록 장려하는 정책이었다. 예컨대 한양과 개성 부근에서 몇몇 보부상 단체에 임차 허가를 내주어 운영을 관찰한 결과, 상인들이 지방 수요에 맞춰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고 관아에도 수수료를 납부하여 재정에 보탬이 되는 효과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재래 상권을 장악해온 토호 출신 전매상인들은 이 정책이 자신들의 특권을 침해할 것을 우려하여 반발하였다. 명종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독점은 곧 폐단”이라 역설하며, 권세가의 시혜가 아닌 제도적 통제 하의 상업으로 경제를 운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임차가점의 성공적인 시범 운영은 후일 전국적 보부상 조직 육성과 상업 활성화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

1567년은 명종 치세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대외 군사정책에서 큰 사건인 히라도 정벌(정평호도, 征平戶島)이 단행된 시기였다. 명종은 즉위 이후 줄곧 경종의 탕구 정책을 계승하여 해적 소탕과 해상 교역로 확립을 추구해왔고, 그 결실을 시험할 무대로 왜구의 새로운 근거지인 히라도(平戶島)를 지목했다. 히라도는 규슈 북서쪽 해상에 위치하여 중국-조선-일본 무역로의 중간 거점 노릇을 하던 섬으로, 왜구 세력이 대마도와 고토 열도에서 축출된 뒤 이곳에 집결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포르투갈 상선 등 서양 상인의 왕래가 늘어난 곳이기도 했다. 명종은 히라도가 해상 무역 허브이자 왜구 소굴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하면 그간 쌓아온 해상 질서가 다시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1567년 조선 수군은 3만여명을 동원한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히라도 섬에 상륙, 거점을 제압하고 평호도 정벌을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기술과 신무기의 실전 활용이 두드러졌는데, 명종이 지원한 격물청 기술자들이 개발한 판옥선 개량형 함선과 화포, 비격진천뢰 등이 동원되어 왜구 진영을 효과적으로 격파하였다. 특히 격물청이 발명한 측거의(쌍안 거리측정기)를 이용해 포격 정확도를 높인 포병 부대가 활약하여, 멀리서 왜선과 해안 포대를 정밀 타격함으로써 적의 사기를 꺾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첨단 무기의 활용은 기술관료와 무관들의 긴밀한 협업을 보여준 사례로, 명종이 평소 강조한 “학문을 널리 익혀 널리 쓰라(弘學弘用)”는 통치 철학이 전장에서 구현된 것이었다. 히라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는 여러 측면에서 분석된다. 먼저 정치적 의도로는, 명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해에 대외 승전을 통해 자신의 왕권과 군사 통솔력을 과시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다. 즉위 초반 경종의 후광에 가려있던 명종은 상왕의 서거(1564) 이후 독자적인 리더십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는데, 왜구 토벌의 승전보는 조정과 백성에게 젊은 국왕의 능력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히라도 원정 소식에 조정의 노신들까지 “전하의 위엄이 바다 건너에 떨쳤다”고 축하했고, 명종은 이를 계기로 보다 과감한 개혁 추진 동력을 얻었다고 평가된다. 군사적으로는, 히라도 섬을 장악함으로써 왜구 세력의 주요 근거지 하나를 제거하고 “남해 무역로 확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였다. 조선군은 히라도에 항복한 토착 세력과 교섭하여, 경종 때 대마도에 설치한 바 있었던 도독부(都督府)를 히라도에도 두고자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히라도 도주는 일단 도망가고 섬이 일시 조선군 통치 하에 놓였으나, 완전한 지배보다는 간접 통치 형태로 편입되었다. 조선 조정은 현지 사정을 고려하여 히라도에 평호도독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통감(관찰사급 관리)을 파견하여 섬 내 치안과 무역을 감독하되, 현지 영주 가문이 자치 행정은 일정 부분 담당하게 하는 절충안이었다. 이러한 양면 통치 전략은 대마도에서 이미 효과를 거둔 바 있어, 히라도에도 적용됨으로써 조선은 규슈 연안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1569년에는 한층 더 야심찬 원정인 히젠국 정벌(정비전국, 征肥前國)이 집행되었다. 히젠(肥前)은 일본 규슈 북부의 넓은 지역(오늘날 나가사키현·사가현 부근)으로, 대마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조선에 가까운 곳이다. 명종이 이곳까지 군사력을 파견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왜구 소탕의 연장선이었으나, 내밀하게는 일본 내 정세 개입과 경고 전략을 담고 있었다. 히젠 지역의 다이묘들 중 일부가 조선에 항복한 왜구를 은밀히 지원하거나, 조선 통제에 반발해 해적 무리를 숨겨주는 정황이 파악되자 명종은 이를 응징할 계획을 세웠다. 명종 12년(1569) 조선 수군은 비전국 정벌을 개시하여 히젠 연안 거점들을 공격, 저항하는 세력을 무력 진압하였다. 이때 조선은 비전도독부(肥前都督府)를 설치하여, 히젠 일대의 정세를 지속 감시토록 하였다. 비전도독부는 대마도·히라도의 도독부와 통합되어 규슈 북서부 해역 전반을 아우르는 간접 지배망을 형성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일본의 서쪽 끝에서부터 점진적인 영향권을 구축해간 셈이다. 히젠 정벌은 또한 “명종의 일본 정세 개입 전략을 본격화한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모리 가문이 서국을 지배하며 옛 오우치 영지를 차지한 상황이었다. 명종은 모리 가문의 확장과 친조선 세력인 오우치의 몰락이 조선 안보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옛 오우치 가문 잔존 세력과의 연대가 추진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우치 테루히로의 난(1569)이다. 오우치 테루히로는 몰락한 오우치 가문의 일원으로서 모리 가문에 대한 반기를 들었는데, 명종은 이를 일본 내 세력 균형을 조정할 호기로 보았다. 조선 조정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비공식 경로를 통해 테루히로 측에 군자금과 화약, 조총 등 무기를 지원하였다. 또한 히젠 도독부를 거점으로 병력 일부를 파견하여 유사시 테루히로의 신변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테루히로의 난은 결국 모리 군에 진압되었으나 조선은 테루히로를 확보하여 히젠과 대마도 일대에서 영향력을 회복하도록 도왔다. 이러한 조선의 은밀한 개입은 모리 가문을 긴장시키고 서국 정세에 영향을 주었다. 명종은 이 사건을 통해 일본 각지의 반모리 세력과 교류 채널을 구축하였으며, 이후 규슈의 오토모 소린 등과 외교 사절을 교환하며 친조선 성향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한편 이러한 대규모 원정들은 국내 개혁에도 촉매가 되었다. 전쟁 수행에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으나 명종은 기존의 명분론적 반대를 물리치고 경제 혁신을 가속화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1567년 히라도 원정 후 조정에서는 은괴 유출과 전비(戰費)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보수파 대신들은 “과도한 해외 정벌로 재정이 탕진되고 농민이 피폐해진다”며 전쟁을 멈출 것을 주청하였으나, 명종은 이에 대해 새로운 재정 조달책을 제시함으로써 반대를 돌파했다. 그는 “상업을 진흥하여 부국을 이룬다”는 목표를 내걸고, 국가가 주도하는 무역 확대와 상공업 증진으로 전비를 충당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실제로 히라도 정벌 직후 조선은 현지에서 노획한 왜구의 물자와 서양 상선의 무역품(후추, 백단향 등)을 활용하여 국제 교역에 나섰다. 한편으론 1568년경부터 조선 내 민간 부호와 상인들에게 국채 성격의 어음을 판매하여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를 제도화한 것이 이른바 어음·투자 제도의 도입이다. 명종은 공조(工曹)와 몇 개 감영에 명하여 민간 자금을 국책 사업에 투자하면, 정부가 어음(약속어음)을 발행해 추후 이익을 돌려주는 방식을 시험 시행케 했다. 이는 획기적인 재정 운용 방식이었으나 물론 전통 유교 경제관을 가진 일부 신하들은 “사사로운 이윤을 약속하여 백성의 이기심을 조장한다”면서 어음 발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산학(算學)을 다해 시세를 조절하면 백성을 안정케 할 수 있다”며 경제 운용에 대한 수리적 접근을 역설했고, 투자제의 장기적 이익 – 국가적 사업 추진력 향상과 민간 부의 생산적 활용 – 을 설득하였다. 결국 이러한 재정 혁신 실험은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확대되어, 본격적인 경제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히라도·히젠 원정은 서양과의 접촉 확대를 가져왔다. 히라도에는 일찍이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조선군이 섬을 접수한 후 이들과 직접 마주하게 되었다. 명종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관세를 낮추는 대신 그들의 항해술과 군사 기술을 전수받는 조건부 교역을 제시했고, 몇몇 상인은 이를 받아들여 조선에 삼각돛 범선 제작법과 화약 무기 개량술 등을 전달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곧 자체 조선소에서 서양식 범선(갤리온선과 유사한 양범선)을 시험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삼각돛을 단 이 양범선(洋帆船)은 기존 판옥선에 비해 바람을 이용한 원양 항해 능력이 뛰어나, 명종 치세 후반 동남아시아 원정 탐사에도 투입되었다. 이렇듯 1567~69년 사이 명종은 연이은 해상 원정의 성공을 바탕으로, 군사력과 기술력, 그리고 국제무역 능력에서 조선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렸다. 이를 두고 사가들은 “명종이 드넓은 바다를 경영하여 비로소 해상왕국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반면 이러한 급진적 대외팽창에 대한 우려도 있었는데,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 규슈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류큐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에 내심 경계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종은 명에 대한 예의를 갖춘 외교 문서를 거듭 보내어 조선의 행동이 “왜구를 소탕하고 해상 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며 요지를 설명하고 미리 협조를 구하며 중화 질서를 자극하지 않도록 세심히 노력했다. 이러한 외교적 균형 감각 덕분에 명나라는 조선의 해상 활동을 묵인하였고, 오히려 명나라 조정 일각에서는 1550년대 남왜도(南倭島) 정벌 때 조선군이 포획해 넘긴 중국인 해적 왕직을 기억하며 조선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1569년 이후 명종은 대외 원정의 성과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내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해상 무역로 장악과 외교적 위신 상승은 국내 경제를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였고, 명종은 이를 살려 조선을 자급자족 농업 중심 경제에서 상공업 중심의 화폐경제로 전환하는 것을 지향했다. 우선 무역의 제도적 육성이 추진되었다. 히라도와 비전(肥前) 도독부를 통해 확보된 일본과의 교역 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얻은 남해 교역 거점은 조선 상인들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명종은 1570년대 초반, 이러한 무역망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순판선 체계를 도입하였다. 순판선(巡辦船)이란 관민 합작으로 조직된 무역선단으로, 정기적으로 동아시아의 주요 교역지를 순회하며 물자를 거래하는 상업 함대를 의미한다. 명종은 국가가 주도했던 이전 원정과는 달리, 이제 민간 자본과 상인을 적극 참여시켜 무역을 지속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기구를 마련하여, 왕실과 공공자금이 아닌 민간 투자를 통해 무역선 건조와 운용 자금을 조달하도록 장려하였다. 가령 개성의 송상이나 한양의 시전상인 등 부유한 상인들에게 출자 기회를 부여하고, 투자액에 비례하여 무역 이익금을 배당하는 방식을 공식화하였다. 이는 일종의 초기 주식회사식 무역 운영으로서, 상인 계층의 호응을 얻었다. 순판선은 정기적으로 평호도(히라도), 유구(류큐), 여송도(루손, 필리핀), 오문(마카오) 등을 왕래하며 비단, 도자기, 은, 향신료 등의 교역을 주도했다. 이러한 해상 상업 활동을 통해 조선은 다량의 은괴와 외래 물품을 확보했고, 국가 재정 역시 무역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원을 얻었다. 동시에 명종은 무역 확대가 농업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조상학(祖蔵學)이라 불린 경제 조정 이론을 행정에 도입하였다. 이는 국가가 화폐 발행량(조화량)을 조절하고 물가를 관리하며, 농업 생산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보호하는 일련의 경제 정책 논의로, 오늘날의 거시경제 정책에 해당한다. 명종은 조정의 재정 전문가들과 함께 이 이론을 발전시켜 물가 안정책과 비축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상업 확대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농촌 피폐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비단 실용적 목적에서도 이루어 졌지만, 정치적으로 보수파 유학자들을 안심시키는 장치로 작동했다. 화폐 경제의 정착을 위해서는 화폐 유통의 확대와 신용 거래의 활성화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명종은 어음과 환어음 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하였다. 치세 중기에 공조와 감영에서 시범 발행한 정부 어음은 점차 신뢰를 얻어, 1570년대에는 민간 상인들 사이에서도 어음 거래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먼 지방의 상거래에서도 현금을 운반하지 않고 정부 보증 어음을 통용시켰고, 화매소에서는 이들을 할인·교환해주는 창구를 마련했다. 더 나아가 사채 성격의 어음도 등장하여, 대도시의 건실한 상점은 자체 신용으로 어음을 발행하고 주변 상인들이 이를 현금 대용으로 쓰는 초기 은행 기능도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일부 사족 출신의 예법론자들은 상업적 신용거래가 전통 윤리를 해친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화폐 주조 사업도 강화하여, 사섬서 등에 신규 동전을 대량 찍게 하였다. 명종 후기에는 세입과 녹봉의 절반 이상을 화폐로 거두고 지급할 정도로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으며, 이에 따라 쌀값 안정과 세곡 수송 부담 경감 등의 효과가 나타났다. 전국의 장시와 상권은 하나의 통합 시장으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조선 사회 구조를 전환시킬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명종은 후반기에 이르러 그간 진행된 각종 개혁과 제도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통합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여러 대에 걸친 개혁으로 법령 체계가 방대해지고 복잡해진 만큼, 이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국가 법전 편찬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편찬된 것이 1578년 완성된 《대전통편》이다. 대전통편은 기존의 《경국대전》, 《대전속록》, 《속대전》 등에 흩어진 조문을 모두 아우른 종합 법전으로, 각종 규법과 의례 등을 최신 실정에 맞게 재정리하고 주석을 붙인 것이었다. 특히 상업과 기술 발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사안들을 다루기 위해 공상업 조항을 보강하고, 육서나 지방관청에 대한 세밀한 사항들이 수정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법전 편찬에는 주로 보수파 유생들과 원로 관료들이 참여했는데, 명종은 이들을 적극 등용함으로써 개혁에 비판적이던 인사들도 법치주의 확립 작업에 동참하게끔 유도했다. “집율편민(執律便民)”, 곧 *“법도를 바로 세워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명종의 통치 이념에 반대할 유학자는 없었기에, 법전 편찬 사업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대전통편》이 반포되자 명종은 친히 교서에서 “이 법은 선왕(현종·혜종·경종) 대의 뜻과 나의 국정을 합해 만들었으니, 지키지 않는 자를 엄단하겠다”라고 밝히며 개혁의 제도적 완결을 선언했다. 이로써 조선의 국법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틀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의 통치자들도 이 법전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게 되었다. 행정 효율화를 위한 조직 개편도 단행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정보기관 ‘조서(朝書)’의 구조 개편이었다. ‘조서’는 본디 국왕 직속 특무 기관으로서 전국의 중요 정보를 수집·보고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경종 대에 실무 관료들을 정보망에 활용하면서 크게 강화된 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조서가 과도한 권한 집중으로 문제를 빚기 시작했다. 조서 책임자인 영의정과 몇몇 핵심 세력이 전국 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명종은 정보기관의 전횡을 막고 왕권의 눈과 귀를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1570년대 중반 **조서직계제(朝書直系制)**를 도입하였다. 구체적으로, 조서를 한 개의 거대 조직에서 12개의 국(局)으로 분할하여 운영하고, 각 국이 독립적으로 국왕에게 직보(直報)하도록 체계를 바꾸었다. 또한 조서 총책임자인 조서 제판과 참의 등의 고위직은 12개 국의 인사에만 관여할 뿐, 정보 수집 내용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명문화하였다. 이를 통해 어느 한 사람도 모든 정보를 틀어쥐지 못하게 막고, 국왕이 다원화된 채널로부터 보고를 받아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개편으로 영의정의 정보 권한은 크게 축소되었고, 조정 내 비밀 결탁이나 전횡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명종은 아울러 조서를 포함한 행정 전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산판(組算板)이라는 새로운 장치를 도입하기도 했다. 조산판은 일종의 목제 계산기로, 복식부기 장부의 세입·세출, 세금 부과액 등을 신속히 산출하기 위한 도구였다. 이는 주판과 서양식 계산법을 응용한 것이었는데, 명종은 각 관아에 조산판 사용을 명하여 관료들의 계산 착오를 줄이고 보고 시간을 단축시켰다. 이러한 작은 혁신까지도 명종 특유의 실용주의 행정 철학을 잘 보여준다.

명종의 통치는 학문 존중과 실용 강조라는 두 축 위에 전개되었으며, 이는 그의 후계자 교육과 정치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양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종으로부터 실무 수련과 대리청정 경험까지 쌓은 정석적인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은 명종으로 하여금 “정통성이란 것은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갖게 하였다. 실제로 명종은 자신의 세자(훗날 중종)를 키우는 데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세자 역은 1560년대 초반에 책봉되었는데, 명종은 즉위 초기부터 육학(六學) 제도를 활용해 왕세자에게 유교 경전 뿐 아니라 산학, 법학, 병학 등을 두루 가르쳤다. 격물청과 홍문관에서 올라오는 기술 보고서와 지리 조사 자료도 세자 교육에 활용되어, 어린 세자가 천리경으로 별을 관측하고 조산판으로 세금을 계산해보는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세자는 또한 아버지를 따라 경연에 배석하여 대신들의 논의를 견문했고, 때로는 방학관으로 나선 중앙 관료가 가져온 지방 민정 자료를 직접 검토하며 현실 감각을 길렀다. 명종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세자가 국정의 크고 작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갖추길 기대했다. 그는 경연 자리에서 세자에게 일부러 어려운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유도하기도 했는데, 세자가 지방 군역 문제와 세금 형평성에 대해 조언하자 “과연 내 아들이 나라일을 꿰뚫어 보는구나” 하고 칭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조기 정치 교육 덕분에 세자는 점차 조정 신료들의 신임을 얻었고, 명종 말년에는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명종은 또한 대리청정 제도를 통해 세자에게 통치 경험을 쌓게 했다. 이는 상왕 경종이 자신에게 했던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명종은 아버지 경종으로부터 배운 바를 세자에게 되풀이한 셈이다. 1570년대 후반 명종이 건강이 약해져 일부 정무를 세자에게 맡기기 시작하자, 조정 대신들은 과거 경종이 명종을 보필했던 사례를 떠올리며 순조롭게 받아들였다. 세자는 명종 22년(1580)에 이르러 사실상의 대리청정을 행하였고, 명종의 지시에 따라 매일 국무 보고를 검토하고 재가를 내렸다. 이 시기 명종은 세자의 판단을 뒤에서 지켜보며 잘한 것은 칭찬하고 잘못한 것은 조언해주는 그림자 조정을 행했다. 이러한 협조 구조는 상왕과 국왕의 역할 분담을 미리 연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명종은 세자가 즉위 후에도 흔들림 없이 나라를 이끌 수 있도록 국정 운영의 장기 비전을 문서로 남기고자 했다. 1581년 초반 편찬을 마친 《명종국정대계》가 그것으로, 이는 “국왕이 바뀌어도 지켜야 할 국정 기조와 이상”을 정리한 일종의 통치 백서였다. 국정대계에는 명종이 평생 추구한 바 있던 여러 좌우명과 사례들이 담겼다. 명종은 이 국정대계를 세자와 대신들 앞에서 반포하며 “이는 우리 조선이 나아갈 길의 이정표”라고 선언했고, 이어 세자에게 “이를 마음에 새겨 임금 된 자의 뜻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정치 이념의 계승을 통한 후계 안정을 꾀한 조치로서, 명종이 얼마나 치밀하게 사후(死後) 계승구도 안정을 준비했는지를 보여준다. 1581년, 명종은 끝내 자신의 생애 마지막 과업인 평화로운 양위를 실현하였다. 오랜 강무(講武)와 친정으로 지병이 악화된 그는 그 해 8월 세자에게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비록 명종은 양위 후 두 달 남짓 만에 향년 42세로 붕어하였지만, 그의 퇴위와 승계 과정은 한 치의 혼란도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이는 상왕 경종과 명종 간의 협력 경험이 고스란히 재현된 결과이기도 했다. 경종이 친자 대신 양자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까지 국정 안정을 도모한 결단을 명종은 깊이 새겼고, 자신도 친히 장성한 세자에게 조정을 물려주며 “부왕 혜종과 선왕 경종의 뜻을 잇는다”고 밝혔다고 한다. 세자(중종)는 즉위 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명종이 남긴 국정대계를 계승하고자 노력하였고, 명종 때 확립된 법률과 제도를 큰 틀에서 유지하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이러한 부자(父子)간 연속성은 조선 중기 정치의 안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명종과 중종 시기를 통해 조선은 내우외환 없이 황금기의 정점을 구가하게 된다.

3. 평가

역사적 평가를 종합하면, 명종(이적)은 정통성과 실용주의를 조화시킨 군주로 평가된다. 그는 혜종의 적장자로서 왕통을 계승한 정통 군주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숙부 경종의 개혁 노선을 이어받은 혁신 군주였다. 명종은 집권 초 상왕 경종의 비호 아래에서, 실무 관료 중심의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어 치세 중반 과감한 해상 팽창과 군사 개혁을 통해 왕권과 국가 위신을 한층 강화했고, 치세 후반에는 경제·법제의 온건적 개혁을 진행하여 조선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선도하였다. 그의 정책 하나하나는 추진 배경에 치밀한 계산과 철학이 있었고, 시행 순서에서도 시범, 확대, 정착의 단계를 거쳐 무리 없이 안착되었다. 선왕대와 마찬가지로 기기와 학문을 국가 경영에 적극 접목함으로써 전통적 유교 관료국가였던 조선을 지식기반 행정국가로 변모시켰고, 상공업 진흥과 무역 확대를 통해 자급자족의 농업 경제를 탈피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외교·군사적으로 명종은 경종 이래의 탕구 정책을 발전시켜 동아시아 해상의 질서 유지자이자 새로운 이익 창출자로서의 조선의 위상을 정립했다. 일본 정세에 개입하여 훗날의 왜구의 위험을 사전에 억제하고, 주변 번국(藩國)들을 관리함으로써 국방의 완충지대를 확보하였다. 정보기관 개편과 법전 편찬은 권력 구조의 건강성을 높이고 국가 운영을 한층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명종은 성군(聖君)의 자질과 영웅(英雄)의 기상을 겸비한 군주로서, 학문과 덕치를 존중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무력을 동원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 명종의 치세는 조선 초기의 절정기로서 이후 세대에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정치철학과 제도들은 훗날까지 조선 왕조의 굳건한 버팀목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4. 여담

명종은 조선의 왕으로서는 드물게 천문학과 별 관찰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왕궁의 별채에서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곤 하였으며, 별을 보면서 국사를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천문학에 대한 그의 애정은 천리경(망원경)과 같은 기구 도입과 기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명종과 왕비 정희왕후는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는 이상적인 관계였다. 정희왕후는 온화한 성품과 풍부한 학식을 지닌 인물로, 명종과 바둑을 두거나 역사와 문학, 최신 기술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명종이 새로운 기술이나 기계를 도입할 때마다, 정희왕후는 신하들과 궁중 내 인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궁중 여성들을 위한 작은 책을 제작할 때 압인기를 적극 활용하여 언문의 사용을 촉진하기도 했다. 상왕 경종과의 관계 역시 매우 긴밀했다. 명종이 세자 시절 경종은 내심 명종을 진정으로 후대 왕으로 키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은 안희왕후에 의해 거의 종식되었는데, 안희왕후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은 명종을 안타깝게 여겨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경종이 명종을 진정한 세자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일이 있은 후, 명종과 경종은 마치 친근한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가 되었으며, 명종은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도 경종을 깊이 공경하며 자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경종은 명종의 초기 치세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두 사람의 끈끈한 관계는 명종의 개혁과 통치 안정에 큰 힘이 되었다. 명종은 많은 자녀를 두었으나, 특히 세자인 중종(세자 역)에 대한 애정과 편애가 뚜렷했다. 명종은 6남 5녀 중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중종과 함께 보내며 그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반면, 차남이나 삼남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은 관심을 보였으며, 오히려 공주들을 더욱 아끼고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명종의 자녀에 대한 태도는 궁중 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 12대 국왕
명종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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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세이위
홍학홍용
상업진흥
집율편민
정평호도
왜구 척결 및 무역로 확보
왜에서 히라도로 불리는 평호도는 남해 가운데 위치하여 왜구가 근거지로 삼고 무역하기 좋은 곳으로 양이의 배가 드나드니 이곳을 장악하여 왜구를 소탕하고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정비전국
왜구영향력 제거
왜에서 히젠국으로 불리는 조선에 인접한 구주 지역에서 왜구를 지원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을 엄벌하고 경고하였음에도 일이 끊이지 않자 출정하여 그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비전도독부를 세워 감시하게 하였다.
하남만
무역로 정보확보
다섯차례에 걸쳐서 남쪽으로 함대를 보내어 대원도, 여송도, 발니, 대월, 진랍, 섬라곡을 거쳐 마라가로 향하였다. 화란, 서반아, 포도아 삼국의 상인을 만나 양이의 세를 탐하여보고 각 국에서 유용한 거점을 선별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고초·양박·남령초
농업 연구 증진
양이로부터 고초, 양박, 남령초 등의 종자를 들여와 농법을 연구하여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남령초는 양반 사이에서 유행하며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압인기
인쇄 비용 감소
동, 납등으로 만든 금속활자와 목판활자를 판으로 엮고 이를 자동으로 먹으로 두를 수 있도록하여 여러번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측거의
측량술 발달
곡경 기술을 이용하여 두 개의 거울로 물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여 토지 측량을 쉽게하고 포격의 정확성을 높였다.
천리경 · 안경
렌즈 제작 기술
곡경이라 불리는 렌즈를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안경을 제작하는 기술을 확보하여 제조하도록 하였으며, 천리경 등이 제작되었다.
지시계
시계 제작 기술
지시루는 조선의 시각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자격루에 비해 비교적 단순했으나, 크기가 크고 번잡했다. 따라서 양이의 기술을 본받아 시계의 제작법을 알아내어 생산하도록 하였다.
을해은문
암호학 발전
을해년에 편찬 정립한 암호의 일종으로 암호화와 복호화 과정을 분리하여 만들었으며, 언문을 기준으로 하고있다. 이를 통해서 지령의 보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양범선
항해술 발전
서양 항해술을 받아들여 삼각돛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경우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도록 하였고, 원양에서도 항해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노를 장비하여 격군을 운영했다.
박문도감
지식 교류 기관
평호도에 설치하여 이양인을 등용하여 난학을 전수받는 기관이자, 난학을 발전시키는 연구기관이자 난어를 배우는 곳으로 박문도감을 설립하고, 각종 학문에 대해 교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상학문
경제학 발전
조화량을 조절하고 시세를 조절하는 산학적 접근을 고도로 하여 민생과 상업을 안정적으로 하고, 농업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조정할 방책을 모색했다.
임차가점
난전 통제
관청에 임차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영업하는 난전으로 보부상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도록 장려하였다.
어음 · 투자
경제 발달 가속화
기업의 사업에 대하여 민간 자본이 투자하는 대가로 어음을 받는 등의 행위를 규정하고 공조, 감영 등의 관아에서 시험적으로 발행하게 하였다.
순판선
경제 발달 가속화
조선이 동북아 무역을 주도하고 평호도, 유구, 여송도, 오문 일대에서 양이와 교역하자 민간 투자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여 순판선을 운영하고자 했다. 투자한 만큼 배당하여 이윤을 지급하였다.
대전통편
국가 운영의 체계화
기존의 경국대전, 대전속록, 속대전 등의 법전을 망라하여 만들었으며, 행정법, 세법, 형법, 민법, 상법, 군법의 정리본과 주석을 포함하였다. 이를 통해 현종, 혜종, 경종 삼대를 거치며 변화한 조선의 실정에 맞추어 법을 개편하도록 하였다.
조서직계제
정보기관 약화
조서의 정보독점에 의한 권력 증대를 견제하고 영의정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조서를 열두개의 局으로 나누고 직계하도록 하였다. 조서 제판과 참의는 조서십이국의 인사에만 관여하도록 하여 권한을 크게 제한하였다.
국정대계
국가운영계획확립
국왕이 바뀌더라도 지켜져야할 국정의 기조와 이상향을 정립하고 규정한 장기간 정무집행계획이다.
조산판
행정 효율성 증대
조세를 누적세로 거두면서 이를 일일이 계산함에 어려움이 있어 이를 바로 계산해주는 목재판으로 조산판이라 불렸다. 이를 통해 쉬이 조세를 측정할 수 있었다.
明世以威
위엄으로 세상을 밝혀
권세를 드높이고자 하느니라
弘學弘用
널리 배워서 널리 쓰도록 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라
商業振興
상업을 발전시켜
부국이 되고자 한다
執律便民
법도를 바로 세워
백성을 편하게 하라
조선 틀 목록
명종
조선 12대 국왕
명종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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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호도
왜구 척결 및 무역로 확보
왜에서 히라도로 불리는 평호도는 남해 가운데 위치하여 왜구가 근거지로 삼고 무역하기 좋은 곳으로 양이의 배가 드나드니 이곳을 장악하여 왜구를 소탕하고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정비전국
왜구영향력 제거
왜에서 히젠국으로 불리는 조선에 인접한 구주 지역에서 왜구를 지원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을 엄벌하고 경고하였음에도 일이 끊이지 않자 출정하여 그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비전도독부를 세워 감시하게 하였다.
하남만
무역로 정보확보
다섯차례에 걸쳐서 남쪽으로 함대를 보내어 대원도, 여송도, 발니, 대월, 진랍, 섬라곡을 거쳐 마라가로 향하였다. 화란, 서반아, 포도아 삼국의 상인을 만나 양이의 세를 탐하여보고 각 국에서 유용한 거점을 선별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고초·양박·남령초
농업 연구 증진
양이로부터 고초, 양박, 남령초 등의 종자를 들여와 농법을 연구하여 재배하도록 하였으며, 남령초는 양반 사이에서 유행하며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압인기
인쇄 비용 감소
동, 납등으로 만든 금속활자와 목판활자를 판으로 엮고 이를 자동으로 먹으로 두를 수 있도록하여 여러번 인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측거의
측량술 발달
곡경 기술을 이용하여 두 개의 거울로 물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여 토지 측량을 쉽게하고 포격의 정확성을 높였다.
천리경 · 안경
렌즈 제작 기술
곡경이라 불리는 렌즈를 제작하고 이를 토대로 안경을 제작하는 기술을 확보하여 제조하도록 하였으며, 천리경 등이 제작되었다.
지시계
시계 제작 기술
지시루는 조선의 시각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자격루에 비해 비교적 단순했으나, 크기가 크고 번잡했다. 따라서 양이의 기술을 본받아 시계의 제작법을 알아내어 생산하도록 하였다.
을해은문
암호학 발전
을해년에 편찬 정립한 암호의 일종으로 암호화와 복호화 과정을 분리하여 만들었으며, 언문을 기준으로 하고있다. 이를 통해서 지령의 보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양범선
항해술 발전
서양 항해술을 받아들여 삼각돛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경우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도록 하였고, 원양에서도 항해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노를 장비하여 격군을 운영했다.
박문도감
지식 교류 기관
평호도에 설치하여 이양인을 등용하여 난학을 전수받는 기관이자, 난학을 발전시키는 연구기관이자 난어를 배우는 곳으로 박문도감을 설립하고, 각종 학문에 대해 교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상학문
경제학 발전
조화량을 조절하고 시세를 조절하는 산학적 접근을 고도로 하여 민생과 상업을 안정적으로 하고, 농업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조정할 방책을 모색했다.
임차가점
난전 통제
관청에 임차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영업하는 난전으로 보부상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도록 장려하였다.
어음 · 투자
경제 발달 가속화
기업의 사업에 대하여 민간 자본이 투자하는 대가로 어음을 받는 등의 행위를 규정하고 공조, 감영 등의 관아에서 시험적으로 발행하게 하였다.
순판선
경제 발달 가속화
조선이 동북아 무역을 주도하고 평호도, 유구, 여송도, 오문 일대에서 양이와 교역하자 민간 투자를 통해 자금을 마련하여 순판선을 운영하고자 했다. 투자한 만큼 배당하여 이윤을 지급하였다.
대전통편
국가 운영의 체계화
기존의 경국대전, 대전속록, 속대전 등의 법전을 망라하여 만들었으며, 행정법, 세법, 형법, 민법, 상법, 군법의 정리본과 주석을 포함하였다. 이를 통해 현종, 혜종, 경종 삼대를 거치며 변화한 조선의 실정에 맞추어 법을 개편하도록 하였다.
조서직계제
정보기관 약화
조서의 정보독점에 의한 권력 증대를 견제하고 영의정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조서를 열두개의 局으로 나누고 직계하도록 하였다. 조서 제판과 참의는 조서십이국의 인사에만 관여하도록 하여 권한을 크게 제한하였다.
국정대계
국가운영계획확립
국왕이 바뀌더라도 지켜져야할 국정의 기조와 이상향을 정립하고 규정한 장기간 정무집행계획이다.
조산판
행정 효율성 증대
조세를 누적세로 거두면서 이를 일일이 계산함에 어려움이 있어 이를 바로 계산해주는 목재판으로 조산판이라 불렸다. 이를 통해 쉬이 조세를 측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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