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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버가 남부와 대평원의 지지를 잃었지만 도시권의 지지를 받으며 재선에 성공. 1931년 워싱턴해군군축조약 주도 1934년 무역자유법을 가결해 특정국가를 대상으로하는 관세부과를 거부하고 일률적 관세를 적용, 자유무역기조를 강화.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이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위협한다며 거부권 행사. 1936년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도 체결.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기는 했지만, 독일이 크게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음. 독일의 성장을 방관. 블록경제로 영프가 시장을 닫자 오히려 차관을 빌려주며 대공황 탈출에 도움을 주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주도함. | ** 후버가 남부와 대평원의 지지를 잃었지만 도시권의 지지를 받으며 재선에 성공. 1931년 워싱턴해군군축조약 주도 1934년 무역자유법을 가결해 특정국가를 대상으로하는 관세부과를 거부하고 일률적 관세를 적용, 자유무역기조를 강화.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이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위협한다며 거부권 행사. 1936년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도 체결.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기는 했지만, 독일이 크게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음. 독일의 성장을 방관. 블록경제로 영프가 시장을 닫자 오히려 차관을 빌려주며 대공황 탈출에 도움을 주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주도함. | ||
* 1936 '''알프 랜던''' v. FDR | * 1936 '''알프 랜던''' v. FDR | ||
** 랜던은 후버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 랜던은 재정보수주의자였지만, 대공황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 국가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후버 대통령은 암살이 두려워 뒷걸음질치다 대공황을 잡았지만, 근본적으로 균형예산 달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그의 2번째 임기는 사회보장지출을 축소하고, 후버댐과 같은 대규모 건설부양책은 지양되었다. 랜던은 집권 직후 후버 대통령이 점차 중단을 시사한 후버빌의 건설을 도시권에서 중소도시로도 확대하고, 후버빌 거주자를 위한 푸드스탬프 제도를 도시권 실업자까지 확대하였다. 물론 1937년을 지나며 공화당과 민주당의 재정보수주의 의원들에 의해 그의 프로그램은 일부 축소되었다. 결과적으로 1938년의 약한 불황을 겪었지만, 대규모 실업이나 | ** 랜던은 후버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 랜던은 재정보수주의자였지만, 대공황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 국가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후버 대통령은 암살이 두려워 뒷걸음질치다 대공황을 잡았지만, 근본적으로 균형예산 달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그의 2번째 임기는 사회보장지출을 축소하고, 후버댐과 같은 대규모 건설부양책은 지양되었다. 랜던은 집권 직후 후버 대통령이 점차 중단을 시사한 후버빌의 건설을 도시권에서 중소도시로도 확대하고, 후버빌 거주자를 위한 푸드스탬프 제도를 도시권 실업자까지 확대하였다. 물론 1937년을 지나며 공화당과 민주당의 재정보수주의 의원들에 의해 그의 프로그램은 일부 축소되었다. 결과적으로 1938년의 약한 불황을 겪었지만, 대규모 실업이나 도산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미국은 확실히 대공황에서 벗어났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랜던 대통령은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가결된 중립법에 거부권을 행사해 독일에 미국이 싸울 의지가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AFC(America First Committee)의 강력한 압박에 의해 중립법은 결국 통과되었다. | ||
* 1940 '''알프 랜던''' v. 존 낸스 가너 | * 1940 '''알프 랜던''' v. 존 낸스 가너 | ||
** 랜던 대통령은 무난히 공화당 경선에서 다시 지명될 수 있었다. AFC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경선에서 재지명되었기 때문에, 1941년 중순 발의된 랜드리스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신 랜던 대통령은 AFC에 영국에 대한 5억달러 차관 동의를 요청했으며, AFC도 이를 동의해 영국에 대한 자금지원만 일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러한 고립주의 기조는 일본에 의한 진주만 공습 이후 완전히 파괴되었다. AFC는 고립주의를 지지하는 모임이었지만, 일본에 맞선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특히 AFC의 얼굴 [[찰스 린드버그]]의 공군 대령 복귀를 허가해 그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에 맞서 출격하는 것을 용인했다. | |||
* 1944 '''알프 랜던''' v. 헨리 A. 월리스 | * 1944 '''알프 랜던''' v. 헨리 A. 월리스 | ||
* 1948 | * 1948 찰스 린드버그 v. '''스트롬 서먼드''' | ||
* 1952 토마스 E. 듀이 v. '''스트롬 서먼드''' | * 1952 토마스 E. 듀이 v. '''스트롬 서먼드''' | ||
* 1956 '''더글러스 맥아더''' v. 필딩 L. 라이트 | * 1956 '''더글러스 맥아더''' v. 필딩 L. 라이트 | ||
* 1960 더글러스 맥아더 v. '''존 F. 케네디''' | * 1960 더글러스 맥아더 v. '''존 F. 케네디''' |
2023년 5월 29일 (월) 12:4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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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보
정치
경제
군사
미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
수도 · 워싱턴 D.C.
지도자 · 알프 랜던
이념 ·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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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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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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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제 US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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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US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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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군 United States Armed Forces |
개요
- 1928 허버트 후버
- 1929년 10월 대공황 발생 이후 균형예산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앤드류 멜론 재무장관이 11월 피습으로 사망. 이후 후버 행정부는 기존의 시도를 벗어나기 위해 연방농민위원회의 헨리 모겐소 주니어를 재무장관으로 임명. 1929년 말 무주택자를 위한 후버빌 건설 시작, 후버빌 거주자를 상대로 푸드스탬프 도입. 1930년에는 후버댐 건설을 지시하고,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거부권을 행사해 "모두의 시장"을 강조. 이는 남부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옴. 연준은 영프의 블록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 후버빌 건설과 일시적인 주택보증이 시작되면서 주택경기가 돌아옴. 1931년 FDR은 민주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발돋움하며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공약. 1932년 실물경기지표가 회복되며 대공황 종식 선언. 1930년 제1차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조인 이후 국방비의 일부를 재건지출에 활용.
- 1932 허버트 후버 v. FDR
- 후버가 남부와 대평원의 지지를 잃었지만 도시권의 지지를 받으며 재선에 성공. 1931년 워싱턴해군군축조약 주도 1934년 무역자유법을 가결해 특정국가를 대상으로하는 관세부과를 거부하고 일률적 관세를 적용, 자유무역기조를 강화. 1933년 글래스-스티걸 법이 자유로운 시장질서를 위협한다며 거부권 행사. 1936년 제2차 런던해군군축조약도 체결.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기는 했지만, 독일이 크게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음. 독일의 성장을 방관. 블록경제로 영프가 시장을 닫자 오히려 차관을 빌려주며 대공황 탈출에 도움을 주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주도함.
- 1936 알프 랜던 v. FDR
- 랜던은 후버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 랜던은 재정보수주의자였지만, 대공황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 국가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후버 대통령은 암살이 두려워 뒷걸음질치다 대공황을 잡았지만, 근본적으로 균형예산 달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그의 2번째 임기는 사회보장지출을 축소하고, 후버댐과 같은 대규모 건설부양책은 지양되었다. 랜던은 집권 직후 후버 대통령이 점차 중단을 시사한 후버빌의 건설을 도시권에서 중소도시로도 확대하고, 후버빌 거주자를 위한 푸드스탬프 제도를 도시권 실업자까지 확대하였다. 물론 1937년을 지나며 공화당과 민주당의 재정보수주의 의원들에 의해 그의 프로그램은 일부 축소되었다. 결과적으로 1938년의 약한 불황을 겪었지만, 대규모 실업이나 도산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미국은 확실히 대공황에서 벗어났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랜던 대통령은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가결된 중립법에 거부권을 행사해 독일에 미국이 싸울 의지가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AFC(America First Committee)의 강력한 압박에 의해 중립법은 결국 통과되었다.
- 1940 알프 랜던 v. 존 낸스 가너
- 랜던 대통령은 무난히 공화당 경선에서 다시 지명될 수 있었다. AFC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경선에서 재지명되었기 때문에, 1941년 중순 발의된 랜드리스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신 랜던 대통령은 AFC에 영국에 대한 5억달러 차관 동의를 요청했으며, AFC도 이를 동의해 영국에 대한 자금지원만 일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러한 고립주의 기조는 일본에 의한 진주만 공습 이후 완전히 파괴되었다. AFC는 고립주의를 지지하는 모임이었지만, 일본에 맞선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특히 AFC의 얼굴 찰스 린드버그의 공군 대령 복귀를 허가해 그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에 맞서 출격하는 것을 용인했다.
- 1944 알프 랜던 v. 헨리 A. 월리스
- 1948 찰스 린드버그 v. 스트롬 서먼드
- 1952 토마스 E. 듀이 v. 스트롬 서먼드
- 1956 더글러스 맥아더 v. 필딩 L. 라이트
- 1960 더글러스 맥아더 v. 존 F. 케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