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陽
북광양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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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광양 제15대 군주
太宗
태종
묘호 태종
(太宗)
시호 태무장정선문대왕(太武莊正宣文大王)
생몰 1746년 7월 5일 ~ 1805년 2월 17일 (58세)
미치마루(六君)
이름 멜라지니(德帥)
재위 광양 막부 대장군
1778년 10월 19일 ~ 1778년 10월 20일 (1일)
광양 막부 계해장군
1778년 10월 20일 ~ 1778년 10월 25일 (5일)
북광양 국왕
1778년 10월 25일 ~ 1805년 2월 17일 (26년)

개요

북광양 태종(北廣陽 太宗), 통칭 육군덕수원고국 세종 치세 말기에 활약한 반란군 수장이자 북광양의 15대 국왕, 그리고 북광양 국왕 중 묘호를 수여받은 최초의 국왕이다.

장자고와 함께 광양인들의 반란을 주도하였으며 북광양 영토의 북부에 해당하는 녹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명주 전투에서 전사한 장자고의 세력을 흡수하여 북광양 최초의 독립 정권을 수립하고 왕으로 즉위했다.

생애

아버지를 여의다

육군덕수는 광양 내항부를 본관으로 둔 중산층 집안 육군씨의 장남으로, 그의 아버지 육군순(六君順)은 국가 공무원으로써 세무원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공무원은 원고국에서 꽤 알아주는 직업이었고, 그 덕분에 육군덕수의 유년은 꽤나 풍족했으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세종 대부터 시작되었던 원고국의 제 2차 전성기는 효종 치세의 무리한 대외 무력 활동으로 인한 재정 악화가 시작되면서 끝나버렸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세조는 특세책을 선포하여 기존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문제는, 광양인에 대한 증세율이 본토인에 비해 지나치게 높았단 것이었다. 당시 특세령을 적용했을 때 본토인에 대한 증세율은 30%였던 반면 광양인에 대한 증세율은 이보다 70%나 더한 100%였다. 이는 선원고국의 쇠퇴가 광양인들의 세력 강화의 원인이 돨 것이란 우려에 본토인들보다 세금을 더 거두어 광양인들의 재산을 감축시켜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광양인들은 이전보다 더 맹렬히 저항하기 시작했고, 광양 출신 관료들은 아예 광양 백성들을 돕기도 했다. 육군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부의 세금 징수 명령을 거부하고 친한 관료들과 연대를 시도했으나, 결국 명령 불이행죄로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늙은 몸뚱아리로 고문을 받은 탓인지 육군순은 풀려나자마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결국 풀려난 지 6일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충격에 빠진 그는 아버지를 죽게 한 속세를 떠나 창운산으로 잠적하였으며, 몇달간 친한 이들 외에는 누구하고도 만나지 않았다.

반란군에 가담하다

그런 육군덕수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꾼 건 그의 친구들 중 하나인 황막이지였다. 그는 육군덕수에게 현재 속세에선 장자고라는 농민이 군대를 일으켜 원고국의 억압에 저항하고 있다고 귀띔해주었으며,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않고 산 속에 숨어 지낸 것을 부끄럽게 여긴 육군덕수는 자신 또한 군대를 일으켜 원고국에 복수하기로 다짐하고 그길로 속세로 돌아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평소 널리 알려져있었던 육군씨의 인망에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부패 관리의 곳간을 약탈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의적으로 활약했다. 육군순과 같이 원고국의 특세책에 불만을 가졌던 하급 관리들도 지방 기밀을 알려주거나 자금을 대는 등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었으며 그 결과 육군덕수의 세력은 나날이 커져 마침내 반란군 수장인 장자고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장자고는 녹주의 중심지인 열야부를 중심으로 군사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는 군사적 지식도 어느 정도 있고 재정도 넉넉한 육군덕수를 높이 평가하여 그들의 세력과 자신의 세력을 합치고 싶어했으며 곧 열야부에 육군덕수를 초대해 뜻을 밝혔다. 평소에 장자고를 존경하던 육군덕수는 제안을 받자 매우 기뻐하며 기꺼이 장자고의 세력 휘하에 들어갔고, 그렇게 반란군은 열야부뿐만 아니라 내항부도 거점으로 삼아 녹주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원고국 조정은 그 전의 수 배에 달하는 8만대군을 보내 반란군을 한 번에 진압하려 하였고, 이를 눈치챈 장자고는 같은 광양인인 명주 사람들을 각성시켜 반란군의 세력을 키우고자 하였으나, 당시 명주에는 반란군의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국소 지역의 도적이라는 잘못된 정보만 퍼져 있었고, 명주 사람들은 반란군이 금방 진압될 것에 대해 우려하여 반란군에 섣불리 가담하지 못했다. 그러자 장자고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명주로 진군하여 반란군의 실질적인 규모를 백성들에게 확인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반란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고 했으나, 이미 조정 또한 반란군이 명주로 세력을 키우려 하는 것을 예측하고 그곳에 군대를 보내 매복하도록 했다.

명주 전투

결국 반란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명주에 입성했다. 확실히 반란군의 실제 세력을 직접 목격한 백성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착각했음을 알고 너도나도 반란군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이에 장자고는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여 당일 친 반란군 인물이었던 복옥부 부관 연숙의가 연 연회를 즐기는 등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강이 해이해진 모습을 보였다.

육군덕수는 한때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장자고가 흐트러져가기 시작하자 크게 실망했고, 자신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생각해 복옥부 변경에 임시 보급소를 설치하는 등 혹시 모를 원고국의 침입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장자고는 점점 더 향락에 빠져 군대를 이끄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병사들 사이에서도 육군덕수를 지지하는 파와 장자고를 지지하는 파로 갈리는 등, 반란군은 명주 입성 이후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상황을 기회로 여긴 원고국은 새벽에 반란군 진영을 기습 공격하였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던 육군덕수는 즉시 방어 태세에 들어갔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밀려 결국 복옥부 본진으로 후퇴하였다.

복옥부 본진에 도착한 육군덕수는 장자고에게 상황을 알리고 명주 방어는 자신이 맡을 테니 녹주로 피신하라고 간언했으나, 장자고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원고국의 기습을 막을 수 없었단 사실을 반성하고 자신이 명주를 지킴으로서 자신의 과오에 속죄하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장자고는 육군덕수에게 반란군의 지휘권을 양도하고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원고군을 맞이했으며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장자고가 원고군을 전력으로 막아준 덕분에 그 사이 육군덕수는 병사들을 데리고 녹주로 피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원고국이 명주 전투로 많은 병력을 잃은 반면 반란군은 병력을 대부분 보존한 채 녹주로 가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연전연승을 거두다

반란군이 녹주로 도망친 이후 병사들은 장자고가 전사했다는 사실에 크게 슬퍼하며 사기를 잃었으며, 병력은 보존하였으나 전의는 확실히 이전에 비해 떨어졌다. 그러자 육군덕수는 장자고의 복수를 하기 위해선 지금 슬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무기를 닦고 훈련을 해야 한다며 병사들을 격려했고, 이에 병사들의 사기도 회복되어 다시 의지를 갖게 된다.

반면, 원고국은 명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장자고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전력을 많이 잃은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녹주로 진격해 반란군을 밀어붙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반란군 내 육군덕수의 영향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현재 반란군엔 우두머리가 없어 내부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착각하고 지금이 아니면 반란군을 진압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이 세조를 말리자, 세조는 아예 전술에 능통한 자신이 직접 전선을 지휘하겠다며 명주로 떠났다.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 것이란 소문에 반란군 병사들은 긴장했으나, 반란군이 원고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시작하며 긴장감은 해소되었다. 원고군은 규모도 많이 줄고 보급도 원활하지 못해 황제가 등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던 반면, 반란군은 녹주 지리에 능통하여 정부군의 전략을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반란군은 포위전술을 통해 원고군을 차츰차츰 압박하면서 승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1778년 7월의 서강부 전투에서 반란군은 원고국의 주력 부대를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때 세조 또한 배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입어 원고국은 결국 서강부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로도 한달 간 원고국은 지속적으로 군대를 보내 반란군과 대적했으나 서강부에서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인지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며 잦아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반란군이 이겼다는 여론이 우세하여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광양인들의 왕이 되다

결국 1778년 10월 18일, 원고국은 북광양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란군에게 북광양의 남부 영토인 명주 땅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반란군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자 육군덕수는 원고국의 허가를 받고 협상 장소인 울주 화곡부에 광양 막부를 세우고 원고국의 조건을 수락할지에 대한 회의를 시작했다.

막부는 총 60명의 반란군 간부로 구성되었으며 조건을 받아들이지 말고 계속 싸워야 한다는 항주파와 조건을 받아들이고 녹주로 돌아가 나라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화친파로 대립했으나, 아무리 서강부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더라도 장기전으로 가면 반란군이 패배할 것은 뻔하기 때문에 화친파가 우세를 점하였다.

결국 다음날인 20일 막부는 원고국이 내건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렇게 북광양은 원광일치 이후 57년만에 다시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직후 화곡부 막부는 해산되었으나 육군덕수는 막부에서 행해진 과두정치를 광양에도 적용하고자 하였고, 그 길로 장수들을 설득하여 녹주 열야부에 새로운 막부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화곡부에 이어 열야부에 제2차 광양 막부가 수립되었으며, 대장군인 육군덕수 통제 아래 60명의 장수들이 정사를 의논했던 제1차 막부와는 달리 제2차 막부는 육군덕수가 일반 장수인 임술장군으로 스스로 내려오고 또 항주파 장수들이 떠나간 자리를 새로운 장수들이 메꾸면서 그 성격이 달라졌다.

막부가 재건된 첫날~둘째날에는 도읍 정하기와 행정 체제 수립 등 국가 기초의 기틀을 닦는 회의가 이어졌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과두정은 잘 돌아가고 있었으나, 결국 왕정에 익숙해져 과두정에 적응하지 못한 장수들이 반기를 들며 다음 3일간은 체제 유지 여부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결국 육군덕수의 뜻과 달리 막부는 폐지되기로 결정났으며, 마지막 날인 25일엔 왕을 정하기로 했고 만장일치로 육군덕수가 새로운 북광양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렇게 1778년 10월 25일 육군덕수는 막부 건물에서 간략한 즉위식을 거쳐 왕으로 즉위했으며, 막부 건물은 그대로 태양궁으로 개칭되어 북광양의 도읍이 되었다.

죽음

1805년 2월 17일 사망했으며 시호는 원고국의 묘업자능연의 원칙을 따라 태(묘, 太)무장(업, 武莊)정선(자, 正宣)문(능, 文)대왕으로 정해졌다.